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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재 안경자 “70대인 우리가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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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자 작가(왼쪽)과 이찬재 작가

 

 

호기심 많은 안경자 씨와 무뚝뚝한 할아버지 이찬재 씨는 1942년생 동갑내기 부부. 대학CC였던두 사람은 26세 나이로 결혼해 국어 교사, 지학과 교사로 일하다 1981년 브라질 썽빠울로로 이민을 갔다. 연애가 너무 즐거워 결혼했고 신혼 생활이 너무 행복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었던 이들 부부. 안정적이었던 한국 생활을 접고 이민을 결심한 건 “한국에서 40년을 살아봤으니, 좀 다른 세상에서 살아봐도 재밌겠다”는 마음에서다. 브라질에서의 의류 사업은 꽤 잘됐다. 적당히 잘 벌고 잘살았던 부부는 2017년 10월, 손주들의 부름에 36년간의 긴 브라질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영주 귀국했다. 그리고 2019년 3월, 아름다운 그림 편지를 담은 에세이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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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재 작가
 

우리 프로젝트의 대장은 ‘아들’

 

‘35만 명 팔로워’를 가진 SNS 인플루언서이세요. 인스타그램을 시작하신 계기는 아들의 설득 때문이라고요.

 

이찬재 : 아들이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요. 손주를 낳아서 보러 갔는데, 제게 인스타그램을 하는 법을 끈질기게 알려줬죠. 그림을 그려서 인스타그램에 올려보라고요. 처음엔 무슨 그림이냐고, 안 한다고 했어요. 그림을 놓은 지도 한참 지났는데, 인스타그램이라니요. (웃음) 그런데 아들이 정말 끈질기게 설득했어요.

 

따님이 갑자기 한국으로 떠나면서 외로움을 느끼셨다고요.

 

안경자 : 남편이 손주들의 등교를 도와줬어요. 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이 남편의 주요한 일상이었는데 딸이 한국으로 가면서 우리의 일상이 달라졌죠. 브라질에서 우리는 모든 걸 함께 했거든요. 남편이 쓸쓸해 하니까 아들이 뭔가 취미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남편이 젊었을 때, 아이들에게 그림을 자주 그려주곤 했거든요. 그 때 기억이 났나 봐요.

 

쉽게 설득을 당하셨나요?


안경자 : 전혀 그렇지 않아요. 처음엔 딱 잘라서 안 한다고 했죠. 그런데도 아들이 정말 정성스레 설득했어요. 결국 뉴욕에서 머문 1주일 동안 남편이 인스타그램을 하는 법을 배웠죠. 저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모두 사용해요.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아직도 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이 많죠.

 

2015년 4월부터 인스타그램 ‘손자들을 위한 그림(@drawings_for_my_grand children)' 계정에 그림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전세계에 팬이 생겼어요. 책을 기다린 독자들이 많았다고요.

 

이찬재 : 책이 언제 나오냐고 궁금해 한 분들이 축하 댓글을 많이 써주셨죠. 아무래도 한국 독자보다는 외국 분들이 많으세요.

 

안경자 : 남편이 그림을 그리면, 제가 그림에 대한 글을 쓰고, 아들은 영어로 딸은 포르투갈어로 번역해 그림과 글을 올렸어요. 그림마다 'For AAA'라고 서명했는데 'A'는 한국에 있는 두 외손자와 미국에 있는 친손자의 이니셜이에요. 그림이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책이 나오고 나서는 영어로 출판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들었죠. 해외 배송으로 책을 받아 보셨다는 독자 분도 계시고요. 왜 연예인들이 이런 말을 하잖아요. “팬들 덕분이다.” 저희도 그걸 느껴요. 이 분들이 이렇게 우리를 응원해주는구나, 생각해요.

 

아드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을 보았어요. 뭉클하면서 재치가 넘치더라고요. 이찬재 작가님은 무척 무뚝뚝한 아버지시라고, 안경자 작가님은 호기심이 많은 어머니라고 소개했더군요.

 

안경자 : 아들은 우리 프로젝트의 대장이에요.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것도 아들 덕분이죠. 한국에서의 우리 일들은 딸아이가 맡고 있어요. 이번에 책 작업을 하게 된 건, 딸 도움이 컸지요. 저희가 오랫동안 브라질에 있었으니까 한국의 흐름을 잘 모르잖아요. 우리보다 일찍 한국에 정착했으니 이제 우리가 자식들의 도움을 받은 거예요.

 

첫 책을 받아봤을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이찬재 : 저희가 푸른 색을 좋아해요. 표지 색이 좋았어요.

 

안경자 : 우리가 나이가 들었잖아요. 그래서 활자가 너무 작은 게 아닌가 걱정이 됐어요. 그런데 책을 읽으실 독자층을 생각하면 작은 게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주 독자가 노인은 아니니까요. (웃음)

 

그림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기분이 좋으세요?

 

이찬재 : 글쎄요. 제 그림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추상화도 아니고 상징이나 은유가 있는 그림도 아니고. 그냥 제 눈에 보이는 것, 자주 생각하는 것들을 그리는 거예요.

 

안경자 : 남편의 그림을 보고서 울었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자식들이 후회스럽다는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도 이런 재주가 있었는데 나는 왜 이런 방법을 제안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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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소재가 다양해요.

