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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압도적인 죽음 앞에 나머지가 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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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으로 달아올랐던 어느 여름, 열아홉 살이었던 김해언은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당시 사건의 용의자 한만우와 신정준은 풀려나고 사건은 미제로 남지만 비극에 얽힌 사람들의 삶은 달라졌다. 해언의 동생 다언, 사건 당시 같은 학교에 다녔던 상희, 해언과 같은 반이었던 태림 등 애도되지 못한 죽음은 남은 자들을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2016년 『안녕 주정뱅이』이후 권여선은 단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수정ㆍ보완해 3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레몬』  을 세상에 내보였다.  『레몬』  속 등장인물들이 17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삶 자체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깨달음을 얻듯이, 감당하지 못하는 비극이 레몬빛처럼 눈을 찌를 때, 독자들은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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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만들어진 소설


『오늘 뭐 먹지?』  이후 일 년 만에 소설이 나왔어요. 검은 바탕에 그려진 레몬이 강렬해요.


산문집과 소설은 서로 다른 진도로 쓰고 있었어요. 산문은 써놨던 걸 모아서 내고, 원래 단편집이 나올 예정이었다가 『레몬』이 먼저 나왔죠. 디자인 시안을 메일로 보내주셨는데 하얀 바탕에 레몬 하나, 검은 바탕에 레몬 하나가 왔어요. 실물로는 이렇게 예쁘게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책 내는 작가의 기쁨이죠. 책은 물성을 가지니까요.


제가 쓰긴 썼지만 제가 만든 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물건이 주는 놀라움이 있죠.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고친 작품으로 들었어요. 기존 작품은 동명의 연극으로도 만들어졌죠?


연극을 보고 깜짝 놀랐죠.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다 섞인 채 진행되면서 보면 볼수록 낯설더라고요. 주인공이 되는 네 명의 화자 중 태림이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역할이었는데, 역할을 맡은 우정원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하시기도 했고, 태림이라는 인물이 너무 비극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소설을 수정하는 동안 계속 연극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개작할 때도 조금이라도 태림을 더 들여다보려고 노력했어요.


연극을 보기 전에도 개작할 생각이었나요?


중편 그대로 단편집에 넣을까도 생각했는데, 단편집에 뭉텅이로 중편이 들어가 있으면 호흡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어요. 분량은 50~60매 정도 늘어나고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수준으로만 고쳤어요. 원래 썼던 감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작품을 마구 비틀 수가 없었어요. 최선을 다해 마감을 해버렸는데 다음에 또 하게 되면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기껏해야 토핑 정도를 추가할 수 있지 뼈대를 들어내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금방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붙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죠.


소설로 창작된 이야기가 연극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연극에 영향을 받아 소설이 나오다니, 재밌어요.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계간지에 실린 뒤 출판이 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출판이 됐다면 감흥이 아무리 와도 바꿀 수는 없을 텐데, 운 좋게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에 연극으로 만들어져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작품으로 볼 수 있었어요.


한 편의 스릴러처럼 퍼즐을 맞춘다는 리뷰가 있었어요. 비밀이 하나 있고 뒤로 갈수록 비밀이 밝혀지죠. 장르 소설 같기도 해요.


장르 소설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장르야 그럴 텐데, 저로서는 워낙 살해나 죽음, 복수 등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쓰면서도 다른 느낌이었어요. 조금이라도 다르게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작가는 다 있거든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이야기를 짤 수 있을지 시도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장르적인 장치를 도입했었어요.


태림은 누군가한테 말하는 독백으로만 말하고, 상희 언니 관점에서는 해설자 느낌이 나요.


이렇게 훈련하다 보면 다른 분야로 조금은 익숙하게 쓸 수 있겠죠. 그저 열린 마음으로 조금씩 새로운 것들을 소설 안에 들이고 싶어요. 스스로 고인 물이 되면 싫증 나니까요.


“예전에는 내 속에서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요즘에는 내가 읽고 싶은 소설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쓴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독자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제가 쓸 걸 쓰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문득 제가 만약 독자라면 내 소설을 읽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독자 입장이 되어 보니 제 소설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 거예요. 작가와 독자가 교감하는 접점이 많은 글이 좋은 글이잖아요. 글을 쓰면서 저도 마음을 좀 열고, 나의 고민만이 아니라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장치 등 여러모로 시도해보고 싶어요. 힘이 달려도요.


소설 쓰기에도 체력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특히 장편은 더욱이요.


무엇보다 뭉텅이 시간이 필요해요. 단편은 부스러기 시간이라도 짬을 내서 하면 어떻게든 모아지는데, 장편은 부스러기로는 안 되고 한 달이면 한 달, 소설만 구성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요. 무엇이든 같이 하기는 어렵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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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노란색이 있었어요


악한 인물로 그려진 신정준은 소설 속에서 많이 드러나지 않아요.


