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를 20년 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 영화와 ‘내’가 함께한 시간을 기쁘게 겹쳐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아끼는 마음이 모여, 아카이빙북이 발간됐다. 이번 책에는 원본 시나리오, 스토리보드, 스틸 컷 등 귀중한 자료와 함께, 권김현영, 강유가람, 복길 등 영화를 사랑한 필진들의 칼럼이 수록됐다. 태희, 혜주, 지영, 비류, 온조 그리고 고양이 티티의 안부를 물으며, 정재은 감독과 영화와 함께한 시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20년의 기록이 모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2021년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20년 만에 관객을 만났고, 올해 크라우드펀딩으로 아카이빙북이 발간됐습니다. 감독님에게도 각별한 일이었을 것 같아요.
영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어요. 하나는 필름 영화를 디지털 리마스터링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사적인 아카이브 자료를 관객들에게 전하는 일이었죠. 이번 아카이브북에는 영화 자료뿐만 아니라 영화를 본 사람들의 글도 폭넓게 실려 있어서 20주년에 걸맞은 책이 된 것 같아요. 제게도 굉장히 뜻깊은 작업이었죠.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관객도 변화했을 것 같아요. 어떤 차이를 실감하시나요?
개봉 당시에는 관객 집계가 디지털화되지 않아서, 주 관객층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어요. 개별 관객의 반응을 보면서 체감한 정도였는데, 의외로 40대 남성들이 피드백을 보내왔어요. 남성 관객들은 직장에서 젊은 여성 사원들을 본 경험을 떠올린 것 같아요. 영화를 통해서 일터의 여성들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 거죠. 지금 관객들은 굉장히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변했는지 20년의 시간을 의식하면서요.
“왜 소녀들이 영화의 주인공이면 안 된다는 건가”(39쪽)라는 질문에서 시나리오를 시작하셨다고요.
시나리오를 쓸 무렵만 해도, 젊은 세대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지 않았고, 나오더라도 폭력과 타락에 빠진 모습만 부각됐어요. 그런 이미지가 어른의 시선 같아서, 당사자의 입장에서 현실의 젊은이를 그리겠다고 결심했어요. 단순히 소녀가 나온다는 것보다는 어떤 소녀를 다루느냐가 중요했죠. 현실에 직접 부딪치며 성실하게 미래를 고민하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 그게 가장 큰 목표였어요.
배두나 배우가 직전에 출연한 작품이 영화 <청춘>이었죠. 파격성이 강조된 청춘 영화와 달리, 평범한 스무살의 모습을 보여준 <고양이를 부탁해>는 배우에게도 새로운 환경이었을 것 같아요.
당시 배우들이 어려서, 영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시나리오를 보기에는 어려웠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동안 출연한 영화가 본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생각은 했을 것 같아요. <고양이를 부탁해>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 같으니까 편안하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나리오에 살아있는 이야기
원본 시나리오가 실려 있어, 영화와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영화에는 편집됐지만 시나리오에만 살아있는 디테일들이 있더라고요.
시나리오에 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전부 영화로 담아낼 수는 없었어요. 이건 러닝타임이 한정된 영화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새로운 디테일을 발견하는 건 굉장히 좋은 일 같아요. 영화에 드러나지 않은 미묘한 관계나 뉘앙스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아카이브북을 만들면서 원본 시나리오를 충실히 싣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영화를 본 관객들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스무살 여성들의 우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한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미묘하게 변하는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부분에 신경쓰셨나요?
이 영화는 관계 속에서 인물들이 지닌 여러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혼자 있을 때, 가족과 있을 때, 친구들과 있을 때, 사회생활을 할 때 개인이 보이는 모습은 모두 다르잖아요. 친구들이라고 해서 고민을 다 털어놓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있을 때만 보이는 모습도 있죠. 모든 인간이 그런 입체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배두나 배우는 혼자 있는 장면에서는 굉장히 집중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친구들과 있을 때는 편안한 느낌으로 연기했어요. 그게 태희라는 인물에 대한 배우의 해석이었죠.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태희(배두나 분)의 모습이 다시 보였어요.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야!” 하는 태희의 대사가 인상적인데요. 여성이 일상적인 폭력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지금, 이 말은 더욱 유효하게 들려요.
