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식당』 이후 4년. 박찬일은 전국의 ‘노포’를 취재해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담고 다시 돌아왔다. 모두 26곳의 노포, 노포의 평균 나이 50년이 넘는 대단한 목록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노포의 장사법』 속 쟁쟁한 노포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이고 과거로부터 찾은 식당의 미래였다.
취재는 쉽지 않았다. ‘어떤 중식당은 짜장면만 일고여덟 그릇을 먹었다.’(374쪽) 그래도 섭외에 실패했다. 어떤 곳은 간청하는 박찬일이 “불쌍해서” 수락해주었다. ‘용마갈비’는 70년대-80년대 서울 외곽 인구 폭발 성장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이기에 꼭 담고 싶었다. “갈비 정말 많이 먹으러 갔”고 간신히 허락을 받았지만 사진만큼은 끝내 거절 당했다.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낮술도 많이 먹었고, 몸도 많이 상했다. 하지만 좋으니까 했다. 해야만 했다. ‘숭덕분식’의 떡볶이, ‘41번집’의 포장마차 요리들, 기사식당으로 성공신화를 쓴 ‘성북동돼지갈비집’, 오사카의 ‘오모니(어머니를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것)’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만든 ‘을지오비베어’까지.
몸고생,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취재 과정에서 얻은 영감이 많았다고 박찬일은 말한다. 특히 그는 인터뷰 말미에 “노인이 갖고 있는 힘이 있다. 노인 직원을 고용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수한 식당, 노포. 장수한 노인의 건강법을 엿보듯 장수한 식당의 철학을 엿보는 일은 그렇게 닿아 있었다.
오래된 것의 소중함
취재 기간이 길었던 것 같아요. 2년 전 취재도 보이고 그렇더라고요.
심지어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도 계세요. 세 분이 돌아가셨고요. 지금도 아프신 분들이 많아 걱정이에요.
그 촉박함, 초조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기록이 중요하죠. 그때는 기록의 중요함을 몰랐으니까요. 이것은 사실 민속기록인데요. 문학 영역에는 많이 있었지만 여기에 이런 시도는 없었던 것 같아요. 언론에서 인터뷰 하는 정도인데요. 언론에서도 이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았어요. 정치인, 예술인에 대해서는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라고 연재도 있었잖아요. 하지만 거기에 요리사나 밥집 주인이 나오는 건 못 봤어요. 밥이라는 건, 밥집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대중에게 그렇게 가치 있다고 판단이 안 되었던 거죠.
왜 그랬을까요?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요?
원래 그랬죠. 흔한 것은 소중한 줄 모르는 법이니까요. 우선 본인들이 귀중한 걸 알지 못했어요. 식당들이 왜 이제야 ‘since’를 붙이는 걸까요? 영어를 쓴다는 자체가 새로운 유행이란 뜻이죠. ‘since2015’도 있잖아요.(웃음) 그것도 오래된 거예요. 4년 가는 식당도 많지 않아요.
한편 책에 등장하는 노포들은 평균 50년이 훌쩍 넘는 곳들이죠.
삼십 몇 년 된 집도 있는데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넣었어요. 그 정도 되는 식당도 별로 없죠.
그 이유를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셨잖아요. 전쟁을 겪으면서 유실된 것들도 많다고요.
그렇죠, 그게 제일 큰 요인이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외국의 예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유럽이라고 전쟁이 없었나요? 1차, 2차 세계대전 다 겪었잖아요. 일본도 공습 엄청 당하고, 파괴된 경험이 있고요. 도쿄는 완전히 평평해졌었어요. 워낙 폭격을 받아서요. 그런데도 노포가 살아남은 것은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누군가가 인정해준다는 거겠죠. 우리는 밥집은 천하다고 생각했고요. 주인들도 자신의 밥집을 대를 물려줄 거라고 상상도 안 했잖아요. 다들 돈 벌면 그만두어야지, 그 마음으로 하거든요. 이제야 이것이 소중하다는 걸 알아채는 분위기죠. 이제야.
