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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소재가 오컬트스러워도 충분히 SF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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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심령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역사 연구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해주는 학문, 고고심령학. 외떨어진 천문대 한쪽에서 조용하게 연구를 이어나가던 고고심령학자 조은수는 어느 날 서울의 중심으로 호출된다. 갑자기 나타난 성벽, 어떤 디지털 기기로도 기록되지 않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목격되는 빙의된 성벽 때문이다. 성벽을 목격한 사람들의 죽음, 의문의 코끼리, 몇 가지 심령현상이 가리키는 답과 오래된 문헌이 예언하는 대재앙, 조은수를 비롯한 고고심령학자들은 눈처럼 흩어진 사건의 조각들을 저마다의 눈부신 능력으로 한 곳에 모은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다.’ 오래된 언어와 건축, 각지의 장기 규칙으로 들여다 본 세계의 본질을 말 그대로 ‘기록’한다. ‘심령’이 어떻게 ‘학문’과 만나 가장 과학적인 태도로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는지 집중력 있게 따라간다.


「누군가를 만났어」의 고고심령학, 「광장의 아미타불」의 코끼리 ‘아미타브’, 『은닉』에서의 조은수 캐릭터와 작가의 중요한 주인공인 김은경을 『고고심령학자』라는 작품 한 곳에 모은 배명훈은 이 지적인 소설을 통해 혼령, 빙의, 고고심령학이라는 소재가 주는 이미지를 보기 좋게 무너뜨린다. 의미의 확장은 이런 데서 일어난다. 소재가 주는 공포스러움은 합리적이고 냉철한 학자적 접근으로 희석된다. 작가는 증명되지 않는 소재를 증명하는 과학적인 과정 그 자체를 통해 SF라는 장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그러니까 “소재가 오컬트스러워도 충분히 SF”가 되는 것이다. 


작품 해설에서 소설가 정소연은 “배명훈은 또 아주 새로운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책을 덮고 나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작가는 『고고심령학자』로 하나의 전혀 다른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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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충분히 SF다


‘아주 새로운 소설’이라는 정소연 작가의 해설, 어떠셨어요? 여기에 이어지는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다’라는 작가의 말도 교묘한데요.

 

되게 좋은 이야기 같아요. 전에는 제가 쓴 걸 평론가 분들이 리뷰하는 데 성공 못 하시는 경우가 있었어요. 아직까지도 있긴 한데요. 그것을 ‘내가 SF를 쓰니까, 작법이 익숙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거든요. 최근에 느낀 건데 SF 작법과는 다른 문제 같아요. 정소연 작가님이 하신 말씀도 그 이야기예요. SF에도 규칙 같은 게 있고, 무엇을 읽으면 된다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고고심령학자』는 그것도 아닌 새로운 소설이었다는 거였죠. 좋았어요. 한편 불편하긴 하고요.

 

불편하다고요.


계속 해석이 안 되니까요. 작품만 있고, 독자 리뷰만 있고, 중간에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없잖아요. 다른 작가들은 그게 있으니까 부럽죠. 처음엔 진짜 작법 때문인 줄 알았어요. 문단에서는 인물 중심으로 많이 보니까 그래서 계속 세계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건 지금도 유효한 것 같긴 해요. 제가 SF 작가 중에서도 세계 부분을 좀 더 강조하는 것 같거든요. 결국 SF를 떠나서 제 소설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도 들어요.

 

외로운 작업이겠어요. 눈 밝은 사람이 제대로 읽어내 주면 좋을 텐데요.


