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아니지만 글 쓰는 사람입니다”
출판 번역가 노지양, 홍한별 저자의 책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에 실린 첫 번째 글의 제목이다. 흔히 번역가는 원문을 우리말로 옮길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국의 언어로 된 작품을 모국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일을 한다. 일반적인 글쓰기와 차이가 있다면 번역은 “보이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글쓰기”라는 점. 필연적으로 투명해질 수밖에 없는 일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2주에 한 번씩 나눈 편지가 책으로 묶였다.
“오늘도 나는 언어의 매개자, 조용한 그림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자 싶어” _(116쪽)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원문의 ‘쨍그랑 울림’을 전하는 사람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라는 제목이 참 좋았어요. 번역가의 일을 한 문장으로 압축할 때,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기란 어려울 것 같아요.
홍한별 : 사실 제 입으로 우리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쑥스러워서 소심한 반대 의사를 밝혔어요(웃음). 그리고 저희 어머니께 보여드렸는데 “너희가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 글이 아름답다는 거니까 괜찮다”고 지지해 주셔서 생각을 바꾸었죠. 출간 후 제목이 좋다는 칭찬을 무척 많이 들었어요. 역시 편집자님의 감각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지양 : 줄곧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라는 가제가 적힌 교정지를 주고받았는데 결국 제목으로 확정되었네요.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봤지만, 마지막에는 가장 적합하고 시선을 끄는 제목이라는 데 동의했죠. 편집자님이 한별의 글에 있던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붙여주신 제목이었어요.
“아름답게 어긋난 상태로 남기려면 번역가가 용기를 발휘해야 했겠지(100쪽)”라는 문장이었죠. 일을 하면서 특히 용기가 필요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홍한별 : 커다란 용기는 아니지만, 작은 용기들이 소소하게 필요해요. 책에 쓴 일화 중 하나인데, 소설 『클라라와 태양』을 번역했을 때의 일이에요. 소설의 서술자 클라라는 인공지능을 지닌 안드로이고, 어린아이 같은 상태로 세상에 나와 일반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식이나 말투가 조금 달라요. 독특한 개인어를 사용하기도 하고요. 특히 클라라가 자주 하는 말 중 ‘high-rank clothes’라는 말이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어색한 표현인데, 이걸 그냥 ‘고급스러운 옷’으로 옮기면 클라라의 특징이 잘 살지 않아서 ‘등급이 높은 옷’이라고 옮겼어요. 그런데 독자 서평에 어색한 표현이라면서 번역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이렇게 원문의 독특한 느낌을 ‘쨍그랑 하는 울림’이 남도록 번역할 때마다 작은 용기를 내야 해요. 때로는 편집 과정에서 잘려 나가기도 하고, 살아남더라도 ‘직역투’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거든요.
서로에게 받은 메일 중, 가장 기억에 남거나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메일은 무엇이었나요?
노지양 : 한별에게 받은 첫 번째 편지였어요. 손으로 썼다고 했었죠. 글이 좋을 거라고 당연히 예상했는데, 편지를 직접 읽어보니 생각보다 더 좋아서 놀랍더라고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해주시는 번역에 관한 문장도 첫 편지 안에 있어요. “원문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스산함, 슬픔, 따뜻함, 고요함, 충격, 통렬함을 조심스럽게 내 언어로 어루만져 이루어내는 일(24쪽).” 번역을 정말 아름답고 품격있게 표현한 문장 아닌가요? 첫 편지를 읽자마자 같이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어요(웃음).
홍한별 : 모든 편지가 의미 있었지만, 우리와 같은 일을 하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지양의 편지를 읽은 순간을 수가 없어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렇게 아픈 이야기도 할 수 있을만큼 우리 사이가 더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겸손은 번역가의 숙명
번역가에 대한 오해 중, 가장 억울한 것이 있을까요?
노지양 : 혼자 일하기 때문에 고고하고 우아한 직업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감정 노동을 해야 할 때가 많아요. 특히 교정 과정에서도 편집자와 의견이 달라 속상하곤 하죠. 그럼에도 현명하게 타협하고, 양보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하고요. 번역을 하려면 오만하거나 고집스럽지 않고, 유하고 겸손해야 해요. 아마 주변에 번역가 친구를 두시면 나쁘지 않을 거예요(웃음). 신간 도서를 선물로 받으실 수도 있고요!
