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록의 대모’, ‘여성 로커의 전설’로 불리지만, 로커로 한정짓기에 패티 스미스의 예술 세계는 더 크고 방대하다. 시인, 미술가, 사진가로 표현 영역을 아우르며 예술가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현재의 그를 보자면, ‘여성 아티스트들의 대모’로 명칭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 실제로 음악가, 연기자, 작가 등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패티 스미스를 롤 모델로 꼽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예술가’다.
패티 스미스가 단독 공연차 지난 2월1일 내한했다. 2009년 지산 록페스티벌 무대에 선 후 3년 반 만의 방문이다. 세계적인 명성과 음악사에 끼친 역할에 비해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은 편임에도, 지난해에는 서점과 음반 매장 한 편에 패티 스미스의 사진이 조용히 걸려 눈길을 끌었다. 12집인 < Banga >앨범과 2010년에 출간했던 회고록 『저스트 키즈(Just kids)』의 번역본이 한국에도 나온 까닭이다. 그러한 문화적 접촉이 공연으로까지 이어졌다. 2일 공연을 몇 시간여 앞두고 강남 한 호텔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인터뷰 내내 집중했고, 의욕적으로 대화를 즐겼다. 평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때때로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특유의 시선을 내비치며 다정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따금씩 지어보이는 소녀 같은 수줍은 미소는 무대 위에서의 강렬함과 대비되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할 때는 마치 노래 속의 시를 읊는 음성이 겹치기도 했다. 음악과 글을 통해 느껴 온 패티 스미스의 맑은 파워풀함이 실제로도 고스란했다.
반갑습니다. 우선 로버트 고 사진예술가 메이플소프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 『저스트 키즈(Just kids)』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이 책은 2010년 아마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고 내셔널 북 어워드에서도 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습니까?
아뇨,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한 책에는 골드 마크가 붙어 있는데요, 어릴 적 서점에서 일할 때 그 마크가 찍힌 책을 볼 때마다 ‘우와~’ 했었어요. 제가 그런 걸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정말 영광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이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원하는 방식대로 쓰자는 거였어요. 그가 죽기 전, 제게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래서 책을 쓰게 된 첫 번째 동기가 로버트라면, 두 번째는 그의 예술 세계를 사람들에게 소통할 수 있게 소개하는 기능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전 이 책이 몇몇 사람들만 좋아할 컬트 북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한국어판까지 나왔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내 인생의 아티스트!”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1989년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책이 2010년에 나온 거면 좀 늦은 감이 듭니다. 그를 회고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요?
죽은 직후에 친구의 죽음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쓴다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Coral Sea」라는 시집만을 냈죠. 이후에 제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심장 질환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 다음엔 남편이 많이 아파서 돌봐야 했고, 그가 죽은 후에는 남동생도 심장이 안 좋아서 또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고… 몇 년 사이 로버트, 내 남편, 피아니스트, 남동생을 다 잃었죠. 제게 남은 건 두 아이와 얼마 있지 않은 돈이 전부였어요. 아이 둘을 키워야 하니 여유가 전혀 없었죠. 그런 것들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에서 책을 쓰기는 힘들었어요.
죽음을 이겨내고 강해져야 책을 쓸 수 있는데, 당시 제 마음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시간을 보냈죠. 아이들 데리고 뉴욕으로 이사를 가고 제 인생에 많은 변화를 줬어요. 결국 제 중심(center)을 찾았고, 그리고서야 집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담은 있었죠. 로버트가 저한테 “패티~ 패티~ 우리 책은 어딨어?”라고 하는 게 들렸거든요.(웃음)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기다린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책이 43개 언어들로 번역돼 나오고, 백만 부 이상 팔렸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로버트도 지금쯤 행복해하고 있지 않을까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Ok~ Ok~ Ok~”하면서.(웃음)
이 책은 우리에게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다시 한 번 알게 했습니다. 메이플소프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만약 이 질문을 로버트에게 한다면 그는 우리의 관계를 ‘마법(magic)’이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는 우리를 두고 자주 ‘마법’이라 말하곤 했었으니까요. 내게 로버트는 ‘내 삶의 예술가(artist of my life)’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러브 오브 마이 블라블라’식의 표현을 많이 하는데 전 ‘아티스트 오브 마이 라이프’예요.
“적게 가져서 더 행복했다!”
1960, 1970년대 뉴욕의 첼시호텔에 살던 시절은 당신이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을 좀 소개해 줄 수 있을까요?
