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라는 말, 당신이 무엇을 입었는지가 곧 당신을 나타낸다는 말처럼 의식주에는 개인의 특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 문구는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규격화되고 브랜드화된 아파트로 사람들을 정의 내리는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단순히 ‘사는’(buying) 곳이라면 인생이 얼마나 협소해질까. 도시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그러나 ‘사는 곳’을 단순히 자기가 소유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보낸 모든 공간으로 생각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가장 많은 삶을 빚는 공간”(119쪽)이 된다.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주변의 공간들을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채색해야”(209쪽) 하는 까닭이다.
유현준 건축가의 첫 번째 에세이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에 소개된 121가지 공간은 공항 면세점, 벤치, 빈 예배당, 우산 속 등 누구나 한 번씩 봤을 법한 평범한 장소다. 이 장소에 기억을 덧대자 작은 점이 모여 별자리가 이루어지듯, 공간이 모여 유현준만의 별자리가 되었다.
머릿속으로 별자리를 되짚어본다. 나를 형성한 공간은 어디인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공간은 어디인가. 내가 지나온 시가지와 골목과 집은 내가 주인이 아니어도 나에게만 반짝이는 빛이 있다. 당신의 도시 별자리는 무엇인가. (중략) 당신의 도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411쪽
A love letter to my city
사철제본으로 책이 나왔어요.
편집자님이 먼저 제안해주셨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제본 방식이에요. 책을 폈을 때 일자로 펼쳐지는 느낌이 좋아서 포트폴리오도 이 방식으로 만들고는 해요.
양해철 사진가의 작품이 실렸어요. 사진작가와 협업해서 책을 낸 건 처음이죠?
편집자님이 사진을 꼭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원래는 제가 찍은 사진이나 제가 그린 그림으로 하려고 했는데, 가지고 있는 사진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몇 분 후보를 두다 양희철 작가님 사진이 결이 맞는 것 같아서 싣게 되었습니다.
사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갔어요.
책을 쓰긴 했지만 주변인들에게는 권하지 않았어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고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하는 것들까지도 써서요.
에세이를 처음 쓰는 분들은 자기가 솔직하게 드러난다는 걸 불편해하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힘들어하실 때가 많더라고요.
새로운 시도였죠. 솔직하고 시시콜콜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저도 구세대라 그런지 감성적인 걸 드러낸다는 게 힘들었었어요.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50년 치의 일기를 쓴 것 같아요. 100세 시대에 전반전을 끝내고 나서 50이 넘었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제 삶을 정리하는 타이밍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편안하게 썼습니다.
표지에 ‘a love letter to my city’라는 문구가 있어요.
편집자님에게 처음 제안받았던 제목도 ‘건축연서’였어요. 그래서 일단 제목에 건축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죠. (웃음) 글을 쓰면서도 지금 뭘 쓰는 거지 확신이 없이 썼는데, 이 문구를 보자마자 제 글에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목의 의미는 책 마지막에 가서야 나와요. 다른 제목 후보가 있었나요?
없어요. ‘원 앤 온리(one and only)’였던 것 같아요. 에필로그를 쓰다가 머릿속으로 어떤 장소를 말했나 그려보니 별자리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공간은 머릿속에 있다
소개해준 장소를 따라가는 도시 여행 실용서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용도도 있겠지만, 제가 더 기대했던 의도는 저만의 장소를 읽으면서 독자가 자신이 이제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하고자 했던 거였어요. 책을 보시면 여백이 되게 많아요. 예전 제 책들이 계속해서 제 생각을 다른 사람의 머리에 넣으려는 시도였다면, 이 책은 읽고서 독자들이 자기 생각을 더 많이 했으면 하고 바랐던 책이었어요.
모든 꼭지마다 결론은 ‘너의 공간을 찾아라’가 될 것 같은데요. 한편으로 젊은 사람들의 공간은 계속 협소해지고 있어서 자기에게 의미 있는 공간을 찾는 게 더 어려워질 것 같아요.
맞습니다. 요새 시간을 보내는 장소를 생각하면 실제 공간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요. 지금 세대가 흔히 구세대라 불리는 아날로그 세대보다는 실공간과 나 자신을 연결하는 시간과 연습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요. 오히려 게임 캐릭터와 더 밀접한 관계를 느끼더라고요. 제가 봤을 때는 그것도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의 하나예요. 어떤 사람에게는 게임 배경 화면이 자기 시대를 반영하는 공간일 수도 있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배경화면이 더 의미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어요. 굳이 건축 공간을 생각하지 않으셔도 좋겠어요. 어찌 됐든 내 삶의 의미를 찾는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만한 공간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거죠.
‘소확행’의 일종이 아닐까요? 물질적인 공간이 없어서 가상 공간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요.
그렇죠. 내 집이 없으니까 인스타그램이라도 꾸며야죠. 어느 시대나 한계는 있었다고 봐요. 특별히 비관적으로 이 세대만 불쌍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원시시대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가 걸어간 거리의 공간만 봤잖아요. 하지만 요즘은 카메라로 전 세계 구석구석을 다 보죠. 지금 자신이 소유하지 못할 뿐이지 즐길 수 있는 공간은 훨씬 더 많아졌어요. 중요한 건 내가 즐기고 소비하는 장소를 얼마나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찍어서 올리는 행위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지만 포켓몬고 캐릭터 잡듯 캡처해서 SNS에 집어넣는 게 이야기를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그 공간으로 인해 내가 만든 역사가 중요해요. 덕수궁 돌담길보다는 누구랑 언제 날씨가 어땠을 때 걸었다는 기억이 중요하죠.