그렇죠, 해석이 나와야 완성이 되잖아요. 독자 리뷰도 그 역할을 분명히 해요. 하지만 그것 외에 비평의 영역이 있는데 그 영역에서 완성이 안 되니까요. 제가 하는 작업이 축적이 잘 안 되는 느낌이에요. 물론 여러 권 쌓이면 어쩔 수 없이 축적은 되죠. 그런데 작가가 어떤 새로운 것을 개척하면 비평이 따라와서 그만큼 영역이 확장되는 거잖아요. 그게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독자나 출판계가 보기에는 저 혼자 쭈뼛쭈뼛 나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 느낌은 그렇진 않거든요. 중력 이야기를 한참 다뤘어요. 그건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해요. 『청혼』, 『첫숨』, 『예술과 중력가속도』같은 작품에서 제 나름으로는 발전하면서 연습을 하고 있던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나올 때마다 산발적으로 읽혀요. 좀 아쉽죠. 정소연 작가님이 해주시면 좋은데 바쁘셔서요.(웃음)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셨는데요. 이 작품은 SF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대답처럼 읽혔거든요. SF가 무엇인지 다시 질문하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제게는 SF가 도구 같아요. SF를 몇 년 해온 분들한테는 그분들이 옛날에 읽은 SF를 다시 재현해내는 게 중요할 거예요. 당연해요. 좋은 외국 소설을 읽었던 분들은 그걸 한국적으로 재현해내는 게 중요한 목표죠. 순문학이든 SF든 마찬가지로요. 그런데 저는 그런 욕망은 전혀 없어요. 쓰고 싶은 걸 쓰는데 그게 SF가 되는 경우였거든요. 세계에 대해 쓰니까 SF랑 잘 맞는 거죠. 보면 소재를 SF적으로 개발해서 그 소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하는 게 SF를 잘 쓰는 것 같은데요. 그게 맞기도 하지만 조금 아쉬워요.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면, 올해 같은 경우 인공지능 이야기가 엄청 많아지는 거예요. 공모전 심사 같은 걸 해보면 그래요.

 

보통 독자들도 SF라고 하면 떠올리는 소재들이 있어요.


제가 데뷔하던 2005년 정도에는 생명공학 이야기가 엄청 많았거든요. 황우석, 그 영향이었겠죠. 소재가 던져지고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제 질문은 제가 던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대답할 질문을 내가 던져서 대답하는 것. 그러다보니까 약간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 쓰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고 있는 공통의 질문도 있겠죠. 가령 페미니즘 같은 것은 모두가 하고 있고, 저도 하고 있고요.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다른 것들도 있는 거죠.

 

『고고심령학자』로 논의를 가져와보면 어떨까요? ‘고고심령학’이라는, SF와는 가장 멀어 보이는 소재를 다루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이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죠. 이 소재와 태도의 배반이 굉장히 흥미롭거든요.


보통 SF가 과학소설이라고 하는데요. 그 ‘과학’이라는 부분이 사회과학이어도 되는 거고요. 인문학이어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쓰면 못 알아봐요. 보통은 자연과학이나 공학 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물리학이나 천문학 쪽, 그런 거예요. 그래서 하드SF를 쓸수록 좋은 거라고 믿는 사람도 많죠. 물론 활동하시는 작가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있고요. 제 경우는 사회과학 내지는 인문학에서 이야기하는 과학적인 접근 방법, 그것에 집중해서 쓰기만 하면 소재가 오컬트스러워도 충분히 SF다, 라고 생각해요. 사실 SF를 쓰겠다고 쓴 건 아닌데요. 정소연 작가님의 해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게 그런 부분인 거죠. 충분히 SF로 읽힐 수 있다, 는 이야기 말이에요.

 

과학적인 접근 방법이라는 태도는 작가의 작품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에요.

 

『타워』에도 계속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게 SF적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식으로 도달하는 것, 그 부분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저의 SF는 이것과 세계 부분이고, 그것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굉장히 지적인 소설이거든요. 이 작품의 세계관에 진입하기 전에 겪는 당황스러움이 있긴 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무척 설득력이 있고 몰입하게 만들어요.


저도 걱정스러웠어요. 걱정이 돼서 주변에도 물어봤거든요. 좀 아카데믹한데 어렵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데 오히려 우주가 안 나와서 쉽대요.(웃음) 보통 독자들은 우주나 로봇이 나오면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설정하잖아요. 거기 빠져드는 게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SF 독자는 그게 재미있어서 SF 독자인 거고요. 그런데 이 소설은 그건 아니잖아요. 물론 혼령이 나오긴 하는데 그건 보통 사람들이 그냥 이 세계에 포함시켜주는 무엇 같아요. 그것 외에는 다 현실의 연장선이라 웬만큼 어려워도 읽혔던가 봐요. SF 독자는 이 소설에 대해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요소가 귀신이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는데요. SF 독자가 아니던 분들은 그래서 안 어렵더라, 라고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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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에 관한 이야기


오래 구상하고 쓴 소설이에요. 준비기간이 거의 8년 정도라고요. 이런 이야기를 쓰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있었을 텐데요.


처음 구상 당시 가제는 ‘벽’이었어요. 그동안 성벽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한참 했었는데요. 원래 『신의 궤도』 다음에 이걸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신의 궤도』가 나온 후 느낌이 ‘문학계에서 소화가 안 됐다’였어요. 좀 아쉬웠어요. 일단 이런 걸 또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다음에 『은닉』이 나온 거예요. 그때 『고고심령학자』를 냈으면 무척 다르게 받아들여졌겠죠.


