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33년의 예루살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의 7일.
소설 『밤의 양들』의 배경이다. 익숙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 예상할 테지만,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소설의 첫 장에 이름을 올린 주인공은 ‘예수’가 아닌 ‘마티아스’. 구원자로 온 신의 아들이 아니라 ‘도살꾼, 사기꾼, 포주, 검투쟁이, 로마 군졸, 밀정’으로 살아온 사내다.
로마인 백부장을 살해한 죄로 수감 중이던 마티아스는 ‘조나단’의 부름을 받고 감옥 밖으로 나온다. 유월절을 일주일 앞둔 예루살렘, 그 성스러운 공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성전수비대의 대장인 조나단은, 충직한 사냥개를 풀어 사냥을 하듯, 마티아스를 조종해 살인범을 잡아들이려 한다. 로마인 총독 ‘빌라도’ 또한 진실을 쫓을 한 사람을 파견한다. 로마인 현자 ‘테오필로스’,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추적과 해결에 능한 인물이다. 사건을 조사하는 도중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이 벌어지고 마티아스와 테오필로스는 합동 수사를 시작한다. 진실에 다가간다고 느낄수록, 두 사람과 예수 사이의 거리도 좁혀지는 상황. 마티아스, 테오필로스, 그리고 예수. 세 사람의 운명이 얽히기 시작한다.
『뿌리 깊은 나무』 , 『바람의 화원』 , 『별을 스치는 바람』 등 한국형 팩션의 새 지평을 연 이정명 작가. 그가 12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한 추리소설 『밤의 양들』로 돌아왔다. 탄탄한 역사 철학 종교에 관한 지식, 그 사이를 치밀하게 파고드는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성경과 추리소설을 접목시킨 파격적인 시도는 물론이고, 뻔하지도 않고 노골적이지도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놀라움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책이 재밌는 추리소설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오래전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지금의 우리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인간,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
A.D. 33년의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의외의 배경에 놀랐다는 독자 반응도 있었어요.
독자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독자들에게 알려진 저의 작품이 주로 우리나라 역사를 배경으로 쓴 것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멀리 떨어진 시대와 공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저는 이 책을 쓸 때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이 실제로 남아있는 기록의 이면,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나 기록이 놓친 부분들을 상상의 인물과 사건으로 채워서 진실성을 조금 더 밝혀보는 것이었는데요. 그런 작업의 절차나 방식으로 보면, 이번 책도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생각해요.
성경은 여백이 많은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그 여백이 작가님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밤의 양들』 은 어떻게 탄생됐나요?
여백이 많은 기록이기도 한데, 성경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성경 이후의 수많은 기록들과 역사에 의해서 그 공백을 채울 수가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공백이 많다고 해서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완벽한 기록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개개인이 다 다를 수가 있겠죠. 이야기로써 받아들이는 독자의 입장도 있고요. 저는 성경에서 짧게 언급했던 사람들이나 짧은 에피소드 하나로 넘어가는 인물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경에 대해서 읽어보고 공부하게 됐고요. 그러는 과정 속에서 인물들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내가 있었죠. 그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지, 궁금해 하셨을 것 같아요. 이번 소설에서 ‘마티아스’로 탄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번 작품 같은 경우에는 상상 속의 인물을 토대로 해서 그 시대를 바라본다거나 기록을 재조명하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그 시대 자체를 충실하게 그림으로써 인물의 개연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됐던 것 같아요. 마티아스라는 인물이 왜 살인자로 설정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마티아스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원죄를 받은 인간,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조건이라는 속성들을 다 가지고 있는 인물이거든요. 마티아스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굴레를 의미하는 거였어요. 마티아스와 대척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로 ‘테오필로스’가 나오는데요. 그리스의 철학과 지식을 배경으로 가진 사람이에요. 마티아스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굉장히 원초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고 유대인이고요.
