며칠 전 SNS에 이수지 작가의『여름이 온다』사진이 올라왔다. 오랜만에 그림책을 펼쳤다는 한 독자는 “아, 이게 그림책이지.”라고 짧은 한 문장을 남겼다. 작가는 울컥했다. 어떻게 내가 각별히 생각했던 지점을 분명하게 짚었지? 좋은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지난 3월, 이수지 작가는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 작가가 ‘아동 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수상 소식을 듣기 일주일 전, 이수지 작가를 서울 광장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적극적인 독자를 원한다
작업실 아래에 미술학원이 있네요. 왠지 학원에서 대가가 탄생할 것 같네요.
미술학원 선생님은 제가 누군지 몰라요(웃음).
월요일 아침이에요. 직장인들은 가장 싫어하는 요일. 작가님은 좋아하는 요일이 있나요?
특별히 없어요. 작업을 해야 하면 일단 작업실에 오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면 폭풍 이메일에 답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요. 제가 잘 쉬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올해부터는 좀 운동도 하고 시간 관리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작년 여름에 『여름이 온다』가 출간되고 첫 개인전 〈이수지: 여름 협주곡〉을 여셨죠. 무척 흥행했고요. 와, 우리나라에 그림책 작가 독자들이 이렇게 많았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어떠셨어요?
제 작품을 집약적으로 전시한 개인전은 처음이었거든요. 어린이 친화적인 전시도 아니었고 오히려 작가성을 조금 강조한 전시였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이 찾아와주셔서 놀랐고 감사했어요. 전시를 연 공간이 찾아오기 쉬운 위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막 아이들 손잡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언덕을 올라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갤러리가 너무 시원하니까 막 기뻐하시고(웃음). 그 모습을 보는데 되게 기분이 좋았어요.
『여름이 온다』는 비발디 <사계> 중 ‘여름’을 모티프로 한 작품입니다. 작품을 그리는 내내 <사계>를 들으셨다고요.
집에서는 CD로 듣고 작업실에서는 스트리밍으로 듣고 정말 많이 들었어요. 작업실에 오면 일단 바로 음악을 틀고 시작했으니까요.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음악을 정말 많이 듣는데 앱에 들어가면 랭킹이 보이나 봐요. 이번 달에 제일 많이 들은 노래가 나오는데, 도저히 엄마를 이길 수 없었다며(웃음).
그림책치고도 판형이 큰 편이죠. 148쪽의 방대한 그림책이고요.
원래 ‘여름’의 1, 2, 3악장 중에 한 악장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것도 놓칠 수 없다, 욕심이 생겼고요. 그렇다면 1, 2, 3악장을 각각 다른 책으로 만들어서 하나의 케이스에 넣어보자고 생각했다가 다시 하나로 묶는 방향으로 결정했어요. 책은 작가가 읽는 순서를 정해주잖아요. 사실 그림책도 그림을 보는 순서를 정해주는 건데 하나로 묶여 있을 때 주는 느낌이 더 좋을 것 같았어요.
새 악장이 시작될 때 종이가 바뀝니다.
새로운 악장이 시작될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콘서트에 가면 악장이 바뀔 때 박수는 못 치지만 뭔가 변화한다는 기대감이 생기잖아요. 종이를 만지고 넘길 때, 그런 마음을 느꼈으면 했어요.
작업하시면서 각별히 좋았던 장면이 있나요?
색종이 콜라주 작업을 할 때 좋았어요. 원하는 느낌이 한 번에 나왔거든요. 아이들이 물풍선을 던지면서 노는 장면은 실제로 저희 가족이 시골에 살 때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기억으로부터 시작됐어요. 예전에 문승연 작가님의 『우리는 벌거숭이 화가』의 그림 작업을 하면서 종이에 물감을 칠한 다음 물감 자국이 있는 종이를 콜라주 하듯 오려서 작업한 적이 있었는데요. 예상치 못한 느낌이 나오니까 재밌더라고요. 그때는 색종이를 쓸 생각은 못 했는데 이번에는 작정하고 했죠. 물감으로는 표현하지 못한 색감이 있고, 종이를 오리는 순간 제가 모르는 우연이 계속 개입되니까 재밌었어요.
겉 표지를 펼치면 한 장의 멋진 포스터를 만날 수 있어요. 포장된 선물을 받는 느낌이 들어요.
