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달, 한 도시에서 사는 삶을 선택하고 그 이야기를 독립출판으로 출간하기도 했던 정은 작가는 2014년, 다른 도시 대신 소설을 선택했다. 한 달을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서점, 극장, 무인 경비 회사, 절, 고시 학원 등에서 일하며 생활하던 작가는 소설 쓰기가 여행과 무척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책을 듣는 시간』의 초고가 그때 완성되었다. 하지만 번번이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다. 어느 공모전에서는 최종심까지 올랐지만 당선되지 않았다. 그만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계속 하는 게 맞다”고 한 어느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정은 작가는 계속 썼다. 『산책을 듣는 시간』은 제1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수지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다정한 세상 속에 사는 인물이다. 그에게 듣지 못하는 불편함은 없다. 엄마와 둘만의 언어로 대화하고, 자신만의 고요를 즐기고, 몸으로 노래를 부른다.『산책을 듣는 시간』은 장애를 남다른 능력이라 말하는 수지의 씩씩함, 뜻하지 않은 이별과 독립이라는 매운 성장통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책에서 ‘장애가 있으면 불편하다’는 식으로 쓰니까 사람들 인식도 따라가는 것 같아요. 책도,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정은 작가. 『산책을 듣는 시간』 은 장애라는 능력을 가진 수지와 자기애 강한 할머니와 함께 성장하는 친구라는 조금 다른 존재들을 보여주면서 계속 질문한다. 그 해본 적 없는 질문 덕분에 독자도 수지와 함께 성장하게 될 것이다.
환경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표지가 작품을 많이 말해주고 있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네, 저도 정말 좋았어요. 원래 좋아하던 이윤희 작가님이 그려주셨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표지 작업을 해주셨는지 몰랐거든요. 나중에 알았어요.
게다가 뒷표지는 지금 저희가 인터뷰 하고 있는 그 장소예요. 맞죠?
맞아요. 아마 이윤희 작가님도 이곳에 자주 오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그려주신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뵌 적이 없어서 얼굴은 모르지만요.
이 공간에서 『산책을 듣는 시간』도 만들어진 건가요?
네, 맞아요. 여기서 많이 썼어요.
우선 제1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을 축하 드려요. 수상 연락 받고, 어떠셨어요?
오래 잡고 있던 원고였어요. 초고를 2014년에 썼거든요. 오래 고쳤죠. 이게 책으로 나올 가능성은 없겠구나, 하고 약간은 포기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화를 받았고요. 그래서 정말 놀랐어요.
왜 가능성이 없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다른 공모전에도 냈었는데요. 최종심에만 오르고 계속 떨어지더라고요.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만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요. 그러다가 수상 소식을 들었죠. 또 심사위원 분들 모두 제가 굉장히 좋아했던 분들이거든요. 그분들이 쓰신 책도 계속 읽어왔고, 어떤 식으로든 그분들의 글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더 기뻤어요.
많이 하는 생각인데요. 공모전과 작가 사이의 궁합도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시기에 잘 만나는 일도 작품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고요.
맞아요. 그래서 만약 제가 했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 얘기를 꼭 해드리고 싶어요. 작품과 심사위원 사이의 궁합 문제도 있는 거니까 절대 글이 부족해서 떨어졌다는 생각은 안 하시면 좋겠다고요.
고독한 작업이잖아요. 작가님만 해도 2014년에 초고를 완성하고 2018년에 수상을 하신 건데요. 그 시간을 혼자 의심하지 않고 해내기 쉽지 않은 일이에요. 방금 말씀이 쓰시는 분들에게 큰 응원이 될 것 같아요.
사실은 저도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다른 일을 하려고 자격증도 따고 그러는 중이었는데요. 친구들이 그러지 말고 계속 쓰라는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어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요.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계속 하는 게 맞다, 는 말을 들은 적 있거든요.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주변 상황이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글에 대한 소망은 계속 갖고 있었던 거죠?
오래 전부터 쓰려고 했는데 진득하게 앉아서 쓰질 못했어요. 계속 완성을 못해서 오래 걸렸고요.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10년도 더 된 것 같아요. 아주 오래됐어요. 단편을 쓰긴 했지만 좋은 글을 읽고 나면 내 글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랬죠. 때문에 늘 완성이 덜 되었다고 생각했고, 자꾸 쓰지 않게 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더 오래 걸린 게 아닌가 싶어요.
