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가 편해문은 ‘놀이터 디자이너’로 불리는 걸 가장 좋아한다. 서울 사당동 산동네에서 위험천만하게 놀며 한 시절을 보낸 그는 20년 가까이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오고,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를 외치며, 플레이워커, 놀이ㆍ터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위험이 아이를 키운다』는 편해문의 놀이ㆍ놀이터 3부작의 마지막 책. 위험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위험이 어떠한 가치와 쓸모가 있는지를 읽기 쉽게 풀어냈다.
혹자는 “어떻게 ‘위험’이 아이를 키울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놀이터 안전검사 합격이 놀이터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아이 곁을 따라다니지 않을 수 있냐고 내 아이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냐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언젠가 편해문은 놀이터에서 아이 곁을 지키고 있던 한 부모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가 참 잘 올라가네요. 조금 떨어져 아이를 보아도 아이들이 잘하더라고요?” 그로서는 용기를 낸 한 마디였는데, 다행히 그 부모는 질문의 본질을 알아채고 답했다. “맞아요. 아이들은 믿고 지켜봐 줄 때 더 열심이더라고요.”
“아이는 도전과 위험 속에서 성장한다. 놀다가 다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부모가 물러나야 아이는 나아간다. 아이들은 놀다가 다칠 수 있고 나아가 다쳐야 배운다.” 이 같은 주장이 더 이상 과격하게 들리지 않는 날을 꿈꾸며 『위험이 아이를 키운다』를 쓴 편해문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사진_ 편해문
아이가 나아가려면 부모는 물러서야 한다
경북 안동으로 귀촌하신지 올해로 15년째이세요. 요즘 일상은 어떠신가요?
아침저녁으로 아궁이에 불을 넣고,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나무도 하고, 마을 아이들이 놀러 오면 집 앞마당 모험놀이터도 가꾸면서 지냅니다. 두 아이가 학교에 가면 부탁 받은 놀이터 디자인을 아내와 의논하고 작업하면서 하루를 보내죠.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에 이어 『위험이 아이를 키운다』 를 쓰셨어요.
앞의 책 두 권을 7년과 4년 터울로 쓰면서, 한국사회에 어린이 놀이와 놀이터를 둘러싼 구체적인 현장과 담론의 변화 추이를 살펴왔어요. 놀이라는 것이 어린이의 성장과 성정에 다 중요하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왜 실제로는 놀이 환경이 나아지지 않는지 그 원인을 놀이 운동 15년 차에 들어서면서 다시 아프게 되물었어요. 그로부터 5년을 더 살피며 쓴 것이 이번 책입니다.
첫 책을 쓴 2012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놀이터 문화가 조금은 바뀌었을까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어린이를 둘러싼 놀이 환경이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어른들 삶이 점점 더 바빠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놀 수 없는 상황이 더욱 강제되고 있고 더 나아가 어린이 자신도 논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꼭 밖에서 놀아야 해? 안에서도 볼 수 있는 게 많아!”라면서요. 여기에 보호자 또한 “그러면 잘 되었네. 밖에 나가면 번거롭고 시간만 낭비하니 실내에서 간단히 보면서 놀고 공부하면 되잖아!” 아이들의 놀 시간이 이렇듯 허망하게 박탈당합니다. 그에 따른 아이들의 비만, 우울, 시력 저하, 바깥 활동의 두려움, 불안, 무기력이 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사진_ 편해문
전작을 접하지 못한 부모들은 “어떻게 위험이 아이를 키우나요?”라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한계에 맞닥뜨린 한국의 어린이 놀이와 놀이터 상황을 비껴가지 않고 정면에서 보고 싶었어요. 결론적으로 아이 가까이 있는 부모나 교사가 ‘놀면 다치고 놀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뿌리 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했어요.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튼튼하게 자리잡은 셈이에요. 이것이 일차적으로 어린이 놀이를 막아서고, 놀이터는 안전 합격에만 매달리는 악순환 구조입니다. 이제는 ‘위험’의 건강한 가치를 부모나 교사 모두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위험을 다룰 줄 알아야, 아이가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죠. ‘위험’은 놀이와 놀이터의 가장 중요한 가치예요. 위험은 아이를 키울 뿐 아니라 아이는 위험을 즐겨요. 문만 열고 나가면 세상에 위험이 흔해요. 아이들은 위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 그 위험을 다룰 줄 알아야 그 위험을 넘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진_ 편해문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의 모토는 “스스로 몸을 돌보며 마음껏 뛰어 놀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때, 옆에 콕 붙어 있습니다. 가끔은 아이들보다 어른이 많은 놀이터도 있지요. 이런 광경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먼저 그럴 수밖에 없는 부모님을 이해해요. 아이들이 다치는 것을 걱정하는 마음도 헤아릴 수 있죠. 하지만 그 보호와 간섭이 한없이 길어지는 것은 문제예요. 아픈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우리 품을 곧 벗어납니다. 그래야 하고요. 우리가 아이 옆에 가까이 있고 싶어도 아이는 곧 뿌리칩니다. 이제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격려해야 해요. 그런데 세상은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놀이터에서도 아이 곁을 떠나지 못하죠. 단언컨대 아이가 나아가려면 부모는 물러서야 합니다. 놀이터는 ‘위험’이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위험’을 만나고 연습하고 실험하는 장소예요. 아이 스스로 크게 다치지 않고 위험을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곳이라야 놀이터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런 놀이터가 지금 아이들에게 절실하죠.
