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문학이 같이 붙어 있었던 유럽 중세 음유시인의 노랫말, 구비문학으로 떠돌던 이야기가 정착해 기록이 된 이야기들, 인쇄술의 발달로 나타난 소설……. 시간에 따라 시대의 요구와 문학을 담는 그릇이 변화하면서 문학의 외양도 달라졌다. 초단편 소설, 엽편 소설, 모바일 소설, 스마트 소설 등이 나타난 연유도 ‘시대의 부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12년에 계간 <문학나무>가 제정한 ‘스마트소설 박인성문학상’의 첫 번째 수상 작가 주수자는 1976년 20대 때 한국을 떠나 프랑스, 스위스, 미국을 거쳐 성인 시절을 보냈다. 외국 여행도 흔치 않던 시절, 객관적으로는 화려한 삶이었지만 ‘일종의 유배 같은 경험’이었다. 199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2001년 소설로 등단했다. 오랜 시간 한국어를 잊고 지냈지만, 뿌리내리지 않은 채 유랑한 과거가 결국은 문학적 뿌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여러 소설 중 16편의 스마트소설을 모은 최근작 『빗소리 몽환도』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하이브리드 소설가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오셨다고요.
제 배경에 하이브리드(hybrid)가 많아요. 경계에 있는 사람이에요. 프랑스에서 아들을 낳고, 스위스에서 딸을 낳았어요. 한국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소설을 써요. 소설로 등단했지만 시를 더 좋아하고 시인하고 어울려요. 국적도 미국이었는데 버렸어요. 한국 사람이냐 하면 뿌리는 다른 곳에서 만들어졌죠.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왔지만 실제로는 좌파와 어울리고요. 이상한 두 가지 지점이 나한테 있어요.
이제까지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겪었던 경험이 경계인을 만든 걸까요?
환경이 나를 만든 건지, 나라는 사람이 원래 그런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금방 등단했다고 나와요.
돌아와서 <기독교 사상>에 번역 글을 기고했어요. 조사 같은 한국어 감각이 부족해서 소설가 선생님에게 자문했는데, 저보고 번역보다는 소설을 쓰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우연히 첫 번째 소설로 등단하게 됐고요. 최윤 소설가나 김혜순 시인과 친하다 보니 솔직하게 저한테 조언을 해줘요.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해서 우리 집에서 독서회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다시 문학을 알게 됐죠.
책 끝에 ‘너무 뒤늦게 우리말을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쓰셨어요.
성인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지 않아서 그런지 제가 어른답지 않다고 그러더라고요. 돌아와 한국어를 쓰려니 특이해요. 이방인처럼 떠돌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후 우리말의 귀중함과 아름다움, 우리 문화와 정신의 고유함을 알게 됐어요. 요즘 한글, 훈민정음에 대한 서사시와 희곡을 쓰고 있어요. 한글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놀라요.
다른 나라의 문학에 영향을 받기도 했나요?
영향을 받은 작가는 있어요. 보르헤스는 현대판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해요. 책으로 만난 스승이죠. 『보르헤스 그리고 창작』이라는 책도 낸 적이 있어요.
시대가 만드는 소설
스마트소설 박인성문학상의 첫 번째 수상자이시죠.
스마트소설은 원고지 기준으로 7매, 15매, 30매 등 짧은 분량으로 쓰는 소설 장르에요. <문학나무>에서 원고 청탁을 받았었어요.
기존 소설과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개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시대가 규정하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작년에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탄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림원에서 우리 시대에는 장르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페이스북, 알리바바, 예스24만 봐도 이전의 시대에는 없던 거잖아요. 20세기 초에 근대 소설이 나왔을 때, 그 시기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시대를 사는지 몰랐을 거예요. 여러가지 변화 중에도 가장 가까운 구조가 변하면서 내용이 변해요. 그럼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뭘까요, 한마디로 하면 스피드라고 생각해요. 정말 많은 사람이 『태백산맥』을 읽고 싶다고 생각해도 읽을 시간을 마련하지 못해요.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 보니 짧은 소설을 원하게 될 거라는 건가요?