글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선생님이 “책장을 둘러보고 거기 없는 걸 쓰세요”라고 하시는데 그 말에 갑자기 놀랐어요. 그냥 다른 걸 쓰라는 얘기잖아요. 쓰려면 잘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렇다면 나도 쓸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어요. 아마 그때부터 쓰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항상 있어요. 그리고 쓰고 싶으신 분들께도 꼭 이 얘기를 전하고 싶어요.
수상이 남달랐을 거라 짐작한 이유 또 하나는 작가 소개 글 때문이었어요. 그동안 서점, 출판사, 방송국, 카페, 무인 경비 회사 등에서 다양한 일을 해오셨잖아요. 게다가 매년 한 달 이상 다른 도시에 머물기도 했다고요?
5년 전만 해도 소원이 그냥 1년에 한 달은 다른 도시에서 사는 것이었어요. 10년 전쯤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후 계속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려면 남은 11개월은 일을 해야 하잖아요. 한 달을 다른 도시에서 살려면 정기적인 직업을 갖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다양한 일을 한 거고요. 2014년에는 그렇게 안 살고, 한 달 동안 아무데도 안 가고 집에서 소설만 썼어요. 한 번은 쉬어 가자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것도 재미있더라고요. 한 달 다른 도시 가는 것과 한 달 동안 집에서 소설만 쓰는 것이 통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더 경제적이기도 하고요.(웃음) 그때부터 한 달 동안 다른 도시를 못 가는 해에는 한 달 동안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둘만의 언어
주인공 수지나 한민뿐 아니라 할머니, 엄마, 고모 등 조금 ‘다른’ 등장인물들이 참 새롭고 반가웠어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어떤 특별한 장면이 있었나요?
유독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를 보면 할머니 캐릭터가 비슷하잖아요. 시골에서 올라왔거나 도시를 모르거나 하죠. 그게 이상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주변에 계신 할머니들은 다르잖아요. 저희 엄마도 이제는 할머니인데, 달라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니까요. 달라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했고요.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주변에 있는 평범한 캐릭터예요. 소설에 많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죠. 저는 그냥 흔히 있는, 평범한 인물을 담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할머니나 고모는 특히 그래요.
원래 이 소설의 시작은 수지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수지의 아빠와 엄마가 주인공이었고요. 수지와 한민은 주변 인물이었는데 쓰다가 주인공이 바뀐 거예요.
아, 그런가요? 쌍둥이 아빠라는 설정 언급이 잠깐 나오죠. 궁금했어요.
그 이야기가 쓰면서 다 빠지게 되었고요. 수지는 제가 10년 전에 경험한 일에서 나온 인물이에요. 친구들과 단편 영화를 찍은 적이 있는데요. 저는 사운드 담당이었거든요. 촬영지에서 헤드폰을 꼈는데 정말 다양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때 내가 아주 일부분밖에 못 듣고 살았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조금 적은 소리를 듣는다는 이유로 청각장애라는 말을 만든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들었죠. 세계에 있는 소리가 10,000개라면 인간은 10정도 들을 텐데 그보다 조금 더 적게 듣는다고 장애라고 하는 게 이상했어요. 그런 생각으로 처음에는 아주 낮은 주파수의 소리만 듣는 인물을 쓰려고 했고 쓰다 보니 수지가 되었어요. 한민은 아마 가장 실제에 가까운 인물일 거예요. 제가 실제로 만난 어떤 순간을 모아놓은 게 한민이거든요. 여행하다가 개와 함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큰 가방에서 개 밥그릇을 꺼내 정성스레 닦고는 밥을 주는 모습도 실제 제가 본 거예요.
수지라는 인물의 생각을 따라가다가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많았어요. 심사평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관념까지도 완전히 깨 버린 탁월한 작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말 공감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라는 책이 있어요.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에게 말 대신 수화를 먼저 배운 작가가 쓴 에세이인데요. 그 책을 읽고 많이 깨달았어요. 미국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따로 있고요. 공동체 같은 게 있대요.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이 담겨 있는데요. 그 책을 읽고 충격을 많이 받아서 알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산책을 듣는 시간』을 쓸 때 아마 그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마음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1년 정도 노력한 끝에 나는 몇 개의 단어를 발음할 수 있었다. 입 모양이 정확한 사람과 마주 보고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면 약간의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마침내 내가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다며 모두가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정상이 되었다며 기뻐하는 꼴이라니. 배신감이 들었다. 그전까지 나는 부족함 없이 충만한 삶을 살았는데,(32쪽)
제가 어렸을 때 눈이 아주 나빴어요. 처음 시력을 쟀을 때 0.1정도였는데요. 저는 세상이 원래 그렇게 보이는 건 줄 알았던 거죠.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그때 안경을 맞춰 썼거든요. 그런데 쓰는 순간 너무 화가 났어요. 어떤 배신감을 느껴서 안경을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고 일 년 동안 쓰지 않았죠. 그런 마음도 떠올리게 됐던 것 같아요.
