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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종범 “자존감의 뿌리에는 자기 이해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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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종범은 스스로 ‘참치형 인간’이라고 소개한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참치처럼 계속 무언가 도전하고 시도해왔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연세대 심리학과에 들어갔고, 네이버 웹툰에 <닥터 프로스트>를 연재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만화가 외에도 라디오 DJ, 팟캐스트 진행자, 재즈밴드 드러머 등 하나만 해도 모자랄 타이틀을 여럿 달고 청강대학교 만화콘텐츠 스쿨 교수로 학생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종범은 자신의 인생을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중 대부분은 도망 다니는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만화가를 준비하면서 보냈던 혹독한 기간, 누구에게나 있었을 지질한 시절을 그렇게 도망 다니면서 보냈다. 그렇다고 자신감과 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도망 친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도망 후에도 다시 숨을 고르고 도전할 수 있었다. 에세이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 는 ‘이겨내자’는 세상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도망치기를 권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이런 경우에 적합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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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무언가의 천재예요


에세이집은 처음 냈어요. JTBC 프로그램 <말하는 대로>에서 ‘도망가도 괜찮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책 제목은 거기서 나온 건가요?

 

<말하는 대로> 나오기 전에도 글 대부분은 나와 있었어요. 웹진 <아이즈>에 연재한 글이 쌓이면서 편집인들이 책으로 엮을 가능성을 봤던 것 같아요. 방송 출연이 방향을 명료하게 만들어 준 건 있어요. 일상처럼 글을 연재하다 보니 웹툰 작가로 산다는 것에 대한 글도 있었고, 어떤 글은 제 개인고백이기도 했고요. 방송하면서 말을 정리하다 보니 파편화된 글이 하나의 주제로 묶이더라고요.


창작의 도구로 계속 만화를 써 왔는데, 글은 또 도구가 달라요. 글 쓰는 건 어땠나요?


만화하고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긴 했는데, 저랑 만화가 편한 관계는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사명감으로 진지하게 했다면 글은 더 편하게 다루는 관계였죠. 하지만 만화는 어떤 이야기나 인물 뒤에 숨어도 글은 제가 전면으로 드러나다 보니까 숨을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정교하게 정리해야 했죠. 가장 편하고 쉬운 게 말이라면 가장 진지한 게 만화고, 말보다는 불편하지만 만화보다 편한 게 글인 것 같아요. 말처럼 휘발되지 않아서 좋아하기도 하고요.


휘발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곤경에 처하기도 하죠.


그렇죠. SNS에 쓴 말이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하고요. (웃음)


창작에 관한 문장이 많이 나왔어요.


에세이를 연재하던 기간에는 ‘창작하는 자신’이 최대 관심사였어요. 만화뿐 아니라 무언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하나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거든요. 작법서와 창작인이 쓴 에세이나 똑같이 작법과 창작론을 이야기하지만, 후자는 창작하는 자신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여러모로 창작하는 지망생에게 하는 조언같이 느껴졌어요. 혼자 스토리를 공부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알려준다든지요.


여러 지망생이 질문을 많이 했던 부분이었어요. 처음에는 에세이인데 너무 작법만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고민을 했는데, 편집자님이 귀농한 사람이 쓴 에세이는 농사법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무슨 글이든 글쓴이의 성분 중에 중요한 부분이 들어간다는 말씀을 하셔서 용기가 났어요. 제 생활이 창작과 관련되어 있으니 창작을 많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한 가지, 제가 쓰지 않은 느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원칙은 있었어요. 더 잘나가는 작가가 쓴 작법론과 제 작법론은 차이가 있어야 하니까요.

 

 

잘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나는 괜찮다


“만화가가 되는 데 특정한 재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재능을 써서 만화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문장이 재능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천재다”라는 말에서 천재라는 말을 너무 중시하는 것 같아요. 가치 있는 재능과 가치 없는 재능을 평가하고 나누는 세상이 가장 문제죠. 그건 월권이거든요. 다들 재능을 다각도로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천재가 맞는데, 이 사람이 가진 천재적인 분야가 스스로든 남에 의해서든 평가절하돼서 드러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봐요. 재능이라는 말이 가진 아름다움과 멋있음보다는 그 단어가 끼치는 해악이 우리나라에서는 압도적으로 커요. 그래서 재능의 무용론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사람들은 재능이냐 노력이냐, 혹은 ‘무엇을 말할까’와 ‘어떻게 말할까’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해요.