큰 공간을 이용해서 크게 펼쳐지는 그림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여름이 온다』는 그래도 큰 판형이지만 항상 그림책들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뭔가 확장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죠.
『여름이 온다』도 글 없는 그림책이에요. 그동안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꼭 빠지지 않는 질문 중 하나가 “글 없는 그림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더라고요.
글 없는 그림책은 마이너 장르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그림책은 아니죠. 글에 익숙한 독자들이 대부분이니까 글 없는 그림책을 만났을 때 많이 당황해요. 그런데 이때 이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핸들링하느냐에 따라 독서가 확장될 수 있어요. 도전 의식이 생기는 거죠. 이 그림이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내 마음속에 들어온 이야기가 뭘까? 생각하면서 일단 끝까지 읽어보는 거예요. 그림책도 그렇고 어떤 낯선 예술 장르를 만났을 때 처음엔 다 당혹스럽잖아요. 하지만 아! 이거 나는 몰라, 하고 덮어버리면 거기서 끝나고요. 반면에 모르지만 알고 싶다, 궁금해하는 순간들을 놓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가는 예술의 향유자가 될 수 있죠. 글 없는 그림책은 항상 이런 도전을 주죠. 되게 적극적인 독자를 원하는 거예요.
글 없는 그림책은 오히려 더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죠. 어떤 단서를 찾아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요. 느긋하게 모호한 의미를 즐기고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답변을 마련해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가져가는 것, 글 없는 그림책을 즐기는 방법이죠.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가는 즐거움
책 첫 장에 “내가 어릴 적, 항상 음악을 켜두신 엄마께”라고 적으셨어요. 어머니께서 클래식을 많이 들으셨나요?
클래식뿐 아니라 온갖 음악을 다 들으시고 좋아하셨어요. 우리가 흔히 라디오를 배경 음악처럼 틀어놓곤 하잖아요. 그런데 엄마는 이 음악을 감상하려고 부러 선곡해서 틀어놓으신 느낌이었어요. 집에 LP판도 많았는데요.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음악은 ‘듣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뭔가를 일부러 찾아서 듣는 일, 되게 적극적인 독자이면서 청자인 거잖아요. 이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름이 온다』를 통해서 어린이 독자가 비발디의 <사계>를 알게 되고, 언젠가 우연히 이 음악을 듣게 된다면 ‘어, 나 이거 알아.’라며 반가움이 피어날 수 있잖아요.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책을 보는 것, 확실히 다를 것 같아요.
얼마 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그림책 강연을 하면서 QR코드로 음악을 재생해줬대요. 그리고 교실 앞에 그림책을 갖다 놓았는데 몇몇 아이들이 책을 들고 자기 자리에 가서 정말 자세하게 책을 보고 있더래요. 음악과 책, 순서가 바뀔 수도 있지만 이 음악으로부터 책이 궁금해진 것에 대해 너무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2020년에 출간된 『물이 되는 꿈』도 음악으로부터 출발한 책이죠. 루시드 폴의 동명의 노래를 수채화로 표현하셨어요. 어떻게 두 분이 함께 작업하게 되셨나요?
책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님이 ‘물이 되는 꿈’이라는 노래로 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대요. 그림책을 전문으로 만드는 출판사는 아닌데요. 루시드폴에게 연락을 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했대요. 그림 작가를 누구로 할지 이야기하다 저에게 연락을 주셨고요. 저는 워낙 루시드 폴 노래를 오랫동안 좋아했는데요. 어떤 분위기의 음악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제안을 받았을 때 뭐랄까 그냥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최근에 노랫말로 만든 그림책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아마 그런 분위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요?
작품을 보면 작가의 성격이 드러나잖아요. 작가님 스스로 “그림을 공들여서 그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순간의 느낌을 빠르게 그리는 걸 선호한다.”고 하셨어요.
네. 약간 즉흥성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이때 아니면 안 될 마음에 관심이 많아요. 아까 제가 화방이나 문구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뭔가 영감이 떨어지길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의외의 것에서 촉발돼서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가는 걸 기대하고 약간 즐기는 기분도 있는 것 같아요.