그 당시 내 친구들은 그 누구도 돈이 없었어요. 신용카드도 없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사야 할 때는 외상도 하고 그랬죠. 물질적 소유가 지금처럼 중요하지 않은 때였어요. 당시의 로버트와 내겐 핸드폰, 텔레비전, 컴퓨터, 팩스 같은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에게 있는 거라곤 작은 레코드플레이어, 몇 권의 아트 북, 미술 도구들 정도였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오직 창조적인 작업들뿐이었어요. 어떤 옷을 사 입고 어떤 새로운 기계를 갖고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가장 중요한 건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어떻게 나를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때의 우리가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적게 가져서 더 행복했지요.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일을 통해 만들어진 내 창조물들이지, 고급 아파트와 멋진 차, 고성능 컴퓨터 등등 내가 뭘 갖고 있느냐가 아니었어요. 소유가 중요해진 지금의 문화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제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자면, 그때는 물질적인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로버트는 나의 성공을 정말 대놓고 기뻐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 우리 서로를 위해서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멋지게 뿜어내더니 내게만 쓰는 말투로, 어정쩡하게 혼내는 그런 말투로, 질투라고는 조금도 없는 감탄을 담아,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느릿느릿 말했다. “패티, 네가 먼저 유명해졌구나.” - 『저스트 키즈 Just Kids』중
패티가 로버트를 얘기할 때마다 예술에 모든 삶을 집중하며 자신을 끌어올렸던 책 속의 어린 두 예술가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패티 스미스는 인터뷰에서 한국어판 책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특히 표지의 사진을 언급하며 22살 때 파리에서 여동생이 찍어준 것이라며 반가워했다.) 난 이 책이 대개의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60대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책을 쓸 때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을 통해 길어 올린 주입적인 교훈과 권위가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예술가의 과거를 훑는 필체는 특별함을 과장하거나 겸손을 가장하며 자신을 교묘하게 치켜세우는 법이 없다. 열정을 향한 확신적 몰두로 내달렸던 그날을 그저 아이들(just kids)이었다고 소개할 뿐이다. 꾸밈없는 태도는 인터뷰에서도 여전했다.
작년 < Banga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에이미 와인하우스’, 프랑스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와 ‘조니 뎁’, 작가 ‘니콜라이 고골’, ‘미하일 불가코프’,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 등 예술가나 그들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으로 태어난 곡들이 다수입니다. 앨범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저 제 방식대로 하는 거였어요.(웃음) 이번 앨범에서 뿐만 아니라 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앨범을 만들어 왔어요. < Horses >앨범에서도 짐 모리슨을 생각하며 만든 곡(「Gloria」)이 있고 「Land」는 지미 핸드릭스를 위한 곡이었죠. 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뉴스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부터 항상 영향을 받아요. < Gung ho >앨범의 주된 영감도 호치민이었어요. 「Radio bagdad」는 조지 부시가 바그다드에 폭탄을 터트린 뉴스에 영향을 받아 만들었고요. 저는 러브 송은 못 써요.(웃음) 이번 앨범에서도 「Seneca」는 손자를 위한 곡이고, 「Nine」은 조니 뎁을 생각하며 만들었죠. 제 친구였던 마리아 슈나이더를 담은 곡이 「Maria」고요.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생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지만 예술가로서의 죽음이 안타까워 「This is the girl」을 썼고요. 「Fuji-san」은 지진과 쓰나미로 재난을 겪는 일본 친구들에게 바치는 노래예요. 저는 늘 나를 움직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써요.
< Banga >앨범의 마지막곡이 닐 영의 커버곡인데요, 닐 영의 「After the gold rush」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After the gold rush」 바로 전 트랙인 「Constantine’s dream」이 대재앙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래여서 어둡게 끝이 나요. 그런데 전 앨범이 어둡게 끝나는 걸 원하지 않았고, 마지막은 좀 밝은 느낌을 주고 싶었죠. 어떻게 갈까 고민하던 차에 카페에 앉아 있는데 「After the gold rush」가 들리는 거예요. 들으면서 ‘아, 이 노래다’ 했어요. 그래서 결정했죠. 심플한 버전이에요. 딸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아들이 기타를 쳤죠. 함께 노래를 부른 어린이들은 친구인 토니 사나한(베이스 연주자)의 조카들이에요.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죠. 아이들이 세상의 희망이니까요. 이제 모든 것들을 자연에게 돌려주고,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는 뜻이죠.