그만큼 험한 일이기도 했고요.
험하고, 인정받지 못하고요. 사회적으로 장인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없고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가 작동한 거죠. 옛날에 조선백자가 개밥그릇이었다잖아요.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학예사, 인사동 고미술상 같은 분들이 플라스틱 바가지를 주고 개밥그릇을 빼앗아왔대요. 오래된 것의 가치를 몰랐던 무지의 시대가 있었던 거죠. 우리는 항상 새로운 걸 좋다고 했잖아요. 노포에 가도 싹 헐어버리고 새로 지은 집 되게 많아요. 옛날에 쓰던 것 하나도 안 남기고요. 다 버렸죠. 이제야 인정받는 건데요. 이것 또한 결국은 인접 국가의 영향이에요. 일본에서 영향을 받는 거예요. 가슴 아프죠. 우리 스스로 그 가치를 왜 미리 알지 못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런 책이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는 나왔어야 해요. 유사한 책은 있었지만 이렇게 깊이, 오래된 것에 초점을 맞춰서 그것의 가치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들이 없었어요. 그런 게 좀 속상하죠.
취재의 어려움이 짐작도 되는 것이 이런 작업이 없었으니까요. 다 처음부터 시작인 거잖아요. 무엇이 제일 힘드셨어요?
이런 문화가 없으니까요. 주인들도 몰라요. 왜 우리집을 하느냐, 라고 해요. TV 촬영이라도 하면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즉각적으로 이해할 텐데 아니잖아요. 옛날이야기를 하라고 하고, 옛날 사진을 달라고 하고 그러니까요. 이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잘 몰랐어요. 일단 섭외가 안 돼요. 또 사기꾼들이 많았죠. 식당 소개해준다면서 기사나 잡지를 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경계심도 많아요. 제가 누군지 알게 뭐예요?(웃음) 그리고 대개 노포가 자료가 없어요. 자료가 없으면 인터뷰가 어렵잖아요. 뭐가 있어야 그것을 되물어보고 하죠. 왜 식당을 시작하셨는지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짧은 시간에 밀도 있는 이야기가 어려운 거예요. 몇 번 가서 들은 이야기들이 많아요. ‘수원집’ 같은 경우는 열 번 가까이 갔어요. 제가 적자가 심하게 났어요.(웃음) 그래도 좋으니까 했어요. 돈 벌려 했으면 애저녁에 안 했어요.
섭외 설득에 도움이 되었던 좋은 논리가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논리는, 없어요. 자꾸 가서 낮술도 먹고 강짜 부린 것밖에 없어요. 술기운에 “아, 인터뷰 좀 해주세요!” 하는 거죠. 이분들은 논리적으로 설득한다고 해도 안 되고요.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거죠. 낮술 먹고, 자꾸 가서 얼굴 비치고요. ‘을지면옥’, ‘용마갈비’ 다 그렇게 했어요. 한 번에 시원시원하게 된 게 별로 없고요. ‘조선옥’도 한 서너 번은 가서 고기 먹었어요.
끝내 설득이 안 돼서 쓰지 못한 곳도 있는 건가요?
인터뷰가 안 됐으면 못 나갔죠. 취재기로만 써도 된다면 했겠는데요. 우리 책을 낼 때 원칙이 주인이 나와서 인정하고 승낙할 때까지 안 쓰는 것이었어요. 변두리의 돼지갈비라는 것이 70년대-80년대의 서울 외곽 인구 폭발 성장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용마갈비’를 담았는데요. 그분의 사진이 없어요. 적극적이지 않으셨어요. 하고 싶지 않다고요. 얘기는 해줄게, 책을 내신다니, 하는 정도였죠. 갈비 정말 많이 먹으러 갔어요. 어느 중국집은 몇 번이나 갔지만 끝내 안 하신다고 하셔서 못 썼고요. 남대문의 어느 곳은 저희 취지를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했어요. 저희가 사기 치는 것 같아서 거부하신 것 같아요. 중요한 식당인데 못했어요. 안타까운 거죠.