시나리오를 쓸 때, 제가 폭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시나리오에서 태희의 가족을 비가시적인 폭력의 세계로 설정한 건 맞아요. 태희의 집은 찜질방 사업에 성공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죠. 아버지가 태희에게 전통 한복을 입으라고 강요한다거나,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자 가족들이 비웃는 모습, 커다란 가게 간판을 올릴 때 아버지를 바라보는 태희의 회의적인 표정. 드러내 놓고 폭력적이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 태희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정체성을 형성한 것 같아요. 그런 캐릭터성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강압적으로 결정하는 아버지에게 소심하게 반항하는 방식으로 표현된 거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롭게 와닿은 인물은 혜주(이요원 분)였어요. 혜주는 서울의 증권 회사에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데요.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의 몸을 의식하고 자기계발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감이 되는 캐릭터였어요.
원래 혜주는 얄밉다는 평가를 받는 캐릭터였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혜주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죠. 20년이 흐른 지금에야 혜주는 폭넓게 공감을 받는 캐릭터가 된 것 같아요. 사실 혜주는 다양한 면을 갖고 있는 친구예요.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기도 하고, 부모의 이혼을 겪고 친구와 멀어지면서 실존적인 자각을 하기도 하죠. 시나리오에는 언니의 낙태를 곁에서 지켜보고, 미용에 관심을 갖는 등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당시에는 그 아이디어가 좀 빨랐던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가 됐죠.
동물과 인간이 함께
현장을 찍은 스틸 컷을 보며, 영화에 다 담기지 않은 장면들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전 과정을 함께한 감독님도 스틸 컷이 공간과 인물에 대해 “나와는 또 다른 해석을 시각적으로 내놓고 있다”(219쪽)고 느끼셨다고요.
영화의 스틸 컷은 포토그래퍼가 제3의 시선으로 현장을 찍은 결과물이라, 감독의 시선과는 다르다는 걸 전제로 해요. 물론 영화를 촬영한 다음 카메라가 있었던 위치에서 똑같이 스틸 컷을 남기는 경우도 많았지만요. 그런데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화와 스틸 컷 모두 필름으로 찍었기 때문에, 노출값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굉장히 달라졌죠. 이번에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하면서 디테일이 선명하게 보이는 장점이 있었지만, 필름의 거친 입자가 주는 느낌이 사라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스틸 컷에는 그런 질감이 남아 있었고, 저와는 다른 시선으로 인물이 담겨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20년 간 고양이가 감독님의 인생에 차지하는 의미도 커졌다고요. 당시만 해도 고양이가 등장하는 영화는 많지 않았는데, 촬영 현장에서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스태프들의 최대 미션이 ‘고양이 찾기’였어요.(웃음) 보통 길고양이는 겨울을 넘기고 이른 봄에 새끼를 낳는데, 촬영을 한겨울에 시작해서 어린 고양이를 구하기가 어려웠죠. 고양이를 등장시킨 건, 아마 어린시절 고양이를 키웠던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고양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꾸준히 스크린에 동물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해왔어요. 고양이뿐만 아니라 개가 등장할 때도 있었죠. 영화를 통해 인간 외의 존재가 공존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관객에게도 중요한 일이라는 신념이 있어요.
도시에서의 인간관계도 20년 동안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지금이라면 ‘단체 채팅’을 하겠지만, 영화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전화를 걸더라고요. 다시 촬영한다면 영화의 모습이 많이 달라질까요?
그간 인간관계의 모습도 많은 변화를 겪었죠. 타인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민감해졌고, 친구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니까요. 그게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작년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개봉했을 때, 한 관객의 리뷰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태희가 지영의 집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장면을 보고, 자신은 그렇게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거예요. 만약 지금 영화를 만든다면 분명 다른 방식으로 찍게 되겠죠. 문자메시지나 전화 대신, ‘단체 채팅방’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요. 오히려 저는 과거로 가서 아주 친밀한 친구 관계를 그려보고 싶기도 해요. 현재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어땠는지 살펴보고 싶은 거죠.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끝으로 도시 다큐멘터리 3부작이 마무리됐는데요. 차기작이 궁금합니다.
사극을 만들 계획이에요. 그간 현대의 도시에 관심이 많았는데, 문득 과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사극은 현대인의 주관을 거쳐 만들어지기에, 판타지가 될 수밖에 없거든요. 모든 디테일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죠. 옛 사람들의 관계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상상하는 것. 요즘에는 그런 일들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정재은 고양이, 도시, 건축에 관심 많은 영화 감독. 2001년 <고양이를 부탁해>로 장편 감독으로 데뷔했다. <고양이들의 아파트> 외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활발하게 만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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