『신의 궤도』가 나온 게 2011년이니까 그때부터 성벽을 보고 다녔어요. 『신의 궤도』에도 스페인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요. 스페인에서 이것저것 보고 다닌 것 중에 성벽도 있거든요. ‘아빌라’가 그래요. 그곳에 중세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데가 있거든요. 성벽 안에 구시가의 도시들이 있고요. 좋아하고, 관심이 많았어요.  

 

나름대로의 필모를 생각하셨던 거군요.


그때는 이런 타이밍에서는 『신의 궤도』같은 것을 계속 낼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꼭 문단 쪽에 맞춘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한 번 씩 왔다 갔다 하면서 쓴 거죠. 『청혼』같은 것도 내고 했으니까요. 제 나름대로는 엄청 신경 써서 안배를 했던 것 같아요. 제 독자의 지형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그때 깨달았고요.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두 개 이상의 독자 군에 걸쳐 있다는 걸 알았는데요. 사실 되게 좋은 거죠. 그런데 조금 힘들긴 했어요.

 

그런데요. 성벽에 매료된 건 어떤 이유였을까요?


예전에 한 다큐를 봤어요. 파리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하는데요. 와인 저장실 한쪽 벽에 옛날 성벽이 있었다는 걸 알고 그냥 놔둔 게 있었어요. 그런 걸 발굴하러 다니더라고요. 너무 재미있잖아요. 우리는 그런 게 없나, 했는데 있더라고요. 형태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고요. 청계천 파면서 나온 흔적들을 종로에 가면 그대로 볼 수 있잖아요. 가로망, 길 같은 것은 조선 시대에 내놓은 것이 그대로인 곳들도 많아요. 성벽이 있던 자리도 그렇고, 성벽 안쪽에 사는 사람들과 바깥에 사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재미있더라고요. 많이 보고 다녔어요. 유럽도 가면 구시가에 가서 성벽 흔적 보러 가고요. 좋더라고요.

 

성벽의 역사성, 특징 등에서 비롯한 작가의 가설과 그걸 풀어나가는 소설의 방식이 아주 흥미롭거든요.


서울 역사 부분은 공부를 했어요. ‘참여연대’ 같은 곳에서 하는 강의도 들으러 가보고요. 오랫동안 공부를 한 거죠. 이중 도시 이야기도 그때 듣고요. 영국이 델리에서 한 것을 보고 일본이 서울에서 하려고 한 건데요. 식민지 도시를 그렇게 잘 만드나 봐요. 원래 도시를 고사시키려고 옆에 더 큰 도시를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런데 일본은 영국만큼 부자가 아니었고요. 용산에 만들려다가 홍수 때문에 철수를 했어요. 그렇게 공부한 이야기들을 썼어요. 여기엔 별로 안 썼는데 타이페이가 좋은 연결고리거든요. 서울이랑 굉장히 비슷해요. 그곳과 비교하면 서울이 이런 도시구나, 하는 게 보여요. 타이페이는 전에 「타이페이 디스크」라는 단편으로 쓴 적이 있어요. 계속 이 책으로 가기 위한 소재 같은 이야기는 쓰고 있었죠.

 

살펴보니 다른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것들이 있더라고요. 고고심령학이라는 소재도 『안녕 인공존재』에 수록된 『누군가를 만났어』에 등장하고요. 여기 등장하는 코끼리 ‘아미타브’도 『타워』의 「광장의 아미타불」에 나와요. 하나의 작품이 닫힌 텍스트가 아니게 된다는 점이 재미있어요.


여기 나오는 조은수는 『은닉』에 나온 그 조은수 캐릭터고요. 김은경도 딱 은경이 방식으로 나오죠. 열려있죠. 그러니까 이게 『신의 궤도』뒤에 나왔으면 사람들이 다 알아봤을 텐데 지금 나와서 잘 못 알아봐요.(웃음) 아쉽지만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겠어요. 제가 발표하는 지면 중에는 문예지 지면도 있고, <과학동아>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걸 동시에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단편집을 많이 내고 싶어 하는 편이에요. 묶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부분은 없었나요?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어서 연결에 고심하시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이야기 구조는 5년 전에 완성된 거예요. 공부를 엄청 많이 했고, 계획한대로 썼죠. 고무줄 노래 부분은 원래 없었는데 넣었고요. 원래 다른 데 넣으려고 연구하고 있던 건데 딱 맞을 것 같아서 넣었어요. 장기 부분, 서울이 이중 도시라는 부분이 있었고 이것을 고고심령학으로 파고들겠다는 구상은 딱 있었고요. 천문대는 우연히 가게 되면서 들어왔어요. 천문대 귀신 이야기 진짜 있는 거거든요.(웃음) 거기에 고무줄 노래 이야기까지 넣어서 완성이 됐죠. 사실 그건 안 힘들었는데요. 막상 구체적으로 쓰려니까 더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채워 넣는 게 힘들었어요. 원래 고고심령학자 소재는 『타워』의 ‘빈스토크’ 소재와 함께 한 30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데요. 시리즈물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너무 힘들게 써서요. 잘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거의 하나의 학문 전체를 연구한 느낌이라서요. 힘들었다는 말이 뭔지 확 전해지네요.


