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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평생 내가 설 자리를 고민하는 것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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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변호사 한동일.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수업을,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에서 유럽법의 기원과 로마법을 강의했다. 그의 강의를 토대로 펴낸 『라틴어 수업』은 100쇄를 넘긴 한동일의 대표작이다. 『라틴어 수업』은 일본에서도 출간 직후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국경을 넘어 라틴어의 매력을 알렸다.

아무리 라틴어가 어렵다 한들 인생보다 어렵지는 않다. 사제직을 그만둔 이후 그에게도 많은 부침이 있었다. 인생이 어려울 때, 가끔 한 문장이 다른 어떤 인간관계보다 힘이 되어줄 때가 있다. 이번에 나온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은 한동일 작가가 가장 어려운 시절에 붙잡은 한 줄의 라틴어 문장, 한 줄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도하듯 품고 외웠던 라틴어 문장에 더해 자신의 인생사를 엮었다. 아픔은 스토리가 되었다(‘Vexatio storia fiat’).



영성은 우리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라틴어 수업』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사제직을 내려놓았다고요. 

2020년까지는 제가 계획했던 사전들을 마무리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사전을 내고 난 뒤에는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점이었죠. 천주교 사제이면서도 늘 천주교 안에서 불편함을 느끼던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은 저에게 사제직을 유지하면서 강의하고 책을 쓰라고 했지만, 천주교에서는 제가 늘 우리 사람이 아니라는 식이어서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했어요.

이번 책의 주제는 ‘삶의 고비마다 나를 일으킨 단 한 줄의 희망’입니다.

영성이라고 하면 사실 대부분 종교적인 거로 생각하는데, 영성이 꼭 종교와 관계있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 문장을 고르고 적었어요. 

출판 과정은 어떠셨나요?

항상 저에게 파스칼의 팡세같은 책을 써달라고 하는 친구가 있어요. 대여섯 줄로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던지는 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어떻게 감히 그렇게 쓰겠냐고 흐지부지 지나가던 시점에 이야기장수 이연실 대표를 만났어요. 처음에는 힘이 되는 문장과 그에 따라 짧은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죠. 마치 쇼츠처럼요. 처음에는 팡세처럼 저의 어떤 짧은 단상들을 써 내려갔는데, 원고를 추가하는 과정에서 성장 과정에 대한 고백이 나오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은 저마다 아픔도 있고 힘듦도 있는데, 제가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누군가 읽고 듣는다면 조금 달리 생각할 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취지에서 썼어요.

책이 금장으로 둘러 있어요. 마치 성경 같아요. 

요즘은 성경 박을 하는 게 많이 어렵대요. 이 작업을 하는 업체가 한 군데밖에 없고, 대부분 연로한 분들이 수작업으로 해서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연실 대표가 원고를 보고는 이 책은 성경과 같은 책이 될 거라고 제작 업체를 설득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사제직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아마 이렇게 내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욕먹죠. ‘네가 뭔데 성경을 따라 하느냐?’ 하면서요. (웃음)



소문을 대하는 제 태도만 남았어요 

부모님, 특히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왔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지 않나요?

그렇기도 하죠. 돌아가신 어머니가 저를 성찰하게 하는 어떤 요인이 됐었어요. 처음에는 성장 과정에서의 결핍을 먼저 생각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결핍 속에서 저를 성장시켰던 것들이 뭐가 있는지 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화해도 이루어지고, 화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냥 여백으로 남겨두고 저에게 없는 부분이라는 걸 인정했어요. 모든 게 다 채워질 수는 없잖아요. 내가 약하고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이 이제까지 제가 어려움을 겪은 원인이라는 것도 인정하게 됐어요. 글을 쓰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가장 어려웠어요. 그게 현대인들의 가장 큰 숙제예요. ‘있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상태에서 시작하려는 것들을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쓰면서 치유가 되는 기분이 들었나요?

매번 책을 쓸 때마다 조금 다른데, 이번 책은 마치 받아 쓴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몰입해서 썼어요. 치유보다는 다른 스테이지에 접어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절망의 한복판에서 새기는 희망의 문장’에서는 힘들었던 시기가 그려집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공부를 편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공부 자체도 힘들고, 공부만 해도 로타 로마나에 들어갈 수 있을지 확률이 희박한데 공부만 하도록 외적인 요소가 저를 받쳐주지도 않았죠. 변호사 과정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힘든 일이 많았고요. 하지만 소문은 지나가더라고요. 그 소문을 대하는 제 태도만 남았어요. 제가 그 소문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시간이 해결해 주는 방식도 달라졌어요.

라틴어로 세계를 ‘문두스(mundus)’라고 하는데, 예전에 제 문두스가 곧 교회와 같았던 적이 있었어요. 어떨 때는 교회가 세계보다 더 컸던 적도 있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그렇게 크지 않고, 이 세계 안에 교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여기서 판결문 몇 개를 잘 쓴다고 해서 교회가 바뀔까? 그럼 난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생각이 확 들었어요.

사제직을 내려놓고 이제까지 한 말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대목이 있었어요. 일반인으로서의 ‘나’와 사제로서의 ‘나’ 사이에 차이가 있나요? 

사제직이었을 때는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서 말하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만원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같이 눈높이를 맞추면서 사람들의 피곤함이 묻어난 얼굴을 보는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제 글과 말을 다시 성찰했어요. 내가 사제가 아니라면, 나는 어디에서 뭘 해야 할지 사춘기 소년처럼 고민이 이어졌어요. 그만둬도 나는 크게 변화할 게 없을 거로 생각했어요. 일상이 너무 비슷하고, 바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제가 말을 많이 했어도 소통이 아니라 강의하는 방식이었잖아요. 부족함을 느낀 상태에서 다시 한 번 글을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지금 하는 강의가 있나요?

