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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 “나는 지나간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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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한 방송을 통해 등장했으니 '작은 거인'의 음악이력도 어느덧 40년의 장구한 세월을 쌓았다. 김수철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40년 개인사를 '온리(Only) 자존심'으로 축약해 정리했다. 한창 때 빅 히트한 '못다 핀 꽃 한 송이'나 '내일' 같은 가요를 써서 스타가수로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미련하게도' 주류의 환대를 거부하고 돈 안 되는 국악의 길, 청년 시절의 포부였던 그 고난의 길로 내달려간 인물이다. '불림소리' '기타산조' '국악가요' 그리고 1993년의 대박 영화음악 < 서편제 >는 우리 기억 속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

 

40주년을 맞아 펴낸 다큐 자서전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이야기』 출간에 맞춰 이즘과 만난 그는 '40년을 그냥 넘길 수는 없어서..'라며 출간 이유를 전했다. 인터뷰에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구촌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고, 또 우리만의 혼과 숨결로 이뤄진 음악을 꼭 쓰겠다는 야망으로 지금도 정열을 불태우고 있음을 수차례 강조했다. 서양음악에 포위되어 고유의 문화가 척박한 실정이지만 '나라도 우리의 것을 세계에 알리자'는 게 꿈이자 자존심이며 그것 하나로 버틴다고도 했다. 진지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재미있게 자리를 이끌어 가만히 듣기 힘들 정도로 웃음꽃이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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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에서 김수철씨 책이 화제다. 책이라니 좀 갑작스럽다.


원래 떠벌리고 다니는 거 싫어한다.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나오지 않은 작업에 대해 미리 얘기하지 않는다. 정직한 게 최고다.

 

거의 모든 언론이 소개하고 있다.

 

40년의 세월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책을 썼는데 의외의 반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젊은 그대'나 '못다 핀 꽃 한 송이처럼' 제 작업 결과물을 좋아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1977년 첫 방송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꼭 40주년이다. 공연은 30주년에 한 번, 그 이후로 안 했다. 그렇다고 이번 40주년을 그냥 지나가자니 아쉬워서 좀 다른 걸 해보자 싶었다. 책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실은 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곤 했다. 다들 내 나이 즈음엔 근황도 알릴 겸 책을 낸다며 꼬시더라. (웃음) 처음엔 계속 거절했다. 일단 글은 말과 달리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중 어느날, 오랜 지인인 까치 대표와의 만남중에 '책 낼래?' '아, 네. 그래요.' 이런 식으로 거침없이 진행됐다. 외골수에 잔재주 안부리고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흥행과 상관없이 한 길만 평생 걷는 내 스타일과 맞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가. 인간 김수철? 아니면 김수철의 음악세계?


구체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기보다는 나의 행적을 보여주고자 했다, 나야, 음악행적밖에 더 있겠나. 일종의 보고서 형식으로 썼다. (이 대목에서 대필 아니냐고 물었더니 온전히 내가 썼다고 답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제가 국악도 했고, 강의도 많이 했다. 1992년, 학전 소극장에서 < 김수철의 음악 이야기 >라는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열흘 동안 총 22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토크 콘서트라는 말이 없었으니 내가 효시 아닐까 한다. (웃음) 한 강의 당 게스트 한 명을 섭외해서 진행했다. 안성기, 배창호감독, 한영애 등등. 전회 매진이었다. 2010년 서울대학교 법대교수 대상으로 강의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대중 상대가 아닌 사회를 이끌어가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우리의 문화와 대중음악의 흐름을 알리고 싶었다. 다섯 번 기립박수를 받았다. 슈만 음악대학교에서 강의한 적도 있었고. 이번 책 출간과 함께 토크콘서트를 할 의향이 있다.

 

직접 다 쓰는데 힘들지는 않았나.


열 달 꼬박 걸렸다. 휴휴∼ 엄청 힘들었다. 이야기 앞, 뒤를 맞추려면 어떤 일이 언제, 몇 시, 어디서 있었는지 세세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자꾸 빠뜨리니까 출판사에서 뭐라고 한다. 오죽하면 1988년 서울 올림픽 전야제 음악을 맡았을 때 회의록까지 다 뒤졌겠나. 내가 자료를 남겨놓았으니 다행이지. 언제는 '그냥 이거 빼요.' 하니까 '이걸 왜 빼요?' 하며 야단치더라. 출판사가 갑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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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음악적 행보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해 알려 달라.


