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을 조각내듯 행과 연으로 나누어 분석했던 학창시절의 국어수업은 늘 어렵고 따분했다. 마음으로 감상하기보다 시어의 함축된 의미를 찾기에 급급했고, 시를 읽고 느낀 감정이 해답지에 나온 정답과 같아야 비로소 시를 제대로 아는 것인 줄 알았다. 문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인데, 교과서에서는 왜 그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이자 시인인 박일환 저자는 학교의 이러한 수업 방식이 늘 아쉬웠다고 한다. 빠듯한 진도에도 불구하고 국어 수업 중, 구태여 학생들이 시를 직접 써 보는 시간을 빼놓지 않았던 이유다. 교과서에 실린 시를 해석하는 것에서 나아가 스스로 시를 써 본 학생들은 소곤소곤 내리는 봄비에서 풀잎을 향한 배려심을 발견하고, 감나무를 보며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비로소 시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된 것이다.
박일환 저자는 지난 8월, 30년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학교에서 은퇴했다. 이후 학생들이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자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청소년을 위한 시 쓰기 공부』를 펴냈다. 책에는 시를 읽고, 쓰는 방법부터 교과서에서 말하지 않는 ‘시를 대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감정을 통하게 하는 ‘시’의 힘
『청소년을 위한 시 쓰기 공부』를 펴낸 계기가 있나.
국어교사로 오래 일하면서 한계에 맞닥뜨릴 때가 많았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수업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늘 미진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의 특성과 아름다움에는 정답에 있는 게 아닌데, 마치 있는 것처럼 가르쳐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시를 올바로 느끼고, 쓰는 법에 대한 길잡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국어 시간에 하는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하는 게 아니라, 시에 관한 색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국어교사인 아버지와 청소년 딸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필 초기에는 강의식으로 내용을 설명하듯 글을 썼는데, 막상 쓰고 보니 영 재미가 없었다. 또 혼자 설명하는 일방적인 전달 방식보다, 독자가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데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국어교사인 나와, 독자 또래의 청소년 딸을 가상해 이야기를 구성했다. 꽤 많은 원고를 썼는데 중간에 엎고 다시 작업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실제로 두 딸의 아버지인 것으로 안다.
그렇다. 하지만 내 딸들은 20대이기 때문에 책에 등장하는 딸 ‘솔비’는 가상의 인물이다. 다만 ‘솔비’라는 이름만큼은 실제 두 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 그동안 가르쳤던 학생들 또래의 딸과 시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하면서 썼다.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인용해 설명한 것이 좋았다.
그동안 가르쳤던 국어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쓴 시의 일부를 선정한 것이다. 가능하면 한 학년 동안 반드시 시를 한 편 정도 써보게 하려고 노력했다. 시 수업을 하려면 적어도 3~4시간을 잡고 시에 대해 설명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고, 쓴 시에 대해 이야기해 다시 다듬고 고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국어 시간에 시만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학생들과 함께 시 쓰는 시간을 마련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학창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시가 이런 거구나’라는 것을 꼭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시 수업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나?
내가 쓴 청소년시집 『학교는 입이 크다』를 교재 삼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골라 필사한 뒤 감상평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는데 수업마다 ‘열일곱 나의 친구에게’라는 세월호에 관련된 시를 골라 적어오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시집 3쪽에 달하는 긴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옮겨 적는 학생들을 볼 때 ‘감정이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한 친구는 수업 시간에 그 시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시가 아이들의 마음을 출렁이게 하고, 감성을 건드리는 것이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시의 힘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했던 기억이다.
직접 써봐야 알 수 있다
수업진도를 맞추기 빠듯한 학교 교육 일정에서도 시 쓰기 교육을 빼놓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좋은 시를 감상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 중 하나다. 하지만 감상은 타인의 작품을 보는 것이라 시의 참맛을 느끼는 데 한계가 있다. 아무리 허술하고 부족해도 자신이 직접 시를 써보고, 시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치고 다듬는 과정에서 비로소 시가 무엇인지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해보는 것만큼 오래 남는 교육은 없다.
한 번도 시를 써보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분명 어려운 경험일 것이다.
시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이야기했다. “모르는 단어, 어려운 단어는 절대 쓰지 말고, 구체적으로 써라.” 작가는 알고 있는 사실이더라도 독자는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생각하고, 그때의 정황과 사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을 때 독자는 그 시에 공감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쓰고 싶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했던 구체적인 행동과 장면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려 노력했다.
학생들이 생각보다 훌륭한 시를 완성해서 놀랐던 적도 있을 것 같다.