네, 고고심령학 자체가 힘든 건 아니었어요. 사실 『누군가를 만났어』전에도 쓴 단편이 있어요. 그걸 개작한 게 『누군가를 만났어』라서 벌써 처음 생각한 고고심령학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면이 있죠. 이번에는 방향을 많이 바꿨지만요. 고고심령학은 괜찮았는데 서울 관련 이야기도 그렇고 힘들었죠. 편집자 분이 힘드셨어요. 사실 관계를 다 확인하느라고요. 장기 규칙도 다 확인해야 하고 그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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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김은경


‘새로 눈이 오지는 않았지만 정상으로 가는 길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잖아요. 저는 이 눈 이미지를 따라 책을 읽었는데 이것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랬군요. 그건 사실 일부러 계획한 건 아닌데요. 눈 이야기가 많이 나온 건 제가 소백산 천문대에 있었기 때문이에요.(웃음) 석 달 간 일주일 씩 왔다 갔다 했거든요. 매일 산책을 갔어요. 천문대도 거의 꼭대기인데 조금 더 올라가면 ‘연화봉’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거기는 눈이 계속 쌓여있었거든요. 눈 구경 엄청 많이 했죠. 눈에 찍힌 토끼 발자국 같은 것도 거기서 본 거고요.


눈 이야기를 아주 오래 전에 쓴 적이 있어요. 늑대 이야기인데요. 그 세계에서 메시아처럼 내려오는 눈송이 하나가 있었어요. 그때 또 공부를 했었죠. 눈 결정 관련된 책 보면 정말 예쁘잖아요. 같은 모양의 눈송이는 하나도 없고, 전문가는 눈송이를 보면 대기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고, 그런 내용들이었어요. 그런 내용이 담긴 거예요.

 

그 작품은 어디 수록 됐어요?


발표 안 했어요. 데뷔하기 전에 쓴 거예요. 데뷔 전에도 한 달에 한 편 씩 썼거든요. 대학원에서 논문 쓸 때도, 회사 다닐 때도 그 속도로 썼어요. 저는 썼던 걸 계속 붙들고 고치는 편은 아니고 새로 쓰는 편이에요. 그러면 좋은 점은 작품이 계속 남는다는 거고요. 지금도 습작할 때처럼 청탁 없이 쓰고 싶어서 쓰는 걸 많이 하거든요. 예전처럼 많이는 못하는데 하려고 노력해요. 청탁 받고 쓰면 재미가 없어져요. 그냥 쓸 때는 정말 재미있거든요. 사실 한 달에 한 편이 그렇게 빠른 편인지 몰랐어요. 직업으로 할 거라고도 생각 못했죠. 어쩌다보니, 『타워』때문에 전업 작가가 된 것 같아요.

 

한국 작가로서 한국어로 작품을 쓴다는 자각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해오셨어요. 이번 작품은 그런 면에서 분명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제는 독자들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한국인이 주인공인 SF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변화를 느끼세요?


많이 바뀐 것 같아요. 특히 원래 SF 안 쓰시던 분들이 SF를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많이 느끼죠. 그 문제가 해결이 된 거예요. 김중혁 작가님의 『나는 농담이다』가 그렇죠. 우주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한국 사람이 나오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SF 작가들도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데요. 그게 축적이 되어서 이제 안 어색하게 된 거겠죠. 요즘도 한국 사람이 백인 남자 주인공처럼 움직이는 경우도 있어요. 많이 있죠. 그런데 계속 그것만 하고 있었다면 다른 영역의 창작자들이 쓰지 않았겠죠.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고 느껴요. 생각보다 폭 넓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트위터에서 한국 사람이 백인처럼 움직이는 걸 두고 <서프라이즈> 보는 기분이라고 하기도 했잖아요.(웃음)