옛날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렸을 때 라디오 켜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평소에 들리지 않던 노래가 갑자기 확 귀에 들어오는 거다. 그러던 차에 흑백 티브이에서 그때는 그룹사운드라고 했는데 여러 밴드들이 나왔다. 가수보다 밴드 전체, 특히 기타에 관심이 가기 시작해서 기타리스트 손가락 모양을 외우고 아버지 없을 때 몰래 통기타를 건드렸다. 그 시절에 통기타 없는 집이 없었다. 장식용이든 뭐든. (웃음) 처음엔 소리가 안 났다. 몇 달 동안 소리가 날 때까지 치고 또 쳤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당시에는 기타교본 같은 것이 없으니 그냥 기타의 어떤 한 음을 내 마음대로 '도'라고 정했다. 거기서부터 음계를 맞춰갔다. 티브이를 보고 외운 것처럼 왼쪽에서 몇 번째 마디, 몇 번째 줄 이렇게 치기도 하고. 일일이 도레미파솔리사도를 쳐 가면서 노래의 다음 음을 찾아갔다. 어느 날 친구들 앞에서 연주했는데 친구들이 막 웃더라.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손을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연주를 하는데 나는 기타 처음부터 끝까지 건드리면서 왔다 갔다 하니까 이걸 신기해 했었다. 그제야 옥타브를 알게 됐다.

 

기타를 독학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통기타로는 한계가 있어서 이후 전자 기타를 잡고 CCR(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비틀스 위주로 연습했다. CCR이 코드는 단순한데 기타 애드립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는 때려치우고 거의 기타만 쳤다. 아버지께서 음악 하는 걸 싫어하셔서 들키지 않으려고 새벽에 이불 속에 들어가서 기타 줄에 종이 껴 놓고 연습했다. 그래서 한석봉 아닌 '김석봉'으로 통했다. (웃음)

 

그럼 청소년기는 오로지 기타로만 보낸 것인가.


고등학교 가서도 기타만 쳤다. 딥 퍼플의 'High way star' 솔로를 치니까 애들이 뒤집어졌다. 동네 여기저기에 내가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이 나니까 한 번은 명동성당에 불려갔다. 명동 성당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문화축제를 하는데 거기 청소년부 애들이 자꾸 신부님한테 나를 불러달라고 했다. 왜 시끄러운 록을 하는 나를 부르나, 싶었고 신부님도 성당과는 맞지 않는다고 하시길래 '그럼 안 할래요' 이랬다. 로커랍시고 반항한 거다. (웃음) 신부님께서 조용한 음악을 원하시길래 처음엔 블루스를 치다가 첫 곡만 조용하게 하고 그 뒤부터 슬슬 시동 걸고 시끄러운 하드록을 했다. 신부님이 깜짝 놀라시더라.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꽝꽝거리면서 소리 지르니까 거기 계신 분들이 다 벌떡 일어섰다. 근데 또 애들은 좋아하지 않겠나… 뭐라고 하실 수도 없는 거다. 한 5곡정도 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다. 무대가 다 끝나고 신부님이 부르시길래 '아, 죽었다.' 싶었는데 다음에 또 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거다. 가만히 못 있고 거기서 또 반항했다. '저희 2회는 안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냥 계속 할걸. (웃음)

 

대학 들어간 직후 1977년에 첫 방송을 탔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대학에 들어가서 퀘스천(Question)이라는 대학생 밴드를 만들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때 기타 좀 친다는 소문이 대학가에도 퍼지고 방송국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KBS TV <젊음의 찬가>에 나와서 연주 좀 해줄 수 없겠느냐고. 여의도까지 갔는데 악기가 전혀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낑낑거리면서 우리가 악기를 다 가져가고 세팅까지 했다. 옛날에는 뮤지션이 모든 악기 옮겼다. 그때 직접 작사, 작곡한 '내일', '야속한 사람아'를 불렀고 닐 영의 'Down by the river'을 버디 마일즈(Buddy Miles) 버전으로 연주도 했다. 이게 데뷔였다.

 

<작은 거인>으로 밴드가 바뀌게 된 이유는.


원래 퀘스천으로 <MBC 대학가요제>에 나갔다가 1차 예선에서 떨어졌다. 당시에는 고고음악이 유행했었는데 나는 기타로 소란스런 헤비메탈을 하니 심사위원들이 바로 나가라고 하더라. 딱 한 음밖에 안 쳤는데…. 며칠 뒤에 친구들이 한 번 더 도전해보자고 <TBC 해변가요제>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대학가요제에서 당한 경험이 있으니 명동성당에서 썼던 방법을 택했다. 도입부를 조용한 블루스로 연주하고 후반에 헤비메탈을 했다. 2차까지는 어떻게 붙었는데 결국 떨어졌고 퀘스천은 그렇게 끝났다. 그 이후 1978년 겨울에 작은 거인이라는 밴드를 만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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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TV에서 본 작은 거인의 연주 '일곱 색깔 무지개'는 잊을 수 없다. 그런 광포한 무대는 전에 보질 못했으니까.