만약 어떤 사람에게 5분간 설명해서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50분이나 5일을 붙잡고 이야기해도 못 알아 들을 수밖에 없지요. 짧은 내용 속에도 함축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을 수 있어요. 문학 하는 입장에서는 길게 쓰는 게 재미있죠. 구조를 가진 사람, 문학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변하지 않아요. 독자가 변하죠. 짧은 소설은 소설가가 노력하고 운동한다고 정착되지 않을 거예요. 요구가 있다면 독자가 저절로 선택하겠죠. 이미 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미니픽션을 실험했었고, 스마트소설은 인터넷이 보급된 세대에 맞게 한국화하고 새롭게 명명한 것뿐이에요. 이름을 붙였다고 이런 장르, 저런 장르 나누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근원적으로, 소설은 소설이죠.
보통 모바일을 염두에 둘 것 같은데요. 모바일에서 보는 이야기는 가벼운 내용을 위주로 쓴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렇게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해요. 다양한 소설이 나오는 건 좋죠.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스마트 소설은 짧게 이야기하면서도 통찰을 주고 깊이가 있어야 오래 생명이 유지된다고 생각해요. 문법이 난해하다는 말이 아니라, 철학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붕괴돼요. 만약 시인이 이렇게 쓴다면 소설가보다 오히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스마트 소설이라는 이름은 살아남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소설은 짧은 형태가 대세가 될 것 같아요.
지금 문학 형식도 시대정신이 만들어냈다고 보시나요?
큰 시대를 꿰뚫는 정신이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 문학은 사실주의가 지배적이었어요. 전쟁을 겪고 생존이 너무 절박했기 때문에 사실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우주시대로 가면 SF가 늘어날 수도 있겠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갈지는 누구도 몰라요.
작가님 문학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나요?
다른 소설가와 다를 바 없어요. 삶에 관해, 인간이 누구이고 삶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여기에 왔나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변용이겠죠. 예술은 근원적인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거든요. 그런 근원적 질문 없이 문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세상에 태어났으면 누구나 다 질문이 있어요. 그 질문 때문에 신학교도 간 거죠.
우리 세상도 사실은 환영이구나
『빗소리 몽환도』에 서양화가 장성순 화백의 그림이 같이 나와요.
유명한 분인데, 상복이 없으셨어요. 제 이모부기도 하셔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받아올 수 있었어요. 색이 너무 아름다운 작품들이라 일부러 편집할 때 흑백으로 넣었어요. 이미지와 문자가 충돌하면 이미지가 너무 막강하니까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은 백남준을 추모하는 내용입니다. 이전 세대 예술가에 대한 오마주로 봐도 될까요?
사실 그렇게 쉬운 사람은 아니에요. 들고양이가 이야기하지만 호랑이 심장을 가졌던 사람이죠.
16편 중 가장 아끼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놀이공원 무유위유」요. 한 달에 한 번씩 롯데월드 근처 커피숍에 가는데요, 위에서 쳐다보면 저는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지만 놀이공원에서 노는 사람들은 저를 못 보더라고요. 어느 날 매니저처럼 보이는 사람이 와서 구두약으로 바위를 닦더라고요. 가짜 바위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한 거죠.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기차가 인생처럼 돌아가는 데 그게 너무 이상해 보였어요. 그래서 우리 세상도 사실은 환영이구나, 너무 아름답지만 초월해서 보면 모든 것이 우스워지는 거죠.
대표작 「빗소리 몽환도」는 연극으로도 제작됩니다.
전기광 연출가가 일 년 반 전쯤 작품을 보내달라고 해서 「빗소리 몽환도」를 보내줬었어요. 희곡으로 만들어달라고 하길래 난생처음 또 희곡을 써 봤죠. 희곡은 정말 모르는데 이미지만 가지고 열심히 썼어요. 입말이 부족한 건 연극 하는 사람들이 메꿔 주고요.
책으로 묶인 걸 보면 만족하는 편이세요?
예스 앤 노(yes and no)죠. 『빗소리 몽환도』에서부터 문체를 바꿨어요. 소설이 자기를 풀어내고 상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결국 통찰을 위한 것이구나 싶어서 드라이하게 쓴 편이에요. 저를 벗어나기는 어려운데, 감상적인 사실주의는 벗어난 것 같아요.
빗소리 몽환도주수자 저 | 문학나무
작가는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과연 있는 그대로 그 세계인가, 또 어디까지를 현실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의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한계와 확장성을 사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