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인들에게 기도는 각별한 것이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물 한 그릇만 있어도 자식과 가족을 위해 비손하려 하지 않았는가. 단군신화를 생각해보면 우린 ‘기도하는 민족’이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디 우리만이 기도하는 사람들이랴마는, 우린 인간이 된 뒤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기도한 뒤에 인간이 된 민족의 후예가 아니던가. 주지하다시피 웅녀는 사람이 되고자 늘 염원했고 그것도 어두운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을 먹어가면서까지 집중적으로 기도한 끝에 인간이 되었다. 우리는 인간존재(human being)라는 지위를 저절로 얻은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인간되기(being human)에 힘쓴 것이다. 결국 인간이 되기 전부터 힘써 기도한 덕분에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네 신화이고, 우리네 존재의 모델인 것이다. ( 『한국 종교 문화 횡단기』 202쪽)
최종성 서울대 종교학 교수가 쓴 『한국 종교 문화 횡단기』 는 답사기다. 한국 답사기라 하면 으레 궁궐, 사찰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공간을 다루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이 소개하는 장소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다. 화순 해망서원, 창명대, 적조암, 쉰움산 등이 그러하다. 화순 해망서원은 병산서원이나 소수서원처럼 유명한 서원이 아니고, 창명대와 적조암은 동학 역사에서는 중요한 곳이나 관광지로 개발되지 못했고 동학 자체를 향한 관심사가 대중적이지는 않다. 산멕이가 열리는 쉰움산은 민속학에서 주목하지만, 역시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부터는 벗어나 있다. 다소 주변이라 할 만한 이러한 장소를 소개한 데에는 최종성 교수의 학문적 사명감이 작용했다. 그의 표현처럼 “누군가는 제네시스의 화려함만이 아닌 쓰라린 타나토스도 기록해주고 기억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행로는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는다. 주 관심사인 동학에 관련한 비중이 조금 더 많긴 하지만, 유교와 천주교, 불교, 민간 신앙을 넘나들며 한국인의 종교 문화를 두루 살폈다. 특정 교단, 조직 차원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화된 종교 행위에 주목했는데 답사지에 얽힌 최 교수의 자전적 기록도 병렬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세계관과 다양한 인물, 다양한 사건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하고, 각자가 소중히 생각하는 공간을 향해 떠나게 만들 것이다.
고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시작한 답사
주로 학술서를 저술, 번역해오셨습니다. 『한국 종교 문화 횡단기』는 비전공자도 읽을 수 있는 책인 듯한데요.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학술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중서라 하기엔 독자에게 다소 인내를 요구하는, 적당히 딱딱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9월, 고대하던 안식년을 맞았습니다. 흔히 해외에 교환교수로 나가 재충전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사정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나름 주제가 있는 행로를 정해서 길을 나서보기로 했습니다. 안식년 이전에 인연이 있어 둘러본 적 있는 몇몇 거점에다 새롭게 접근하고픈 지역을 덧붙이다 보니, 태안에서 태백까지, 서에서 동으로의 길을 내게 되었습니다.
태안이 답사의 출발지가 된 것은 고 정주영 회장을 숭의사의 초헌관으로 추천한다는 문서(망기)를 우연히 손에 넣으면서 그곳의 사당을 찾아나선 게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주영 회장이 초헌관 노릇을 했던 사당을 추적하다 헛걸음도 했지만 그러면서 배움도 쌓고 행로도 다각화 할 수 있었습니다. 해 지는 서해(태안)에서 시작해 해 뜨는 동해(삼척)로 횡단하며 동진하는 사이 1년이 지났고, 그렇게 1년을 쏘다닌 기록과 어릴 적 기억을 욱여 넣은 한 권의 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답사기에 실린 사진은 어떤 기준으로 넣으셨나요?