맞다. 그 노래가 1979년 <TBS 대학축제 경연대회>에서 불렀던 곡이다. 해변가요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날 유심히 봤는지, 어느 날 연락이 와서 대학축제 경연대회에 참가하라는 제안을 했다. 대학가요제도 그렇고, 해변가요제에서도 1절까지만 부르고 탈락해서 조금 삐져 있었다. (웃음) 이번에는 2절까지 다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애초에 사전 심사로 진행되고 생방송 기회까지 준다고 하기에 냉큼 나갔다. 거기서 '일곱 색깔 무지개'로 동상을 받았다. 경연대회에서 떨어진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작곡에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동요로 작곡하고 편곡은 록으로! 처음부터 록을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어법으로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맞겠지만 색의 영원성을 담고 싶어 굳이 '색깔'로 한 것이었다. 젊은 층에는 어필했다.

 

1983년에 첫 솔로 음반이 나왔다. 밴드는 완전 해체된 건가.


대학축제 경연대회가 끝나고 나서 1979년 1집이 나왔고, 4학년 때 2집을 녹음했다. 다른 레코드사에서 2집을 내자고 제의가 왔을 때는 멤버가 드럼의 최수일, 나 이렇게 두 명뿐이었다. 베이스 치던 친구는 ROTC 훈련 때문에 빠지고, 건반 치던 친구는 집안에서 반대해서 밴드를 나갔다. 사람이 모자라니 내가 베이스, 기타, 건반… 뭐 다 쳤다. 거의 반 원맨밴드나 마찬가지였다. 1980년에 녹음을 마치고 이듬해 4월 <작은 거인 2>가 나왔다. 사운드도 획기적이어서 일각에서 회자는 많이 됐는데, 살아남은 곡도 없고 망했다. (웃음) 2007년에 경향신문이 뽑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28위를 하기도 했다.

 

안성기 이미숙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고래 사냥> 얘기를 해 달라.


그때가 안성기형이 조금씩 뜨고 있었을 시절이다. 대학 다니면서 <지옥의 묵시록>, <대부>, 이런 영화들을 보고 10분짜리 단편을 찍으면서 송승환, 성기형을 만난 거다. 졸업 후 2년간 방황하다가 일단 1983년에 대학원 행정학과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성기 형한테 전화가 왔다. '형, 이제 저 음악 안 합니다.'라고 하니 음악 얘기가 아니라며 한 다방으로 불렀다. 가게로 들어가는 입구에 문턱이 있어서 걸려 넘어질 뻔했던 순간 '병태다!'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배창호 감독이 <고래 사냥>의 '병태' 역을 찾고 있었고 성기형이 나를 추천했다. 병태같이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웃음) 바로 감독님이 영화 같이 하자고 하시길래 일단 거절했더니 당시 청년들의 영웅이었던 최인호 형이 나를 병태로 점찍고 같이 술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거다. 좋다고 따라가서 재미있게 놀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도장 찍게 됐다.

 

연기경험이 적이 없는데 카메라 앞에서 막막하지는 않았나.


욕 많이 먹었다. 한 번은 베드신 촬영이 있었다. 막말로 내가 겁탈을 해본 적이 없는데 배창호 감독님이 이걸 시키면서 잘 하기까지 원하셨다. 말로만 '막, 확! 이렇게 해!'라며 요구를 하신다. 상대 여성분을 침대에 거칠게 던져야 하는데 내가 살포시 놓으니 NG가 났다. 그래서 이번엔 확 던졌는데 배우가 침대 밖으로 튕겨나갔다. 정말 울면서 그분께 빌었다. 전문 배우가 아닌데 시켜서 그랬다고…. 연기도 너무 어려웠고, 대사가 생각이 안 나면 일부로 상대 배우를 깨물기도 했다. 성기형도 깨물었다. 컷 소리가 안 나오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렵게 촬영했다. 서울역 앞에서 새벽에 속옷만 입고 돌아다닌 적도 있다. (웃음)

 

그렇게 영화도 흥행대박 치고 솔로앨범도 매머드 히트를 기록했다.