없어요. 가끔 특강은 나가요. 그것도 좀 고민하고 있어요. 대학이라는 플랫폼이 예전처럼 훌륭한 교육 플랫폼이 아닌 것 같아요. 얼마 전에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교수님이 투트랙으로 인터넷에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하신 적이 있어요. 전문가들을 위한 강의, 일반인들을 위한 강의 두 가지로요. 어떻게 할지는 아직 고민 중이에요.

책이 나왔으니 북토크로 사람들을 만나실 수도 있을 거고요.

그것도 좋죠.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 중 하나는 단편적인 강의보다는 이어지는 강의를 하고 싶어요. 예전에 학교 강의를 했을 때 같은 과목이어도 한 번도 같은 이야기로 강의를 꾸려간 적이 없었거든요. 학기마다 새로운 걸 이야기하기 바빴어요. 늘 강의하는 것에 대해 목마름이 있어요. 대학이 아닌 다른 공동체에서도 강의를 해보고 싶어요.



통념을 깨기 위한 사소함

‘법률은 사소한 일에 관여하지 않지만, 인생은 사소함으로 구원받습니다’(341쪽)라는 문장이 있어요. 

제가 성장한 것과도 연관된 문장이에요. 공부가 무엇인지 질문을 자주 받는데, 어떤 데에서는 통념을 깨는 거라고 답했지만, 그 통념을 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사소함이에요. 우주에서 바라볼 때 어떤 한 별에서 다른 별까지 측정값이 조금만 달라지면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하게 되잖아요. 오차 범위를 넓히는 거죠. 이제까지 외적인 부분에서는 성과를 많이 냈어요. 성취가 있었으니 다른 부분은 넘어갔죠. 하지만 실상은 외적인 결과를 잘 낸다고 해서 내가 일상에서 관계를 잘 맺는다는 건 전혀 아닌데 그 현실을 이제야 마주친 거죠. 전에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도 잘 맺으려고 하지 않았고, 요즘 말로 손절도 많이 했어요. 요즘은 역으로 손절을 당하면 이런 마음이었겠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 같아요.

스스로 다그치는 사람이라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많이 다그쳤죠, 엄청나게.

다그쳤다는 게 과거형인가요? 아니면 여전히 스스로 다그치나요? 

성격이 그렇게 빨리 바뀌겠어요(웃음). 늘 쫓기고 다그쳤죠. 성격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집안의 아이로 태어나서 생존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거예요. 여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운이 좋게 계속 이어 나가고 받았던 게 있어요.

마지막에는 기후 위기 문제 언급을 하셨더라고요.

우리 어머니 세대가 ‘다 쓰고 죽자’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주 불편했어요. 인간은 다 쓸 권리도 없고 다 쓸 수도 없어요. 자연에서 대형 동물이 죽으면 그날은 그 동물의 죽음이 축제가 돼요. 많은 동물이 와서 포식하죠. 그런데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저는 인간의 죽음이 다른 인간들의 축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미래 세대를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도 어차피 다 물려받은 거거든요.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지금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책의 주제 문장이 있다면 뭘까요? 

전 이걸로 하고 싶어요. “평생 내가 설 자리를 고민하는 것이 인생입니다(‘Vivere est semper secum quaerere qui suus locus in universe sit.’).” 제 현재진행형 질문이기도 하고요. 예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예전은 그때대로 어려움이 있었어요. 지금은 지금대로 또 다른 어려움이 있고요. 어려움을 대하는 기술이 나아졌나 생각해 보면, 달라졌죠. 달라졌지만 스스로 어려움을 대처하는 게 편안하지만은 않아요. 매 순간 다른 어려움이 다가오고 고민은 계속돼요. 20대, 30대뿐만 아니라 40대, 50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고요. 부모님을 보면서 늙어갈 준비를 잘하지 못하고 단순히 시간상으로 길게 살면 재앙이겠다 싶고요. 뭐가 그렇게 급하냐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늙어가는 문제를 뒷순위로 빼면 뺄수록 지금 서로가 더 각박하게 사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한동일

공부하는 노동자. 한국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변호사. 로타 로마나가 설립된 이래, 700년 역사상 930번째로 선서한 변호인이다.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유럽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법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유럽인이 아니면 구사하기 힘들다는 라틴어는 물론 기타 유럽어를 잘 구사해야 하며, 라틴어로 진행되는 사법연수원 3년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마쳤다고 해도 변호사 자격시험 합격 비율은 고작 5~6퍼센트에 불과하다.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2003년 교회법학 석사 학위를 최우등으로 수료했으며, 2004년 동대학원에서 교회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로마를 오가며 이탈리아 법무법인에서 일했다.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수업을 맡아 진행했고,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에서 ‘유럽법의 기원’과 ‘로마법 수업’을 강의했다. 서강대학교에서 진행한 라틴어 수업은 타교생 및 외부인까지 청강하러 찾아오는 최고의 명강의로 평가받았다. 그 현장 강의를 토대로 펴낸 『라틴어 수업』은 100쇄를 돌파하며 40만 부가 판매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은 책으로 『로마법 수업』『믿는 인간에 대하여』『법으로 읽는 유럽사』『한동일의 공부법 수업』『교회의 재산법』『카르페 라틴어 종합편』『한동일의 라틴어 산책』 등이 있으며, 『카르페 라틴어 사전』 등의 라틴어 사전을 편찬하고, 『동방 가톨릭교회』『교부들의 성경 주해 로마서』『교회법률 용어사전』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
한동일 저
이야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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