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고 똑똑하다고 소문난 아이는 명성에 걸맞은 대학에 입학했다. TV나 책에 나오던 물리학자,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등에 업고 입학한 학교는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숨 막혀 주저앉고 싶었던 그의 숨통을 트이게 한 것이 명상이었다. 우연히 명상을 접해 완전히 새로운 체험을 했다. 당시 느꼈던 행복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커다란 깨우침을 얻는 것 같았다. 완전히 명상에 빠져 수행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고, 마침내는 출가를 결심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고, 이제 막 겨울을 보낼 채비를 하던 2월이었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출가가 운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무엇이 괴롭게 하는지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다. 불자가 되기 위한 공부도 좋지만, 못다 한 대학 공부의 끈도 놓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승려 생활을 하며 10년 만에 대학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전부를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0년 넘게 불교에 몸을 담고 공부를 하며 깨달은 것을 『있는 그대로 나답게』 에 담았다. 동서양 철학자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성현이 이야기했던 진리를 도연 스님만의 방식으로 담았다.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고, 자기다움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있다.
삶을 통해 진리를 실험하는 길
이른 나이에 출가하셨어요. 출가를 결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요.
스물하나였습니다. 대학엔 스무 살에 입학했고,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내 길은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할 때였는데 아는 분이 명상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때 명상을 접하고 그동안 몰랐던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됐어요. 말로 설명하고 싶은데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신비한 경험이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주말마다 수행 공동체에 방문하다가 출가까지 결심한 거죠. 돌이켜보면 그때 함께 지냈던 선배, 혹은 스승 같은 분들이 이끌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순수하게 삶의 의미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분들이었어요. 출가와 관련한 내용은 첫 번째 에세이인 『누구나 한 번은 집을 떠난다』에 많이 수록했어요.
한 페이지에 하나씩 인용이 나올 만큼 많은 책과 이야기 등을 인용한 문구가 나옵니다. 마치 문제 하나를 두고 철학자나 옛 성현들과 대화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고전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객관적이고 근거가 명확한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용을 많이 했던 것 같고요. 또 제가 현재 인도철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보니까 학자의 마인드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근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설득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논문이나 자료도 많이 참고했고,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도 그냥 머릿속에 집어넣는다고 나의 것이 되는 건 아니(114쪽)”라고 하셨어요. 스님께서는 책에 쓰인 것을 전부 깨닫고 체득하신 것인지도 궁금했어요.
당연히 전부 그렇다고 할 수 없죠. 다만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저 역시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최선의 답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공유하고 싶을 뿐이죠. 책에도 이야기했지만, 맹신하는 게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완벽히 알고 깨달았으니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혹세무민(惑世誣民)입니다. 사람들을 낭떠러지로 잘못 인도할 수도 있는 거죠. 간디는 ‘자신의 진리를 실험한 글’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 자신도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진리를 실험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거죠. 저 역시 부족한 부분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썼습니다.
스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책 마지막 장에 언급했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철학적으로도 수많은 의미로 해석되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기준으로 사랑을 하잖아요. 저는 꼭 인류애적인 사랑만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자신을 성숙하게 하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추억을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출가자로 사랑에 관해 언급하는 게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사랑을 빼고 우리 인생을 논하기도 쉽지 않죠.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하지요. 사랑과 자비에 관한 의미를 책 뒷부분에 담았고, 저 역시 그런 것들을 통해 성숙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마지막 장에 제 경험을 조금 보태어서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철학적 사유로 자신과 세상을 밝히다
말씀하신 대로 수많은 철학자의 이야기와 성현을 만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는 먼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명상의 정의가 다양하지만, 하나의 문제나 사건에 관해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는 것도 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살아가는 데는 명상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어렵죠. 하지만 살면서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극복할 방법을 찾게 되잖아요. 그럴 때 책에 있는 내용을 자꾸 생각하고, 되뇔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책에 담긴 고전은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온 만큼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종교와 이념을 떠나 모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스님 자신도 “어느 종교에도 속해있지 않다(6쪽)”고 쓰셨어요.
종교를 초월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성철 스님이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왜 불교인이 되었냐’는 물음에 ‘나는 불교인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답하셨습니다. 불교인이라는 틀에 자신을 묶지 않는 거죠. 성철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한 종교의 틀에 머물게 되면 종교가 추구하는 가르침에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요. 당연하게도 종교가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배울 수 있는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는 특히 더 그렇죠. 진정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종교를 초월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가 가진 틀에서 벗어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틀에서 벗어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현재의 우리는 석가모니나 공자, 노자와 같은 종교인이나 사상가의 깨달음을 문자로 전해져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최초 설법자의 원음이라고 한정할 수 없죠.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진정으로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언어를 넘어서서 마음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언어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닫고, 언어를 넘어선 절대의 깨달음의 세계에 가 닿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나 문자가 가진 틀에 묶이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특정 종교인으로 한정 지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현재까지 찾은 방법 중에서 종교인으로 사는 게 스님과 가장 잘 어울리고 맞는 가치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그런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이라고 하셨는데요. 책에도 “저도 이 길을 언제까지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85쪽).”라고 하셨어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성철 스님의 가르침과 맥락이 닿아있는데요. 더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면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는 말처럼, 불교인이라는 것에 평생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아니죠. 물론 현재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종교에 관한 믿음이나 제가 머무는 길에 대한 신념도 필요해요. 그것도 맞지만, 이것만 답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발전이 없어요. 종교인은 곧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데, 정말 훌륭한 가르침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합니다. 좋은 가르침은 어디에나 있고, 미래는 불확실한 거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단정할 수 없는 거죠.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거네요.