1978년 히트했던 「Because the night」은 브루스 스프링스턴과의 협업으로 유명한데요, 브루스 스프링스턴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브루스가 「Because the night」을 만들다가 그만두고서 완성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자기도 러브 송은 못 쓴대요.(웃음) 코러스는 완성했는데 버스(verse) 부분은 미완 상태였죠. 저는 앨범을 만들고 있었고요. 저한테 곡을 완성해 볼 의향이 있냐고 브루스가 그래요. 당시 전 프레드 스미스랑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그는 디트로이트에 있고 나는 뉴욕에 있는 데다, 내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연락을 잘 못했죠. 디트로이드에서 뉴욕으로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전화를 할 수 있었어요. 어느 날 밤 프레드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그 노래를 듣고 있었어요. 평소에도 전화가 늦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그가 늦어? 또 늦어?’ 그러면서 괴로워했죠. 화로 흐트러진 제 자신을 브루스 스프링스턴 노래를 들으며 거기에 담았어요. 러브스토리를 못 쓰지만 프레드를 생각하며 가사를 썼죠. 노래를 들어보면 ‘Have I doubt when I’m alone / Love is a ring, the telephone.‘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프레드가 제게 전화를 주길 기다렸기 때문에 나온 가사예요. 이 노래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시크릿이죠.(시크릿 정도가 아니라 ‘탑 시크릿’이라고 하자 크게 웃었다)
“지구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소멸되어야!”
1979년에 < Wave >앨범을 낸 뒤 1988년이 되어서야 「People have the power」가 수록된 앨범 < Dream Of Life >가 나왔습니다. 9년 동안의 공백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앨범 발표가 늦어진 건가요?
1979년에 은퇴가 아니라 은둔 생활에 들어갔어요. 사랑에 빠져 있었고, 프레드가 제게 청혼을 했었죠. 남편도 음악을 통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때문인지 FBI가 계속 남편을 감시하고 쫓아다니는 문제들이 있었죠. 남편은 조용한 삶을 원했어요. 아이 키우면서 둘 다 좀 조용히 살자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러다가 첫째가 크고 여건이 돼서 다시 음악을 만들고 나오려 하는데 또 임신이 됐어요.(웃음) 그래서 또 미뤄졌죠. 남편은 정말 조용한 사람이지만 아주 정치적이었어요. ‘People have the power’는 프레드가 잘 쓰는 문구였어요. 그는 제게 ‘Patricia, People have the power, write the song’이라곤 했죠.(패티 스미스의 풀 네임은 Patricia Lee Smith다.) 그래서 프레드의 꿈을 담아 그의 문구를 썼어요. 「People have the power」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의 주제곡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그 노래가 불리는 걸 결코 보지 못했죠. 하지만 저는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면서 데모나 행진을 할 때 그 곡이 사람들에게 불리는 걸 봐요. 브루스 스프링스턴, 에디 베더, 조니 뎁 등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공연이나 음반에서 이 노래를 다시 쓰고 있죠.
프레드는 지구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여기서 사람이란 개개인의 인간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의 ‘연대된 인간’을 말하죠. 연대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하나가 돼야 환경문제나 핵문제에서 인류가 승리할 수 있고, ‘전 국가적 연대’가 되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구할 수 있어요. 깨끗한 물과 공기, 그리고 아이들은 국가주의로 지킬 수 없어요. 결국 지구촌 전체가 하나가 되는 방법은 국가주의의 소멸인 거죠. 그래야만 인간의 삶의 질이 상승할 수 있어요.
꾸준한 앨범 활동을 펼쳐 오며 ‘펑크 록의 대모’로 일컬어집니다. 이에 대해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그게 웃긴데, 어렸을 때는 퀸이었어요.(웃음) 나이가 드니까 사람들이 대모라고 부르네요. 그럴 때마다 “흠~ 대모? 예전엔 여왕이었는데”(웃음) 여기서 더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펑크 록의 공룡’으로 부를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저는 제 자신을 그냥 ‘worker’라고 생각해요. 시를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또 나는 엄마고, 공적인 일을 하는 ‘worker’죠. 그 모든 분야에 동등한 에너지를 쏟으면서요. 창조적인 일을 할 때 모든 것 똑같이 최선을 다 해요. 그런데 좋은 주부는 아닌 거 같아요. 노력은 하는데(웃음)
『저스트 키즈 Just Kids』를 영화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나요?