상반된 배경을 가진 두 인물이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도록 설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어떤 부분에서는 당시의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적인 배경을 조금 상징한다고 할까요.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강한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적인 신념을 지니고 있었어요. 서구 문화를 지탱하는 문명의 큰 기둥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볼 수 있는데, 테오필로스는 전형적으로 헬레니즘, 로마의 문명을 상징하면서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마티아스는 성전에서 양육을 받으면서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죠. 결국에는 두 인물의 배경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상징하는 것이고요. 그 두 사람이 충돌하고 엇갈리고 협조하면서 사건이 풀려나가는 것이 당시의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예수가 아닌 마티아스의 이야기에서 소설이 시작됩니다. 왜 예수에게 더 중점을 두고 쓰지 않으셨어요?
그 이야기는 지난 2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기존에 했던 그런 방식과 시각으로는 굳이 제가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대를 이야기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면, 그 시대를 살았던 예수의 모습이 자연적으로 떠오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부감 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예수를 약간 편광 시켜서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그 속의 여러 가지 빛깔들이 드러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죠.
2천 년 전 예루살렘에 투영된 지금의 대한민국
마티아스가 ‘밀정’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밀정으로서 그가 하는 일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말’을 수집하는 거잖아요. 그걸 임의로 가공해서 전달하거나 팔고요. 또 ‘소문’이라는 것이 어떻게 진실을 담거나 왜곡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말’과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이 소설은 2천 년 전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주 작은 도시의 이야기인데요. 그러한 지리적 시간적 격차나 이격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소설이 한국의 소설가가 쓴 한국적인 작품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독자 분들이 그렇게 받아들여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왜냐하면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말과 소문과 진실과 왜곡된 것들을 받아들이는 매커니즘이 지금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목도하고,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것이 오래 전의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2019년의 대한민국을 투영하는 하나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에도 얼핏 나오지만 로마의 총독과 로마 세력이 식민지 속주에서 시행하는 세금이나 여러 정책들, 행정적인 행태들이 있는데요. 지금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과정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지금의 우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조나단’이라는 인물이 떠오르는데요. 자신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 충성도가 엄청난 사람이죠. 그 거대한 이념 때문에 한 인간을 희생시키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요.
조나단은 성전 세력에서 아주 중추적인 인물이에요.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위정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것이 국가, 조직, 사회에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독선으로 사회를 끌고나갈 때,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희생들이 있죠. 그런 것도 복잡한 지금의 현실을 타개해나가는 위정자나 일반 시민들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조나단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복합적이지만, 나름대로 자기 논리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인물이죠. 그 주장이 진짜 사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마티아스는 “누구든 자신의 형틀은 자기가 메고 가야 한다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에요.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을 갈구하는 인물이 아닌 거죠. 이렇게 설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일차적으로는, 소설 속에서의 구도로 봤을 때, 마티아스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역할은 오히려 안티 히어로 쪽에 가깝지 않나 라는 생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일반적인 죄와 속죄에 대한 관념, 생각들과 배치되는 자기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요. 또 마티아스는 당시의 사회 제도와 배치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거든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죄를 지었다면 생명을 바치고 속죄의 제를 지내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을 텐데, 마티아스는 그것과도 배치되는 자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인간으로서의 굴레를 가지고 있는 안티 히어로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는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시시포스 같은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운명을 거스르는, 또는 기존 관념과 충돌하는 자기 생각을 가짐으로써 당시 사람들보다 굉장히 현대적인 생각을 하는 거죠. 한계가 있고 여러 가지 제약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아주 인간적인 인물이 마티아스예요.
12년 동안 집필하신 작품이에요. 2007년경부터 쓰기 시작하신 건데, 그 시기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이 소설을 계속 붙잡고 있는 동안 다른 작업도 병행했기 때문에, 12년의 세월을 온전히 이 책에만 전념해서 바친 건 아니에요. 초고가 나왔을 때부터 계속 수정하고 재검토하는 과정이 12년이 걸렸다는 거고요. 그 기간 동안 계속 다른 작품을 하면서도 병행해서 작업을 해왔죠. 2007년이라는 시간과 특별히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작품마다 긴 시간 준비하시고 집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쉬운 길로 가지 않으세요(웃음)?
다른 작가 분들도 다 그러시죠. 작품 하나하나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시죠.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이고요. 왜 고생을 하냐고 물으셨는데(웃음), 저로서는 굉장히 즐거운 고생이죠. 풀리지 않는 부분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방법을 찾고, 그렇게 해서 맺혀있는 부분을 풀어내고, 그런 과정들이 저한테는 오히려 재밌는 것 같아요.