“안전은 철저히 안정에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아이들이 모험놀이터에서 놀 때는 더 높은 주의력을 갖기 때문에 사고가 덜한 걸까요?
아이들은 대부분 실내에서 다칩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거의 집이죠. 사람은 실내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진화해 왔지요. 모험놀이터처럼 아이나 어른이나 밖으로 나와서 놀면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챙깁니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치는 경우는 매우 적어요.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알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언론 때문입니다. 놀이터에서 어떤 사고가 났을 때, 같은 사고를 다른 여러 언론과 방송에서 되풀이하다 보니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많이 다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여기에 동조하고 싶은 보호자도 많겠죠. 왜냐하면 아이들이 노는 것을 막을 근거로 쓸 수 있으니까요. 사회와 부모, 교사들이 아이들이 노는 것에 대해 불안을 가지고 있는데요. 아이 가까이에 있는 분들이 불안하면 아이들은 놀기 어렵습니다. 위험하기도 하고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해야 아이들이 놉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놀아야 다치지 않고요. 그래서 안전이 안정에서 나오는 것이고요.
부모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아이로부터 위험을 숨겨 위험과 만날 수 없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두려워 아이들로부터 놀이를 빼앗으면 아이는 숨이 멎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결코 문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사진_ 편해문
아이에게도 한가한 시간이 필요하다
‘플레이워커’라는 직업이 흥미롭습니다.
저희 집 앞마당을 동네 아이들 모험놀이터로 개방해 5년째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플레이워커’라고 합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저와 아내는 무급으로 하고 있지만요. (웃음)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에도 플레이워커가 계시지요?
‘파크플레이어’로 불리는 3명의 ‘플레이워커’가 있습니다. 작년 1월 정규직에 모두 임용되었고요. 기적의 놀이터의 ‘파크플레이어’가 하는 일은 놀이터에 온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다시 말해 플레이워커는 놀이지도자도 놀이전달자도 아니라는 거죠. 다만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환경을 가꿔주는 것으로 역할이 충분합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는데요. 놀아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은 놀이가 아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저의 놀이 철학입니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 사이에서 자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모험놀이터만들기협회’를 결성하면서 “생기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을 아프게 하거나(자해 놀이) 상대를 공격하는 일이 늘어(109쪽)”난 배경을 밝혔습니다.
자해는 유행이라기보다는 넓고 깊고 꾸준하게 늘고 있어요. 일본에서 모험놀이터를 만든 배경과도 관련이 크죠. 벌써 40년 전 일본에서는 집단 괴롭힘이나 왕따와 같은 일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매우 단순하죠. 그래서 모험놀이터의 모토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입니다. 자해라는 것이 어떻게 아이들과 청소년의 놀이가 되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해요. 다음 놀이가 무엇으로 이어질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논다는 것은 하라고 하는 것을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예요. 이것이 집과 학교에서 철저히 막혀 있으니 아이들은 풀이 죽고 시들고 있어요.
