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닥치는 불행에 일일이 슬퍼하고 있느니 차라리 삶의 부조리함에 웃음을 터뜨리는 편이 낫다.”
망가지기 쉽고, 취약한 삶들을 찬란한 유머로 엮어낸다면 에리카 산체스의 글이 될 것이다.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은 멕시코 이민자 2세대이자 여성, 정신질환 당사자인 그가 쓴 회고록이다. 가난한 멕시코 이민자 가정에서 강한 자의식을 가진 글 쓰는 여성으로 자라난 그는 자신의 삶을 결코 매끄러운 이야기로 쓰지 않는다. 대신 최악의 파트너를 만났던 경험, 가장 성공했을 때 가장 우울했던 경험 등 예기치 못한 삶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써 내려간다.
백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그는 ‘유머’를 무기로 삼는다. 할머니 대부터 내려온 멕시코 여성들의 시끄럽고 통쾌한 웃음을 자원으로,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조차도 스스로를 조롱하는 농담을 잊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여성의 자전적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에리카 산체스를 서면으로 만났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은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이후 두번째로 한국에 소개되는 책입니다. 원제인 ‘Crying in the Bathroom’을 읽고 많은 독자들은 한번쯤은 화장실에서 울어본 경험을 떠올릴 것 같아요. 어떻게 지은 제목인가요?
사실 바로 그 이유로 고른 제목이에요. 독자들이 공감했으면 했거든요. 욕실에서 울어본 적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테니까요. 제목뿐 아니라 표지 이미지[*2022년 바이킹 출판사 출간 원서 표지*]도 취약함에 대한 공감을 유도합니다. 좀 코믹한 요소도 담겨 있죠. 시뻘겋게 부은 눈으로 욕실 문을 열고 나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런 상황?
작가님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하면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가 실화인가요?’라는 질문이 뜰 정도로, 소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는 작가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소설 출간 이후,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하하, 그런 줄은 몰랐네요. 소설은 완전히 허구이지만 인물 설정은 15살 때의 저였죠. 소설의 화자 훌리아가 저냐고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서사는 대부분 상상이지만 저와 제가 알던 사람들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던 책, 예술작품, 음악 등 아주 많은 것을 조합해서 쓴 소설이에요. 회고록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저 자신과 세상에 관해 드러내어 부딪치고 싶은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을 취약한 자리로 초대해 연결되고 싶었어요. 저는 에세이가 작가의 정신세계에 접속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아해요. 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배우고 싶거든요.
『망가지기 쉬운 영혼들』은 분노와 상처를 대면하고 ‘치유’를 향해 분투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선형적(linear)이지 않습니다. 방황과 좌절, 회복, 그리고 좌절이 이어지는데요. 이것을 특별한 성장 서사라 불러도 될 지 모르겠어요. 과거의 일에 서사의 형태를 부여하는 건 어떤 일이었나요?
저는 시간 개념이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요. 최근에 제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제가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어요. 저는 비논리적 추론(non sequitur)을 아주 잘하는데 이것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뇌가 그런 식으로 작동해서인지, 뭐든 비약적으로 연결하기를 좋아하죠. 사고방식이 선형적이지 않다 보니 그렇게 선형적으로 구조화하는 건 못해요. 우리 선조들에 관해 상상하다 보면 이런 게 시간여행인가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너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십대 시절의 저를 떠올릴 때도 있어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느껴지는걸요. 저는 늘 과거와 미래의 저와 대화를 나눈답니다. 우리는 너무나 다양하게 존재하고 때로는 어지럽게 뒤섞여요. 이 책을 쓰면서는 서사를 주제별로 정리했고, 어떻게 해야 그것들이 전형적이지 않은 서사의 궤적으로 녹아 들어갈지 고민했어요. 부디 잘 되길 바랐고, 결국 잘 되었습니다.
에세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스팽글리쉬(Spanglish)를 보면서 글 자체가 여러 언어가 섞이는 장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드러내는 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어렸을 때 학교에서 학생이 스페인어를 쓰면 혼나거나 벌을 받곤 했어요. 그때는 얼마나 인종차별주의적인 일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요. 이제는 내가 재능이라고 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도록 가르쳤다니 말이에요.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특권을 누립니다. 두 가지 언어를 섞어 쓸 때도 많은데,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죠. 멋진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자신의 상처를 ‘멕시코계 이민자’인 보다 큰 맥락과 연결 짓는 대목을 읽으며, 내 안에서 식민주의와 이민자의 역사를 발견하는 건, 내면화된 억압과 기대, 몸에 대한 강박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즉 모계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내 안의 인종주의와 수치심을 연결하는 건 어떤 일이었나요?