현재로선 없습니다. 모두가 하자고 하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됐어요. 현재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 하겠다는 여배우, 엄청난 돈들이 줄을 서 있는 상태예요. 제가 나중에 영화화를 한다면 각본은 직접 쓸 계획이에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단순(simple)하며 유니버설(universal)했으면 해요. 패티와 로버트가 꼭 미국 아이들이 아니라 한국 애들이어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현재 그 책의 영화 제작권은 당신 손에 있는 거군요.
맞아요. 지금까지 내가 만든 모든 작품의 권한을 내가 다 소유하고 있어요. 자기 작품의 권한을 다 팔아치운 아티스트들도 있는데, 나는 돈을 덜 번다하더라도 내 창조물들에 대한 권한은 누구에게도 내놓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까지 내놓은 자신의 앨범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앨범이 있다면요?
너무 어려운 문제예요. 모든 앨범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제겐 기억할 만한 이유들이 다 있어요.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녹음할 때 이루어진 다양한 즉흥연주(improvisation)의 경험들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 Horses >에서의 「Birdland」, < Radio Ethiopia >의 타이틀 곡 등은 모두 스튜디오 녹음 때 즉흥연주로 완성된 곡들이에요. < Gung ho >의 타이틀곡, < Trampin' >의 「Radio Baghdad」, 이번 앨범에 수록된 「Constantine's dream」과 같은 곡들은 러닝타임도 굉장히 길고, 스튜디오에서 즉흥연주 방식으로 녹음될 때 고도의 집중과 많은 에너지 소모를 요하는 곡들이죠. 「Constantine's dream」은 구성도 복잡하고 가사도 없어요. 전 이런 즉흥연주들을 완성한 것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모든 앨범은 완성되는 과정이 모험(adventure)이에요. < Easter >앨범 전 큰 사고를 당해 목 깁스를 한 채 5개월 이상 누워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Rock'n' roll nigger」를 녹음할 때 폭발적인 괴력을 발휘했던 경험은 아직도 내 마음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죠. 「Gung Ho」를 녹음하기 전에는 호치민의 삶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어요. 녹음 직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호치민도 심장이 나빠 죽었어요. 스튜디오에서 그 곡을 녹음할 때 호치민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온힘을 다해 즉흥연주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끝 부분에서 갑자기 내 마음 속에서 아버지의 심장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녹음할 때는 마음 속 매우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신비스러운 경험을 가끔 하곤 합니다.
질문에 딱 맞는 대답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매 앨범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뭔가 독특한 걸 창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제 스스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전 솔직히 좋은 팝송을 쓰는 재주는 없어요. 내게 모두가 행복해 할 팝송을 만들 재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댄스곡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런 곡을 만드는 재주는 없어요.
“누구도 지미 헨드릭스를 추월하지 못했다”
다른 아티스트 앨범 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앨범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단연 지미 헨드릭스의 < Electric Ladyland >예요! 엘비스 프레슬리도 훌륭했지만(God bless Elvis!), 제겐 지미 헨드릭스예요. 그 누구도 지미 헨드릭스를 추월하진 못했어요. 공연할 때 가끔 그를 생각하며 에너지를 얻으려 해요. 구성으로 봐도 그는 < Electric Ladyland >녹음 때도 즉흥연주 방식을 많이 했었고 「1983... (A merman I should turn to be)」와 같은 긴 곡이 그 사실을 잘 입증하죠. 앨범 전체가 존 콜트레인 음악처럼 영적으로 충만하고 사악하기도 해요. 순수한 로큰롤이에요. 지미 헨드릭스의 방식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제 앨범들도 구성 면에서 그의 작품과 많이 닮아 있죠. 긴 즉흥연주와 같은 형식 말예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창작을 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었다. 인터뷰 내내 나는 시간의 파고에 침식되지 않은 순수한 예술가의 영혼을 대면했다. 첼시 호텔에서 미래를 꿈꾸던 시크한 소녀가 그의 안에서 여전히 영롱하게 숨 쉬고 있었다. 67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아니 나이라는 시간적 관념으로 사람의 한 부분을 이해하려는 관성적 태도가 무안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시간과 장르에 엮일 수 없는 패티 스미스라는 정체성 자체로 온전했다. 그 예술혼이 끝나지 않는 한, 아무리 세월이 그를 휩쓸고 간다 해도 세상을 향한 그의 외침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아티스트의 진정한 정의였다.