우리 삶의 비늘들이 다 문화재
후기에서 “아마도 노포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 같다”(387-388쪽)고 하셨는데요. 취재의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세대교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아요.
기억이 희미하신 거죠. 오래된 얘기니까요. 가면 나이 든 단골손님들이 와서 새로운 얘기를 자꾸 해줬어요. ‘수원집’에서는 과거 정보기관에 근무하셨던 분이 계셔서 얘기를 들었죠. 60년대에는 인천에서 배가 나가려면 정보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북한 인접지역이니까요. 허락을 받는 동안 여기 앉아서 술 먹고 기다렸다는 거예요. 지금도 배는 해양경찰정 산하 지구대에 허락을 받아야 해요. 지금은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옛날엔 정보기관의 허락을 받았던 거죠. 배가 월선과 월북에 많이 쓰였거든요. 그런 뜻밖의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곁에서 노중훈 작가님은 졸기도 하고요.(웃음)
아이, 그러니까요.(웃음)
노중훈 작가님의 사진도 절묘해요. 순간포착이 있었어요.
사진을 찍고 가는 게 아니라 노중훈 작가는 나랑 같이 움직이는 거거든요. 얘기를 듣고 어떤 것을 찍어야 하는지 파악하는 거죠. 사진이 생동감이 있잖아요. 진짜 저와 팀이죠. 노중훈이 술값 한 번도 안 냈어요. 꼭 좀 써주세요.(웃음)
노포의 비결을 하나 꼽는다면 ‘한결같음’일 텐데요. 방금 단골손님 말씀도 해주셨지만 책에도 단골들의 “기묘한 연대감”(6쪽)을 적어두셨거든요. 이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어요.
그런 게 있죠. 서로 몰라요. 그런데 앉아 있다가 무슨 얘기 한 마디 꺼내면 “그랬어요?” 하면서 같이 앉아서 마시는 거예요. 이 집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겠죠. 공통의 정서들이 있는 거예요. 그것에서 촉발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발견할 때 좋죠. 술주정도 많았어요. 어떤 분이 갑자기 “필승!”하고 저한테 인사를 하더니 술주정을 부리는 거예요. 저는 해병대 아니거든요. 그러더니 저를 때리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곁의 노인 분이 “이놈 자식! 나가, 인마!”라고 하시면서 저를 구해주신 적이 있었어요. 그분 성함이 ‘김영원’이에요. ‘수원집’에 나오는 분이에요. 4년 전 이야기예요. 살아 계신지 모르겠어요.
‘숭덕분식’이라든지 ‘41번집’같이 떡볶이집이나 포장마차 같은 곳도 담으셨잖아요. 새로운 목록이라 더 눈이 갔어요.
책 작업으로 제일 기분이 좋았던 건 이것을 통해 ‘당신들이 가치 있는 일을 했습니다’라고 제가 처음으로 인정해준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점이에요. 출판사와 제가 이 책을 만들어서 묶어냈잖아요. 현장에서는 여러 번 얘기를 했지만 자신들의 일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책을 통해 비로소 물리적인 형태로 받아들이게 된 거죠. 독자가 책을 사서 본다는 건 우리 가게를 인정하는 거잖아요. 자랑스러움과 걱정거리를 안겨드린 셈이에요.
번듯한 가게, 장사 잘 되는 집은 노포가 돼요. 별 문제가 없죠. ‘우래옥’, ‘하동관’, ‘한일관’ 이런 곳들은 워낙 잘 나가던 곳이죠. 그런데 분식집, 포장마차 같은 곳은 오래 안 해요. 포장마차를 50년 한 집이 있나요? 떡볶이집 중에 ‘숭덕분식’보다 더 오래된 집이 없어요. 오래 안 하니까요. ‘숭덕분식’은 놀라운 집이에요. 지금도 초등학생들이 와서 먹고 그래요.