애초에 준비한 사진도판은 대략 190여 컷이었는데, 책을 엮는 과정에서 1/3 정도인 60 컷 내외로추려냈습니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책의 서술을 보조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들로 모았지만 사진책이 아니다 보니 최소한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사진에 관한 한 문외한이어서, 전문가의 시선에서 보자면 사진의 구도와 앵글, 그리고 색상에 있어 질적으로 한참 모자라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사진 중에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장면들도 여럿 있습니다. 가령, 구암 김연국의 묘지라든가 구암이 해월을 처음 만났던 인제군 무의매리(미매)의 풍경은 사진의 질적인 차원보다는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의해 채택된 것들입니다. 화려하고 세련된 명승지의 사진은 아니지만 지역의 소박한 종교문화로 기억할 만한 또는 기억해야 하는 장면들을 배치하고자 했습니다.
제목이 ‘한국 종교문화 황단기’인데요. 책에서 다룬 소재와도 관련한 질문일 텐데, 교수님께서는 보시는 한국 종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한국 종교'라는 특정 교단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종교는 한국의 종교학 내에서 나름 독립성을 인정받은 분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종교는 특정의 지배종교나 대표적인 제도종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신앙해온 종교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넓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의 세계종교가 한국인의 삶에 수용되었다면 당연히 한국종교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제도적으로 미약하지만 한국인의 내적이고 장기지속적인 신앙을 보여준 민속종교나 잔존하는 신종교도 당당히 한국종교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책에서는 세계종교의 위상을 지닌 종교전통뿐만 아니라 무슨 무슨 종교로 명명하기 곤란하더라도 한국인의 문화에 내재화된, 생활화된, 일상화된, 그래서 우리 문화로 받아들이는 데에 조금의 서슴거림도 없는 종교문화에도 유념하면서 답사의 여정을 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종교, 문화가 자연스럽게 조합되면서 횡단기의 제목으로 구성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 종교문화’를 횡단하면서 종교의 성분을 엄격하게 구별해내기보다는 한국인에게 중층적으로 녹아 있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종교문화의 의미망을 다각적으로 확인해보고자 했습니다. 한국인의 삶에 반영된, 혹은 그 삶을 좌우해온 종교문화의 거대한 의미망을 ‘한국종교’라 하면 어떨까 합니다. 사실, 그러한 한국의 종교문화와 저의 삶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 중간중간에 들어간 제 성장기의 기억들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증언해준다고 봅니다.
성장기라고 하신 것처럼, 답사기가 선생님의 자전적 기록과 병행되어 진행되는 독특한 구성입니다.
책에서 소개한 곳이 대단한 명승지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한국인의 문화를 온전히 접할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시선에서 비껴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렇게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들렀던 경험이 있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탄탄한 공식이나 다된 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조금은 투박하고 애틋하고 가려진 곳을 즐겨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무튼 초행길에도 뜻 모를 친숙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 저기 다니면서 답사지의 종교문화를 기록하고, 과거 속에 개켜 두었던 옛 경험의 일부를 요 깔듯 펼쳐내면서 관련된 주제 의식을 상기시키고자 했습니다. 그간 학술 논저에선 결코 할 수 없었지만, 답사기에서만큼은 어릴 적 기억과 일상의 삶의 이야기도 배움의 원천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답사기의 서술이 추구하는 주제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기억도 있긴 하지만, 이 기회를 통해서 제 자신의 종교 경험도 정리하고 싶었고, 더 잊혀지기 전에 짝할 수 있는 기록에 부기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논문의 문장과는 다른 문학적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장소를 소개하는 장면에서는 산과 물이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이 느껴졌는데요. 