흔히 스님들에게 ‘큰스님 되시라’고 인사해요. 물론 좋은 말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꼭 큰스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에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큰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부처님 또한 스승이자 교사였어요.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사람이었던 거죠.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은 선지자나 성현들은 모두 훌륭한 교사였죠. 누군가에게 그 깨달음을 가르치고, 참된 가르침을 추구해나갔으니까요.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공
스님께서는 참된 가르침을 고전에서 찾으신 거고요.
우리 시대는 정말 빠르게 변합니다. 이 시대를 사는 스승이라면, 사람들에게 시대에 맞는 훌륭한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거대한 속도로 밀려오는 변화 속에서 진리에 뿌리를 두지 않고, 현실만 생각하다 보면 제대로 된 가지를 뻗거나 열매를 키울 수 없어요. 그런데 뿌리만 강조하면 시대 변화에 적용하지 못할 수 있죠. 현실을 인지하면서 고전에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뿌리는 생명력의 근간인데, 그걸 무시하고 나눌 수는 없죠. 불교에서도 자각각타(自覺覺他)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남에게 나눌 수 있다는 말이에요. 자기 자신을 깨닫고, 그 이후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뿌리를 잘 내리는 것부터 시작인 거네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게 먼저라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처음에 수행할 때는 거의 말을 안 하죠. 묵언 수행하잖아요. 말을 삼가고, 몸을 삼가고, 생각까지 삼가는 거예요. 신구의(身口意)를 절제하는 거죠. 행동, 언어, 정신, 이 세 가지로 업을 많이 쌓잖아요. 그리고 성찰의 과정을 겪어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이 최초에 뿌리를 내리는 데 도구가 되었던 것이 명상인 건가요?
명상과 철학이라고 할 수 있죠. 최초에 명상이라는 체험으로 수행을 시작했고, 명상과 철학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체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체험에만 머물게 되면 자기 독선주의, 자기주장만 강해질 수 있어요. 주관적인 게 너무 강해지는 거죠. 반면에 경전이나 철학만 중요하게 생각하면 객관적인 게 너무 많아지니까 자기 생각이 사라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주관과 객관이 다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주관적인 체험은 자기만 아는 것이고, 설명하기 힘든 깨달음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 깨달음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있어야 자기 자신을 세우고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어떤 길을 갈 때 선택할 수 있거든요.
명상의 어떤 점 때문에 불자의 길로 가는 것까지 선택하게 되셨나요?
맨 처음 명상을 했을 때 신비한 체험을 했어요. 동양에서는 ‘기’라고 하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감각이 열렸던 거죠. 운이 좋았어요. 또 명상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다 보니까 과거에 했던 죄의식, 죄업, 악행에 대한 업과 같은 것들이 명상과 기도를 통해 극복을 할 수 있었어요. 얼마 전에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 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극 중 인물이 ‘악한 사람은 없다, 악한 상황만 있을 뿐’이라고 해요. 예전의 나는 저를 악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큰 잘못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너무 크게 느껴졌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제가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명상과 기도를 하다 보니까 그때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또 제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했던 주변 사람도 용서하게 됐어요.
명상하는 것만으로 타인의 잘못까지 용서가 되나요?
결국 타인에 대한 용서는 자기 용서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명상과 기도에 깊이 들어가다 보니까 내가 나를 용서하는 힘이 생기는 거예요. 사랑이 커지는 거죠. 명상을 통해서는 나를 바라보는 힘이 생기고, 기도를 통해서는 나를 품는 사랑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명상은 나를 비우는 거고, 기도는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는 것이거든요. 비운 이후에야 절대적인 힘이 보여요. 기도만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길 수 있거든요. 또 명상만 하다 보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어요. 그래서 명상과 기도, 두 가지가 다 필요해요. 나를 비우면서 절대적인 가치에도 의지하게 되는 거죠. 그를 통해 나를 용서하고, 극복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치유할 수 있으니까요.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인 거죠.
누구나 확실히 행복해지는 법
유튜브로 명상 영상을 찍어서 배포하기도 하고, 봉은사에서 명상 체험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도 그런 깨달음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인가요?
