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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진 “질문이 계속 나오는 북유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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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게, 라곰, 팬츠드렁크. 어디에선가 한 번쯤 들어본 이 단어들에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문화와 감수성이 그대로 녹아있다. 그렇다면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크리스티안 크로그, 아나 안셰르는 어떨까?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에는 낯선 화가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를 화가들이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마음속에 들어온다.


<여성중앙> <쎄씨> <볼드저널> 등의 잡지에서 에디터로 일해 왔던 최혜진은 스물네 살에 빈센트 반 고흐에 끌린 이후로 미술관 여행자가 되었다. 『명화가 내게 묻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등을 펴낸 그가 이번에는 일하는 틈틈이 북유럽으로 날아가 미술관을 누볐던 지난 3년의 기록을 담았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동반한 채 그림을 본다”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말처럼 그림을 보면서 몰랐던 자신 안에 무언가를 꺼내게 되는 경험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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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내가 독대하는 기분


북유럽 작가들 이름이 많이 나와요.

 

처음에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 그 지역의 미술관에서 올려놓은 유튜브를 보고 화가 이름의 발음을 그대로 적어서 썼었어요. 외래어표기법에 맞춰서 편집자님이 다 고쳐주셨죠.


북유럽 미술관을 여행한 기록이 담겼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여행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잡지 기자로 일할 때는 회사와 잘 협상을 해야 했죠. 짧게는 사나흘씩 다녀오고, 휴가를 모아서 일 년에 한 번은 떠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어요.


낯선 북유럽 지역을 다니면서 시행착오가 많았을 것 같아요. 


북유럽이 제일 북유럽다울 때를 알고 싶어서 1월에 제일 길게 여행을 떠났었어요. 1월이 비수기잖아요. 핀란드 국립미술관을 찾아갔는데 홈페이지에 아무런 공지 없이 메인 전시 소장품을 닫아버린 거예요.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던 미술관도 리모델링을 해서 일부 소장품만 볼 수 있었어요. 기대한 만큼 볼 수 없었던 게 아쉬웠죠. 그리고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무덤은 그렇게 못 찾을 줄 몰랐어요. 거기까지 갔다가 그냥 떠나야 하는 마음이,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하면 허탈하지 않았나요?


허탈하죠. 눈물 날 것 같았고요. 하지만 제가 정신승리를 잘해요. (웃음) 마음대로 안 되는 요인이 있다는 게 여행의 매력이거든요. 처음 여행할 때는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짜고 가려는 곳의 구글 스트리트 뷰까지 봐야 안심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투 두 리스트(To do list) 지우듯 이만큼 돈을 들였으니 본전을 뽑으려면 이건 내가 보고 와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생기니까, 제가 몰랐던 걸 보면서 경계가 탁 깨지는 느낌을 받는 데는 방해가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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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당시 적었던 미술관 기록.


 

마음대로 안 되는 면이 있어서 북유럽 화가들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죠. 이름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고, 첫사랑에 빠지듯이 좋아해서 검색하면 영어로 된 검색 결과가 세 개만 나올 때도 있었어요. 떠듬떠듬 알아가야 하는 존재들이어서 더 매력 있었던 것 같아요.

 

빌헬름 하메르스회이를 시작으로 북유럽 작가들을 탐색했어요. 어떤 점에 매혹되었을까요?


처음 느껴보는 색감이었어요. 물감이 침잠하고 스며드는 인상으로 발려 있었어요. 그리고 그림에서 주는 정보가 너무 적어요. 밤낮도 잘 구분이 안 되고 등장 인물이 무엇을 하는지 감춘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냥 넘길 수도 있는데, 화가가 던져준 미끼에 걸리면 계속 생각하게 돼요. ‘이 여자는 누굴까, 여기는 어딜까, 새벽일까 밤일까’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질문이 계속 나오는 그림이었어요.


구글 아트프로젝트로 검색을 많이 했다고요.


인터넷 세상에서 하이퍼링크가 주는 엄청난 장점이 있어요. 구글 아트프로젝트에서 한 작품을 보면 연관된 그림을 추천해주는데, 시각적으로 유사한 그림, 색감, 같은 시대, 같은 재료로 만든 그림 등을 따라가면 또 링크가 나와요. 그러면서 정보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는 게 되게 즐겁거든요. 모두가 접속 가능한 평등한 공간이고, 너무 예술성 있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무명의 작품과 유명한 작품이 같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사전 정보를 배제한 채 이미지와 나하고 둘만 독대하면서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집중할 수 있어요.


“미술 경매 시장보다 구글 아트프로젝트가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구글 아트프로젝트 안에서 맘껏 뛰어놀 때 저를 움직이는 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장은 이 그림이 얼마짜리인지를 말해주는 곳이고요. 저에게는 예술성이 시장이 부여한 가치와 분리되어 있어요. 그래서 훨씬 더 선입견 없이 작품 그 자체로 내 마음에 와닿는 것, 내 마음에 남은 인상이 뭔지 훨씬 더 집중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 화가가 가진 명성, 그 화가의 작품 가격을 미디어에서 소개하면 자기도 모르게 선입견으로 남아요. 그러면 그 작품을 보고 싶다는 동기가 외적인 이유로 나타나거든요.