“이런 살아 있는 우리 삶의 비늘들이 다 문화재”(386쪽)라고 했죠.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가 반드시 예술에만 해당하잖아요. 왜 식당은 해당이 안 되느냐고요. 곰탕 만드는 것이 어떻게 문화재가 아니겠어요. 무형문화재,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 부여하는 거잖아요. 봉산탈춤을 추는 사람에게 무형문화재를 줘요. 식당도 마찬가지예요. 국밥을 보존할 수는 없죠. 그걸 만드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문화재 지정을 해줘야 해요. 서울 한양 음식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설렁탕, 곰탕 밖에 없어요. 장국밥이죠. 그리고 구한말 냉면이요. 그런 것에 왜 무형문화재를 안 줄까요. 그건 정책당국이 음식 만드는 사람의 기술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거예요.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삶이 훨씬 더 밀접하게 담겨 있거든요. 비단은 지키고 무명은 버려야 하나요? 그건 아니잖아요.
개중에 ‘을지오비베어’부분 말미에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2015년 ‘서울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점을 언급하셨고요. 작은 변화들이 이제야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책이 나오고 며칠 후에 박원순 시장님에게 밤에 전화가 왔어요. 깜짝 놀랐어요. 노포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서울시가 서울문화유산 하는 것 보고 놀랐죠. 문화유산 사업을 시작한 지자체가 별로 없거든요. 이런 가치를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안심했어요. 어쨌든 이것은 지켜질 가능성이 높아진 거잖아요. 그 동판 하나 붙여두면 그분들도 자부심을 갖고 일하실 수 있거든요. 이나마 시작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있어요. 안타까워요.
사회적인 인식 이야기를 하지만 분명히 공공 영역에서 선행해야 하는 작업이 있는 거죠.
공공에서 한다는 건 결국은 예산을 편성한다는 거예요. 돈이 있어야 움직이죠. 예산을 편성하고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 이 책이 기여를 했으면 좋겠어요. 책 팔아서 돈을 얼마나 벌겠어요. 다만 이런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보람이죠. 정말 힘들었어요. 『백년식당』 작업했을 때도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었는데요. 또 하게 될 줄이야.(웃음)
노포의 수많은 상징들
‘하동관’과 ‘팔판정육점’의 오래된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주더라고요. 대를 이어 신뢰에 기반해 계속해서 거래를 유지하고 있잖아요.
거기는 주문할 때 아무 말도 안 하고요. 고기를 갖고 오면 달아보지도 않아요. 서로 할 얘기가 있어도 안 해요. 지난 번 고기가 질이 안 좋았어요, 그런 얘기 일절 없어요. 그런 고기가 있을 수 있겠죠. 왜 없겠어요. 하지만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보내는 사람(팔판정육점)도 마찬가지죠. 예를 들어 갑자기 고기값이 폭등해요. 그래도 당장은 말을 안 해요. 몇 달 후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얘기해요. 그러면 이쪽(하동관)은 그냥 알았다고 하죠. 상도덕을 지키는 분들이 있다는 거예요. 흔히 ‘깎아야 맛’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장사를 해보니까요. 깎으면 깎은 만큼 줘요. 그게 장사예요. 깎는 건 바보짓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신용할 만한 거래처는 깎으면 안 돼요. 달라는 대로 줘야죠. 책에 등장한 노포들은 거의가 다 그래요. 거래처가 아주 오래됐고, 잘 안 바꿔요. 우리가 모르는 생태계가 그 안에 있어요. 그것이 대세가 아니라는 게 너무 속상할 뿐이죠.
자영업자가 약 5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요.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도 중요할 것 같아요.
