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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 "일단 해 봐요, 재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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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4년, 지구에 이상 기후로 인한 1차 세계 재난이 닥치며 세계 곳곳은 폐허가 된다. 쌀은 금보다 귀해지고, 탄소를 배출하던 공장들은 가동을 멈췄다. 수십 억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직면하자 UN기후재난기구에서는 묘책을 떠올린다. 식량을 가진 나라에서 기후 난민을 수용하고, 식량이 부족한 나라를 '노 휴먼스 랜드'로 만드는 것. 제3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대상을 수상한 『노 휴먼스 랜드』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린 서울의 미래를 섬뜩하고 생생하게 그린다.



못하는 것들 중, 제일 하고 싶은 일 

수상 소식을 듣고 어떠셨어요?  

토요일이었어요. 한낮에 별 생각없이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는데, 낯선 메일이 와 있었죠. 메일에는 출판사 창비의 직원인데, 아래의 번호로 전화를 달라고 써 있었어요. 날짜를 보니 금요일에 보내셨는데, 제가 늦게 확인을 했더라고요. 토요일에 전화를 드리면 실례인 것 같아서 답장으로 제 전화번호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와서 수상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전화를 끊고 혼자 앉아있는데 비실비실 웃음이 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저녁이 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상 받았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주변에 제가 글을 쓴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원래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셨다고요.

네,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7~8년차쯤이 되었을 때 미술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퇴사를 했죠. 사실 유학을 가려고 준비했는데, 못 갔어요. 잘 해낼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1~2년간 시간만 보내고 나니 위기감이 찾아왔죠.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TV를 보다가 영화 미술이라는 분야를 알게 됐어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무작정 대학원에 등록하고 상업 영화 미술팀에서 일을 했죠. 그런데 저는 재능이 별로 없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제가 진정으로 하고싶었던 일은 미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럼 소설을 쓰는 일이었나요?  

소설이라고 단정할 순 없고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영화 미술을 그만둘 때 너무 절망적이었어요. 막연하게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와 오랫동안 배운 미술이 결합한 분야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어차피 못 하는 일이라면, 진짜 못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었던 걸 하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글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거죠. 어린 시절부터 소설을 좋아했는데, 글 못 쓴다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거든요. 대신 스스로 약속을 했어요. 딱 10번만 해보고 안 되면 평생 이쪽은 쳐다보지도 말고 돈을 열심히 벌기로요.

이번 소설이 그 10번의 도전 중 하나였군요.  

맞아요. 그동안 시나리오도 쓰고, 단편 소설도 쓰는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요. 운 좋게 7번째로 쓴 소설이 당선됐어요. 

영화 같은 스토리예요. 글 못 쓴다는 말만 듣던 사람이 소설가가 됐다!(웃음) 

정말 그랬어요. 학교나 학원에서도 글을 못쓴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글 쓰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했죠. 저에게 작가가 된다는 건 마치 농구 선수가 되는 것과 비슷했어요. 키도 작고, 운동을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농구가 좋다는 이유로 무작정 뛰어드는 무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죠.



기후 재난으로 서울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어요. 어떻게 떠올린 이야기인가요? 

평소 출퇴근길에 오디오북을 종종 듣는데요. 한 번은 『아메리칸 노트』를 들으며 집에 가고 있었어요. 작가 '찰스 디킨스'가 북미 지역을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너무 흥미로워서 귀가 계속 오디오북을 향해 열리더라고요. 그때 '나도 어딘가로 긴박하게 떠나는 여정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인이 기후난민이 되는 서사를 떠올리면서 시작된 이야기였죠.

작가의 말을 보니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 같아요.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공모전은 미완성 원고를 제출할 수 있거든요. 공모전 당시에는 최소 분량만 맞춰서 원고를 썼기 때문에 후반부 작업을 해야 했어요. 대략적인 구성안은 있었지만 너무 부담스럽더라고요. 마치 공부를 하나도 안 했는데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기분이었죠.(웃음) 그래서 한동안 글을 못 쓰고 계속 책만 읽었어요. 틀리면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환경에 관한 책과 작법서를 읽는 데 매달렸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급하게 소설을 완성했어요. 글 쓰는 내내 그렇게 무서웠는데, 편집부에 원고를 보내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마침내 완성했다는 안도감이 들었겠네요. 

아니요.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솔직하게 보여줬으니 됐다!' 싶었어요.(웃음) 무책임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죠. 원고를 통해서 '죄송하지만, 전 여기까지에요'라는 말씀을 드린 것 같았어요. 그후, 편집자님의 피드백과 독려를 받으며 처음부터 원고를 다시 쓰다시피 했어요. 어떻게 끝낼지 몰라서 풀어헤쳤던 끈을 잘 오무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정 작업을 했죠.

