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화와 전문화의 시대였던 20세기에는 객관화된 지식 즉, 형식지(形式知, explicit knowledge)가 중요했다. 교과서를 외우고,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중요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습득한 지식은 주어진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에 좋았다. 하지만 형식지는 더 이상 매력적인 자산이 아니다.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런 지식보다 필요한 것은 암묵지(暗?知, tacit knowledge). 자신만이 독특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내재화된 지식인 암묵지는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영역을 자동화시키는 21세기에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다. 21세기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전문가보다 고도화된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이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이 말하는 ‘개척하는 지성’이란 이 같은 새로운 질서, 뉴 노멀(New Normal)이 형성되는 21세기의 사회를 “문명사적 대전환기”로 이해하고 대응하는 방법론에 가깝다. “문제는 위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20쪽)에 있다고 말하는 염재호 총장은 『개척하는 지성』에서 네트워크화로 점차 개인화되는 21세기의 노동 구조를 살피며 개인이, 대학이, 그리고 사회가 어떻게 가치를 재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짙게 드리운 불안과 좌절에 대해서 이것은 젊은 세대가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기성세대에 많은 부분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기회라고 역설한다. 대학 졸업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80세까지 일해야 한다, 와 같은 염재호 총장의 말은 뉴 노멀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20세기 방식으로는 안 된다
미래를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밝히셨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총장님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20년 정도 “미래사회와 조직”이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쳤어요. 수업을 하면서 놀란 건 학생들이 부모나 선생이 시키는 대로 선택한다는 점이었어요. 왜 이 학과를 왔는지, 20-30년 뒤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현재는 문명사적으로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준비를 안 할까, 고민스러웠어요. N포 세대니, 취업률이니 이야기하는데요. 지금은 이런 것들이 의미 없어졌죠. 대기업더러 신입 채용 하라 하고, 정규직이라는 말을 하면서 평생직장 찾으라고 하는 것은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개념이에요. 이제는 각자가 전문가로서 자기 일을 해야 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취업률로 겁만 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20세기의 잣대인 거죠. 이렇게 겁만 주는 상황에서는 젊은이들이 꿈을 키울 수 없는 게 당연해요.
20세기의 잣대라고요.
앞으로 명문대 졸업장은 10년도 유효하지 않을 거예요. 변호사라는 직업도 60년대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질 거고요. 대기업도 마찬가지죠. 20세기의 대량생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도 그때와 같다 생각하고 똑같이 거기에 시간과 돈을 들여요. 겨우 되면 또 방황하고요. 이런 일련의 상황이 너무 답답했고요.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동안 강연에서도 많이 하고, 방송에서도 했는데요. 정리가 필요하겠다 싶어 책을 쓰게 된 겁니다.
책에서도 현재의 불안과 위기를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14쪽)이라고 분석하셨죠. 불안에 앞서 지금의 위치를 거시적 시선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21세기의 사회가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데 문제를 20세기의 방식으로 풀려고 하니까 계속 갈등이 생기거든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논의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시각으로 봐야죠. 제가 총장으로 있으면서 유연학기제를 도입하고, 성적 장학금을 없애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20세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 되니까요. 지금은 강의가 너무 많아요. 하버드나 스탠퍼드는 일 년에 2천5백 개 강의가 개설이 되는데요. 고려대는 약 만 개가 개설이 돼요. 바뀌어야죠.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게 아니라 강의는 인터넷 동영상으로 핵심을 보여주고, 학교에서는 그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해요.
실제로 고려대에서 그와 같은 방식의 토론 수업이 진행되고 있나요?
학생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6학점이 있었는데요. 그 중 3학점을 그런 방식으로 바꿨어요. 일곱 개 테마를 잡아서 40분짜리 동영상을 보고 학생들이 질문을 올리도록 했고요. 그것으로 교수와 학생들이 단체 토론과 그룹 토론을 한 후 학생들이 프로젝트 발표를 하는 거죠. 예를 들면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토론이 있는데요. 과학의 이성과 합리성이 18세기에 등장하면서 왜 제국주의가 발현되었는가에 대한 토론을 학생들이 하는 식이에요. 여기서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까지 논의할 수 있죠. 물론 처음에는 이런 방식을 학생들이 힘들어하기도 했는데요. 지금은 아주 성공을 해서 나중에는 이런 수업 방식을 다른 대학에 공유하려고도 하고 있어요.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대학교라는 곳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총장님의 답이 될 수 있는 대목이네요.
책에서 ‘지식의 반감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건 10년이 지나면 지식의 절반이 쓸모없어진다는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지금은 지식을 습득하는 게 아니라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근육을 키워야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되는 거예요.