예술적 정신이 지켜지기 힘든 시대에 패티 스미스 같은 예술가는 분명 순수를 염원하는 세상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통역을 맡은 이무영씨도 ‘패티 스미스 같은 사람이 있어서 외롭지가 않다’고 말했다.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해 스스로 민망해하지 않고, 이익보다는 가치를 위해 투쟁을 마다않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안이다. 패티 스미스를 만나고 돌아오며, 그처럼 늙을 수 있다면 노인이 되는 일도 근사하리란 오래된 믿음에 확신을 더했다.
패티 스미스가 단독 공연차 지난 2월1일 내한했다. 2009년 지산 록페스티벌 무대에 선 후 3년 반 만의 방문이다. 세계적인 명성과 음악사에 끼친 역할에 비해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은 편임에도, 지난해에는 서점과 음반 매장 한 편에 패티 스미스의 사진이 조용히 걸려 눈길을 끌었다. 12집인 < Banga >앨범과 2010년에 출간했던 회고록 『저스트 키즈(Just kids)』의 번역본이 한국에도 나온 까닭이다. 그러한 문화적 접촉이 공연으로까지 이어졌다. 2일 공연을 몇 시간여 앞두고 강남 한 호텔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인터뷰 내내 집중했고, 의욕적으로 대화를 즐겼다. 평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때때로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특유의 시선을 내비치며 다정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따금씩 지어보이는 소녀 같은 수줍은 미소는 무대 위에서의 강렬함과 대비되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할 때는 마치 노래 속의 시를 읊는 음성이 겹치기도 했다. 음악과 글을 통해 느껴 온 패티 스미스의 맑은 파워풀함이 실제로도 고스란했다.
반갑습니다. 우선 로버트 고 사진예술가 메이플소프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 『저스트 키즈(Just kids)』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이 책은 2010년 아마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고 내셔널 북 어워드에서도 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습니까?
아뇨,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한 책에는 골드 마크가 붙어 있는데요, 어릴 적 서점에서 일할 때 그 마크가 찍힌 책을 볼 때마다 ‘우와~’ 했었어요. 제가 그런 걸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정말 영광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이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원하는 방식대로 쓰자는 거였어요. 그가 죽기 전, 제게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래서 책을 쓰게 된 첫 번째 동기가 로버트라면, 두 번째는 그의 예술 세계를 사람들에게 소통할 수 있게 소개하는 기능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전 이 책이 몇몇 사람들만 좋아할 컬트 북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한국어판까지 나왔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내 인생의 아티스트!”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1989년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책이 2010년에 나온 거면 좀 늦은 감이 듭니다. 그를 회고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요?
죽은 직후에 친구의 죽음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쓴다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Coral Sea」라는 시집만을 냈죠. 이후에 제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심장 질환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 다음엔 남편이 많이 아파서 돌봐야 했고, 그가 죽은 후에는 남동생도 심장이 안 좋아서 또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고… 몇 년 사이 로버트, 내 남편, 피아니스트, 남동생을 다 잃었죠. 제게 남은 건 두 아이와 얼마 있지 않은 돈이 전부였어요. 아이 둘을 키워야 하니 여유가 전혀 없었죠. 그런 것들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에서 책을 쓰기는 힘들었어요.
죽음을 이겨내고 강해져야 책을 쓸 수 있는데, 당시 제 마음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시간을 보냈죠. 아이들 데리고 뉴욕으로 이사를 가고 제 인생에 많은 변화를 줬어요. 결국 제 중심(center)을 찾았고, 그리고서야 집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담은 있었죠. 로버트가 저한테 “패티~ 패티~ 우리 책은 어딨어?”라고 하는 게 들렸거든요.(웃음)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기다린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책이 43개 언어들로 번역돼 나오고, 백만 부 이상 팔렸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로버트도 지금쯤 행복해하고 있지 않을까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Ok~ Ok~ Ok~”하면서.(웃음)
이 책은 우리에게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다시 한 번 알게 했습니다. 메이플소프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만약 이 질문을 로버트에게 한다면 그는 우리의 관계를 ‘마법(magic)’이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는 우리를 두고 자주 ‘마법’이라 말하곤 했었으니까요. 내게 로버트는 ‘내 삶의 예술가(artist of my life)’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러브 오브 마이 블라블라’식의 표현을 많이 하는데 전 ‘아티스트 오브 마이 라이프’예요.
“적게 가져서 더 행복했다!”
1960, 1970년대 뉴욕의 첼시호텔에 살던 시절은 당신이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을 좀 소개해 줄 수 있을까요?