교수님의 연구자적 자아가 아니라 문학적 자아가 표출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단언컨대 제게 문학적 소질은 없습니다. (웃음) 학교 다닐 때 그쪽으로 상 받아본 적도 없고, 문학소년이란 얘기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 다만, 다년간 공부를 하다 보니까, 그래도 제가 인문학자이고 인문학이 문사철(문학/사학/철학)인데 사철 쪽에만 너무 절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을 의도적으로 거부하진 않았지만 공부의 일부, 글쓰기의 일부로 적극 수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등한히 하다가, 40대 중반 넘어가면서 주말에는 시와 소설에 시간을 할애하며 1주일에 두세 권씩 읽어나가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젊은 연구자들이 그러하듯, 예전에는 저 역시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있었고, 심지어 주말까지 그것을 연장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주말이 되면 집 근처 카페에다 나만의 독서 아지트를 찜 해놓고 문학 작품들에 맛을 들이고 있습니다. 답사를 다닐 때에는 현지의 문인들의 시집을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없던 문학적 기질이 살아나는 건 아니지만, 답사기를 쓰면서 예전 어른들의 예스러운 말투, 지역의 색채가 들어간 방언들, 잊혀가는 정감 어린 표현들에 기대어 빈약한 문학성을 감춰보려 했습니다. 대중적인 교양서라 가독성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그래도 낯선 표현들이 종종 들어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소외받는 주변지를 답사한 이유
보통 답사기, 하면 궁궐이나 사찰, 명승지를 다루는데, 책이 소개하는 공간은 유명하지 않은 곳입니다.
국토예찬이나 명승지를 둘러보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주류적인 전통이나 지배적인 체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용되거나 기록된 종교문화보다는 기록되지 못하거나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민속과 민중의 종교문화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발굴해내고 정리해서 학문의 장으로 초대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아왔습니다. 태생적으로 촌놈의 기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신종교를 다루더라도, 창생의 화려함이나 증가일로의 발전모델보다는, 다소 기세가 꺾여서 힘이 부치는 퇴락일로에 있는 종교의 애잔함에 관심이 끌립니다. 왠지 모르게, 시대 정신에 부응하며 창립하거나 부활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침체해가고 명멸해가는 종교의 운명도 지켜봐 주고 기록해줘야 한다는 학문적 사명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제네시스의 화려함만이 아닌 쓰라린 타나토스도 기록해주고 기억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다닌 곳이 모두 임종을 맞은 종교문화라는 말은 아닙니다. 모두가 주목하는 문화재거나 명소는 아니지만 쉬이 잊힐 수 없는 소중한 종교적 삶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나쳐온 사당의 제사, 동학의 잔불, 마을의 천제, 성지와 순례지, 산중의 수행처와 기도터 등은 종교적으로는 나름 중심지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소외받는 주변지였습니다. 이번 여행기를 통해 저들에게 그 향기와 빛깔에 걸맞은 한국종교의 멤버십을 부여해주고 싶었습니다.
가유약, 김충선이나 책에서 소개한 인물은 시대의 주류라기보다는 변방, 주변에 머물던 사람으로 시대와 불화한 사람들이 주였습니다.
명나라 출신의 가유약과 왜군 출신인 김충선은 분명 국외자였습니다. 우리에겐 당연히 구별되는 외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중일이 얽힌 국제전이라 할 만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빌미가 되어 그들은 우리사회로 편입되었고 자랑스런 한국인의 일원으로 승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동화되는 과정에서 쉽게 잊힐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을 쉽사리 잊지 못하게 하는 기억의 장치가 당시 유교사회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봅니다. 사당이야말로 혈연적 계통과 집안의 자부심을 환기시키는 기억의 장소였고, 사당의 제사는 그 기억을 강화시키는 세련된 문화장치였습니다. 저들은 분명 변방과 주변인으로 출발했지만, 각각 귀화한 소주 가씨와 사성김해 김씨의 시조로서 기억되고 여러 곡절을 겪은 뒤 세대가 거듭되어도 늘 제사를 받을 수 있는 불천위(不遷位)의 권위를 누리게 됩니다. 적어도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더 이상 국외자나 주변인이 아니었습니다. 혈연상의 국적에 관계 없이 조상을 회고하게 하고 저들의 공훈을 되새기게 하는 문화적 장치, 그런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유교 문화가 뒷받침 되었기에 그들은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의 동질감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유교문화가 혈연, 국적과 상관 없이 기억하는 장치가 있었다는 게 새롭습니다. 일부에서는 고대사를 혈연 중심으로 기억하려는 흐름도 있는데요.