 

화가를 좋아하면 무덤까지 찾아가는 버릇이 나와요.


디지털 이미지로 보는 것도 좋긴 좋아요. 하지만 그 많은 그림과 화가 중에 무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저는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존 버거가 “원작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떤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라고 한 적이 있어요. 화가가 몸을 움직여서 물감을 바를 때 시공간의 고요함이 묻어있다고 표현하거든요. 물성으로서 존재하는 그림, 어떤 한 순간에 어떤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무언가를 제스처로 느끼면서 만든 물건으로서의 그림을 좋아해요. 그걸 극대화해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화가의 무덤이에요. 박물관에서 봤던 작품들이 단순히 이미지가 아니고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았던 인간이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낸 물건이라는 게 확 와 닿는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자꾸 무덤에 가나 봐요.

 

 

자발적 마감노동자


북유럽의 위계를 경계하는 태도가 그림을 읽는 태도와도 공통점이 있어요.


어쩌면 위계가 가장 견고한 곳이 미술계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아카데미가 있었고 숙련된 사람들만의 리그가 있고, 평론가와 전문가, 큐레이터들이 선택한 작품만이 예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 되는 체계로 몇백 년이 흘렀잖아요. 하지만 북유럽 화가들은 그런 곳에 잘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 같아요. 서양미술사 중에 가장 권위 있는 책이라고 하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가 될 텐데, 이 책에 소개된 북유럽 화가가 몇 명이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뭉크 말고는 없거나 아주 적을 거예요. 지금도 천여 점 소개된 것 중에 여성 화가는 딱 한 점 있어요. 이런 식으로 위계로 돌아가는 장이 저에게 씌워놓은 안경으로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스카겐 화가들의 회화가 ‘지루한 범생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어떤 뜻이었을까요?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가 후기 인상주의와 팝아트가 나오고 점점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갔던 시기예요. 제가 해석하기에 인상주의 시절은 화가가 자기에게 남은 인상이 진실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면서 점점 화가의 자의식이 커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서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지점으로 갔고요. 현대미술은 저에게 ‘느낌이 안 와? 그럼 넌 그냥 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물론 신선한 현대미술이 주는 정수리가 깨지는 듯한 충격을 주는 것도 매력이지만, 제가 느낀 북유럽 이 시대의 화가들은 설명하고 싶어서 애쓰는 느낌을 받았어요. 자기가 느낀 감정을 전하고 싶은 건데, 분노를 전하고 싶으면 요즘 방식으로 빨갛게 칠해버려도 되잖아요. 이 사람들은 분노를 잘 전달하고 싶어서 서사가 있는 상태로 전달하는 거예요.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을 재현하는 옛날 방식일 수 있거든요. 하지만 소통의 측면에서는 이 방식이 유효하고 통속적으로 널리 소통하고 싶어 하는 화가들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지점은 소통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그 자세였던 것 같아요.


에디터여서 그렇게 느낀 걸까요? 글 쓰는 모든 종류의 직업 안에서 잡지 에디터는 최대한 소통하는 쪽이잖아요.


그럴 거예요. 통속적이라는 단어가 흉처럼 쓰이지만, 제가 이제까지 속해있던 세상은 통속성을 그렇게 흉처럼 대하지 않는 세상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목표였고요.


저자 소개에 ‘자발적 마감노동자’라고 쓰여 있어요.


10년 동안 월간지 기자로 살면서 글쓰기든 취재든 콘텐츠 만드는 일이 자발성이 떨어지면 너무 지옥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취재하고 싶고 궁금한 대상과 만날 때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는데, 때로는 자발성이 떨어지는 글도 써야 할 때가 있잖아요. 자발성을 지키면서 마감 일을 하고 싶다는 방향성이었어요. 노동자라는 말을 넣은 것도, 글 쓰고 창작하는 사람을 향한 왠지 낭만적인 편견이 있어요. 저도 예술가 이미지에 매혹되었던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자기감정에 취해 일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싶었어요. 글은 노동이고 매일 해야 하는 일이고, 그걸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힘에서 글을 잘 쓰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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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마음


북유럽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읽을 것 같아요. 휘게와 소확행을 비교하면서 문화를 설명하기도 했어요.


북유럽 예술을 다룬 한국어 책이 별로 없더라고요. 하지만 객관적인 정보를 실은 건 아니라서, 독자들이 북유럽 책이라고 읽었는데 내용이 없어서 실망하면 어쩌죠? (웃음) 글 쓰는 과정에서 왜 하필 북유럽인가에 대한 답을 저도 찾고 싶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서유럽 화가와 북유럽 화가가 대체 뭐가 다르길래 나에게 다른 미술관에서 느끼지 못 했던 감정을 주는 걸까? 이런 질문을 계속 하면서 다녀서 저도 모르게 언급이 되긴 했어요.