홍한별 :흔히 번역을 거치면 글이 원문에서 멀어지고, 그 과정에서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번역이 불가능해서 사라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번역 과정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들도 있거든요. 번역문을 원문과 별개의 성취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거죠. 사실 원문에 가장 가까운(가깝다는 것 또한 정의가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번역이 가장 좋은 번역은 아니거든요.
그럼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요?
홍한별: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독자에게 그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택한 형식을 존중해야 하고요. 그러면서 최대한 원문과 비슷한 효과를 내도록 적절한 우리말로 표현하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노지양 : 한별이 책에서 말했듯이 “최대한 한국어처럼 읽히도록 자연스럽게 옮기면 지나치게 길들여 동글동글한 자갈돌 같은 번역”이 될까 조심스럽다고 하잖아요. 저도 기본적으로 독자 입장에서 술술 읽히는 번역문을 만드는 게 1차 목표이지만, 이국 문화의 낯선 느낌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또 제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은 작가의 의도를 잘 살린 번역이에요. 단어의 위치, 문장의 길이, 리듬감을 조절해서 원문이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을 살린 번역이 좋죠. 가끔 번역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순수한 우리말이 들어간 번역문을 봐도 신선한 느낌이고요.
책에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에 대한 이야기가 여럿 실렸는데요. 반대로 좋아하는 단어, 혹은 번역 작업을 하다가 만나면 반가운 단어 등이 있나요?
노지양 : 저는 'smart'라는 단어가 은근히 좋아요. 영민한, 똑똑한, 현명한, 영특한, 우수한 등 문맥에 맞게 다르게 번역하는 재미가 있거든요. 또 페미니즘이나 젠더 인종 관련 어휘는 많이 접한 편이라 익숙하기 때문에 검색을 덜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참정권 운동가인 ‘수잔 B. 앤서니’, ‘아이다 웰스’, 교차성 이론의 ‘킴벌리 크렌쇼’, 미투의 기원이 된 ‘타라나 버크’ 등의 이야기도 이미 배경을 잘 알고 있으니 원문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죠.
홍한별 : 저는 'boring(지루한)'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요. 뜻은 심드렁한데, 생긴 모양이나 소리가 귀여워서요. 사실 영어의 특별한 재미는 단어의 품사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ring(반지)’은 보통 명사라고 생각하지만 ‘ringed finger(반지 낀 손가락)’라는 말도 하거든요. 얼마 전에 번역한 글에서는 ‘bright sting(빛나는 자극)’이라는 표현이 있었어요. 이렇게 아름답게 어긋나는 것들이 재미있어요.
번역에 대한 편견과 처우 등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어요. 특히 합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문제는 비단 번역가뿐 아니라 집필 노동자라면 대부분 공감할만한 지점이었죠. 출판 번역가의 처우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까요?
홍한별 : ‘출판’이라는 산업은 사실 노동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크지 않잖아요. 여러 제작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파이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조건 번역료를 올려달라고 주장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번역 품질이 높으면 교정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거든요. 그 부분을 고려하면 출판사에서 좋은 번역가에게 조금 더 투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노지양 : 외서의 경우, 번역이 독서 체험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독자 분들이 마지막 장까지 재미나게 읽은 외서가 있다면, 번역이 잘 된 책이었던 게 분명하거든요. 번역가의 수입이 어느 정도 보장되면 독자들이 더 질 높은 번역물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더불어 각 출판사, 문화부 등에서 주최하는 번역상이 더 생기고 청년 지원 사업처럼 번역가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창구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인 조건 외에, 일의 수락 여부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홍한별 : 첫 번째 조건은 ‘재미’예요. 내가 좋아하는 책, 글이나 내용이 재미있는 책, 번역 과정이 흥미로운 책,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책 등이 모두 ‘재미있다’의 범주에 들어가죠.
노지양 : 저는 말맛을 살릴 수 있는 일러스트 도서나 감성적이고 유머러스한 에세이를 선호해요. 진지한 순수문학, 사회과학 책 등은 다른 번역가가 훨씬 더 훌륭하게 번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사하기도 하죠. ‘내가 하면 잘할 수 있겠다,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겠다’ 싶은 책에 끌립니다.
번역, 나를 사랑하게 하는 일
노지양 번역가님은 출간 제의를 받고 ‘만약 이 프로젝트를 한다면 반드시 홍한별 번역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요.
노지양 : 편한 친구이자, 제가 좋아하는 번역가였으니까요. 작업 과정이나 번역에 대한 한별의 생각이 궁금했고, 뭔가 함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예전에도 우리가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를 해보자는 말을 건넨 적 있었거든요. 물론 당시 한별에게 “그 재미없는 걸 누가 듣겠냐”는 말을 듣고 1초만에 계획을 접었지만요(웃음).