그 당시 내 친구들은 그 누구도 돈이 없었어요. 신용카드도 없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사야 할 때는 외상도 하고 그랬죠. 물질적 소유가 지금처럼 중요하지 않은 때였어요. 당시의 로버트와 내겐 핸드폰, 텔레비전, 컴퓨터, 팩스 같은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에게 있는 거라곤 작은 레코드플레이어, 몇 권의 아트 북, 미술 도구들 정도였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오직 창조적인 작업들뿐이었어요. 어떤 옷을 사 입고 어떤 새로운 기계를 갖고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가장 중요한 건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어떻게 나를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때의 우리가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적게 가져서 더 행복했지요.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일을 통해 만들어진 내 창조물들이지, 고급 아파트와 멋진 차, 고성능 컴퓨터 등등 내가 뭘 갖고 있느냐가 아니었어요. 소유가 중요해진 지금의 문화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제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자면, 그때는 물질적인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패티가 로버트를 얘기할 때마다 예술에 모든 삶을 집중하며 자신을 끌어올렸던 책 속의 어린 두 예술가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패티 스미스는 인터뷰에서 한국어판 책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특히 표지의 사진을 언급하며 22살 때 파리에서 여동생이 찍어준 것이라며 반가워했다.) 난 이 책이 대개의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60대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책을 쓸 때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을 통해 길어 올린 주입적인 교훈과 권위가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예술가의 과거를 훑는 필체는 특별함을 과장하거나 겸손을 가장하며 자신을 교묘하게 치켜세우는 법이 없다. 열정을 향한 확신적 몰두로 내달렸던 그날을 그저 아이들(just kids)이었다고 소개할 뿐이다. 꾸밈없는 태도는 인터뷰에서도 여전했다.
작년 < Banga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에이미 와인하우스’, 프랑스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와 ‘조니 뎁’, 작가 ‘니콜라이 고골’, ‘미하일 불가코프’,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 등 예술가나 그들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으로 태어난 곡들이 다수입니다. 앨범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저 제 방식대로 하는 거였어요.(웃음) 이번 앨범에서 뿐만 아니라 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앨범을 만들어 왔어요. < Horses >앨범에서도 짐 모리슨을 생각하며 만든 곡(「Gloria」)이 있고 「Land」는 지미 핸드릭스를 위한 곡이었죠. 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뉴스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부터 항상 영향을 받아요. < Gung ho >앨범의 주된 영감도 호치민이었어요. 「Radio bagdad」는 조지 부시가 바그다드에 폭탄을 터트린 뉴스에 영향을 받아 만들었고요. 저는 러브 송은 못 써요.(웃음) 이번 앨범에서도 「Seneca」는 손자를 위한 곡이고, 「Nine」은 조니 뎁을 생각하며 만들었죠. 제 친구였던 마리아 슈나이더를 담은 곡이 「Maria」고요.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생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지만 예술가로서의 죽음이 안타까워 「This is the girl」을 썼고요. 「Fuji-san」은 지진과 쓰나미로 재난을 겪는 일본 친구들에게 바치는 노래예요. 저는 늘 나를 움직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써요.
< Banga >앨범의 마지막곡이 닐 영의 커버곡인데요, 닐 영의 「After the gold rush」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After the gold rush」 바로 전 트랙인 「Constantine’s dream」이 대재앙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래여서 어둡게 끝이 나요. 그런데 전 앨범이 어둡게 끝나는 걸 원하지 않았고, 마지막은 좀 밝은 느낌을 주고 싶었죠. 어떻게 갈까 고민하던 차에 카페에 앉아 있는데 「After the gold rush」가 들리는 거예요. 들으면서 ‘아, 이 노래다’ 했어요. 그래서 결정했죠. 심플한 버전이에요. 딸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아들이 기타를 쳤죠. 함께 노래를 부른 어린이들은 친구인 토니 사나한(베이스 연주자)의 조카들이에요.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죠. 아이들이 세상의 희망이니까요. 이제 모든 것들을 자연에게 돌려주고,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는 뜻이죠.