편집자님의 어떤 말이 도움이 되었나요? 

구체적으로 수정 방향을 함께 고민해주신 점도 좋았지만, 묵묵히 믿고 응원해 주신 게 큰 힘이 되었어요. 제가 의기소침해서 힘들어하는 걸 느끼셨는지 "자신감을 갖고 써도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마치 편집자님께서 "나를 믿고 이쪽으로 와"라면서 과자를 던져주시면 제가 과자를 주워 먹으며 그 길을 따라서 가는 느낌이었어요.(웃음)



계속 쓰고 싶어요, 그건 확실해요

소설은 2044년, 전 세계에 닥친 기후 재난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노 휴먼스 랜드'가 된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용산 공원' 등 실존하는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 더 현실감이 느껴졌어요.

저는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거든요. 현실의 공간들을 그대로 구성하고, 묘사하는게 저에게 가장 쉬운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공간적인 배경을 훨씬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싶었는데 스토리에 좀 더 집중하느라 초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했던 게 내심 아쉬워요. 

노 휴먼스 랜드를 찾은 조사단 '미아', '크리스', '한나', '파커' 등은 각각의 개성이 매우 뚜렷한 인물들이에요. 어떤 생각을 하며 소설의 인물을 구상했는지 궁금해요. 

사실 인물을 구상하는 게 너무 어려웠는데요. 모든 등장인물이 저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어요. 어떤 순간에 들었던 내 마음을 따로따로 뽑아서 인물들에게 각각 부여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특히 한나에게 애착을 느껴요. 한나는 사회성도 있고, 순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합리화를 잘하게 된 면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도 지금보다 어릴 때는 사회의 이상하고 잘못된 점들에 의문을 갖고, 말하는 편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러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사회화되어가는 저의 모습이 한나에게서 문득 보여서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소설의 마지막에 실린 미아의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불안하면 뭐 어때요. 그 마음은 그대로 두고 다른 걸 해 봐요. 일단 뭐든 해 보고, 어떻게 되나 봐요. 그리고 또 다시 해보고, 어떻게 되나 봐요. 재밌잖아요.(312쪽)" 저는 이 말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지닌 독자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이겨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버티는 편이었죠. 지금도 내년, 내후년에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죠. "나는 관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나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며 살 거야"라고요.(웃음)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겁내지 않고, 무엇이든 한번 해봐야겠다는 용기도 생기고요. 

소설은 어때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계속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네, 계속 쓰고 싶어요. 그거 하나는 확실해요. 물론 죽을 때까지 '다음 작품 써야하는데 어쩌지...'라고 생각만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요.(웃음)



독자가 생긴 기분은 어때요? 

그동안 대나무 숲에 혼자 비밀 이야기를 떠드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좋으면서도 두려워요. 저는 소설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제 글을 보여준 적도 없어서 다른 사람이 내가 쓴 소설을 본다는 게 아직도 낯설어요. 글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저는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디자인에 대한 피드백은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조금만 안 좋은 댓글을 봐도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더라고요. 내 안에 있는 감정을 박박 긁어서 쓰기 때문인가 봐요. 최근에 이 문제로 힘들어했더니 친구가 "너는 어떻게든 안 좋은 문장을 찾아서 모으는 것 같다"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좋은 리뷰들을 보여주었어요. 읽고 감동을 받아서 조용히 하트를 눌렀죠.(웃음) 

먼 미래에 한국이 정말 '노 휴먼스 랜드’가 된다면 어떨까요? 작가님은 어떤 선택을 하실 것 같아요? 

조사단이 될 일은 없을 테고요. 아마 정해진 규칙을 따를 것 같아요. 한국에 남아도 된다고 하면 계속 여기서 살겠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하면 각종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잘 챙겨서 가족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떠나야죠. 나라에서 정한대로 잘 따르면서 조용히 궁시렁대며 살지 않을까요.(웃음)

앞으로 쓰고 싶은 주제가 있나요? 

저는 노후에 대한 불안이 있어요. 몇 년 전 『아빠의 아빠가 됐다』『간병살인』 등의 책을 인상적으로 읽었거든요. 부모님이 점점 연로해지시는 것도 걱정이고, 제가 늙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도 궁금해요. 이런 생각을 토대로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요. 

머지않아 작가님의 두 번째 소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네, 그럼요. 저 다음 소설은 훨씬 더 잘 쓸 거예요!(웃음)



*김정

제3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대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노 휴먼스 랜드』를 썼다.



노 휴먼스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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