책에 인용된 것이 모두 그런 시들이다.(웃음) 한 학생은 학교생활을 주제로 시를 썼는데, 수업시간에 자리에 앉아있는 학생들을 딱딱한 ‘고체’에, 쉬는 시간의 학생들을 흐르는 ‘액체’에 하교할 때의 학생들을 자유로운 ‘기체’에 비유했다. 아름다운 시어를 쓰고, 표현이 훌륭한 시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이런 기발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맞닥뜨릴 때마다 놀라곤 했다.
시 쓰기 수업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나타난 변화가 있나.
교육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의 잠재력을 생각할 때, 시를 쓴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훗날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시를 읽고 공감하며 감동했던 기억, 직접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각했던 경험은 분명 아이들의 정서를 풍요롭게 하는 데 쓰일 것이다.
자유로운 감상에 앞서, 의미를 분석하는 데 급급한 문학 교육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다. 시인이자 교사의 입장에서 학교의 문학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나.
지나치게 평가와 시험에 종속돼있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는 게 어렵다. 이건 문학뿐 아니라 전반적인 학교 교육이 가진 한계다. 학습의 결과를 점수로 계량화시키기 때문에 평가를 위한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 수업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쓴 시를 가지고 평가를 하면 객관성에 문제가 생긴다. 또 국어 과목은 한 학년을 2-3명의 교사가 반을 나눠 가르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합의해서 시험 문제를 내야 한다. 창의적인 수업을 진행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시 쓰기 수업을 하려 해도 일단 기본적인 진도를 모두 나간 뒤, 여유 시간을 마련해야 가능하다. 평가권이 교사에게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고질적 문제라고 본다. 점수화된 평가가 아니라 각 교과목에서 가르치는 능력을 세분화해서 교사가 서술형으로 평가하는 방식이 도입되어야 수업의 방향도 바뀔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평가권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교사는 주어진 범위 안에서, 교육청 지침에 따라 서술형과 객관식 문제의 퍼센트를 맞춰 시험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문책을 받는다. 교사가 자율적으로 논술, 감상문 등 다른 형태의 시험을 통해 학생들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30년간 교직생활을 했는데 과거와 현재 학생들이 시를 대하고, 생각하는 태도에 있어 차이가 느껴지나.
많이 변했다. 과거에는 학교마다 문예반이 반드시 있었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문예반이 싹 사라지기 시작했다. 논술반, 독서토론반 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늘 학생 모집이 되지 않아 운영이 어려웠다. 시대와 환경이 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것들이 책 말고도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들 마음속에서 ‘시심(詩心)’까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지금도 시를 읽고 공감하고, 눈물 흘리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서 자연스레 문학을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할 것이다.
학생들이 시를 친근하게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려운 시를 무턱대고 권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청소년시집을 읽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내가 처음 청소년시집을 출간했을 때, 편집자가 학생들에게 시집을 보여줬더니 “이런 시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고 말해서 ‘성공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웃음) 시인들도 아이들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가 있는 시를 많이 써서 청소년시집이 더 확산되길 바란다. 또 언젠가 시를 웹툰으로 만든 작품을 보았는데,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 나와도 좋을 것이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매체와 시가 융합하는 시도가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사 시인’ 아닌 ‘시인 교사’가 됐어야 했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떻게 교사가 된 것인가?
글을 쓰고 싶어서 국문과에 갔는데 선배들이 대부분 부전공으로 교직이수를 하기에 대세에 따라 교직이수를 했다.(웃음) 교사의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업만 들었고, 성적도 별로 안 좋았다. 그러다 졸업하고 직장을 잡을 때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 시험을 보았는데 운 좋게도 덜컥 합격했다. 처음엔 두렵고 막막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가르쳐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더듬더듬 혼자 고민하면서 길을 찾아갔던 것 같다.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와 고민을 교사가 된 이후부터 했던 셈이다. 신임 교사 시절에는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교실에 자주 드나들고, 주말엔 함께 등산도 했다. 규격화된 수업이 아닌 색다른 수업을 해보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교사를 하길 잘했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
교사가 된 첫해 여름방학이었다. 그때 당시 27세였는데, 방학을 맞아 무전여행을 떠났다. 고비가 찾아오는 순간, 우리 반 아이들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걸으니 저절로 힘이 나더라. 그때 ‘학교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반면 시인을 꿈꾼 것은 열일곱 살 때부터였다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문학에 관심이 많고 글을 잘 쓰는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내가 모르는 높은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시인, 소설가는 교과서에 있는 사람이 전부인 줄 알았으니까.(웃음) 시를 쓰는 친구가 위대하고 멋져 보였다. 그러면서 나도 그런 세계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움텄고, 시집과 문학잡지를 사서 보며 조금씩 시인이 되길 꿈꿨다. 하지만 신이 시 쓰는 재능은 주지 않으셨던 것 같다. 백일장에 나가면 장려상은커녕 입선도 한 번 못 해봤고, 대학에 입학하니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늘 주눅 들어 지냈다. 정식으로 시인이 된 건 37세의 일이다. 당시 빛나는 재능을 가졌던 친구들은 대부분 시인이 되지 않았다. 나는 시인이 되기까지 20년이 걸렸지만, 그 시간을 돌아보면 대견하다. 뛰어난 시인, 훌륭한 시인까지는 못 갔어도 성실하게 시를 쓰는 사람정도는 된 것 같다.
