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은 4년 만의 신작 소설집을 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앞으로 책을 몇 권이나 더 낼지 모르니까, 최선을 다하자고. 인터뷰 요청이 오면 가능한 한 다 받아들이려고 했다. 『아직 멀었다는 말』 이 출간된 건 2월 1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지역사회감염으로 확대되는 시점이었다. 거리는 한산하니 서점에도 사람이 없었다. 낭독회, 강연회는 모두 취소됐고 인터뷰 요청은 딱 두 곳에서 왔다. 권여선의 오랜 독자들의 일찌감치 그의 소설집을 예약해 받았지만 대면할 수 있는 기회는 잃었다. “제가 나이도 있고 얼마나 책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권여선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소설가로 잊히는 일은 “아직 멀었다”는 말.
취기의 흥건함이 사라진 자리
카메라 앞에서 너무 자연스러우셔서 놀랐어요. 아마도 『Axt』커버 촬영 이후 가장 사진을 많이 찍은 오늘 아닌가요?
『Axt』 인터뷰 때 생전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을 일은 다시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촬영도 만만치 않네요. 그래도 이번에는 실내 촬영이라서 심신이 좀 편했어요. 사진 촬영은 항상 긴장되고 힘들지만, 사진을 찍는 분의 말씀만 잘 들으면 시간이 단축된다는 걸 아니까요. 제가 매우 협조적으로.
촬영이 끝나고 나니 무척 좋아하셨어요.
네, 후련하고요. (웃음)
출간 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평소라면 지금이 가장 바쁘셨을 텐데요.
3월에 글 좀 열심히 써보려고 토지문화관에 입주신청을 했는데 연기됐어요. 코로나19로 인해 출간 행사도 모두 취소됐고요. 그래서 붕 뜬 상태로, 일도 안 하고 글도 안 쓰고, 불안에 떨면서 놀고 먹고 지내요. 잠시 멈춤 운동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요즘 사람들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를 많이 읽는다고 해요. 최근 TV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고요. 소설가들은 어떤가요? 전염병이 돌면 삶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계기가 될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즉각적으로 소설에 반영하는 민첩성이 없기 때문에 그저 하루하루 자가격리 상태를 충실히, 곰곰이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도 문득 드는 생각은 있는데, 뉴스를 보다 보면 이런 재난이 스펙타클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고, 저 또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 제 속의 악마와 야만을 만나는 느낌이 듭니다.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 생겨 먹었다면, 지구의 종말이 와도 인간은 어느 구석에서든 유희의 기쁨을 찾아내겠구나 경탄스럽기도 하고요. 또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데, 예전에는 엘리베이터 탈 때 사람들이 꽉 차 있는데도 안 기다리고 어떻게든 끼어 타려고 하고, 카페나 식당 문에서 들고날 때 동선이 꼬이면 막 밀어붙이는 사람들도 많고, 줄 서면 숨결이 느껴지게 바짝 붙어서거나 등을 밀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요즘은 안 그러더라고요. 서로 거리를 두니까 숨통도 트이고, 본의 아니게 서로 삼가는 태도를 보이는 듯해서 예의 바른 느낌도 들고요.
『아직 멀었다는 말』 이 소설집으로는 4년 만이지만, 작년 4월에 장편 소설 『레몬』이 나왔어요. 원래는 이번 소설집이 더 빨리 나올 계획이었다고요.
단편이 모여 책 한 권 분량이 된 게 작년 초였으니까 그때 바로 묶어냈으면 『레몬』보다 빨리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일정이 바뀌었죠. 아마 단편집을 연달아 내기보다 단편집-장편-단편집 이런 식으로 리듬을 타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2016년에 출간된 『안녕 주정뱅이』 가 정말 큰 사랑을 받았어요. ‘주류(酒類) 문학의 위엄`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고요. 이번 작품집은 보다 침잠한 느낌이 들었어요. ‘술’이 등장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고요.
글쎄요. 두 작품집의 차이를 뚜렷하게 말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작가는 쓰는 과정 중에 있으니까, 변화하려는 의지는 충만해도 그 결과인 작품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명료하게 인식하기 어려워요. 그래도 누가 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면, 술기운이 쏙 빠졌다 하는 정도? 그런데 침잠의 느낌이 드신다니, 그건 뭘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취기의 흥건함이 사라진 자리에 모래 같은 울화들이 가라앉아 있어서 그럴까요? 슬픔의 물결이 분노와 무력감의 응결로 바뀌어서 그럴까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좀 침잠 스타일로 바뀐 건지, 잘 모르겠네요.