1983년 8월 내 이름을 내건 <못 다 핀 꽃 한 송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솔로 1집에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다 넣었다. 록만 해왔으니 조용한 음악도 해보자 싶었고 특히 여기 수록한 경음악 '별리'는 한 번쯤 꼭 만들고 싶었던 곡이었다. 존 케이지 이전에 이미 나는 피아노를 뜯고 만지고 하면서 현대음악을 시도했다. 그러고 나서 그 해 겨울 영화 촬영에 들어가게 된 거다. <고래 사냥>에 집중하느라 '못 다 핀 꽃 한 송이'가 뒤늦게 히트했다는 것도 몰랐다. 영화 막바지에 온 사람들이 다 나를 찾는다는데, 당시 아직도 부모님께서는 음악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때 최인호 선배가 날 응원해줬기 때문에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

 

'못 다 핀 꽃 한 송이'가 뜨고 '별리', '내일'가 줄줄이 사랑받았다.


'정녕 그대를'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에 발매한 앨범인데 1984년에 와서야 떴다. 영화 <고래 사냥>과 맞물려 매기가 증폭했다. 이 앨범 엄청 많이 나갔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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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영화뿐만 아니라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미술 전시를 다닌 지 40년이 넘어간다. 대학생 때는 송승환을 만나 뮤지컬, 국악 얘기를 나누었고, 성기형을 만나 영화를 공부했다.

 

갑자기 국악으로 선회한 것인가.


갑자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못 다 핀 꽃 한 송이'를 발표했을 때는 이미 국악을 시작한지 4~5년이 지나고 있었다. 솔로 앨범으로 번 돈을 국악 공부하는데 다 써버렸다. (웃음) 1980년대 시도했던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거다.

 

영화 <서편제>는 김수철에게 어떤 의미인가.


<서편제>는 내가 국악으로 돈을 벌게 해 준 최초의 음악이다. 이 안에 13년간 망했던 음악이 총망라되어있다. 최초로 백만 장을 넘긴 국악 앨범이고, 백만 장을 넘긴 최초의 영화음악 앨범이기도 하다. 내가 '최초'맨이다. (웃음) 랩도 최초로 시도했고 국악의 현대화도 그렇고 '기타산조'라는 말도 내가 만든 장르다.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 음악 '풍물'을 만들 때 기타 산조로 처음 공연했다. 이후 1987년 대한민국 무용제 음반을 냈는데 이게 국악 1집 앨범이다. 노래가 아니라 연주곡이다. <황천길>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1989년에 발매했다.

 

가요, 국악, 연주음악, 행사음악, 동요를 통틀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음악은.


'일곱 색깔 무지개'와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이름을 알리게 해준 곡이다. '치키치키 차카차카'는 어린이를 위해서 만든 노래고, 앨범 <불림소리>는 우리 소리가 서양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가능한가에 대한 실험이었는데 아주 성공적으로 끝나 뿌듯했던 앨범이다. 내 삶의 가장 보람된 작업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1988년 올림픽 전야제 음악, 빚을 갚게 해준 곡 '정신 차려'와 <서편제>, <팔만대장경>을 어찌 빼놓을 수 있겠나. <팔만대장경>은 평생 시리즈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젊은 그대'가 있지 않나.


세월이 흘러 2000년대 들어서니 '젊은 그대'가 나의 대표곡이 된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을 보면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몰라도 '젊은 그대'는 알더라. 세대 찬가라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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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은 음악가에 있어서 실험적 태도의 중요성을 알려준 인물이라고 본다. '최초맨'이자 '실험맨'이다. 동요 '치키치키 차카차카'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어린 친구들이 어린이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전까지는 나라를 위해 우리 국악을 알리는데 힘썼지, 정작 자신들 노래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한 일이 없었다. 막상 동요를 작곡하려고 보니 동요 쪽 환경이 부실했고, 규모도 작았다. 그 당시에 <꼴찌 수색대>와 같은 어린이 애니메이션 프로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연령대 별 음악취향을 분석하고 공부하면서 만든 노래가 '치키치키 차카차카'다. 마침 1990년 허영만 선생님께서 KBS <날아라 슈퍼보드>의 OST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서 본격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노래들을 만들었다. 이 노래는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국악을 하다가 1989년 '정신 차려'라는 가요로 다시 돌아섰다.


음반 회사에서 국악 앨범이 잘 안 팔린다고 싫어했다. 노래하면 돈이 되는데 왜 자꾸 국악 앨범을 내느냐는 거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대중성 있는 음악을 해야 되는지, 아니면 내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지…. 결론은 그래도 내가 해왔던 음악을 하는 게 맞다 생각이 들었다. 돈도 없었고, 더 나이 들면 하고 싶은 것도 못하겠다 싶어서 원맨밴드로 작품을 준비했다.

