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디까지나 극의 재미를 위해 꾸며진 이야기라고. 소설의 제1부, 그중에서도 맨 첫 번째 장을 읽은 순간부터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바람은 가차 없이 빗나갔다. 공지영 작가는 5년여의 취재 끝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신작 『해리』를 펴냈다.
소설의 주인공 ‘한이나’는 암 투병 중인 엄마와 함께 지내기 위해 고향 무진에 내려갔다가 한 사건을 맞닥뜨린다. 이를 시작으로 그녀는 사건을 둘러싼 고교 동창생 ‘이해리’와 천주교 신부 ‘백진우’를 추적하며 우리가 신성하고 선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추악한 어둠을 발견한다. 파헤치려 할수록 세상은 자욱한 안개가 낀 듯 답답하고, 궁지에 몰린 악인들은 점점 더 추악해지는데,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악을, 법의 테두리를 교묘히 비껴가는 악을 응징할 근거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까.
책을 읽고, 인터뷰를 마친 지금까지도 이 소설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종교의 흉악한 이면을 이야기하던 공지영 작가의 격양된 목소리, 대구 희망원 사건의 피해자를 언급할 때 순식간에 두 눈을 차오르던 눈물이 대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고.
시대를 내다보고 쓴 것 같은 이야기
불매운동, 평점 테러 등으로 소음이 많았지만, 출간 이틀 만에 초판 6만 부가 매진되었을 만큼 반응이 좋아요. 응원받은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정말 그런 느낌 받았어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심적으로도 힘들었던 게 사실이고요. 그래도 많은 사람이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권으로 구성돼 있어 각오를 하고 책을 펼쳤는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어요.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웃음)
고마워요. 제가 바라던 감상이에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해주셨어요. 그런데 앞으로 『해리』를 보실 독자분들은 제발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다들 너무 빨리 읽으시는 것 같아요.
출간기념회에서 『해리』를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에 대해 “진보의 탈을 쓰는 게 돈이 된다는 사실을 터득한 사기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민주화운동을 지나온 과거 70~8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소위 약자의 편을 들고 진보의 기치를 올리면 투옥되거나 가난을 감수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늘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죠. 하지만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고,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정의를 부르짖는 게 무척 쉬워졌습니다. 특히 SNS와 팟캐스트의 등장으로 개인이 스피커를 갖게 되며, 누구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를 통해 진보의 기치를 내걸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감지한 사기꾼들이 대거 몰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어요. 기존 보수 정권에 대한 실망으로 정의에 목말랐던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가 물질화되어 그들에게 권력과 재물을 주었고, 대중들은 누구보다 가장 속기 쉬운 상황에 놓여버렸죠. 그걸 재빠른 악인들이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시대의 징후로 포착한 거예요.
신작을 출간하고 난 뒤, ‘현재를 내다보고 쓴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을 종종 밝히곤 하셨어요. 『해리』 가 출간된 뒤에도 그랬을 것 같아요.
네, 마찬가지였어요.(웃음) 책 출간하고 난 뒤, 하루는 편집자에게 문자가 왔어요. “선생님, 신부 이름을 왜 백진우라고 쓰셨어요?”라기에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더니 “이름이 진우잖아요”하는 거예요. 아니, 그 이름 1년 반 전에 쓴 건데.(웃음) 실제로 SNS에 달린 책 관련 악플 중에도 ‘일부러 이름을 그렇게 지었지?’라는 게 있었어요. 무진 시장의 이야기도, 시장이 이런 횡포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해서 쓴 것인데 지금 와서 보면 마치 작정해서 쓴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장편소설은 집필 기간이 길다는 걸 다들 아시기 때문에 오해하는 독자분들은 없겠지만, 이걸 쓴 저 조차도 현재의 상황과 묘하게 엮이는 걸 보며 소름이 돋았어요.
작가는 시대를 앞서 보는 눈이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작가님은 특히 더 혜안이 있으신가 봐요. 왜 그럴까요?
작가는 현재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예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인간의 기층 심리를 계속 탐구하고, 생각한 세월이 수십 년 쌓였으니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아요. 현재 속에 들어있는 미래의 작은 단서를 포착하는 거죠. 해바라기 씨가 뜰에 떨어진 것을 보고 ‘여름이 오면 여기가 해바라기 밭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예언은 아니잖아요.
한 인터뷰에서 “『도가니』 를 쓰는 동안 온 나라가 무진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당혹스러웠다”고 말씀하셨어요. 반면 『해리』는 ‘온 나라가 무진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쓴 느낌이 들더라고요.