고대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저의 주제를 넘는 일이지만, 민족이라는 게 혈연, 혈통을 통해 우월성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했던 가유약, 김충선과 같은 분들은 각각 어지러운 혼돈의 시기에 한반도로 들어온 원군이었고 적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얄궂은 운명은 잠깐이었고, 이들의 후예는 조상의 명예를 존중하며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저들은 이 땅에서 세대를 연속해가며 자신들의 인간적 바람을 실현해나갔고, 여타의 한국인들과 문화를 공유하면서 더불어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갔습니다. 민족을 피의 문제, 즉 혈연의 순수성으로만 보는 것은 그릇된 신화적 사고라고 봅니다. 소주 가씨와 사성김해 김씨의 경우는 그것을 뛰어 넘어 이 땅의 주인으로서 삶의 공동체를 꾸려가며 사회의 일원이 되었던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다문화사회로 가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되새겨볼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와 동학이 만난 적조암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제발, 이웃에 다른 종교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138쪽)라고 하는 표현과 함께 곱씹을 만한 대목이었어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함백산의 정암사는 자장율사가 토착의 성지(소도) 위에 세운 사찰입니다. 불교 전래 이전의 토착의 문화가 당시 신종교라 할 수 있는 외래의 불교를 품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12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정암사의 암자인 적조암이 토착의 자생종교인 해월의 동학을 품어주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월이 동학의 운동을 재건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비축하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적조암에서의 수행이었다고 봅니다. 1873년 당시 해월이 동학의 지도자라고는 하나 늘 산중으로 쫓기는 신세였고, 교조인 수운이 참형을 당한 뒤 동학도들도 좌절 속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전히 교조의 유족이 남아 있는 상태라 종교적 카리스마도 해월에게 곧장 수렴되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해월은 수행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과 교단에 닥친 난제들을 돌파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피신과 수련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적조암이었습니다. 다행히 적조암의 철수좌 스님은 해월 일행을 관대하게 받아줄 만큼 아량이 있었고, 동학의 종교적 실천을 너그러이 인정해줄 만큼 도량이 깊었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종교적 계통을 엄격히 하고 차별성을 극대화하는 종교의 세태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동학과 불교의 접점을 잘 보여줍니다. 적조암은 비록 퇴락하여 유허지만을 남겨 놓고 있으나 한 때 어칠비칠하던 동학의 산실로서 불교와 동학의 격조 있는 공존문화를 꽃피워낸 역사적 장소임을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제발, 이웃에 다른 종교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는 표현은 은사이신 정진홍 선생님께서 20여 년 전 동행했던 답사지(계룡산 신원사)의 한 민박집에서, 이웃한 투숙객을 배려하지 않고 밤새 술 마시며 시끄럽게 굴던 젊은이들을 혼내시겠다며 던지신, “제발, 옆방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는 야밤의 발언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종교간의 공존 질서를 만들어보겠다며 새삼스럽게 나설 필요도 없고, 다만 내 옆방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하는 일, 내 이웃에 다른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배려하는 일,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백산 1100미터 고지의 적조암에서 교감했던 철수좌와 해월이 그것을 웅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서술에서 동학에 관해서는 '농민 전쟁' '계급 운동'을 부각하고 영성, 종교성은 다소 빼려고 하지 않습니까. 교수님께서는 “갑오년 동학이 세월에 묻히지 않고 역사와 문학과 예술의 관심을 받은 것이야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농민들의 마음을 자각시키고 하나로 단단하게 묶어주며 새 시대를 대망하게 했던 경신년 동학이 외면받아서는 곤란하다. 그것이 혁명을 지체시킨 천덕꾸러기로, 혹은 합리성을 결여한 미신으로 치부되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81쪽)라고 쓰셨는데요.