『아직 멀었다는 말』 에는 8편의 작품이 실렸어요. 2016년부터 2018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작품이 실린 순서가 참 적절하다고 느껴졌어요. 표지가 환한 파스텔 톤이라서 그런지 무거운 이야기도 조금은 경쾌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이 소설집의 목차는 편집계의 금손이신 김내리 씨께서 해주셨는데요. 그 구성이 교묘한 게, 전체 단편들 중에서 가장 경쾌하다고 할 수 있는 「모르는 영역」과 「전갱이의 맛」이 소설의 입구와 출구에 놓여 있고, 그 중간에 어두운 침잠 계열의 소설들이 지하계단 내려가듯이 배치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마 전체적인 느낌은 어두운데,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햇살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으셨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제 맘대로 침잠과 경쾌의 조화라고, 나아가 융화라고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싶네요.
죽어라 힘을 빼면 안 됩니다
소설가를 인터뷰할 때, 사실 고민이 많이 들거든요.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텐데, 너무 친절하게 작품을 해석해버리면 좋은 감상을 이끌어낼 수 없지 않나? 싶어요. 작가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일 수 있고요.
맞아요.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건 사진 촬영 다음으로 곤욕스러워요. 사후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자괴감도 들고요. 사실 자기가 쓴 글이라고 해서 작가가 그 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는 않아요. 독자들이 책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책은 완성되지요. 작가가 나서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설명하는 게 오히려 감상을 방해하기도 해요. 하지만 또 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더 듣고 싶고 알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가진 독자들도 계시니까,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곤욕스러움도 이겨낼 만하죠. 아주 열심히는 못해도 최소한의 서비스는 해드리려고 하는 편이에요.
소설집에는 장편과 달리 정말 많은 인물이 등장하잖아요. 특별히 잊히지 않는 인물이 있나요? 저는 「손톱」의 ‘소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갚아야 할 빚이 많아 백 원 단위까지 돈을 계산해야 하는 소희를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저도 소희예요. 「손톱」을 쓸 때 저하고 소희의 나이 차이가 31년쯤 났어요. 지금은 35년쯤 나고요. 오래 고민했고 쓰면서도 계속 고민했던 인물입니다. 소희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제가 느꼈던 안타까운 감각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제가 쓰는 소설 속 인물들을 최대한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번 책에서는 소희만큼 조심조심 마음이 쓰인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요.
「모르는 영역」에서 주인공 ‘명덕’은 자신의 페인팅을 보며 “더는 세지지 말자. 그런 생각. 조금 연해도 된다고, 묽어도 된다고, 빛나지 않아도, 선연하지 않아도, 쨍하지 않아도, 지워질 듯 아슬해도 괜찮다(10쪽)고 생각합니다. 작가님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짐작해보았어요.
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잘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죠. 세지자는 결심보다 세지지 말자는 결심을 지키기가 더 힘듭니다.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도 잘 알 수 없고요. 힘을 주는 일은 죽어라 힘을 주면 되는데, 힘을 빼는 건 죽어라 힘을 빼면 안 됩니다. 단번에 확 빼도 안 되고 적당히 살살 정교하게 빼야 해요. 조금 연해지는 일도, 관건은 ‘조금’입니다. 이 ‘적당히’나 ‘조금’이 바로 어떤 미묘한 심미적 경험을 낳는 토대가 되거든요. 이건 룰이 아니라 감이니까 매번 작품 쓸 때마다 달라져요. 그래서 적당히가 안 되면 힘을 못 빼고 차라리 센 척하고 쓰게 되죠. 아마 평생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쓰게 되지 싶어요.
「모르는 영역」과 함께 「너머」도 특별히 좋았습니다. 「너머」는 가장 현실적인 소설이 아닐까 싶었어요. 기간제교사인 주인공 ‘N’은 ‘Neutrality(중립)’의 N일 것 같기도 했고요.