무진은 대한민국 사회의 압축판이에요. 권력, 자본, 언론이 똘똘 뭉쳐서 약자들을 착취하는데, 그 어떤 저항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하더라고요.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가진 게 없는 자를 끊임없이 약탈하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들어요.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이 있나요?
‘너 이런 소설 써놓고, 그런 짓 했구나’라는 악평이 있었어요.(웃음) 난 그게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리뷰 중에는 ‘PPSS(ㅍㅍㅅㅅ)’에 실린 허희정 소설가의 글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 없이, 제 의도를 잘 읽었더라고요. 요즘은 이렇게 눈 밝은 독자들로 인해 긴장하게 돼요. 어떨 땐 나의 약점이나 나태까지도 찾아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악이 빼앗은 가치, 사랑으로 되찾아야 한다
등장인물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악을 파헤치는 한이나는 권력이 있는 집안의 딸이고, 악을 일삼는 이해리는 가정폭력을 일삼는 편부 아래서 가난하게 자란 소외 계층이에요. 대개 진실은 약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 반대였어요.
보통은 약자에게 진실이 있어요. 하지만 그걸 역이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가난하게 자랐고, 소외되었고, 약자인 사람에 대해 한없이 너그러운 선함이 있어요. 이건 분명 좋은 점이고, 우리 사회가 가진 엄청난 잠재력이에요. 그런데 이걸 악용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끊임없이 앵벌이에 사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도 분명 많거든요.
페이스북 화면, 메신저 대화를 소설에 차용한 것도 독특해요. "SNS가 위선과 사기의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하셨는데요.
종교, 언론, 권력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누구나 우상을 원해요.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목말랐던 선과 정의를 사람들이 이를 SNS에서 찾기 시작한 것 같아요.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특정 인물에게 자신의 선의를 투척하고, 영웅을 만들고, 그에 대항하는 이에게는 힘을 모아 응징하고 있어요. 공공성에 대한 측정이 되지 않은 인물, 얼마든지 위선을 행할 수 있는 인물이 대중을 속이기 쉬운 토양이 마련된 셈이죠. 그럴듯한 말만 내뱉으면 되니까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날을 그렇게 자세히 기억해? 세상에 태어나 부당함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1권, 123쪽)’는 구절이 마음에 남아요. 사회적 사건에서 상처는 늘 피해자의 몫일 때가 많은데, 부당함을 당해보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아서 그런 걸까요?
특히 여자이고, 약자일 때 더 그렇죠. 제가 느끼기에는 ‘이명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그게 더 심해진 것 같아요. 특히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면서 약자에 대한 약탈이 노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거든요. 그 신호탄이 용산 참사였고, 쌍용차 노조가 파업했을 때는 국가 장비인 헬기를 이용해 국민인 노조원들의 머리 위로 최루액을 뿌렸어요. 이로써 힘이 있는 자가 최고이고, 그렇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메커니즘이 국가를 뒤덮으며 약자에 대한 혐오가 생겼어요. 이제 당한 사람을 억울한 피해자로 보는 게 아니라 약자라고 보는 거예요. 반대로 가해자는 범죄자가 아닌 강자이고요. 소위 사회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한이나 조차 성추행을 당했을 때는 입을 열지 못해요. 피해자는 약자라는 인식이 있으니까요. 어쩌다 정말 큰 용기를 내 피해를 고백해도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냐. 신부를 모함하지 마라”는 말밖에 듣지 못하는 거죠.
이해리와 백진우는 분명 악인이에요. 필요할 때마다 ‘가면을 바꿔 쓰는’ 위선은 무척 악랄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요. 소설을 읽으며 답답함을 느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게 현실이니까요....... 머리는 가지 말라고 하더라도 영혼이 가라고 이야기할 때, 영혼을 따르는 게 나에게도 좋고 우리 사회에도 좋은 것 같아요. 종종 “선생님, 이길 수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아요. 그런데 법적으로 판결이 나고, 권력을 뒤집는 것만이 승리가 아니라 어둠에 빛을 비추고, 끊임없이 저기 추악한 게 있다고 소리치는 것도 승리예요. 그게 사회를 바꾸니까요. 편의점에 강도가 들었다고 가정했을 때, 다칠 것을 알면서도 달려가서 칼을 뺏는 사람을 보면 우리 가슴에 분명 어떤 울림이 생기잖아요. 모른 척,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우리를 상심하게 만들고요. 한 사람의 용감한 행위가 우리를 움직여요. 결국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가장 쓰기 힘들었던 장면이 있나요?
첫 장면부터 너무 힘들었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최대한 드라이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제 감정을 억눌러야 하니까요. 또 다른 하나를 꼽자면 질문의 의도와 맞는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 이야기가 전개될 때도 힘들었어요. 연애에 대한 감이 다 떨어져서.(웃음)
다른 의미의 힘듦이네요.(웃음) 그럼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은요?