갑오년(1894년)에 거스를 수 없는 힘의 분출이 일어난 건 당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문학이나 예술 방면에서 갑오년 동학을 풀어내는 작업을 많이 했다고 봅니다. 들판에서 타오른 아우성과 물리적인 힘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러한 힘을 불러일으킨 원천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갑오년의 힘을 발산하기까지 수반되는 이데올로기적 설득과 정서적인 자극은 경신년(1860년)의 동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갑오년 녹두장군의 동학에 비해 경신년 수운의 동학은 진지하게 성찰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경신년 산중에서 있었던 종교경험이 회전력을 발휘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힘을 규합했고, 결국에는 갑오년 들판의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갑오년에 변혁 공동체로 힘을 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경신년의 영적 공동체가 원천이 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문을 읊으며 천주를 모시는 데 몰입하다가 천주를 모시듯 인간을 모시라는 사인여천으로 사고가 전환되면서 동학도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널리 자각해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모시던 공동체가 인간성을 자각하는 변혁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산중의 기도와 수련에서 비롯된 경신년의 동학과 들판의 함성으로 번져간 갑오년의 동학이 균형 있게 다루어 졌으면 합니다.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했는데요. 동학도 큰 역할을 담당했죠?
이 방면에 대해서는 저의 이해가 짧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1905년 12월 1일을 기해 동학은 천도교로 개신되었습니다. 1906년 교단이 설립되면서 동학혁명 실패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다시 종교운동으로 규합되었습니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무력투쟁이나 신비주의에 몰입하지 않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민족종교 진영에서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교육시키는 데 천도교가 감당한 역할과 공과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주지하는 바대로 천도교는 3.1운동 때에도 구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물론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 종교적 역량만이 발휘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갑오년의 경험과 애국계몽운동을 거치면서 비축된 동학의 인적, 물적 역량이 3.1운동과 그 이후의 민족운동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구화, 정보화 시대에도 구원을 향한 갈망 여전해
이 책의 중심 주제가 죽음, 순교, 순도인데요. 천주교 순교와, 숭의사 5현이라는 존재의 순도 등 믿는 인간, 구도하는 인간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 같습니다.
좋은 지적이라고 봅니다. 순교 및 순도라는 주제로 모든 걸 묶어내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책에서 다룬 인물들 다수가 종교적, 문화적 격변기에서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펴 나가다 기존 사회의 저항에 부딪쳤던 당사자들입니다. 자신의 소명과 신념을 따르는 데 있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순교나 순도로 이어진 것은 거의 필연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희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이들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기억해내려는 의례화 작업이 시도되었다는 점입니다. 가령 정여해가 역사적 불행을 당한 스승(김종직)과 학문적 벗(김굉필, 정여창)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해망단, 정여해의 유지를 받든 후손과 지역의 유림들이 확대시킨 해망서원 숭의사의 오현(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정여해) 제사가 그것입니다. 해망서원이 비록 서원연구에서 주목받을 만한 큰 서원은 아닐지라도 수백 년을 이어온 이러한 의례화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교적 순례 혹은 학문적 답사에서 만나는 것은 어떤 인물의 의롭고도 성스러운 죽음 그 자체이기보다는 그런 인물과 그들의 숭고한 가치를 기억해내기 위해 후예들이 고안해낸 기억의 구축과 의례화 작업일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현대인들은 주로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하지 않나요. 100년 사이 우리사회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진 게 아닐까요.