1978년 히트했던 「Because the night」은 브루스 스프링스턴과의 협업으로 유명한데요, 브루스 스프링스턴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브루스가 「Because the night」을 만들다가 그만두고서 완성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자기도 러브 송은 못 쓴대요.(웃음) 코러스는 완성했는데 버스(verse) 부분은 미완 상태였죠. 저는 앨범을 만들고 있었고요. 저한테 곡을 완성해 볼 의향이 있냐고 브루스가 그래요. 당시 전 프레드 스미스랑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그는 디트로이트에 있고 나는 뉴욕에 있는 데다, 내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연락을 잘 못했죠. 디트로이드에서 뉴욕으로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전화를 할 수 있었어요. 어느 날 밤 프레드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그 노래를 듣고 있었어요. 평소에도 전화가 늦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그가 늦어? 또 늦어?’ 그러면서 괴로워했죠. 화로 흐트러진 제 자신을 브루스 스프링스턴 노래를 들으며 거기에 담았어요. 러브스토리를 못 쓰지만 프레드를 생각하며 가사를 썼죠. 노래를 들어보면 ‘Have I doubt when I’m alone / Love is a ring, the telephone.‘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프레드가 제게 전화를 주길 기다렸기 때문에 나온 가사예요. 이 노래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시크릿이죠.(시크릿 정도가 아니라 ‘탑 시크릿’이라고 하자 크게 웃었다)
“지구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소멸되어야!”
1979년에 < Wave >앨범을 낸 뒤 1988년이 되어서야 「People have the power」가 수록된 앨범 < Dream Of Life >가 나왔습니다. 9년 동안의 공백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앨범 발표가 늦어진 건가요?
1979년에 은퇴가 아니라 은둔 생활에 들어갔어요. 사랑에 빠져 있었고, 프레드가 제게 청혼을 했었죠. 남편도 음악을 통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때문인지 FBI가 계속 남편을 감시하고 쫓아다니는 문제들이 있었죠. 남편은 조용한 삶을 원했어요. 아이 키우면서 둘 다 좀 조용히 살자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러다가 첫째가 크고 여건이 돼서 다시 음악을 만들고 나오려 하는데 또 임신이 됐어요.(웃음) 그래서 또 미뤄졌죠. 남편은 정말 조용한 사람이지만 아주 정치적이었어요. ‘People have the power’는 프레드가 잘 쓰는 문구였어요. 그는 제게 ‘Patricia, People have the power, write the song’이라곤 했죠.(패티 스미스의 풀 네임은 Patricia Lee Smith다.) 그래서 프레드의 꿈을 담아 그의 문구를 썼어요. 「People have the power」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의 주제곡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그 노래가 불리는 걸 결코 보지 못했죠. 하지만 저는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면서 데모나 행진을 할 때 그 곡이 사람들에게 불리는 걸 봐요. 브루스 스프링스턴, 에디 베더, 조니 뎁 등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공연이나 음반에서 이 노래를 다시 쓰고 있죠.
프레드는 지구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여기서 사람이란 개개인의 인간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의 ‘연대된 인간’을 말하죠. 연대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하나가 돼야 환경문제나 핵문제에서 인류가 승리할 수 있고, ‘전 국가적 연대’가 되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구할 수 있어요. 깨끗한 물과 공기, 그리고 아이들은 국가주의로 지킬 수 없어요. 결국 지구촌 전체가 하나가 되는 방법은 국가주의의 소멸인 거죠. 그래야만 인간의 삶의 질이 상승할 수 있어요.
꾸준한 앨범 활동을 펼쳐 오며 ‘펑크 록의 대모’로 일컬어집니다. 이에 대해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그게 웃긴데, 어렸을 때는 퀸이었어요.(웃음) 나이가 드니까 사람들이 대모라고 부르네요. 그럴 때마다 “흠~ 대모? 예전엔 여왕이었는데”(웃음) 여기서 더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펑크 록의 공룡’으로 부를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저는 제 자신을 그냥 ‘worker’라고 생각해요. 시를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또 나는 엄마고, 공적인 일을 하는 ‘worker’죠. 그 모든 분야에 동등한 에너지를 쏟으면서요. 창조적인 일을 할 때 모든 것 똑같이 최선을 다 해요. 그런데 좋은 주부는 아닌 거 같아요. 노력은 하는데(웃음)
『저스트 키즈 Just Kids』를 영화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나요?
현재로선 없습니다. 모두가 하자고 하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됐어요. 현재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 하겠다는 여배우, 엄청난 돈들이 줄을 서 있는 상태예요. 제가 나중에 영화화를 한다면 각본은 직접 쓸 계획이에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단순(simple)하며 유니버설(universal)했으면 해요. 패티와 로버트가 꼭 미국 아이들이 아니라 한국 애들이어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현재 그 책의 영화 제작권은 당신 손에 있는 거군요.
맞아요. 지금까지 내가 만든 모든 작품의 권한을 내가 다 소유하고 있어요. 자기 작품의 권한을 다 팔아치운 아티스트들도 있는데, 나는 돈을 덜 번다하더라도 내 창조물들에 대한 권한은 누구에게도 내놓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까지 내놓은 자신의 앨범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앨범이 있다면요?