작가가 인물의 언어를 구사하기 어려우면 그 인물을 은폐시킬 수밖에 없거든요. 개연성 떨어지는 언어를 억지로 만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섣불리 가해자의 언어를 쓰면 상투적으로밖에 될 수 없어서, 그 언어를 제가 책임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해자가 어떤 사정으로 뭘 했는지 쓰기보다는 불행을 겪은 사람 위주로 이야기를 쓰고 싶기도 했고요.


『토우의 집』  에서 아이가 주인공이었다면, 『레몬』은 어른이 되기 직전의 청소년들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을 맞닥뜨려요.


『토우의 집』  에서 아이들은 가장 무고한 존재잖아요. 가장 죄가 없는 존재에게 벼락처럼 뭔가가 오는데… 인혁당 사건 때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림 받고 폭력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국가 폭력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는 아이를 생각하며 마음이 슬퍼졌는데, 『레몬』  도 마찬가지였어요. 꼭 세월호를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에요. 그런데도 막 꽃피기 전의 아이들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떠난 아이도 그렇고 남은 아이도 그렇고요.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고등학생을 그린 것 같아요. 노란빛도 황현경 평론가가 평론을 써줘서야 알았거든요. 보니까 정말 곳곳에 노란색이 있는 거예요. 제목이 ‘레몬’으로 바뀐 것도 그 이후였고요.


2014년 이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마음에 노란빛을 깔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작별이나 상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세월호를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게 아닐까요.


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태림은 계속 자신의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을 찾고, 반대로 다언은 신의 무지함을 이야기하죠.


종교와 같이 큰 철학적 주제를 담을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불행이 닥친 사람들을 보면 절대적인 존재에게 어떻게든지 질문을 하고 대답을 받는 것 같아요.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왜라는 질문의 대상이 신이 되는 거죠.. 자기 자신의 불행과 비극을 묻고 답하는 양상을 보면 굳이 대비하려고 한 것 또한 아니었는데 다언과 태림의 대비가 드러나더라고요. 다언이 절대적인 무신론에 빠졌다고는 볼 수 없어요. 질문했으나 대답하지 않는다는 강한 원망이 있고, 다른 한쪽은 거의 맹신의 지경으로 가죠. 누구나 불행이 다가온 사람들은 신과 관계 맺는 양상이 다양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한편으로 태림은 시를 쓰면서 시마저도 종교처럼 믿게 돼요. 태림의 믿음은 절규나 비명에 가까웠어요.


자신은 평화를 얻었다고 강박적으로 외치는데 오히려 더 지옥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잖아요. 태림은 신을 접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게 아니라 미친 듯 신을 붙들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전에 다언이나 상희가 시를 쓴다고 할 때의 그 시와는 약간 다른 걸 거예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게 시라고 보면 태림의 표현과 다언의 표현도 다를 수 있고요. 각자 다른 경로로 인해 어떤 심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결말인 거죠.


다언이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179쪽)라고 말하지만, 막상 다언은 계속 죽음에 붙들려 있어요.


떠난 자는 선을 그어버렸는데 남은 자는 계속 손을 놓지 못해요. 죽은 자와 죽음 너머를 상상할 수 없고, 돌이킬 수도 납득할 수도 없으니까 붙들고 있는 거예요. 해언이 너무 아름다워서 모든 사람이 나머지 존재가 된 것처럼, 너무 압도적인 죽음 앞에서 우리는 나머지들이 될 수밖에 없어요. 다언의 말에 작품의 주제를 담은 건 아니고, 다언이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는 상황 자체를 그리고 싶었어요. 태림의 독백이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 다언도 잠언적인 말을 하죠. 자기가 한 복수로 인해 자기를 고립시켜야 하는 상황을 만든 채로 잠언 풍의 말을 하는 것. 그것이 제가 보고 싶었던 맥락인데 대부분 메시지를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잠언은 힘이 세서 그런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 말이 나오면 대개 작가의 메시지처럼 받아들여지죠. 상희가 다언이 말하는 게 어딘가 비틀려 있다는 걸 목격하잖아요. 그 모습을 안쓰럽고 안타깝게 지켜보는 것 자체가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누구도 치유 받거나 행복해지지 않았어요. 권선징악도 없고요. 신정준이 괴로워했다고만 나오죠.


그것도 사실 태림의 시각에서 그려져서 실제 그런지는 알 수 없는 거죠. 냉혈한인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태림이 스스로 그렇게 봤을 수는 있을 거예요. 태림과 다언 삶 모두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고요.


다언의 복수는 죽음을 죽음으로 갚지 않고 삶으로 갚아요.


그렇게 받아들여 주길 바라고 썼어요. 끝내는 복수가 아니라 자기 삶이 끝날 때까지 데리고 가는 복수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예쁜 아이라면 나중에 눈에 띄어서 TV라도 한 번 나오고 어디서든 밝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속편으로 나와도 좋을 것 같아요. 예빈이의 이후 삶에 대해서요.