물질과 자본에 인생의 희망을 다 걸기 하는 풍토가 종종 목도되긴 하지만, 옛날이라고 해서 더 성스럽고 현대라고 해서 더 세속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20세기 중후반까지 세속화 논쟁이 가열될 때마다 종교의 쇠퇴와 약화를 예견하는 의견이 많이 등장했지만, 그 이후 지구화와 정보화 시대에도 여전히 구원을 바라는 기호들이 새롭게 갱신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제도화된 교단중심주의, 공동체중심주의, 사제중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고전적인 모델은 점차 약화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대신 현대의 종교문화에서는 개인적이고 영적이고 만인사제적인 성향들이 점점 더 강조될 것이라 예견해 봅니다. 분명한 것은 종교적 환경이 변한다 해도 그러한 변화된 환경에 걸맞은 핵심적인 표상들이 여전히 주목을 받을 것이고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의례화 전략들도 여전히 추구될 것이라 봅니다.
교수님의 여러 학문적 관심사 중 하나가 신종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19~20세기가 정말 뜨거웠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다원화된 사회가 허락되다 보니 오히려 그 열기가 식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지금 연구자 입장에서 주목하는 종교 현상이 있나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는 신종교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종교가 전래되면서 이에 자극 받은 토착의 종교적 실험이 동학 이래로 다채롭게 모색되었고, 반대로 전래된 서양종교가 토착의 종교적 기반을 흡수하면서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운동들이 분출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20세기 신종교 운동을 고려할 때에는 이 두 축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동아일보 1923년 12월 18일자 보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한국은 종교부자의 나라였습니다. 19세기 후반부에 분출했던 동학은 20세기 전반부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며 종교구매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한편 20세기 전반부에 출발한 증산계열의 종교운동도 민중들로부터 각광을 받으며 다양하게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후반부에는 전대 동학이 지녔던 종교적 열기를 대체해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에 전래된 외래종교에서 파생된 기독교계통의 신종교운동들입니다. 독특한 메시아 사상을 견지하면서도 한국인의 종교적 맥락을 접목시킨 이들 신종교운동들은 한국종교 연구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 사례로 보면 옴진리교 교주가 사형당했고, 유명 헐리우드 배우가 믿는 사이언톨로지도 있잖아요.
옴진리교나 사이언톨로지에 대해선 피상적인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본 옴진리교를 보자면, 일본사회와 종교학계에 던지는 충격이 굉장히 컸습니다. 1995년 옴진리교 지하철 가스테러사건은 종교와 교단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무고한 일반 시민이 희생된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의 신종교연구는 옴진리교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파장이 큰 것이었고 그만큼 지식사회에 던지는 파장도 컸습니다. 일본의 인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취재한 기록을 『언더그라운드』로 엮어 출간할 정도였고, 그것을 계기로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 전반에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종교가 갖고 있는 조직의 폐쇄성과 신념의 절대화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사회문제에 둔감한 연구자의 중립성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던 것입니다. 종교를 있는 그대로 보는 중립적인 태도야말로 연구자에게 권고되는 윤리적 덕목이었지만, 종교가 초래할지도 모를 사회적 악영향을 애써 외면하거나 판단정지와 중립성에 숨어버리는 태도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옴진리교사건은 일본 사회 내에서 종교연구자가 지녀야 할 사회적 책무를 재고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답사에 관한 질문입니다. 서원 답사하시면서 내삼문이 주로 닫혀 있던 데 대한 아쉬움에 저는 동감했습니다.