 

원맨밴드도 국내 최초 시도 아닌가.

 

이것도 내가 시초다. 근데 원맨밴드 정말 재미없다. 당시엔 디지털 기술이 없었으니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서 처음부터 끝까지 드럼 치고, 거기에 맞춰서 또 연주한다. 혼자서 원테이크로 진행하다 보니 정말 지루하고 다리도 아픈데 이걸 몇 달을 해야 한다. (웃음)

 

'정신 차려'는 사회풍자적인 메시지로 당시 회자되었다.


얘기는 많이 됐는데 망한 줄 알았다. 그러다가 친한 프로듀서한테 연락이 와서는 <화요일에 만나요>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정신 차려'를 불러달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언제나 타인' 같이 조용한 노래나 부르겠다고 하니 막무가내로 '정신 차려'를 하라는 것이었다. 생방송 전 날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힘들어 죽겠는데 방송을 취소할 수도 없어서 그냥 리허설 하러 갔다. 가만히 서서 부르니까 친구가 왜 가만히 있느냐며 좀 움직이라는 거다. 댄스를 할 수는 없어 그냥 무대 위를 걸어 다녔다. 너무 걷기만 하기도 이상해서 국민 체조 같은 것도 하고, 트로트 가수들처럼 가끔 손가락 뻗어 허공도 찔러줬다. 끊임없이 움직였다. (여기서 말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폭소 연발이었다) 겨우 노래 마치고 나니까 갑자기 방송국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거다. 웃긴 노래가 하나 나왔다고. 그거 춤 아니고 그냥 움직인 거다, 또 섭외가 왔길래 어떻게 했는지 생각도 안 난다고 했더니 방송국에서 녹화 본을 보내줬다. 그걸 보고 내가 나를 따라하며 연습했다. 같은 동작만 하면 재미없으니 다르게 걷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댄스가수가 되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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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의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음악가는.


한둘이 아니다. 먼저 기타리스트로 제프 벡, 지미 헨드릭스 그리고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닐 영 그리고 레게 밥 말리도 열광했다. 베토벤 음악은 궁극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도 그의 음악처럼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다. 교향곡 9번은 정말 오랜 기간 사랑받는 음악 아닌가.

 

요즘 K팝 슈퍼스타 '방탄소년단' 현상은 어떻게 보나.


아주 바람직하다. 세계로 나아가려는 계획을 갖고 오래 준비한 팀이다. 회사와 멤버와의 합(合)이 만들어낸 일종의 '작품'이다.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언론 인터뷰를 보니 아이유를 꽤 칭찬하던데....


아이유는 대중가수로서 성공했지만 '자기음악'을 하는 가수다. 히트곡만 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는 그 공부와 자세를 칭찬하고 싶다. “아이유씨, 이거 보면 저랑 밥 한번 먹어요” (웃음) 그리고 힙합에서는 도끼. 난 래퍼라고 꼭 욕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욕을 안 하면서도 반항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도끼의 마인드를 사랑한다. 그리고 도끼가 자기 노래에 '치키치키 차카차카'를 가사로 쓰기도 했고.. 그래서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고. 비와이, 타이거JK, 혁오, 자이언티도 좋아한다. 다들 자기 색이 분명하다.

 

자신의 어제, 오늘, 내일의 음악생활을 정의한다면.


이번에 책을 쓰면서 옛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난 사실 지나간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과 내일이 중요하지 어제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 60이 넘어 인생의 2막을 맞았다. 앞으로 우리의 음악이 나아가려면 먼저 음악 자체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우선 양이 많아야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 아닌가. 음악시장의 위축에도 뮤지션은 지속적으로 음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인생 2막의 꿈은.


언제를 1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1막이나 2막이나 꿈은 같다. 내가 개척해 온 장르를 공연으로 다져서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콘텐츠를 만들고 동, 서양 사람들 모두에게 감동을 전하는 것, 그게 영원한 목표이자 꿈이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고 또 우리만의 혼과 숨결로 이뤄진 음악을 꼭 쓰고 싶다. 그 야망이 내 에너지다. 꿈을 반드시 이루고자 한다. 서양음악에 포위되어 우리만의 문화가 척박한 실정이지만 나라도 우리의 것을 세계에 알리자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 자존심 하나로 버틴다.

 

 

인터뷰 진행: 임진모 정연경 박수진
사진: 박수진
정리: 임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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