강의도 듣고 자료도 모으면서 공부하시지만 이런 말은 없겠죠. 물건 값 보지 말고 받아라, 네 가게를 시작했으면 50년 할 각오로 해라, 라는 말은 없잖아요. 노포의 수많은 상징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식당을 열겠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이것이 진짜 살아 있는 장사법이죠. 오래 살아남은 가게들이 어찌 살아 있을까를 배우면 훨씬 더 오래 장수할 수 있는 가게가 될 거예요. 그렇잖아요. 장수한 노인의 식사법과 인생관을 배우면 장수할 가능성이 높아요. 노포도 노인이잖아요. 그런 곳의 장점을 배우면 장수할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제목이 『노포의 장사법』 이에요. 이 책을 저는 식당 전략서로 읽히길 원한 건 아니었지만요. 실은 이게 전략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눈 밝은 사람은 찾아내겠죠.
『백년식당』 출간 당시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노인 이야기를 많이 강조하셨잖아요.
사람이 가진 것을 우리가 무시해요. 골동품은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가 부족한 것 같아요. 노포라는 것이, 식당 안에 뭔가가 있지 않아요. 주인의 머릿속에 있죠. 그게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그 물리적인 형태만 봐서는 절대로 따라할 수 없고요. 따라하는 집은 되게 많은데 잘 되는 집은 별로 못 봤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안에 진수가 있어요. 노포 자체가 생물이 된 거거든요. 어떨 땐 무서워요. 오래된 것에 귀신 붙는다고 하잖아요. 이 가게에 귀신이 붙은 것 같아요. 사람으로 인해 영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거죠. 50년 이상 된 집은 다른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상징적인 장면이 이런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그 분위기에 압도돼서 조용히 식사하고 나오잖아요.
부민옥은 아무나 가는 집이지만 또 아무나 가지 않는 집이다. 대중식당이니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묘한 기에 눌려서 아무나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집이 서울 중구 다동 언저리에 여럿 있다. 이 집 역시 오랜 단골들의 출입처다(섭외가 어려워 미루다가 이번에 어렵게 문턱을 넘었다). 손님도 홀의 직원도 주방 요리사도 사장도 다 나이들었다.(57쪽)
어떨 땐 푸근하기도 해요. 마음 편하죠. 할아버지 집에 가면 한 번 갔을 때는 약간 어색하잖아요. 하지만 자꾸 가면 편하죠. 그런 게 노포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와요. 20대-30대들이 많이 와요. 의외로 많이 오죠. 냉면집에 많이 오잖아요. 놀랍지 않아요? 깜짝 놀랄 일이죠. 그렇게 계속 이어지겠죠.
식당의 미래
못하겠다고는 하셨지만 혹시 이 작업을 한 번 더 하게 된다면 소개하고 싶은 곳은 어디예요?
인천 배다리에 있는 전설적인 노포가 있어요. 안 한다고는 했지만 책을 또 낸다면 꼭 싣고 싶은데요. 제가 좋아하는 집 중 하나예요. 남겨두고 있었는데요. 그곳 할머니가 다치셨어요. 지금 편찮으시고 가게는 임시 폐점한 상태인데요. 아마 다시 못 나오실 것 같아요. 연세가 많으시고, 병원에 계시면 못하죠. 주방에 혼자 계셨거든요. 진짜 맛있었어요. 그곳을 이 책에 썼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조선옥’만 해도 기록물로는 처음이잖아요.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곳들을 생각하니 앞서 말한 초조함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그 집이 인터뷰를 안 하다가 처음으로 했어요. 그러니 얘기를 잘해주지 않죠. 선대가 안 계신다니까 후대가 기억하는 것도 아무래도 적고요. 충분히 자료가 없는 거예요. 후대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거든요. 직접 겪은 게 아니니까요. “그랬다고 한다.”죠. 그렇게라도 듣는 것이 안 듣는 것보다는 낫고요.
‘토박이할머니순두부’는 다른 책에 썼지만 너무 좋아서 다시 썼다고 하셨어요. 이유가 뭘까요?