“못 듣는 것은 그들 삶의 핵심적인 정체성이었다.”(62쪽)는 문장에서 아주 오래 머물러 있게 되더라고요. 작가님께서 수지의 내면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 애쓴 장면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어요.
수지가 어렸을 때 엄마와 수화 나누는 장면을 공들여 쓰고 싶었어요. 둘만의 언어죠. 그런 언어를 갖고 있다가 추방당하잖아요. 둘만 아는 언어인데 한 사람이 더 이상 그 말을 하지 않으면 그건 죽은 언어니까요. 실제로 그런 언어가 있다고 들었어요. 세상에 어떤 언어를 쓰는 사람이 단 둘만 남았는데요. 그 둘이 싸워서 대화를 나누지 않자 언어학자들이 화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요. 쓰면서 그 이야기도 생각나더라고요. 그렇게 수지는 아마 그 이후로 계속 추방당한 느낌을 간직한 채 살았을 테니까요. 그 마음을 잘 전달하고 싶었어요.
엄청난 고독감이에요.
외국에 나가보면 제가 외국어를 잘 못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유치원생처럼 대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한국에서는 신문도 읽을 수 있는(웃음) 대학생인데 그 나라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제가 유치원생처럼 사고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게 되게 놀라웠어요. 동시에 나도 다른 환경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었으면
한편 ‘작가의 말’에는 두려움과 자괴감을 적기도 하셨어요.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어려운 작업이었던 거죠?
책 나오기 전에 악몽을 엄청 많이 꿨는데요. 우선 제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잖아요. 또한 인공 와우 수술을 받는 것은 개인에게는 아주 큰 결정이고, 청소년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 소설을 보고 수술을 안 받겠다고 결정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 이후의 삶에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너무 걱정됐어요. 제가 실제 겪지 않은 채로, 자료를 바탕으로 쓴 건데 이걸 믿고 자신의 삶을 결정할 청소년들이 있을까봐 그게 정말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 걱정은 해결이 됐나요?
이 소설은 그 길만이 아니라 이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이지만 아직도 무서워요. 계속 무섭죠.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청소년들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자기 삶이니까요. 내 선택과 내 책임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줄 수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그런 책을 좀 더 써야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수지가 인공 와우 수술을 한 후 불행함을 느꼈던 것은 수지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또 수지가 수술과 동시에 집도 잃어버리죠. 공간과 자신은 같은 거라는 생각을 항상 했는데요. 그 공간을 빼앗기는 경험은 언제든 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공간을 결정할 수 있을 때는 사실 별로 없어요. 산다는 게 실은 그런 일이 곁에 늘 기다리고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럴 때, 이미 닥친 상황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원치 않게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고, 그것이 성장이라고 한다면요. 성장의 기회를 수지에게도, 엄마에게도, 다른 가족에게도 주고 싶었어요. 성장의 기회가 왔을 때 스스로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핵심이 아닐까요. 저도 거의 스무 살까지 같은 집에 살았는데요. 건물을 새로 짓느라 그 집이 사라졌어요. 그 후로 내가 되게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생각이 들고 그 기억이 여기에 담겨 있기도 해요.
그 수화는 우리 집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이 수화로 사전을 만든다면 우리 집의 도면이 될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작은 의자-달-달-구름-접시-접시-책장-문-식탁-서랍장-마루-벽장-마당의 향나무. 이것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였고, 그것만으로도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되었다.(10-11쪽)
마침내 수지는 산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하는데요. 왜 산책이었나요?
사실 산책은 사적인 경험이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산책했는지 알기가 어려워요. 수지가 하게 된 ‘산책을 듣는 시간’이라는 사업은 다른 사람의 산책을 듣는 사업인데요. 예전에 친구들과 여행을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어느 날은 각자 다니고 와서 서로 얘기해주기로 했죠. 그런데 분명 같은 곳을 다녔는데도 돌아와서 하는 얘기들이 각자 다른 거예요.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나의 산책과 친구에게 들은 산책이 겹쳐지면서 그 길이 완전히 새로워지는데 그 경험이 정말 좋더라고요. 아마 그래서 쓰게 된 것 같고요. 다른 사람의 산책을 경험하는 것의 특별함에 더 초점을 맞추려고 했어요.