최근 M. B. 고프스타인의 『할머니의 저녁 식사』 번역도 하고 글 작가와 협업도 꾸준히 하세요. 어떤 기준으로 일을 선택하시나요?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제안은 계속 오거든요. 그런데 출판사에서 제안을 주실 때, 제 작업의 어떤 면이 잘 나타날 것 같아서 이 원고를 의뢰한다고 말씀해주세요. 일단 설명을 읽고 정말 그런가? 생각해보고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혼자서는 안 나올 것 같은 작업,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을 때 수락하는 것 같아요. 뭔가 흥분이 되는 작업을 주로 하게 되는데 이건 개인 작업을 할 때와 같은 기분이에요.
내놓는 게 전부인 사람들
경계 삼부작 작업 노트인 『이수지의 그림책』에서 “그림책으로 인해 수혜를 받는 이가 오히려 작가 자신.”(154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림책 작가들을 만나면 이 책이 잘 팔리든 팔리지 않든, 작업 자체에 대한 만족도가 대단히 높다고 느꼈어요. 물론 작업의 어려움이 크지만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라는 것, 그림책 장르에 관한 애정이 정말 각별하다고 여겨집니다. 작가님은 슬럼프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하셨었죠?
(웃음) 그 이야기를 했다가 엄청나게 폭격을 받았는데요. 없어요. 없죠. 그런데 슬럼프가 없다는 말의 맥락을 살펴보면, 슬럼프를 말하기엔 이 분야가 너무 발랄한 경향이 있어요. 내가 하는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는 대상을 보면 정말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고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고민을 조금 가볍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림책 작가님들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명료한 지점이 있어요. 보통 말씀도 길게 하지 않으시고 간결하죠.
아마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거면 됐지.’ 하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말하는 게 그냥 액면가 그대로인 사람들이 많은데요. 저는 그런 면이 되게 좋아요. ‘나는 뒤에 뭔가가 더 있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앞에서 내놓는 게 전부인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그림책이 저에게는 그런 느낌이에요. 만약 어떤 그림책이 계속 뭔가를 숨겨 두고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이게 아이들의 본성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이들로부터 출발한 장르이기 때문에 창작자도 같은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고 또다시 아이 같은 마음으로 순환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영국 캠버웰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북아트를 공부하셨어요. 북아트를 공부한 경험이 그림책 작업을 하는데 어떤 도움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책이라는 매체를 정말 진지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던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언제나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치기 어린 마음이 늘 그렇지만 내가 세상을 향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그 외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북아트를 공부하면서 책이라는 매체를 깊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고 관점이 바뀌었다고 할까요? 이렇게 상자 밖으로 한 번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제 첫 책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데요. 이 그림책을 보면 무대가 펼쳐지다가 한 발자국 물러나보면 그게 벽난로라는 걸 알게 되고, 또 한 발자국 물러나면 그냥 책의 한 페이지에 있는 그것조차도 하나의 일루전이었다는 걸 깨닫게 돼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시 제 상태가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 세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고, 갑자기 중요도가 바뀌는 순간을 느꼈어요. 책을 만드는 일이 하나의 놀이처럼 인식되면서 책이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물성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가 막히게 멋지다고 느꼈죠. 그리고 이 느낌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게 그림책이라면 이거 정말 하고 싶다는 생각이 활활 타올랐어요.
지금도 타오르는 중이시죠?
네, 그 느낌이 여전히 지속되는 걸 보면 그림책이 정말 대단하긴 한 것 같아요(웃음).
작가님의 대표작 『파도야 놀자』는 2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됐는데 영문판이 먼저 출간됐죠. 첫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이탈리아 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출간됐고요. 북아트를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던 2001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 더미북을 갖고 가는 용기는 어떻게 생겼나요?
저도 무슨 용기였는지 알 수 없는데요. 그때는 그냥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뭐가 달라? 어떻게 되나 해보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영국에 있었으니까 이탈리아에 가기 쉽잖아요. 볼로냐에 북페어가 있는데 되게 재밌고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프랑스에 사는 친구랑 같이 갔어요. 가보니까 제 또래 아이들이 큰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출판사랑 약속을 잡고 자기 작품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거예요. 그 모습이 되게 좋아 보였어요. 내 작업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그 상대가 필드에 있는 사람이고 또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니까요. 놀라웠죠. 그래서 이듬해 포트폴리오도 만들고 그림책도 두 권 만들어서 이걸 팔아봐야지 하는 일념으로 갔던 거예요. 당시 유럽 쪽 출판사들이 많이 열려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탈리아 코라이니 출판사도 이렇게 어린 외국 작가랑 창작 그림책을 만든 건 처음이었다고 해요. 자기들도 실험을 해본 거죠. 묘하게 인연이 돼서 미국에서 『파도야 놀자』가 나왔을 때 이 출판사가 이탈리아 저작권을 사가면서 『파도야 놀자』가 이탈리아에서 많이 팔렸어요. 이번 『여름이 온다』도 계약했고요.