그건 반응을 봐서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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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보다 울림


『안녕, 주정뱅이』후 이제는 술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레몬』에서는 정말 술 먹는 장면이 없더라고요.


요즘도 늘 말하고 다니고 있어요. 한만우 여동생과 다언이 맥주와 참외 먹는 장면이 『레몬』  에서는 제일 알코올 냄새가 나는데, 아무리 술 한 방울 쓰지 않겠다고 해 봤자 어떤 중요한 장면이 되면 그만큼이라도 술을 등장시켜야 하는 게 제 한계 같아요. 계란 후라이나 참외만 먹고 끝나도 되는데 저는 거기서 끝낼 수 없어요. (웃음)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삶의 반대는 평(平)인 것인가”(202쪽)라고 쓰셨어요.


평한 삶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데, 과하게 굴곡이 지거나 감당할 수 없을 만한 비극이 발생하면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게 평(平)한 일상이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유토피아 같은 마음이에요. 어느 순간 평한 상태여도 자신이 유토피아에서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잃고 나면 너무 소중해서 울게 되는 것. 불가능하기 때문에 갈망하지만 막상 존재하지는 않죠.


원래 작가의 말 없이 가려고 했어요. 출판사에서 소설 읽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독자에게 쓴 편지를 작가의 말로 싣게 됐어요. 제가 요새 평한 상태거든요. 이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사실은 평하고 싶은 마음과 평할 수 없어 생기는 의미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글이 나오게 된 거죠.


모순적이기도 해요. 소설은 평한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잖아요. 평평한 이야기는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모든 삶이 다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거겠죠.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평한 삶이 꼭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심리적으로 너무 잔잔하면 안되거든요. 그렇다고 일부러 마음속에 파도를 만들 수도 없고요. 작업하기에는 가장 좋은 조건인데, 과연 소설에도 좋은 조건인지는 모르겠어요.


다언이 삶에 대한 의미를 회의하듯, 의미 없는 삶 속에서 문학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의미라는 건 사람이 만드는 거잖아요. 오늘 기자님과 제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무의미한 작업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흩어져 있는 구름을 어떤 순간 우리가 볼 때 양 떼가 되는 것처럼, 순간 보는 사람에 따라 만들어내는 거죠. 의미라는 말보다 저는 울림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커다란 감동의 물결이 아니라 살짝 흔들리는 정도요. 그 정도는 왜 그런지 설명할 필요도 없어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마음에서 느끼는 게 있잖아요. 다언도 한만우의 삶을 보면서 느낀 게 있는데, 그게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한만우의 죽음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마음에 울림을 갖게 된 상태 같아요.


누군가 ‘읽으려고 하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의미를 찾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의미도 없을 거예요. 


맞아요. 내가 어떤 의도로 훌륭하게 썼기 때문에 이렇게 읽힐 수밖에 없어, 이런 건 없어요. 읽어주는 사람이 그걸 읽고 각자가 가져가는 무엇인가는 있겠죠. 저도 써놓은 걸 설명하라고 하면 못하겠어요. 제 속에서는 울림이 있고 의미가 만들어지니까 썼겠죠. 하지만 제가 쓴 대로 독자가 그대로 느끼란 법은 없어요.


책이 안 팔린다지만, 사람들은 꾸준하게 이야기를 찾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권여선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하나요?


제 소설은 영화 <300>처럼 좁은 층이지만 대신 매니악한 300명 정도의 독자가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을 낼 때마다 중점을 두는 부분이 바뀌다 보니까 독자분들 중에는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작품이 좀 더 독하고 섬뜩했으면 좋겠는데, 풀어진 것 같다고요. 아무래도 가장 결정적인 건 『안녕, 주정뱅이』  같아요. 평생에 가장 많이 판 책이었거든요. 지금 『안녕, 주정뱅이』  의 독자분들이 『레몬』  을 사주시는 것 같은데 또 반응이 갈리겠죠. 그렇게 독자들이 변한다는 건 자화자찬하자면 제가 변하고 있어서일 거예요. 조금씩이라도 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도 독자는 계속 변할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작품이 나오게 될까요?


운 좋게도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일 년에 단편 두세 편씩을 쓰고 있어서 2, 3년에 한 번은 단편집을 내고 있어요. 이번에 장편을 천천히 준비해보려고 해요. 글 쓸 분위기를 계속 만들고 있어요. 이번에는 또 어떻게 다르게, 해괴하게 써볼까 싶어요.


지금 쓰는 단편은 어떤 내용인가요?


은퇴생활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은퇴 이후를 매우 걱정하다 의외로 윤택한 노후를 보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진 부부의 이야기예요. 어떤 면에서는 위선적이고 속물적이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부부요.

 


 

 

레몬권여선 저 | 창비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어떤 파장을 남기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며 삶의 의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읽는 이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순식간에 끌어당기는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며 장르적 쾌감마저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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