시인과 교사는 얼핏 생각하면 결이 전혀 다른 직업으로 느껴진다. 시 쓰는 작업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해왔을지 궁금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고 해서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나오는 시가 진짜 시다. 그런 점에서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시는 말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철학적 생각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남과 다른 시선으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삶과 분리된 시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시적인 것들을 많이 끄집어낼 수 있었다. 교사로 일하며 시를 쓰는 삶이 참 행복했다. 행운이었던 것 같다.
퇴직하며 펴낸 교육 시집 『덮지 못한 출석부』 후기에 ‘교사 시인이 아니라 시인 교사가 되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고 썼다. 어떤 의미인가?
교사 시인은 ‘시인’에 방점이 찍혀 있고, 시인 교사는 ‘교사’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교사보다 시인에 좀 더 치중한 삶을 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늘 문인들 모임이나 문학 행사가 먼저였고, 젊었을 때만큼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지도 못했다. 지난해 명예퇴직을 한 이유다. 교육에 열정적인 젊은 선생님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학생들에게 더 좋은 일일 것 같았다. 퇴직하면서 교사로 더 열심히 살지 못한 아쉬움, 관성적인 나태함에 대한 반성을 많이 했다.
퇴직한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생활이 단조로워졌다. 낮에는 책 읽고 글 쓰고, 저녁에는 사람들을 만난다. 강의 요청도 종종 있다. 단조롭지만 심심하지는 않다.
『청소년을 위한 시 쓰기 공부』는 어떤 이들이 읽으면 좋을까.
시에 대해 알고 싶은 청소년은 물론이고, 특히 국어 교사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후배 교사들로부터 ‘시를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다. 실제로 시중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시 쓰기 책이 별로 없다. 이 책이 시를 조립하듯 가르치는 게 아니라, 시가 무엇이며 어떻게 감상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는 책이었으면 한다.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함축적 언어, 은유 같은 것에서 벗어나 시에 대해 다시 깨닫고, 나도 써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봄비
- 유하은
봄비가 새록새록 내린다.
가녀린 새싹들 다칠까 봐
조심스레 내린다.
풀잎 위 봄비들은
그런 풀잎들이 무거울까 봐
또르르……
굴러 내려온다.
책 서문에서 시를 쓰는 게 어렵다면 ‘시심을 품고 시처럼 사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시처럼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
평생 시 한 편 읽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왜 시를 읽어야 할까? 책에 인용된 유하은 학생의 시 ‘봄비’가 이 질문의 답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새싹이 다치고, 풀잎이 무거울까봐 살며시 내리는 봄비의 마음은 결국 이 시를 쓴 소녀의 마음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연민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시심이다. 몇 년 전, 교육부의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 돼지”라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적 있다. 그때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얼마 전 구의역에서 청년노동자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는데, 당신의 아들이었다면 어땠겠느냐.”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내 자식이 아닌데,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하나. 그건 위선이다”라고. 공감력은 물론 상상력조차 없는 것이다. 사람들 마음속에 연민이 사라질 때 진짜 헬조선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여린 것을 보면 보듬어주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경탄할 줄 알고, 불쌍한 것을 보면 도울 줄 아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게 시처럼 사는 삶이다. 시는 여린 것, 약한 존재에 대한 올바른 마음을 가르쳐준다.
청소년을 위한 시 쓰기 공부박일환 저 | 지노
다양한 사례를 들어 시라는 게 무엇이고, 사람들이 왜 시를 쓰고 읽는지, 시와 일상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나아가 실제로 시를 쓸 때 도움이 되는 이론과 방법까지 조곤조곤 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