맞아요, 진짜 그래요.(웃음) 실제로 많이들 써요. 활동하고 있는 SF 작가들은 안 그렇거든요. 공유하고 있는 것도 있고요. 비평은 없지만 동인 정도의 뭔가는 분명히 있는 거죠. 그런데 공모전 같은 데 나오는 글들은 전혀 달라요. 우리가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미국 사람처럼 쓰고, 사람들이 <서프라이즈>처럼 나와요. 제일 충격적인 건 섹스로봇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건데요. 그 부분이 너무 안 좋아요. 그래도 다 극복했다, 우리는 다 페미니즘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문단에서 문제되고 있는 강간 소설, 딱 그 구조잖아요. 남자 일인칭 주인공의 캐릭터를 확보하려고 고통 받는 여자를 만드는 거죠. 그런데 SF에 돌파구가 있던 거예요. 섹스로봇을 넣으면 인간 여자를 강간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하나 봐요. 그래서 심사평에 ‘절대 그거 아니다’라고 썼어요.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도 애써 많이 하시죠. 심지어 『고고심령학자』에는 주인공들이 모두 여자예요. 주인공 김은경은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애써 얘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특히 SF 쪽에는 남자들이 전문가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거든요. 그걸 여자 작가들이 더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올해 많이 바뀌었고요. 소설 안에서도 물론 그렇죠. 어렸을 때 잘 배운 덕분인데요. 외교학과를 나왔는데 제가 다닐 때만 해도 여자 비중이 점점 높아져서 40% 정도 됐었어요. 지금은 여자가 훨씬 많고요. 그런 변화를 하던 과여서 1학년 때부터 페미니즘을 많이 배웠어요. 제가 주인공을 은경이로 한 것도 그래서였을 거예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으면 여자로 주인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다행이었죠.

 

예전 『예술과 중력가속도』출간 기념 행사에서 김은경을 계속 쓰겠다고 말하기도 했잖아요. 함께 나이 먹는 인물로 말이에요.


은경이를 은퇴시킨 것 같은 때가 있었어요. 그게 많이 걸렸었는데 계속 쓰겠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계속 은경이가 나오고 있어요.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에 수록된 「외합절 휴가」가 그 다짐 후 처음 나온 중편이에요. 거기서는 은경이가 오랜만에 나와서 조금 어색해요.(웃음) 『고고심령학자』에서는 능숙하죠. 잘 되고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려고 해요. 저는 젠더 경험이 있는 건 아니고, 다른 여자 작가들이 쓰는 부분을 쓸 수는 없잖아요. 사실 제가 쓸 필요까지도 없고요.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는 거죠. 그게 중요하겠더라고요. 꼭 남자여야 하는 게 아니면 여자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해도 된다는 걸 자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고고심령학자』의 여성 인물들이 주는 의미가 크죠. 각각의 인물뿐만 아니라 인물 간 관계도 전에 없던 모습들이에요.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여자들끼리의 동료애를 정세랑 작가님이 되게 좋아하셨어요. 근데 별 게 아니잖아요. 같이 일을 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리고 이 책에서는 아무도 연애를 하지 않아요. 그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였는데요. 여자 등장인물은 연애를 하는 순간 캐릭터가 이상해져요. 묘하더라고요. 전혀 안 해야 되겠더라고요. 심지어 저는 외형 묘사도 거의 안 하거든요. 그것 역시 페미니즘에서 배웠던 것과 같은 거예요. 외모를 평가하면 안 되는 거란 얘기를 오래 들어서요. 그게 저한테는 맞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고고심령학자』를 읽었으면 하는 의외의 독자가 있나요?


주요 타깃은 대학원생이 되지 않을까 했어요. 제일 좋아할 것 같아요. 너무 유능한 사람들이 나오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무협지 같은 거라고 할까요. 고수들이 나와서 하는 걸 보는 느낌이긴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재미있을 것 같긴 해요. 그런 분들이 많이 보셨으면 좋겠는데 바쁘시겠죠?(웃음) 이 책은 잘 팔리고 반응이 좋아야 후속편을 쓸 수 있을 텐데요. 안 그러면 사실 너무 힘들어서 후속을 써내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거든요.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요.

 


 

 

고고심령학자배명훈 저 | 북하우스
“고고심령학은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학문이 아니었으므로 박사학위 같은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심령학적인 관찰을 통해 고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학문. 고고심령학은 대강 그렇게 정의되는 학문 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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