굳이 예를 들면 오른손과 왼손 같은 거랄까요.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표현은 조심하려고 해요. 하지만 일상처럼 반복했을 때 테크닉은 따라오고, 그래서 무게중심을 ‘무엇을 말할까’에 두는 것 같아요.


재능을 ‘불행배틀’의 일환으로 접근하기도 해요. 작가님은 만화가로 성공도 했고, 명문대 출신에, 여러 가지 취미가 많고, 그런 점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누군가 그런 싸움을 걸면 기꺼이 져 줘요. 그래, 네가 더 불행하고 네가 더 재능 없는 게 맞아, 하면서요. 하지만 대개 그렇게 불쾌하게 만들기보다 그냥 물어봐요. 저보다 더 불행하고 더 재능 없는 걸 원하냐고요. 그럼 비교를 꺼내 들었던 대화와는 다르게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있더라고요.


 ‘이종범은 에고이스트다’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어요. 자존감이나 자기애가 높으면 창작에 동력이 되지 않나요?


자존감이 높으면 편리하죠. 배구하는 데 키가 크다는 정도의 유용함일까요? 그것도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요.


자신감과 자존감의 차이는 뭘까요?

 

한국은 제가 보기에는 자존감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태 같아요. 핵폭탄 이후 멸망한 인류 수준으로 자존감이 기근에 들어 있어요. 과거 성취가 중요했던 시절에 쓰이던 자신감이라는 자리를 자존감이 채운 것도 있고, 자존감이라는 게 너무 많이 쓰이면서 피곤함을 느끼는 단어가 됐는데 그게 아쉬워요.

 

“나는 잘났어.”
이건 자신감이고,
“못난 것 같지만 괜찮아.”
이것이 자존감에 가깝다.
이쪽이 유통기한이 훨씬 길다.
- 36쪽

 

최근 ‘나를 알아야 한다’는 화두가 자주 들려와요.


자존감의 뿌리에는 자기 이해가 있다고 믿어요. 잘하는 게 있어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논리 속에서는 조건에 의해 자기 가치가 정해지는데, 자존감은 잘하고 못하고와 무관하게 자신은 괜찮은 존재라는 느낌이거든요. 자기이해가 많이 쌓여있는 사람에게는 자존감이 어렵지 않아요. 자신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잘 따라가고 파악하다 보면 어디서 자기 가치가 나오는지 선명하게 이해하거든요. 그럼 남들이 제시하는 조건에 자신을 달아두지 않게 되고요. 저도 20대 내내 온통 저 자신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쏟았던 것 같아요. 지금 그리는  『닥터 프로스트』 도 자기를 이해하고자 하는 남자의 이야기고,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도 결국 저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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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눈


핑크레이디 사건이나, 레진코믹스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SNS에 올린 글이 비판을 많이 받았었어요. 하지만 클로저스 성우 해고 사건 때도 목소리를 냈었고, 웹툰계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늘 방법을 고민하지만 무력감도 같이 들어요. 만화가 협회, 웹툰작가협회 양쪽에 이사로 있어서 만화 현안을 가장 빨리 접하지만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대부분 피해자인 제자와 동료를 상담하는 데 보내고요. 최근 벌어지는 여성 혐오 문제에서는 가장 소중한 동료와 제자와 지인이 전부 여성인데, 당연히 분노하고 속상하죠. 하지만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첫 번째 옵션으로 일단 말을 아껴야 된다는 생각은 있어요. 젠더 이슈를 이야기할 때 뭘 이야기할까 고민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먼저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SNS에 무언가 말하는 게 압도적으로 줄었어요. 누군가 매일 이것저것 떠들다가 이 사안에 대해서만 침묵한다는 식으로 반응하면 억울할 수는 있겠지만, 차라리 그런 오해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취미를 이야기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회 이슈에 문제제기를 하는 의미로 ‘사회를 보는 눈’을 생각하고 있다고 느껴져요. 시즌 3에서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사회를 보는 눈이 제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연재가 늦어지는 이유기도 해요. 새로운 시즌에서 혐오에 관한 내용을 그리려고 하는데, 2년 전에는 혐오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혐오의 정체가 뭘까 관심이 생기고, 혐오에 대해 생각하고, 혐오를 받아 보고, 누군가를 혐오하는 나를 관찰하면서 2년이 흘러가 버린 거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어떤 이야기가 발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넓어졌어요.