굉장한 비밀은 없다
며칠 전 작가님의 SNS에 올라온 작업 노트를 봤어요. 수년 전인 것 같은데 아이들의 낙서가 보이더라고요.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지금은 두 아이가 중학생이 돼서 좀 나은데요. 아이가 어렸을 때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힘들었어요. 아이들에게 지금 뭐가 필요한지 눈에 다 보이니까 모든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는데 뭔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기니까요. 아이들이 너무 예쁜 것과는 별개로 매 순간 분통이 터지면서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나, 왜 나는 항상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억울했어요. 물론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진 않죠. 제가 이렇게 사는 걸 선택했으니까. 책임을 져야 하니 어쩔 수 없는데, 내가 원하는 퀄리티를 뽑아내지 못했을 때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면 제가 더 잘했을까요? 글쎄 또 그럴 것 같지도 않고요. 생각이 계속 엎치락뒤치락 변했던 것 같은데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한 게 가장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로부터 얻는 에너지가 굉장히 컸을 테고요.
그럼요. 아이들만이 줄 수 있는 사랑스러움,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보람과 여러 짜릿한 감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를 견뎠던 것 같아요.
동료 그림책 작가들과 ‘바캉스 프로젝트’ 활동을 하고 ‘흰토끼프레스’라는 이름으로 독립 출판물도 만들고 판매하시죠. 어떻게 기획된 프로젝트인가요?
짧고 굵게, 평소 해보고 싶었지만 출판은 안 될 것 같은 종류의 책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기획했어요. ‘바캉스’란 본업으로 하는 작품 외에 휴가처럼, 놀이처럼 만들어보자는 뜻이고요.
보통 작가들이 출판사와 책을 만들잖아요. 누가 막 검열하진 않지만 이미 많은 자기 검열을 통해 나오는 정제된 작품이죠. 이를테면 옛이야기를 소재로 책을 만들어보자는 기획을 갖고 하나의 작품을 함께 만들고 또 별개로 각자 작품을 만들어요. 독립 서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고 저희가 직접 온라인으로 판매도 해요. 올해도 마감이 얼마 안 남았어요. 제가 막 마감을 쪼고 있어요(웃음).
그림책을 좋아하다 보면 또 만들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누구나 그림책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좋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 독자가 힌트를 하나 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누구나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말을 제가 무책임하게 한 것 같은데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였어요. 왜냐하면 저도 ‘그림책 작가가 되려면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내가 알고 있는 상식 내에서 필요한 것들을 피하지 않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잘 그릴 수 있는 스킬을 키워야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대개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내가 이게 부족한데 이걸 안 해도 할 수 있을까요?’라는 의도성 질문이 많아요. 그분들께 해줄 수 있는 말은 “피해 갈 수 없어요. 결국 그거 해야지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어요.”예요. 즉 굉장한 비밀은 없다는 말이에요.
올해 신작이 나오나요?
한국 제목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요. 미국 작가 팻 지틀로 밀러의 『See you someday soon』이라는 작품에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할머니와 손주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내용인데요. 다이컷이라고 하죠. 종이에 구멍을 뚫어서 아래쪽이 들여다보이는 형식으로 구성되는 작품이에요.
"『여름이 온다』를 잘 들여다보면 『이렇게 멋진 날』도 있고 『우리는 벌거숭이 화가』, 『강이』, 『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있어요. 그림책 속 아이들은 무대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음악을 듣는 관객이기도 해요. 혹시 관객석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셨나요? 이게 제 모습이에요."
*이수지 그림책 작가. 회화와 북아트를 공부했고, 여러 나라에서 책을 펴냈다. 경계 그림책 삼부작인 『파도야 놀자』, 『거울 속으로』, 『그림자놀이』는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어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이 온다』로 2022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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