어떤 세력에 의해 눈을 다쳐 병실에 입원한 미카엘 신부가 이나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요. “그들은 독약을 먹고 있어요. 그게 독약인 줄도 모르고, 안 죽네, 맛있네, 이러고 있다구요. 그들이 쥐약이 든 빵을 계속 먹고 있는데, 왜 화가 나요? 안타깝지요, 그 사람들이요.(2권, 169쪽)”라고 했잖아요. 이 대사는 사실 어떤 성직자가 제게 해주신 말씀이에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나쁜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면 화가 나잖아요. 그런데 사실 악한 사람들은 꼭 망해요. 이건 인류 역사상 보편적인 진리예요. 그러니까 화낼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악에 저항할 때 화를 내면 동화돼 버려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해요.
“증오로 몰아가는 싸움을 해서는 안 돼. 그러다가는 적과 닮아버려요.(2권, 260쪽)”라고 쓰셨어요.
네, 악인들이 빼앗아간 가치를 사랑으로 되찾아야지, 분노로 맞서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해리』에서 거듭 반복되는 문장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 부류가 있어요 흔히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늘 ‘좋은 쪽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게 이들의 토양이에요.(1권, 246쪽)‘ 상식은 『도가니』 에서도 무척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요. 책을 읽으며 ’상식이란 대체 뭐지?‘라고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정치인들로 인해 상식이라는 말이 너무 퇴색되었단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정치인들이 제일 나쁘게 전락시킨 단어는 ‘소설’이에요. BBK를 감추기 위해서 이명박이 그랬죠. “여러분, 이거 다 소설인 거 아시죠?” 그때부터 소설이 굉장히 안 좋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어요. 전주시청과 마찰이 있었을 때, 한 관료가 제게 “소설 쓰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서 맘먹고 한마디 했거든요. “전주가 예향의 도시라면서요. 그곳의 관료가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를 비하하면 되겠어요?” 그러니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요. 소설이라는 단어가 자꾸 나쁜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어요. 왜 소설을 그렇게 함부로 사용해요? 그냥 거짓말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소설은 대중들이 즐기는 중요한 예술 장르 중 하나예요. 그걸 폄하하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권력자들을 질타할 수 있어야 하고요.
출판사 제공
사랑하는 종교를 지키는 마음
취재 기간만 5년에 달한다고요. 사건을 파헤쳐가는 주인공 한이나와 작가님이 겹쳐 보였는데, 취재 당시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나가 저보다 훨씬 침착한 것 같은데요.(웃음) 우연히 제가 한 신부, 그리고 봉침 여목사와 엮이고 송사를 치르면서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너무 궁금해서 취재를 시작했어요. 소설의 모티브가 된 대구 희망원 사건과 전주 봉침 목사 사건이 아니었다면 가톨릭이 이렇게 부패했다는 것도, 장애인이라는 약자를 위한다는 인간들이 이렇게 악랄할 수 있다는 것도 아마 몰랐을 거예요. 사실 『도가니』 의 사건은 자애학원에 있던 사람들이 악했던 것인데,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러한 악과 위선이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신성하다고, 신성해야 한다고 믿는 영역인 가톨릭, 그리고 SNS에서 자선을 행하는 장애인 단체의 사업가가 세월호까지 이용하며 악행을 저지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사실 저의 취재 스토리는 한이나가 백진우와 이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과 굉장히 비슷해요.
인터뷰집 『괜찮다, 다 괜찮다』 에서 “저는 가톨릭을 믿는 게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하며 종교에 회의가 든 적은 없나요?
회의보다 그 좋은 종교를 말아먹는 인간들에게 엄청난 분노가 일었어요. 새로운 사실을 알아갈수록 분노를 넘어 슬프더라고요. 이렇게까지 부패했을 줄은 몰랐거든요. 아직도 그날이 기억나요. 그해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이었는데요. 대구 희망원에 관계된 사실들을 취재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내가 믿는 천주교가 이정도로 타락했나’ 싶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나더라고요.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어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동안 펑펑 울었어요. 그 안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지금도 끔찍해요. 언젠가 희망원에 대한 보고서를 『의자놀이』처럼 따로 쓰려고요.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예요.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죽어갔어요.
이 사건은 소설에서 ‘지난 6년 통산 312번째, 최근 2년간 일어난 129번째 비슷비슷한 죽음이었다.(1권, 17쪽)’고 등장해요.