제가 전문 유교학자는 아니지만 서원이나 사당을 즐겨 찾는 편입니다. 답사를 하는 이상, 가능하면 내삼문 안쪽까지 가보려 노력하지만 막상 사당의 관문 격인 내삼문은 굳건히 닫혀 있기 일쑤였습니다. 앞쪽에 강학을 위한 공간을 배치하고 뒤쪽에 위패를 모신 사당을 배치했다는 전학후묘(前學後廟)를 열심히 설명하면서도 달랑 강학 공간만을 개방할 뿐, 정작 숙연함과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의례의 중심 사당공간은 닫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관리하는 유교 측의 입장과 어려움을 잘 알 만합니다. 쉬이 범접할 곳이 아닌 신성공간으로서 절기나 제일에 따라 제한적으로 개방하여 소제하고 정성껏 의례를 올리면 그만이지 상시 개방할 필요까진 없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성스러운 제사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현대인에게는 문화재의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종교 문화재가 갖고 있는 가치가 있고, 현대인에게 옛 문화의 경건함을 경험하게 하는 좋은 소재라 생각합니다만, 접근할 수 없는 게 무척 아쉽습니다. 막상 먼지 쌓여 있고 거미줄 쳐져 있고 쥐 똥이 나뒹구는데 범접할 수 없는 신성공간이라며 문 걸어 잠그고 방치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직무유기라고 봅니다.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전통이 있고 가치가 있다면 조심히 드나들게 해서 피가 통하는 공간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도 잠시 밝혔지만, 접근을 막고 외부 경비 업체에 의존할 폐쇄 공간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웃 일본은 외진 곳 신사라도 개방해서 사람이 드나들게 하고 사람 때를 타게 하면서 성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손때 묻고 발길 끊이지 않게 하면서 성스러움도 지키고 문화재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길을 고민했으면 합니다.
봄이라 돌아다니기 좋은 계절입니다. 한국 종교를 보기 위해서는 OO을 가면 된다, 교수님께서 추천하는 장소는 어딜까요?
두 군데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민속종교의 현장입니다. 제가 강원도 사람이고, 이 책 마지막 부분에도 기술한 바 있듯이, 삼척과 태백의 권역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곳에 번듯한 제도종교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문화적 자발성과 주체성을 기반으로 예부터 내려오는 민속종교의 전통이 많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산, 강, 바다가 어우러진 그곳의 자연환경도 좋지만 거기에 새겨진 소박한 신앙과 의례도 여행자에게 신선함을 줍니다.
다른 하나는 동학의 현장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전 충청권에 남아 있는 동학의 센터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 충남 청양의 창명대(천진교)에 관심을 가져볼 만합니다. 해월 최시형의 측근이자 핵심 제자였던 구암 김연국의 후예들이 꾸려온 교단으로서 계룡산 신도안을 호령하던 옛 자취와 열기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들이 간직한 동학의 열기와 문헌기록들이 방치되지 않길 기대합니다. 특히 옛 교주들이 남긴 일기자료를 비롯한 문헌들은 종교 이전에 문화재적 가치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쓰실 책은?
1년간의 안식년이 있었기에 이번의 답사기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첫 시도니만큼 모든 게 어려웠지만, 이따금씩 기회가 되면 시도해볼까 합니다. 물론 당장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종교학이나 민속학을 전공한 몇몇 동학(同學)들과 함께 민속종교에 관련된 공동의 테마를 공유해서 공저로 묶어내는 데 힘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문헌과 현장을 아우르고, 이론과 실제를 접목시키고, 사건과 해석이 곁들어진 민속의 종교문화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데에 중점을 두려 합니다. 일차적인 주제로 선정된 것이 산학(山學)입니다. 한국인 누구에게나 산은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어서 민속종교에서 빠트릴 수 없는 주제이자 소재였다고 봅니다. 높이와 넓이에 상관 없이 한국인들은 저마다 명산을 간직하고 있는 듯합니다. 홀로 학술논문을 쓸 때보다 이번 공동작업이 더 긴장되지만 합심해서 공감을 얻는 글을 구성해보고 싶습니다. 산에 대한 공동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한국들의 종교적 일상문화를 응축해온 강, 바다, 하늘, 나무, 조상 등의 테마로도 관심을 확장해볼까 합니다.
한국 종교문화 횡단기최종성 저 | 이학사
한국의 종교사와 민속사 속에서 잊혀가는 조상들과 그들의 명맥을 이어가는 후손들의 삶과 더불어 곳곳에 서려 있는 한국의 기도 문화 및 그 속에 깃든 정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