정치적 올바름이 시대의 정신이 됐으니까요. 하지만 계속 생각하다가는 휴재가 길어지겠는걸요.


어떤 사항이나 이슈에 발빠르게 의견 내는 건 논객의 역할이고, 작가로서의 역할은 일단 정리가 될 때까지는 봐야 한다고는 생각해요. 어느 지점에서는 끊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 놔야죠. 그게 작가로서의 직업적인 의무고요. 휴재한 지 2년 2개월 됐습니다. 온통 걱정이에요.


자존감과 휴재에 대한 걱정은 별개군요. (웃음)


왜 이렇게 휴재를 길게 했나 파악을 못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졌던 것 같아요. 지금은 초조한데 그렇게 무섭진 않아요. 그저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송구합니다.


『닥터 프로스트』 가 2010년에 시작했으니 웹툰 1.5세대에 해당할 텐데, 그동안 웹툰 생태계가 급격하게 바뀌었어요. 뒤쳐진다는 불안함이 있나요?


어떻게 변할지 알수 없으니 불안한 건데, 다시 뒤를 돌아보면 안정감이 생겨요. 웹툰이 어떤 모양을 띄더라도 만화의 형식을 활용해서 생각을 전달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고, 제가 만화를 사랑하고 할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독자가 있다는 점 때문에 불안하진 않아요.


연재가 끝나면 연재했던 만화를 다시 통독하신다고요. 자기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힘들 텐데요.


힘든 기간이 있죠. 지금은 내려놨어요. 학생들이 힘들어할 때 늘 제 데뷔작을 보여주거든요. 데뷔작은 정말 엉망이었어요. 학생들이 늘 효과 만점으로 용기를 얻어서 갑니다. 이것이 자존감일까요? (웃음)


팟캐스트도 진행합니다. 말을 편하게 하시는 것 같아요.


말하기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가장 길 거예요. 말을 도구로 적극적으로 쓰겠다고 마음먹은 거라, 계획적으로 쓰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발음이나 빠르기를 일부러 조절하기도 하고요.


향후 계획은요?


최근에는 다이빙과 다트에 빠져 있어요. 열심히 로그를 채우면서 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있죠.


취미인간이군요. 재즈에 빠져서 연주했다고 들었어요.


취미는 늘 저에게 중요해요. 자신을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가 좋아요. 제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자극받는지 잘 보여주죠. 연주도 예전에는 업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저를 위해 해요. 원고 작업하는 공간에는 무조건 피아노나 드럼 연습 패드가 있어야 해요. 연재하면서 마감할 때 힘들면 가끔 치고요.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하나요?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긴 한데,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방향은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타인의 평가나 생각을 직접 구할 용기는 없잖아요. 하지만 모두다 궁금해 하죠. 이 책은 저랑 닮아있으니 어떻게 읽힐지 궁금한 게 당연하고요. 하지만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말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말이기 때문에 선언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리뷰는 찾아봤어요?


아직 못 찾아봤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필자인 김혜리 기자님이 추천사를 써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김혜리 기자님의 글을 읽고 싶다면 사라고 홍보하고 있어요. 제 에세이는 부록이고요.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이종범 저 | 위즈덤하우스
부끄럽고 찌질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웹툰 작가의 삶까지 담담하게 풀어낸 그의 고백은 그 어떤 현답이나 건설적인 조언보다 따뜻한 위로와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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