작가님에게도 산책은 특별한 것이겠죠?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친구는 산책을 할 때 걷는 속도와 뇌가 움직이는 속도가 딱 맞으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대요.(웃음)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도 그렇게 믿고 잘 안 써질 때는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그래요. 산책은 몸이랑 정신을 동기화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아요.
달리기도 하세요?
실은 수상 소식을 듣고 기뻐서 이곳 카페 사장님께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쁜 소식이니까 2.5㎞를 달려서 왔죠. 와서 소식을 전하는데 사장님은 “축하합니다”라고 하고 하던 일을 하시는 거예요.(웃음) 그게 끝이었어요. 사장님이 저보다 더 기뻐한 적이 있었나, 생각을 해봤더니 제가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얘기했을 때더라고요.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얘기했을 때는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기뻐하셨어요. 여기 사장님 같은 분에게는 수상보다 달리기가 더 축하할 만한 일이었던 거예요.
그냥 그래도 괜찮겠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125쪽)라는 할머니의 말은 작가님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거든요. 쓸 때, 무엇을 떠올리면서 쓰신 건가요?
처음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인데요. 부모님이 원하는 삶은 다를 것 같았어요.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야 할 것 같고, 결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렇더라고요. 당시 인도에서 ‘타블라’라는 악기를 배우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 얘기를 해주셨어요. 네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하고, 삶은 한 번뿐이니까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요. 그때는 그 말이 잘 이해 안 됐는데 10년이 지나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할머니의 얘기를 들었지만 아마 수지도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좀 시간이 지나면 알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된 10년은 어떤 시간이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제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 계속 부모님 핑계를 댔던 것 같아요. 자신이 없으니까 부모님 때문에 못하겠다, 한 거죠. 하지만 사실은 내게 용기가 없었던 거거든요. 그걸 직시한 순간이 있었어요. 내가 나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인정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구나 생각을 했고요. 인정을 하고 나니 그때의 말도 이해가 됐어요. 그때 이후로는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계속 해왔다고 생각해요.
소설가로서, 관심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세요?
최근에 <서치>라는 영화를 봤는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잖아요. 어린 친구들은 영상으로 기록을 하고요. 문자에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도 고민을 해요. 그 안에 많은 것들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것이 문화고 현대인들의 생태계인데 지금 그런 것을 담은 책은 거의 없는 것 같거든요. 지금의 책은 20세기의 방식이잖아요.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거죠.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는 방식도 새롭게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정말 다른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모습일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생각을 많이 해보고 있어요.
만약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요. 소설가가 안 되었다면 반찬가게나 돌잔치 전문 사진사가 되었을 것 같아요.(웃음) 좋아해서요. 아마 그런 일을 하며 만족하고 살지 않을까 싶어요. 책 나오고 정말 기뻤어요. 책을 받아들고 집에 혼자 앉아 있는데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구들과도 사이좋은 편이고, 부모님도 건강하신 편이고요. 하지만 일 년 뒤에 전혀 다른 곳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별로 무섭지 않았고요. 그냥 그래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나 자신과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겠죠?(웃음)
그런가봐요.(웃음)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수지의 엄마, 아빠 이야기는 쓰실 계획 없으신가요?
아, 써야죠. 이번 책을 고치면서 빠진 이야기인데요. 아마 SF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꼭 다시 쓰고 싶어요. 실은 이번이 첫 소설이고, 다음 소설을 못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이야기를 다 넣다보니 그 이야기는 빠지게 된 건데요. 빠진 이야기가 여러 가지 있으니 아마 여러 이야기가 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마르첼로도 그렇고, 시도 그렇고,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좋아하는 편이고요. 산책도 좋아해서요. 이 책이 나왔을 때 친구들이 걱정도 했어요. 좋아하는 걸 여기 다 써버려서 다음 소설을 쓸 수 있겠느냐고요. 저도 진짜 고민했었는데요. 한 친구가 영화 <매그놀리아> 얘기를 해줬어요.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이 좋아하는 것을 <매그놀리아>에 다 넣어놓고 이후에 하나씩 빼서 영화를 계속 찍었다면서 너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위로가 됐어요.(웃음)
산책을 듣는 시간정은 저 | 사계절
완벽했던 침묵의 세계에서 불완전한 소음의 세계로 옮겨진 수지는 낯선 세상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새로운 발걸음을 준비한다. 눈이나 귀가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지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