사이버 공간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공간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거라고 보거든요. 우리는 공간을 바위처럼 하나의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기보다는 머릿속 생각을 따라가요. 제가 옛날에 살던 동네가 다 부서지고 없어질지라도 기억이 남아 그 공간이 제게 의미를 갖는 거니까, 물리적 세계와 사이버 세계가 같은 기준을 가진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자기 공간’을 찾으면 좋을까요?
일단은 갔을 때 기분 좋아지는 공간이 어디인지 찾아야죠. 그 공간을 찾으려면 발품을 팔고 시간을 보내야 하고요. 옷을 잘 입는 친구를 보면 일주일에 한 번은 백화점에 가서 옷을 매번 입어보거든요. 공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를 기분 좋게 만들고 우울할 때 위로를 하는 공간이 어딘지 기억하는 거죠. 저는 직업이다 보니 본능적으로 기억하려는 습성이 있는데,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시면 훨씬 더 자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봐요.
4차원 공간과 연결되는 말인 것 같아요. 시간이 있어야만 공간이 존재할 수 있어요.
맞아요. 인간은 2차원 망막을 통해 공간을 보기 때문에 시간의 도움 없이는 3차원을 이해할 수 없어요. 공간을 볼 수 있는 건 초당 200여 장으로 망막에 맺힌 이미지를 통해 공간을 인지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시간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방금 되게 <알쓸신잡>처럼 말한 거 아세요? (웃음) 요즘도 방송의 후광이나 효과가 있나요?
그런가요? 혜택이 없진 않겠죠. 방송을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냈다면 이 정도로 팔리진 않았을 거예요. (웃음)
공원의 역할
공간을 예민하게 파악하는 것 같아요. 건축가의 직업병일까요?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건축가가 된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도 공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스쿨버스에서 조그만 방을 만들어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여러 가지 안심을 주는 공간을 찾아서 다니려고 했던 것 같아요.
건축가로 일하면서 자기 생각과 다른 경험도 많았었죠?
많죠. 예를 들면 지금 공간의 유리창이 밑에까지 내려와 있는데, 저는 이런 공간이 좋아요. 뻥 뚫려있고 커튼으로 개방성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죠. 하지만 건축주분들 중에는 이런 공간을 불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창문을 조그맣게 뚫으라고 하기도 하고요. 사람마다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모든 건축주가 요구하는 게 다 달라요. 방법을 찾아서 저도 만족하고 의뢰인도 만족하는 제3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죠.
책을 읽다 보면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걸 좋아한다고요. (웃음)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요?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권력을 좋아하지만, 저는 그걸 시각적으로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은 목소리를 높인다거나 비속어를 쓰면서 자기 권력을 표현한다면, 저는 시선 처리에 의한 권력에 민감한 사람이에요.
‘나의 공간을 바라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것’(14쪽)이라는 표현이 들어맞네요. 이런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인 거죠.
그렇죠. 저는 혼자 있고 숨어 있고 훔쳐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거죠. (웃음) 기본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해요. 다만 예전에 제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있으니까 주도적으로 장소를 선택해서 좋아하는 공간에 있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모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공간, 즉 ‘등잔 밑’ 공간을 찾으라는 조언을 했어요.
사람이 양면성이 있어요. 모여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혼자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이 사회에서 혼자 있으려면 공간을 소유해야만 하는데 그게 점점 더 힘들죠. 등잔 밑 공간은 대개 인구밀도가 낮고 남이 잘 안 가는 곳이에요. 그만큼 공간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혼자 있을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등잔 밑 공간을 찾는 게 꼭 필요해요.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 오히려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중요시했어요. 도시에서는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서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는데요.
그게 결국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죠. 민간 시장에만 맡겨두면 한 뼘만 한 공간도 찾아서 개발해 버릴 거예요. 공간을 공공의 목적으로 쓸 수 있게끔 남겨놓는 게 크게 보면 국립공원이고 작게 보면 동네 놀이터가 되는 거죠. 하다못해 가로수도 공공의 의미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게 많을수록 선진국이라고 생각하고요.
정책론자도 그렇고, 일반 시민들도 ‘노는 땅’이 쓸데없다고 생각해요. 개발돼서 땅값이 비싸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을 거예요. 예를 들어 연남동의 ‘연트럴파크’ 공원이 생기면서 주변 땅값이 엄청나게 올랐어요. 공공 공간 옆에 있으면 혜택을 본다는 걸 깨달을 때가 온 것 같아요. 시민들 입장에서도 그런 걸 요구해야 하거든요. 미국 도시에서는 누구든지 걸어서 10분 이내에 공원을 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도시를 개발하고 있어요. 시민사회에서 공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아는 거죠.
커피숍을 우리의 거실로 만들라는 말이 있었어요. 점점 공용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누리는 게 많아질 텐데, 긍정적으로 보시는 편인가요?
빵집에서는 빵을 먹는 행위를 하면서 부산물로 공간을 쓰고, 카페는 커피를 마시며 공간을 누리죠 그게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인 것 같아요. 뭔가를 소비하면 공간이 따라오는 형태요. 저는 그게 다양해질수록 좋다고 봐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된다면 더 좋고요. 뭔가 사람들을 자꾸 한 공간에 모으는 작업을 사회가 해야 해요.
다음 책 계획이 있나요?
장기 프로젝트 건축을 하면서 부동산 개발업자나 경영하는 사람이 보면 재밌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이번에 에세이 분야를 썼으니 다음에는 경제경영 분야로 책을 써보면 어떨까 싶어요.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유현준 저 | 와이즈베리
유현준을 인간으로서, 건축가로서 성장하게 한 도시의 요소와 장소들을 살펴보는 시간은 독자가 자신과 도시의 관계를 다시금 발견하고,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