어떤 분이 정정해주셨는데 2010년부터 2016년까지, 6년 사이에 309명이 죽었다고 해요. 희망원 전체 정원의 26.9%예요. 국내 다른 장애인 시설에 비한다면 연평균 7.5배가 넘는 사람들이 더 죽은 것이고요. 이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고상한 척하는 천주교 교구가 관장하고 있었어요. 백번 양보해서 관리감독이 소홀할 수 있었다고 쳐도, 사건에 대처하는 교구의 위선을 보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어요.
회의가 아니라 종교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네요.
맞아요. ‘왜 이걸 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독자의 재미를 반감시킬까 봐 자세히 전할 순 없지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신부의 이야기가 압권이었어요. ‘내가 또 속았구나’ 싶더라고요.
제가 직접 겪은 실화예요. 앞선 사건들을 취재하고 나서 소설을 구상하다가, 너무 가톨릭을 나쁘게만 묘사하는 것 같아서 소개를 받아 그 신부를 만났어요. “신부님 이야기를 소설에 쓰겠다”고 전하기까지 했는데, 그런 비화가 있을 줄 몰랐어요. 그때 느낀 배신감은 정말….(웃음) 그 신부가 『해리』를 봤을까 모르겠네요.
그런 사람들은 책 잘 안 읽더라고요.(웃음)
정말이에요. 책 안 읽어서 아마 모를 거예요.
소설을 읽어야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어요
예민한 사안에도 거침없이 생각을 발언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잡음이 생길 때가 많으시잖아요. 작품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집필에 몰입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나요?
출판사에게 미안하면 어쩔 수 없이 쓰게 돼 있어요.(웃음)
‘언젠가 망한다. 그 언젠가가 올 때까지 손 놓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한 번뿐인 젊음이나 가족, 혹은 생 전체를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언젠가 망한다” 이 말처럼 무책임한 것이 또 있을까, 이나는 잠깐 생각했다(1권, 256쪽)’는 구절을 읽고, 작가님이 계속 발언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맞아요. 그사이에 희생되는 삶의 시간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거든요. 악은 분명 언젠가 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 없잖아요.
후회하지는 않으세요?
힘들죠.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이번에 쓴 대사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고, 심혈을 기울여 쓴 게 있어요. 서유진이 한이나에게 하는 말인데, “열 받으면 내 피부만 망가지고 걱정하면 나만 늙고 울면 코만 풀어(2권, 60쪽).” 후회하면 뭐 해요, 나만 손해지.
작가님이 믿는 선(善)이란 무엇인가요?
생명에 이바지하는 거요. 그게 어떤 것이든. 우리 모두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살리는 게 선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악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버리고, 죽어가게 만드는 거겠죠. 청소년들을 자살하게 만들고, 최저시급도 주지 않은 채 일을 시키고, 약한 사람을 착취하고…. 이 모든 게 악이에요.
그럼 어떤 사람을 좋아하세요?
살리는 사람이요. 주로 엄마들이 그렇죠.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결국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작가후기를 보니 소망하던 작업실을 마련하셨다고요. ‘소망’이라는 단어로 인해 어떤 공간일지 궁금했어요.
지리산 인근에 거처를 하나 마련했어요. 지리산은 품이 넓고, 다른 어떤 산보다 많은 생명이 깃들어있어서 가장 좋아하는 산이에요. 그래서 ‘어머니 산’이라고 부르나 봐요. 지리산가에 제가 지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몰라요.
작가님께 나이 든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어릴 때와 다르게 무언가 많이 보여요. 느긋해지고요. 어떤 일이 닥치면 예전에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제 그 이면까지 바라보게 되었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는 것을 알아요. 나이 들수록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이 더 좋으세요?
훨씬 좋아요. 물론 살이 찌고, 외모가 변하는 건 새롭게 각오를 해야 하지만요. 그런데 저는 제 얼굴을 매일 보니까 변하는 것도 잘 모르겠더라고요.(웃음)
올해로 작가 생활 30주년을 맞이하셨어요. 소설가로 30년을 살아온 소회가 어떤가요?
굉장한 일이다 싶어요. 30년간 소설가로 이렇게 꾸준히 먹고살았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느끼고 있어요. 아직 이 사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요.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뉴스 기사로도 접할 수 있는 일들이잖아요. 그럼에도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할까요?
세상은 이것을 은폐하니까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 공감하고, 우정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에요. 익명의 해리가 누군지 모르고, 무진이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 몰라도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한이나의 방황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그녀에 대한 공감과 우정이 생겨요. 소설을 읽고 이러한 감정을 연습해야만, 우리가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어요.
해리공지영 저 | 해냄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진정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만듦과 동시에, 그 희망을 일궈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뜨겁게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