어린 시절 덴마크와 연관된 경험을 불러오기도 했어요. 어릴 때 생각한 덴마크와, 지금 덴마크를 생각하면 다른 점이 있나요?


덴마크 나라 자체에 대한 동경은 없어요. 담백하게 말하자면 제가 좋아하는 화가들이 많이 살았던 나라일 뿐이에요. 그 화가들이 저에게 준 인상과 감정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당연히 그들이 살았던 토양과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한국적인 부분들을 타자의 시선으로 검증하게 되니까 문화적인 발견이 따라오게 된 것 같아요.

 

여행이 관점의 문제라고 한 적이 있어요. 새로운 관점으로 여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르는 상태일 때가 주는 마법 같은 게 있어요. 흔히 사람들은 특히 미술에 대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많이 해요. 하지만 앎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대가 생기고 목표의식이 생기기 때문에 온전히 제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집중해서 들여다보지 못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앎을 배제한 상태로 마주쳐보고 인상과 감정을 잘 모아둔 다음 그 다음부터 앎의 영역으로 가는 쪽으로 가는 감상의 방법을 선택하거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아는 것만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아는 게 많아졌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아는 것만 봐요. 여행자로서 저를 생각해 보면 처음 해외 여행을 파리로 갔었는데, 간판도 너무 예쁘고 지나가는 모든 생명이 저한테 의미로 다가오려는 경험을 했어요. 하지만 이후 프랑스에 살면서 본 파리는 전혀 저한테 다가오지 못했거든요.


결혼 후 3년 동안 파리에서 살았었죠.


파리도 어차피 누군가의 일상 공간인데 왜 나는 간판만 봐도 고양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여행자의 시선이라는 건 결국 순백의 무지 상태로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려고 작정한 상태인 거죠. 나는 지금 여기에 왔고, 여기는 되게 흥미로운 공간이고, 나는 여기서 흥미로운 일과 만날 거라는 극도의 기대감에 차 있어요. 그래서 궁극의 목표는 일상을 그런 시선으로 보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건데, 너무 어려운 일이죠. 그저 지금 안다고 착각하지 않고 모르는 게 되게 많다고 생각하고 처음 만나는 것처럼 봐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처음 만나는 마음을 유지하려고 하는 게 여행을 새롭게 하는 관점인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대입하는 글이 많이 나와요. 여성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인생을 반추하기도 했고요.


내면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여성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한국 사람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한 번씩 다 느껴봤을 감정 같아요. 그림을 볼 때 저를 비추지 않고서는 못 봐요. 저는 동일시와 의미 부여로 그림을 보는데, 그림은 결국 다른 사람의 얼굴이고 타자의 얼굴이에요. 그 타자의 얼굴에 제 모습이 비치는 매력 때문에 그림을 보거든요.


인터뷰에서 “그림은 교양이 아니라 관계”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림을 볼 때 단순하게 여기 빨강이 있고 파랑이 있고 얼굴이 있다고 보지 않잖아요. 그림을 보고 제 안의 무언가가 꿈틀꿈틀 자극을 받는 느낌을 받고, 이 감정과 감각의 정체가 무엇일까 알고 싶어지면 그다음에 글을 쓰면서 정체를 알아보고, 그러다 보면 결국 저의 유년기와 만나고 엄마가 해줬던 한마디 말을 만나죠. 그런 식으로 기억에서 잊혔다고 생각했던 것을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늘 그림 덕분이었어요.

 
이 개별적인 경험들이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나요?


걱정이 되는 건 있어요. 제가 쓴 책이 북유럽 미술의 정론인 것처럼 되면 안 되잖아요. 예술사적 배경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냥 저라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제 내면에서 벌어진 일을 언어로 기록한 거거든요. 제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건 제가 이렇게 느꼈어요, 까지에요. 이후 어떻게 해달라고 바라는 건 없어요. 어떤 독자 분에게는 이 이야기를 따라 움직여보고 싶다는 동력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받는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앞으로 다른 출간 계획이 있을까요?


프랑스 평론가가 쓴 그림책 이론서를 번역하고 있어요. 『유럽의 그림책 작가에게 묻다』를 내고 종종 그림책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불려 다니면서 발언할 기회가 생겼는데, 전문가라는 표현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어느 정도는 지식을 쌓는 경험을 하게 될 것 같아요.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최혜진 저 | 은행나무
사는 일이 힘에 부칠 때, 하루분의 울컥도 버거울 때, 쉬이 내 존재가 지워진다 느낄 때, 그리하여 두렵고 먹먹할 때, 북유럽 그림을 통해 모든 불화하던 것을 향해 화해의 악수를 내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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