지금 바로 여기라는 말을 하죠. 무언가를 채우지 않아도 확실하게 행복해질 수 있어요.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떤 목표를 이루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 짧은 순간을 위해서 긴 과정이 불행하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게 있을까요? 또 그것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행복감이 얼마나 가겠어요. 명상을 통해서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지금 바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탁발하셨을 때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도심에서 탁발하는 스님을 많이 뵙지는 못한 것 같아요.
일종의 수행이었죠. 작은 절에서 발심했고 거기에서는 수행 방법의 하나로 탁발을 했어요. 탁발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는데요. 나를 위한 수행,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 생계유지가 탁발의 이유입니다. 예전에 스님들은 실제로 탁발로 먹을 것을 얻어서 생계유지하셨다고 하니까요. 3년 전 조계종으로 옮겼는데 조계종은 탁발이 금지되어 있어요.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시대에 맞추어 변한 부분이죠.
탁발이라는 게 좀 특별한 경험이기도 한데, 그 경험이 어떻게 남았는지 궁금합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발심 수행자(發心 修行者)에게는 하심(下心)이 굉장히 중요해요.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죠. 탁발하면서 만난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기 위해서는 낮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멸감을 주는 표현을 할 수도 있고, 불순한 태도로 임하기도 해요. 참아야 합니다. 하심과 인욕(忍辱)을 기르는 거죠. 참고, 욕됨을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처음 출가하고 얼마간은 운명이라고 믿었던 출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153쪽)”는 이야기도 쓰셨어요.
많은 사람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게 힘들었어요.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출가를 선택했는데, 출가 후에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많이 노력했죠. 그러다 일반적인 수행자의 길만을 가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세상과 소통하고, 배우고 싶은 공부도 하고 싶었어요. 내가 잘하는 걸 하면서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학교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행자로의 삶이 만족스럽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데 제한이 있다는 게 힘들었거든요. 수행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공동체에 계신 분들을 설득하고, 학교에 다니며 수행자의 길을 걷는 방법을 마련했어요. 학교로 돌아가 우여곡절 끝에 졸업도 했고, 대학원도 진학하게 된 거죠.
스님도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계속 들여다보고 방법을 찾았던 거네요.
그렇죠. 저와 같은 시기에 출가하고, 동반 입대한 형이 있었는데 그분은 제대 후 환속하셨거든요. 지금은 잘 살고 계시고요. 그분에게는 그게 길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승려로 사는 게 잘 맞는 옷인 것 같았어요. 물론 학교 다니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대전에 있는 학교에 3~4일 정도 있으면 서울에 나머지 절반을 있어야 했죠. 그래서 힘들게 졸업했어요. 만약 공부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만두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두 가지 모두 다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좀 오래 걸리더라도 끝낸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나를 채우다
혹시 스님도 마음이나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이 잘 안 되는 게 있나요?
당연히 있죠. 이타적으로 사는 것, 순수하게 베푸는 게 힘들어요.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신을 먼저 이롭게 한 이후에 남을 이롭게 한다)를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타적인 것에 대한 무게보다는 자리에 대한 무게가 큰 거 같은 거예요. 자신을 들여다보며 발견하는 이기심을 언제 극복할 수 있을지가 큰 질문이에요. 제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적으로 좋은 기운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것 역시 나의 이미지를 위한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요. 저 역시 계속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자기만의 이유를 가진 상태(122쪽)’라고 자유에 관해서 정의하셨는데요.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모라도 타인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기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이해하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만드는 게 자유라고 생각해요. 남의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만의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차피 누구도 제대로 나를 이해할 수 없어요. 자기만의 이유를 만드는 게 자기만의 삶이에요. 남이 만든 이유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따라가면 관념에 갇히는 거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해요. 남은 어차피 나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나만의 이유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스님은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우신가요?
그렇지 않죠. (웃음)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있고,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 속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나를 받아들였을 때 내가 행복해지고 편안해지고, 나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나는 왜 평범하게 살 수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나는 왜 이렇게 이상한 거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적당하게, 보편적으로 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미 그럴 수 없더라고요. 태어날 때부터 남과 비슷하게 살 수 없게 태어난 것 같아요. 그리고 좀 더 생각해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남과 다르게 살도록 태어난 거예요.
모두 비슷한 듯 보이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거네요.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로 생각합니다. 답답한 부분이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얽히고설킨 삶의 인연, 이 복잡한 실타래 속에 나만 머무는 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구나’ 생각하니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도 다 다르게 보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정신으로 보편적인 걸 극복하려고 의지를 보이고, 문제가 있을 때 주체로 나서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자나 명상가로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인터뷰 중 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면요?
그리스 여행담 작가인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프로나오스에 새겨진 말이 있어요. 흔히 소크라테스가 먼저 한 이야기로 아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에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게 힘겨운 세상을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이에요. 알아야겠다는 의지를 낸다면 행복에 한 발자국 다가간 거로 생각해요. 그게 명상과 철학의 시작이죠.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게 행복의 바탕을 이루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 나답게도연 스님 저 | 특별한서재
최고의 휴식인 명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 하루 좀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지혜, 그리고 위로와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