재밌는 추리소설로 읽혔으면
『밤의 양들』 에는 방대한 지식, 역사적 사실, 추리의 틀이 같이 정교하게 맞물려있어요. 초고를 완성하시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아요.
초고를 쓰는 시간은 생각보다는 길지 않아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1년 안에 써요. 집필부터 시작되는 시간이 그렇고, 구상 기간을 따지면 12년 이상의 기간이 있는 거겠죠. 어느 날 문득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집필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하면 계속해서 자료를 찾고 수집하고 분류하고 축적하고 검토해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전체적으로 떠오른다고 할까요. 어느 정도 구상이 끝났을 때 집필로 들어가기 때문에, 막상 집필 과정에서는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어요. 오히려 초고를 작업하고 난 뒤의 과정이 더 힘들다고 할까요.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모순이 없도록 맞춰야 되니까요. 그래서 편집자분들이 엄청 고생을 하실 거예요(웃음). 수정 과정이 마지막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편집자 분들, 디자이너 분들이 고생을 많이 하시죠.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금까지 팩션을 써오시면서 ‘소설은 소설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오해할까 봐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해오셨는데요. 이번 작품은 종교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만큼 조금 더 조심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소설 속의 어떤 문장을 보고 ‘이게 신과 종교에 대한 작가의 해석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우려 때문에 12년 동안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죠. 어차피 저는 쓰는 사람이고, 이 책을 읽고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읽는 분들 각각의 입장이나 생각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저로서는 제가 쓸 수 있는 한도에서 그 시대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주인공들이 각각의 상황에서 개연성 있게, 모순 없이 그려지도록 했고요. 그런 과정들이 조금 길어진 것 같아요. 이 책에서 종교적인 색채라든가 속성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재밌는 추리소설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계속 빛의 조도를 조금씩 높여가다 보면 어느 순간 벽에 있는 벽화가 드러나면서 부감이 되는 식으로, 사건을 쫓아가는 과정 속에서 독자들이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바라보게 되면 좋겠다는 게 가장 바라는 바인데요. 독자 분들은 어떻게 읽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이기도 하고, 여러 세력들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서 충돌하고 엇갈리는 과정에는 정치소설의 성격도 일정 부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종교소설의 속성도 분명히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이 이야기가 재밌는 추리소설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처음부터 장르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하신 게 아니었죠?
결심을 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저에게 익숙한 방법이었던 것 같고요. 저는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쓰는 글을 많이 써왔잖아요. 기록이라는 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저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써온 거죠. 그렇게 해서 이면의 것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메시지, 이야기, 대상에 대해서 정말 논리적으로 접근해 나가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아주 허황된 이야기가 되거나 앞뒤가 안 맞는 중구난방의 이야기가 되죠. 추리라는 기법이 하나하나 논리를 세워나가고, 그것들을 계속 강화해 나가고, 결국은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종착점까지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끌고 갈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쓰는 것 같아요.
굳이 율법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누가 봐도 마티아스는 죄 많은 인간이에요.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인간에게서 성스러움이 발견되는 순간도 있을까’ 싶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성스러운 순간이라고 표현해야 될지 아니면 그 표현이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사건이 끝났을 때 마티아스의 고뇌와 내적인 긴장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건이 끝났지만, 그러면 모든 게 풀려야 되지만, 마티아스의 갈등과 내면적인 고민은 그때부터 아주 격렬하게 시작되는 거예요. 자신이 윤리적인 선택을 해야 되는 거죠. 진실을 묻으면 자신은 어느 정도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묻어버리지 않으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것은 종교적인 선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주 윤리적인 선택이죠. ‘진실을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사건이 다 해결된 후에 다시 시작돼요. 마티아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 갈림길에 선 그 장면이 마티아스로서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아니었나 싶어요. 성스럽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저로서는 마티아스의 가장 진실한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밤의 양들이정명 저 | 은행나무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예루살렘이라는 성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그 당시 예수와 그의 진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재조명된다. 성경과 추리소설과의 만남이란 형식 또한 파격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