두 분의 첫 만남이 궁금해요.
홍한별 :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녔지만 함께 수업을 들은 적은 거의 없었어요. 전공 수업에서는 학번순으로 반을 나누는데, 학번이 가나다순이거든요. 지양이는 늘 앞반, 저는 언제나 뒷반이었죠(웃음). 졸업 후 한참 뒤에 지양이도 번역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십 년이 훨씬 지나서야 다시 만났는데 대화가 끊이지 않았어요.
노지양 :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제가 먼저 만나자고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같은 업계에 있는 동창생이고, 멀리서 봐도 호감이 생기는 친구라서 만났는데 너무 잘 통했어요. 그 뒤로 다른 친구들한테는 못하는 번역으로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죠. 사실 한별은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 한번 친해지면 누구든 관계를 오래 유지되는 편이에요. 저도 한별과의 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여러 친구 중 한 명이고요.
홍한별 번역가님은 책에서 “내가 찾아낸 책을 내가 한국어로 옮기고 그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만난다는 것(171쪽)”이 궁극의 소망이라고 하셨어요. 노지양 번역가님도 ‘궁극의 소망’이 있으신가요?
노지양 : 다음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궁금하고 기대되고, 매일 아침 번역하고 싶다고 생각되는 책을 번역하는 일이요. 모든 번역은 어렵지만, 그래도 내 문체와 궁합이 잘 맞는 책이 있거든요. 인세로 계약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꿈을 꾼 적도 있지만 큰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웃음).
서로의 번역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소개해주신다면요?
노지양 : ‘세라 스마시’의 『하틀랜드』를 밑줄을 그어가면서 두 번 읽었어요. 쉽지 않은 내용인데도 매끄럽게 술술 넘어가서 ‘이런 책을 만나 기쁘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죠. 최근 읽은 ‘샤샤 세이건’의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도 섬세하고 미려한 문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요. 아마 한별의 번역이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홍한별 :지양이 번역한 것 중, 좋은 책 진짜 많은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록산 게이의 『헝거』예요.
오랫동안 번역가로 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두분 모두 “결국에는, 내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번역의 어떤 면을 특히 사랑하시나요?
홍한별 : 번역의 결과물이 책이기 때문이에요. 영화, 게임, 유튜브, 소셜미디어 등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나 많지만 아직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이니까요.
노지양 : 저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사람이지만 번역만큼은 제 강점이 발휘되는 일인 것 같아요. 인내심, 성실성, 센스, 감성, 유머, 문장력 등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이거든요. 일상 생활에서는 한심하고 서투르지만, 번역을 하고 있는 저는 꽤 괜찮은 사람인 듯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번역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노지양 번역가이자 작가. 달리기와 자전거를 사랑하고 각종 스포츠 중계와 미드, 스탠드업 코미디까지 챙겨 보며,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배우는, 좋아하는 것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건강한 자기중심주의자’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단순히 ‘라디오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라디오 작가가 됐다. 겨우 메인 작가가 될 무렵 아이를 가지면서 방송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번역을 시작해 10년이 넘어가면서 점차 인정받는 번역가가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번역가로서 만나온 단어들과 그에 관한 단상들을 쓴 책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로 처음 ‘지은이’로서 독자들을 만났다. 두 번째 책 『오늘의 리듬』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현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했으나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여전히 서툰 어른 생활을 헤쳐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 『케어』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센 언니, 못된 여자, 잘난 사람』 『트릭 미러』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인종 토크』 등이 있다. *홍한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글을 읽고 쓰고 옮기면서 살려고 한다. 옮긴 책으로 『도시를 걷는 여자들』, 『하틀랜드』, 『우먼 월드』, 『먹보 여왕』, 『밀크맨』, 『온 컬러』, 『권력과 테러』, 『자라지 않는 아이』, 『위대한 생존』, 『오카방고 숲속의 학교』,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 『나무소녀』, 『네모난 못』, 『자유 방목 아이들』, 『밴버드의 어리석음』, 『식스펜스 하우스,』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 『사악한 책, 모비 딕』, 『이 문장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아웃런』, 『바다 사이 등대』, 『달빛 마신 소녀』,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페이퍼 엘레지』, 『몬스터 콜스』, 『가든 파티』 등이 있다.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과 『미스테리아』 등에 글을 실었다.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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