너무 어려운 문제예요. 모든 앨범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제겐 기억할 만한 이유들이 다 있어요.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녹음할 때 이루어진 다양한 즉흥연주(improvisation)의 경험들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 Horses >에서의 「Birdland」, < Radio Ethiopia >의 타이틀 곡 등은 모두 스튜디오 녹음 때 즉흥연주로 완성된 곡들이에요. < Gung ho >의 타이틀곡, < Trampin' >의 「Radio Baghdad」, 이번 앨범에 수록된 「Constantine's dream」과 같은 곡들은 러닝타임도 굉장히 길고, 스튜디오에서 즉흥연주 방식으로 녹음될 때 고도의 집중과 많은 에너지 소모를 요하는 곡들이죠. 「Constantine's dream」은 구성도 복잡하고 가사도 없어요. 전 이런 즉흥연주들을 완성한 것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모든 앨범은 완성되는 과정이 모험(adventure)이에요. < Easter >앨범 전 큰 사고를 당해 목 깁스를 한 채 5개월 이상 누워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Rock'n' roll nigger」를 녹음할 때 폭발적인 괴력을 발휘했던 경험은 아직도 내 마음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죠. 「Gung Ho」를 녹음하기 전에는 호치민의 삶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어요. 녹음 직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호치민도 심장이 나빠 죽었어요. 스튜디오에서 그 곡을 녹음할 때 호치민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온힘을 다해 즉흥연주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끝 부분에서 갑자기 내 마음 속에서 아버지의 심장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녹음할 때는 마음 속 매우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신비스러운 경험을 가끔 하곤 합니다.
질문에 딱 맞는 대답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매 앨범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뭔가 독특한 걸 창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제 스스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전 솔직히 좋은 팝송을 쓰는 재주는 없어요. 내게 모두가 행복해 할 팝송을 만들 재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댄스곡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런 곡을 만드는 재주는 없어요.
“누구도 지미 헨드릭스를 추월하지 못했다”
다른 아티스트 앨범 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앨범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단연 지미 헨드릭스의 < Electric Ladyland >예요! 엘비스 프레슬리도 훌륭했지만(God bless Elvis!), 제겐 지미 헨드릭스예요. 그 누구도 지미 헨드릭스를 추월하진 못했어요. 공연할 때 가끔 그를 생각하며 에너지를 얻으려 해요. 구성으로 봐도 그는 < Electric Ladyland >녹음 때도 즉흥연주 방식을 많이 했었고 「1983... (A merman I should turn to be)」와 같은 긴 곡이 그 사실을 잘 입증하죠. 앨범 전체가 존 콜트레인 음악처럼 영적으로 충만하고 사악하기도 해요. 순수한 로큰롤이에요. 지미 헨드릭스의 방식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제 앨범들도 구성 면에서 그의 작품과 많이 닮아 있죠. 긴 즉흥연주와 같은 형식 말예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창작을 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었다. 인터뷰 내내 나는 시간의 파고에 침식되지 않은 순수한 예술가의 영혼을 대면했다. 첼시 호텔에서 미래를 꿈꾸던 시크한 소녀가 그의 안에서 여전히 영롱하게 숨 쉬고 있었다. 67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아니 나이라는 시간적 관념으로 사람의 한 부분을 이해하려는 관성적 태도가 무안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시간과 장르에 엮일 수 없는 패티 스미스라는 정체성 자체로 온전했다. 그 예술혼이 끝나지 않는 한, 아무리 세월이 그를 휩쓸고 간다 해도 세상을 향한 그의 외침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아티스트의 진정한 정의였다.
예술적 정신이 지켜지기 힘든 시대에 패티 스미스 같은 예술가는 분명 순수를 염원하는 세상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통역을 맡은 이무영씨도 ‘패티 스미스 같은 사람이 있어서 외롭지가 않다’고 말했다.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해 스스로 민망해하지 않고, 이익보다는 가치를 위해 투쟁을 마다않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안이다. 패티 스미스를 만나고 돌아오며, 그처럼 늙을 수 있다면 노인이 되는 일도 근사하리란 오래된 믿음에 확신을 더했다.
인터뷰 : 임진모, 이무영, 윤은지
통역 : 이무영
사진 : 이한수
정리 : 윤은지
통역 : 이무영
사진 : 이한수
정리 : 윤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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