나이가 들면서 저의 타자성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제 선조들과 그들이 겪은 트라우마에 관해, 그리고 제가 양가를 통틀어 가족 중에서 꿈을 좇을 기회를 가진 유일한 여성이라는 사실에 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요. 제가 여기서 책을 쓰고 그 책을 통해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분들이 지녔던 회복력과 독창적인 재능 덕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저 자신뿐 아니라 그분들을 위해서, 가능한 한 제 인생을 즐기려고 해요.
「나의 질이 망가졌던 해」는 여성이 욕구를 드러내는 순간 마주치게 되는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작가님의 말씀대로 라틴계 여성에게, 혹은 한국과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성’은 수치심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수치심을 마주하고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할까요?
섹스가 세상 그 무엇보다 일상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다들 좀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거의 모두가 하는 일인데도 아닌 척한다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에요. 합의 하의 섹스를 비난하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와 관련이 있어요. 종교는 이 일상적인 신체적 행위를 빼앗아 가서는 일탈로 바꾸어 놓았죠. 욕망을 실현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쪽은 여성인 경우가 더 많은 것은 언제나 분명한 사실이고요. 죄다 프로파간다고, 저는 그게 참 지겨워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로 처벌하려 드는 이런 이데올로기에 맞서야 합니다. 언제까지고 맞서 싸워야 해요.
에세이를 읽으며 작가님의 농담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마치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는 듯한 대목들도 있었는데요. 자신의 불행조차 농담거리로 삼는 등 ‘선 넘는’ 불편한 농담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저는 매사에 웃음을 터트려요. 어디서든 웃음거리를 찾아낸답니다. 그게 제가 살아남는 방법이라서 말이죠. 최악의 순간을 돌이켜보다가 거기서 부조리함을 발견하는 거예요. 사는 게 참 힘들잖아요. 제가 웃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요. 둘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저는 전직 스탠드업 코미디언과 결혼하기도 한지라 남편과 온종일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낸답니다. 아주 만족스러워요.
작가님은 외적으로 가장 사회적 성취를 이뤘을 때, 정신질환과 임신중지를 겪어내고 있었음을 쓰셨습니다. 한국에서도 정신질환은 예전만큼 터부시되지는 않지만, 특히 여성은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는데요. 우울의 경험을 쓴다는 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우울증은 사람들의 삶의 의지를 앗아가곤 하는 심각하고도 흔한 질병입니다. 우울증이 존재하지 않는 척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괴한 일이에요.
“유색인 여성의 회복력에 대한 찬사가 주기적으로 나오지만 그 회복력이 갖가지 폭력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사실은 너무 쉽게 외면당한다”(7쪽)고 하셨지요. 최근 한국에서도 『마이너 필링스』, 『H마트에서 울다』 등 인종주의에 균열을 내는 자전적 글쓰기들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실제로 유색인 작가가 글쓰기를 시도할 때 어떤 전략이 필요했는지 작가님의 경험이 궁금합니다.
미국에서 유색인 여성으로서 글을 쓰려면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사회가 우리의 글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도 존중하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죠. 이 백인 우월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그들을 위로해 주고 기쁘게 해 주고 봉사해 주는 존재에 불과해요. 그래도 갈수록 유색인 작가가 더 많이 나타나서 기쁘고, 한국의 독자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연결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이 정말로 벅차네요.
버지니아 울프의 견해에 반대하며 “분노가 없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가 되겠는가”(221쪽)라고 하셨죠. 백인문화에 둘러싸인 유색인 여성으로서, 수많은 분노와 마주하게 되는데 “분노를 돌보”는 일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글로 쓰는 일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분노를 이해하고 예술과 행동으로 승화시키려면 분노가 꺼지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해요. 우리가 겪은 폭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변화의 희망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분노는 불의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지만 여성인 우리가 분노하면 평가와 처벌이 따라오지요. 그렇다고 분노가 제 삶을 지배한다는 말은 전혀 아니에요. 분노는 중요하니 이것을 지켜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번역: 장상미
*에리카 산체스 시인이자 소설가, 이민자의 딸. 일리노이주 시서로의 멕시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이중 언어로 구사하며 자랐다. 일리노이주립대학교와 뉴멕시코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시와 소설 쓰기를 가르쳤고, 현재 드폴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7년에 시집 『추방의 교훈 Lessons on expulsion』을 출간하며 작가의 삶을 시작했다. 같은 해 출간한 장편소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는 멕시코계 미국인 여성의 정체성을 드러낸 자전적 소설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고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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