20세기 대량생산체제에서는 교수가 강의를 통해 효율적으로 전문지식을 전수하면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서 이를 활용하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지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암기하여 숙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교육방법은 21세기에는 맞지 않는다.(중략) 이제는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설계하는 능력이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228-229쪽)
다양한 기회를 줘야한다
“개인들은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 위해 끝없이 새로운 학습을 해야 할 것이다.”(181쪽)라고도 하셨잖아요. 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요. 계속 공부해야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 너무 책 안 읽어요.(웃음)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데 말이에요. 겉으로는 ‘4차 산업혁명’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필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해요. 4차 산업혁명을 하려면 얼마나 사회가 유연해져야 하는데요.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아직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없어요. 여전히 다들 대기업에 가려고 하고요. 대기업에 들어가면 30년 동안 일을 하든 안 하든 연봉은 계속 오르니까요. 그런데 그게 뭐가 좋은 사회예요? 다양한 기회를 줘야죠. 저희는 8주씩 하루 6시간을 중국에서 중국어로 수업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100명에게 생활비까지 다 대줘요. 개척하려는 마음이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데요. 이것이 학교가 할 일, 국가가 해야 할 일이에요.
개인이 언제든 새로 학습할 수 있도록 사회가 시기별로 다양한 기회를 줘야 하는데요. 그렇지 않다는 점이 지금의 큰 문제겠네요.
네덜란드, 덴마크에서는 1년에 노동인구의 4분의 1일이 실업자가 됩니다. 2년 동안 회사에서 받았던 급여에 달하는 금액을 국가로부터 받아요. 동시에 국가가 재교육을 시켜주죠. 국가는 그 일을 해야 해요. 개인은 힘들더라도 새로운 것을 배워서 다른 걸 해야죠. 기성세대가 그런 시스템을 디자인하지 않고서 한쪽은 젊은이들이 노력하지 않는다고 하고, 한쪽은 기업 탓을 하고 있어요.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21세기에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해요. 가령, 창업 하라고 하는데요. 창업이 쉽나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창업 잘못 했다가 망하면 패가망신하잖아요. 제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을 할 때 정부에 창업에 실패한 사람들을 위한 곳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적이 있어요. 대학에 3천만 원 정도의 연봉을 보장해주면서 재교육을 2-3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요. 그걸 만약 만 명에게 해준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런 식의 시스템 디자인을 끊임없이 해줘야지, 창업하라고만 해서는 안 되죠.
‘뉴 노멀에 적응하기 위한 조건들’이라는 챕터에서 제일 먼저 꼽은 조건이 ‘포기’였어요. “이른바 기득권이라고 하는 현재의 이익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한다”(79쪽)고 한 말씀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발전했어요. 그래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죠. 가령 청년들에게 창업을 하라고 하면서 대학에는 취업 통계를 내라고 하거든요. 당연히 둘 다 해야죠. 하지만 그것을 통계를 내고, 계산해서는, 평가해서는 안 돼요. 저희 학교에서 출석부, 상대평가, 시험 감독을 없애는 ‘3무(無)정책’을 시행했는데요. 수업을 학생이 좋아서 들어야지 수업에 안 들어오면 점수 깎는 게 얼마나 유치한 거예요. 왜 60년대부터 똑같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어야 하고, 16주 수업일수가 있어야 하나요? ‘콜롬버스의 계란’이랑 똑같아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면 돼요.
시스템 말씀을 하셨는데요. 실제로 새로운 정책을 도입했더니 발견하게 된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나요?
얼마 전에 이탈리아의 ‘베니스국제대학’에 갔어요. 세계 18개 대학과 네트워크로 연결된 대학인데요. 국내에서는 고려대학교가 유일하게 함께 하고 있거든요. 이곳은 ‘산세르볼로(San Servolo)’라는 섬 전체가 캠퍼스인데요. 교환학생들만 모여서 수업을 하고요. 교수들도 각지에서 파견되어 와요. 다녀온 학생들이 너무 좋아해요. 개설 과목도 재미있는 게 많으니까요. 예를 들면 ‘인쇄 문화’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데 우리나라의 ‘직지’와 ‘구텐베르크’가 자유롭게 이야기되는 거예요. 그런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창의력도 생기고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강해지니까요. 그런 게 필요한 거죠. 정답을 가르쳐서 무엇해요? 스마트폰 안에 다 있는 걸요.(웃음)
관련해서 ‘형식지’보다 ‘암묵지’가 중요하다는 말씀도 여러 번 강조하셨잖아요.