책 나온 후 제일 먼저 전화 온 분도 그곳의 김규태 사장님이에요.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70년대 초반에 시작했으니까 거의 50년이 됐는데요. 두부에 잔재주를 안 부려요. 지금까지 그렇게 해요. 딱 알아요. 이 사람 미련한 사람이군, 해요. 지금 그곳이 유명해져서 난리예요. 평창올림픽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요. 그런데도 똑같이 할 거예요. 빨리빨리 안 해요. 뭐든지 빨리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과정을 압축해야 하잖아요. 그것이 산업의 논리죠. 판두부를 만들려면 무거운 것으로 눌러야 해요. 수분이 빠져서 두부가 되는 거거든요. 누르는 것의 무게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예요. 30분 만에도 만들 수 있어요. 꽉 누르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곳은 가벼운 것으로 눌러놓아요. 천천히 내려가요. 옛날 무게를 그대로 유지하는 거예요. 콩을 불리는 것도 그렇죠. 미지근한 물을 넣으면 금방 붇잖아요. 그럼 맛이 없대요. 찬물로 불려요. 오래 걸려요. 진짜 대단하죠.
꾸준히 노포의 변하지 않음을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온 모습들도 반드시 짚어야 할 것 같아요. 기사식당도 그렇고요. 직장인들의 퇴근시간 변화에 따라 오픈 시간이 빨라진 곳도 있었어요.
식당의 존재와 융성, 폐퇴는 전적으로 사회사적인 관점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어요. 정치경제사죠. 설렁탕에 국수를 넣은 게 강제였거든요. 박정희 시절에 쌀을 아끼려고 그랬어요. 떡볶이도 그렇죠. 수입밀가루로 싸게 만들 수 있게 되고, 수도권 인구폭발로 초등학생들이 많아졌어요. 그러니까 번성할 수 있었죠. ‘을지오비베어’도 생맥주의 대중화와 관련이 있어요. 이전까지 생맥주는 고급이었어요. 고급 양식당에서 팔고 그랬던 것을 맥주회사에서 대량으로 소비할 만한 시스템으로 구축했어요. 월급쟁이들이 많아지고, 이들이 생맥주가 싸지니까 호프집에 와서 먹게 됐죠. 사회의 성장, 정치경제의 변화와 다 결합되어 있어요. 특히 기사식당이 그런 거고요. 서울의 인구 성장, 교통 인프라의 부족으로 택시의 수송분담률이 굉장히 높았거든요. 택시기사들이 밥을 먹을 공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안 그랬으면 그런 식당이 못 생겨났겠죠. 감자탕, 떡볶이, 포장마차 등은 특히 그런 영향이 컸어요.
지금 일어나는 변화들 가운데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신 건 뭔가요?
소비인구의 감소나 소비의 결정권을 젊은이들이 쥐게 되었다는 점, 혼자 사는 가구가 늘어나는 것 등인데요. 그게 식당에 그대로 반영이 되잖아요. 원래 고기는 1인분 안 팔았거든요. 지금은 꽤 많이 생겼어요. 홍대 인근에 많아요. 월급이 줄고, 개인화, 파편화 되면서 혼자 먹게 되는 거죠. 이런 변화 흐름에 저도 고민을 하고 있어요. 우리 가게가 30년 가는 노포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이죠. 이대로 유지해서 노포가 될까, 아니면 끊임없이 트렌드를 반영해서 노포가 될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모든 식당들이 사회의 격변기에 대응을 해왔지만요. 지금처럼 예측불가한 시대가 또 없었던 것 같아요. 다 힘들었죠. 다 예측 안 되긴 했는데요. 어떤 면에서 지금은 더 불리한 예측을 하고 있어요. 잘 안될 거라는 그림자가 요식업에 비치고 있잖아요. 걱정들이 많아요.
노포의 장사법박찬일 저/노중훈 사진 | 인플루엔셜
트렌드, 마케팅, 브랜딩 없이도 꾸준히 단골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빛나는 장사 비결, 비용이나 마진과 같은 경영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들의 우직한 승부수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