사진_ 편해문
초등학교 5학년 딸과 유치원생 아들과는 어떻게 노나요?
저는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아요. 놀이가 아이 안에 오롯이 있기 때문이죠. 아이들 놀이에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로 부모의 놀이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아이들은 도전할 수 있으니까요. 도전에 따른 크고 작은 부상은 예상할 수 있어야 해요. 20년 가까이 ‘하지 마라’ 하다가 세상에 나온 청년에게는 갑자기 ‘도전하라’고 말하니까요. 당사자에게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죠. ‘하지 마라’와 ‘도전하라’ 사이에 허용이라는 다리를 하나씩 놓아주는 게 부모이고 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분들은 스마트폰을 좋아하지 않나요?
강연을 가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에요. 우리 아들도 스마트폰을 좋아하지요. 제가 놀이 운동을 20년 가까이 했으니까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대해 부정적일 거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극단적이 사람이 아닙니다. 균형이 필요하죠. 밖에서도 놀 수 있어야 하고 안에서는 스크린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환경이 아이 가까이 실제로 존재하고 모두 필요하다는 차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부모는 아이들의 ‘디지털 모델’이 된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가상과 현실의 균형’을 어릴 때부터 아이 가까이 계신 분들이 또렷이 인식해야 한다는 점, 이 두 가지는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키즈 카페는 매우 편리합니다. 그런데 모험놀이터는 너무 멀리 있고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사실 부모들도 모험놀이터가 좋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데요. 집 앞 놀이터, 또는 집안에서 셀프로 작은 모험놀이터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일단. 더 좋은 놀이터를 소개하자면 하우스와 홈입니다. 대단한 놀이터를 가야 잘 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허용하는 마음’이 있느냐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하우스와 홈을 놀이터로 알뜰히 가꾸면 어떨까요? 조금 모자라면 키즈카페도 동네 놀이터도 갈 수 있습니다. 멋진 놀이터가 없어 아이들이 놀지 못하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별거 없는 놀이터나 하우스나 홈이라도 놀이를 허용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곳이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작년 겨울에 3년을 시흥시 보건소와 벗들과 공공형 어린이 실내 놀이공간 ‘숨 쉬는 놀이터’를 만들었어요. 아이 키우는 분들이 살고 계신 지자체에 적극적으로 요구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에도 비용을 내지 않고도 놀 수 있게 만들었거든요.
아이들에게는 왜 한가한 시간이 필요할까요?
놀 궁리를 하고, 안 하던 생각을 하고, ‘태어나길 참 잘했어’라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이 놀 때, 부모들이 “이런 말은 꼭 좀 안 했으면”하는 말이 있을까요?
“만지지 마! 시끄러워! 어지르지 마!” 놀지 말라는 다른 말이죠?
‘진짜 모험놀이터 만들기 시민 모임’은 앞으로 어떤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신가요?
이제는 정부나 기관에서 만들어 놓거나 만들어준 놀이터에 가서 아이들과 노는 시대가 저무는 것 같아요. 그런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놀이 욕구가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가 아이와 놀 놀이터는 아이와 우리가 함께 만든다’라는 놀이터 DIY 시대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모험놀이터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어요. 지역에서 놀이와 놀이터를 고민하는 개인이나 자조 모임도 부쩍 늘어나고 있어 반가워요. 그분들에게 놀이터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만든 이후 어떻게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지 공부하는 모임으로 꾸려나갈 생각입니다.
안전 신화를 외치는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틀림없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일 거예요. 아이가 놀다가 다치면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아이는 어디가 아플까요? 부모는 마음이 아프지만 아이는 진짜 아픕니다. 아프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만나는 일이에요. 아이들은 때로 다치면서 자신이 사이보그가 아님을 생생히 깨우치니까요. ‘아! 내가 살아있구나’를 느끼죠. 왜 자해 놀이가 늘어갈까요? 하라는 대로만 살아야 하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놀다가 다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저의 주장이 아이 가까이 지내시는 부모와 교사 사이에서 교양과 상식으로 자리잡혔으면 합니다.
위험이 아이를 키운다편해문 저 | 소나무
놀이는 위험을 다루는 철학이며, 아이들은 다치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이터는 어린이가 ‘도전과 위험’을 만나고 그것을 실험하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