고려대학교가 처음으로 입시에서 논술을 완전히 없앴어요. 그래서 관련 부서의 이름도 ‘인재발굴처’로 바꾸었는데요. 신입생 85%를 심층면접으로 뽑습니다. 학생이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습한 과정, 활동한 내용을 보는 거예요. 그걸 2년 준비해서 올해 처음으로 시행했어요. 이렇게 하면 학생들이 단기간에 학원에서 배운 식으로는 할 수 없죠. 작년에 그렇게 85%, 3천 명을 뽑았는데 합격한 학교가 천 개가 됐어요. 다양성이 늘어난 거예요. 이제는 형식지 가지고는 안 돼요. 옛날 이야기지만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주임교수님이 한 시간에 책을 몇 페이지 읽는지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20페이지라고 답했더니 너무 낙담을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살아남을 거냐고요. 미국 애들은 책 엄청 많이 읽어요. 그런데 우리는 책을 읽나요? 요약본만 보죠. 더 이상 그런 학습으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21세기의 ‘뉴 노멀’
‘개척하는 지성’의 특성을 암묵지 능력, 호기심, 시간과 공간 확장 능력, 디자인 능력, 독창성 등으로 설명하셨는데요. 가장 눈길을 끄는 특성은 공감능력이었습니다. 개인화된 세상이라고들 하는데 그럼에도 공감능력이 중요한 이유는 뭔가요?
개척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적인 존재로서 시간이나 공간을 확장하는 경험을 하고,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건데요.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다양성, 그리고 타자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정답만 가르쳐주고 형식지만 학습하다보니까 미리 울타리를 치고요. 이 안에서 A 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 기업에 들어가면 1년 이내에 약 30%가 퇴사를 하죠. 인간관계 때문에요. 21세기에는 직장에서 하는 일이 거의 프로젝트잖아요. 시키는 일을 혼자서 하는 게 아니죠. 앞으로는 같이 일을 해야 하고요. 이때 공감능력은 아주 중요해지는 거예요. 점점 더 프로젝트 형식의 일이 되니까 말이에요.
“21세기에는 모든 것이 네트워크화된다.”(102쪽)는 이야기가 중요할 것 같아요. 심지어 국가도 초월한 프로젝트들이 이루어질 테니까요.
그럼요, 그런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돼요. 공감능력,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하면 앞으로는 힘들 거예요. 지금 회사들도 제일 힘들어 하는 게 이런 부분이거든요. 거의 6개월씩 훈련을 한다고 하는데요. 그 정도로 되나요? 어렸을 때부터 경쟁만 해온 걸요. 제가 지금 대학들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육 방법도 물론이지만요. 더 이상 성적순으로만 학생을 뽑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객관성을 문제 삼아요. 하지만 고려대학교가 전 세계 4천 8백 개 대학 가운데 86위를 하는 대학이거든요. 고려대를 안 믿으면 어떻게 해요. 미국 대학교를 보세요. SAT 만점 받고도 떨어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객관성이 문제였다면 다 소송 걸렸겠죠.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21세기의 ‘뉴 노멀’인 거죠.
이것은 비가역적이에요. 젊은 사람들, 주말에 일본 가서 라면 먹고 오고, 하잖아요.(웃음) 얼마 전에 대학 총장 포럼이 있어서 다녀왔어요. 그곳에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 부총장이 와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대학1.0부터 4.0까지를 나눠서, 지금을 4.0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건데요. 4.0이 바로 네트워크였어요. 1.0은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같은 것처럼 학자를 키우는 거였죠. 도제식으로, 연구하는 걸 보면서 배우는 것이고요.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프로패셔널들이 생겼어요. 공대 같은 게 20세기의 산물이잖아요. 기술을 빨리 가르쳐주면 그 학생들을 대기업에 써먹는 방식이니까요. 형식지를 배워서 그대로 써먹도록 하는 게 맞았죠. 그러다 대학3.0에 이르러 누구나 다 대학을 갈 수 있게 했고요. 대학4.0이 되면서는 복수학위제도 하고, 교환학생도 하고, 그런 거예요. 그렇게 배우면서 이제는 세계시민이 되는 건데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되면 20세기처럼 이 안에서 막 경쟁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이에요. 삶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뉴 노멀 사회에서는 우리가 기존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인식이 급속히 바뀔 것이다. 20세기에는 TV, 냉장고, 세탁기 등 내구재가 비싼 것이 당연하지만, 21세기에는 지금 이 순간의 효용을 극대화해주는 여행, 외식, 의류 등 소비재의 가격이 더 비싼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점심값보다 더 비싼 커피값, 집값보다 더 비싼 자동차값, (중략)일 년 동안 허리띠를 동여매고 돈을 모아서 떠나는 해외여행 경비 등 이전에는 노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점점 노멀이 되어가고 있다.(240-241쪽)
18세기-19세기 농업을 하던 입장에서는 경쟁할 이유가 없었어요. 먹고 살면 됐죠.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다 하버드, 스탠퍼드 가려고 하고 욕심을 부리고 경쟁하다보니까 나타난 현상들이 지금의 것들인데요. 삶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야 해요. 30년 전에 이민 간 사람이 최근 한국에 와서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해요.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는지 몰랐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헬조선’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결국 경쟁에서 나오는 마음의 문제인데요. 욕심을 조정하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봐요. 저는 왜 문과대 학생들이 경영학을 복수전공 하느냐고 해요. 글 잘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데 말이에요.