 

이찬재 : 처음엔 손주들 크는 모습을 많이 그렸어요. 그러다 브라질에서 본 인상적인 풍경도 그리고, 옛날 한국에서 살았을 때의 모습도 그리게 됐죠.

 

안경자 : 손주들이 20년 후, 30년 후에 이 그림들을 볼 거 아니에요. 애인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 이 그림들을 보면서 추억했으면 좋겠어요. 살다 보면 언제라도 내 부모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에요.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나요?

 

안경자 : 내 표현이 너무 고루하지 않을까, 너무 옛날 감성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됐어요. 브라질에 있을 때 재외동포신문에서 문학상 공모를 하길래 글을 보낸 적이 있어요. 그림 그리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가작으로 당선됐죠. 그래도 읽히는구나, 안심했죠. 브라질에 있을 때도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꼭 구해서 읽었어요.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 . 책 제목이 본문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삶의 여러 과정을 겪은 후에 할 수 있는 말로 읽혔어요.

 

안경자 : 출판사에서 제목을 제안해 주셨는데 처음엔 제가 썼는지도 몰랐어요. 어떻게 보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 같은 느낌이 있어 걱정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 말 안에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책을 만들고 보니, 지금까지 살아보니 모든 순간이 찬란했어요. 어떤 때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무척 힘들고 벅찼지만 결국 삶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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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자 작가

 

 

우리 모습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일

 

브라질에서의 삶은 어땠나요?

 

이찬재 : 좋았어요. 저흰 크게 어려움 없이 잘 적응했습니다. 장인어른이 브라질에서 이미정착하신 후에 저희를 부르셨어요. 그리고 제가 브라질 음식을 참 좋아해요. 한국 음식보다 브라질 음식이 더 좋을 정도인데요. 한국 와서도 브라질 음식점을 몇 번 찾아갔지만 그 맛이 아니더라고요.

 

안경자 : 이민하고 2년 뒤 ‘보찌끼 심포니’라는 옷가게를 열었어요. 장사라는 일이 이렇게 신나다니, 즐겁게 일했어요. 우리는 그저 어제처럼 오늘은 사는 소시민의 근성으로 일했죠. 브라질 교포들은 지금까지도 해마다 이렇게 말해요. “작년만 못해. 큰일이야.” 그럼 브라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좋아질 거야.” 우리고 그렇게 일했어요.

 

한국으로 다시 오실 결심은 손주들 때문이었나요?

 

안경자 :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였죠. 그리고 브라질에서 우리가 딸아이에게 의지한 부분도 많았으니까요. 나이가 더 먹고 거동이 어려울 때 움직이는 것보다 지금 가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큰아들이 뉴욕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왜 미국으로 가지 않았냐?”고 묻는대요. 뉴욕으로 가면 재이민이잖아요. 재이민은 싫었어요.

 

26세에 결혼했을 당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셨다면서요.

 

이찬 : 우리끼리 있어도 좋았으니까요. 그런데 4년을 보내고 나니 아이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하나만 낳자고 해서 첫째를 낳고, 또 4년이 흘렀는데 아이가 둘이면 좋겠더라고요. 첫째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고요. 크게 계획을 잡고 사는 편이 아니었어요. (웃음)

 

두 자녀분을 어떻게 키우고 싶었나요? 자녀교육 철학이나 신조가 있었나요?

 

안경자 : 딱히 그런 건 없었어요. 교과서처럼 가르치는 것보다 우리의 모습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뭔가를 원하면 할 수 있는 한, 다 해주려고 했어요. 다만 강요하진 않았어요.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지원해주려고 노력했죠. 공부하라는 소리도 안 했어요. 낙제만 하지 말라고 했죠. 브라질 학교에는 낙제가 있어요.

 

이찬재 : 브라질은 가족 중심의 문화가 자연스러운 나라입니다. 저녁에는 보통 가족들이 다같이 식사하죠. 어디를 가든 우리 넷은 함께 다녔습니다.

 

BBC, NBC, <가디언> 등 해외 언론의 관심을 비롯해서 브라질 텔레비전 채널인 ‘Rede CLOBO’의 인기 프로그램 <판타스티코>에 출연하기도 하셨습니다. 작년에는 브라질대사관 초청으로 한국에서 전시회도 여셨고요.

 

이찬재 : 놀라운 일이죠.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림이 이렇게 관심을 받을지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안경자 : 우리의 작업에 관심을 보여주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즐거워요. 남편의 그림처럼 우리는 소박해요. 소소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이 꾸준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따름이에요.

 

또래 노인 독자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안경자 :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아이들이 가르쳐줄 걸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손주들한테 다가가야 한다고요. 아들, 딸은 어려워요. 손주들에게는 가능하죠. 용돈도 주고 말도 걸면서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 해요. 100시대라면서 등산만 할 게 아니라, 적극적인 취미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돌봐야 해요.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아까운 분들이 많아요. 오래 쌓은 전문지식과 경험들을 나누면 모두에게 좋지 않겠어요?

 

이찬재 : 특별한 이야기는 없고요. 자식이 마음을 담아 설득할 땐 넘어가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웃음)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안경자 글/이찬재 그림 | 수오서재
할아버지와 어린 손주가 함께하는 글과 그림에선 형용하기 어려운 뭉클함이 밀려온다. 각 계절 사이사이 할아버지가 그리고 쓴, 할아버지만의 이야기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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