개척하는 은퇴
총장님도 한 개인으로서, 이런 문명사적인 변화를 맞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으신가요?
저는 계획은 없고, 항상 현재에 충실하며 살았는데요.(웃음) 이런 생각은 했어요. 책에도 수명 이야기를 했잖아요. 지금까지는 2단계만 살았죠.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직장 잡는 준비가 30년, 이후 30년은 열심히 하면서 자기 자식을 자기와 똑같이 키우며 바톤 터치를 했죠. 이후 10년 정도 여생을 살다가 가는, 2단계였다면요. 지금은 3단계가 됐어요. 수명이 길어졌으니까요. 저도 고민이 많아요. 제가 베이비붐세대인데요. 다음에 책을 쓴다면 ‘개척하는 은퇴’를 쓸까 했어요.(웃음) 왜냐하면 제 세대가 700만 정도가 되는데요. 하나도 은퇴 이후가 준비되지 않았거든요.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많이 있는 거예요. 특히 우리나라는 인프라가 많이 구축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개인적으로도 그에 대한 고민이 많으신가봐요?
다시 저 개인으로 돌아오면요. 저는 원래 자유로운 것을 원했기 때문에 법대 시절에 다들 고시 공부를 할 때도 저만 유일하게 계속 공부를 한다고 했고, 유학을 갔어요. 지금도 저는 같은 생각이에요. 자유롭고 싶어서 교수가 됐고요. 이제부터는 정말 자유롭게 프리랜서 작가가 되면 좋겠다, 생각도 해요. 아직도 20세기의 좁은, 1차 방정식 같은 것으로만 얘기를 하니까 개인을 너무 힘들 게 하는 것 같거든요.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지금 젊은 세대가 인구수도 적은데 이 많은 베이비부머 세대를 어떻게 부양하겠느냐고 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베이비부머들은 80세까지 일을 해야죠. 왜 일을 안 하고 부양 받으려고 해요?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데 말이에요.
저출산으로 노인인구를 떠받칠 노동인구가 적어서 걱정이라고 하는데 70대나 80대를 노동시장에 흡수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제조업에서 필요한 노동력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데, 단순히 사회경제적 이유로만 본다면 저출산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일까?(142쪽)
유럽에도 보면 70세에도 바텐더로 활동하잖아요. 식당 웨이터도 하고요. 오히려 더 친절해요. 젊은 사람들만 일해야 하나요? 또, 왜 매일 일해야 해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해도 되죠.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그런 일자리로 유일하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파트 경비원밖에 없어요. 다른 일자리를 정부에서 많이 만들어줘야 해요. 지금 저희 세대에게는 은퇴 이후의 삶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어요.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논의는 아주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총장으로 있으면서 원래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도 ‘3G스쿨’이었어요. 50대 정도가 다니는 학교인데요. 가령 연금을 받는 교수나 교사는 정말 하고 싶었던 역사나 철학, 영화 같은 것을 배우고요. 그렇지 않고 경제활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졌던 직업과 관련해서 컨설팅을 하거나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요. 봉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봉사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거죠. 그렇게 대략 세 분류로 교육하는 학교를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60세부터 30년을 더 살 텐데 아무 준비를 안 하니까요. 20대에 향후 30년 살기 위해서 준비한 것처럼 50대면 이후 30년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그래야 해요. 아쉽게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에요.
이 책은 역시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으세요?
저는 오히려 중학교 3학년 정도가 읽으면 좋겠어요. 중학교 3학년을 둔 학부모가 읽어서 얘기를 해줘도 좋겠고요. ‘개척하는 지성’은 제가 총장이 되면서 캐치프레이즈로 들고 나온 거였는데요. 그동안은 너무나 주어진 것에서 기득권에 안주하고, 대접 받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찾아다녀야 해요. 세상은 넓고요. 할 게 많아요. 꼭 국내 명문 대학만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해외 대학에 기회가 더 많을 수 있죠.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왜 국내만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젊은 학부모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세상에는 대안이 너무나 많은데 정답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그 생각을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도전하고, 조금만 바꾸면 엄청난 기회들이 있어요. 딱 한 번 사는 인생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을 해보지도 않고 겁을 먼저 먹으면 얼마나 불행한가, 생각해요. 인생에 즐거운 게 얼마나 많은데요.(웃음) 삶의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야 해요.
개척하는 지성염재호 저 | 나남
21세기 뉴노멀 사회를 이해할 열쇠들을 쉽게 풀어 놓았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고 도전할 젊은이라면 미래를 개척하는 여정에 반드시 지참해야 할 나침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