맞아요. 그 N을 떠올리고 명명을 했습니다. 중립적이라는 건, 성별에서도, 직업에서도, 연령에서도 아무 소속감을 갖지 못한, 경계의 영역에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 소설에서 N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성별은 드러나지 않았고, 직업은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이고, 나이는 헬스장에서 나오는 젊은이들과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 사이에 걸쳐 있죠. 이런 삶의 고단함을 세밀하게 드러내려니 리얼리즘 스타일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고, N이 절망의 벼랑에서 순식간에 끝장을 보려는 사나운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신경향파 소설에 가깝기까지 하죠. 그러나 끝내 살인이나 방화는 저지르지 않고, N은 세상에 끝내 버릴 수 없는 게 있다고 다시 마음을 돌리는데, 사실 그 마음 한 끗 돌리는 일이 N에게는 지구를 거꾸로 돌리는 일보다 더 어려웠을 거예요. 마음을 지옥에서 현실로 건져 올리는 일이니까요.
「희박한 마음」에는 레즈비언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한국 소설에서 이런 캐릭터를 본 것은 저는 처음입니다.
결혼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해 관심이 있어요. 근래에 포괄적 가족형태를 인정하는 법제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지만 제 생각에 그런 법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요원해 보입니다. 그야말로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죠.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런 법제화 문제를 다루려고 한 건 아니고, 아예 그런 꿈조차 꾸지 못했던, 늙은 레즈비언 커플의 꿈과 무의식과 두려움과 분노를 그리고자 했어요. 자신들이 왜 그렇게 아득한 공포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급급하면서 살아야 했는지, 왜 꿈속에서까지 타인들의 개입과 추궁에서 자유롭지 못한지, 이미 지나왔지만 격렬한 회한을 남기는 과거에 대해서 집요하게 반추하는 이야기를요.
일곱 번째 순서로 실린 「재」가 발표한지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안녕 주정뱅이』를 내고 처음 쓴 단편인데요, 일단 술을 안 먹이자 결심하면서 시작했어요. 하지만 <재>의 주인공은 저의 방심과 태만으로 여러 번 술을 먹을 뻔한 위기에 빠졌고 극적으로 제가 정신을 차리고 구출해내긴 했는데 마지막에 보면 자기는 안 마시지만 옆자리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있어요. 거기까지는 제가 미처 관리를 못했습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술을 안 먹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쓰는 내내 캐릭터에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겐 다소 알레고리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집 제목 『아직 멀었다는 말』 은 「손톱」에서 따온 말입니다. 어떤 의미로 제목이 되었나요?
‘아직 멀었다’는 말은 요원하다 또는 가망이 없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흔히 쓰입니다. 넌 안 돼, 아직 멀었어, 뭐 그런 절망적인 진단의 의미를 가진 말이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중에 누군가 빨리 도착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거나 안달을 할 때 조금만 더 지긋이 기다리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주로 안달이 난 쪽은 아이들이고 ‘아직 멀었다’는 말을 하는 쪽은 어른들이죠. 그럴 때 이 말은 요원하거나 도착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전혀 없고, 우리가 가고 있으니, 끝내 가긴 갈 테니 조금만 참아보자는 격려, 조바심을 잠재우는 위로의 뜻이 담겨 있죠. 저는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두 가지 뉘앙스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독자들이 어느 쪽으로 읽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의도대로 쓰는 것을 경계한다
이번에도 ‘작가의 말’은 쓰고 싶지 않으셨다고요.
소설 말고 다른 글을 쓰는 일이 점점 싫어집니다. 에세이도, 추천사도, 심사평도 그렇습니다. 그 중에 가장 싫은 게 작가의 말인데, 소설로 진을 다 뺐는데 또 무슨 말이 필요한가 싶어요. 흔히들 작가의 말은 소설과 달리 진솔한, 작가의 민낯을 보여주는 그런 걸로 알고 있지만, 제 생각에 작가의 말이야말로 허구 중의 허구 같아요. 그것도 한 톨 의미도 없는 허구… 아니, 다른 작가들의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제 경우엔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아무튼 이번 ‘작가의 말’로 저는 독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쓰자 하고 썼는데, 마지막 문장을 한 호흡에 토해 놓고 놀랄 만큼 위로를 받았어요. 그 문장 속에서, 제 독자들이 제 임종을 지켜주는 기이한 환상을 체험했거든요. 아울러 아직은 제 손도 따뜻합니다.
독자들도 작가님과 손을 잡은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코로나19가 지나가면 제 손이 따뜻할 때 독자들의 따뜻한 손과 맞잡고 싶네요.
김애란 작가님이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추천사를 쓰셨어요. 소설을 쓰는 작가는 어떤가요?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줄 때 좋은가요?
다 읽고 났을 때 독자들이 제가 그 소설을 쓸 때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면 가장 좋겠어요. 이건 제 의도대로 읽어 달라는 뜻이 아니고, 마음의 온도, 마음의 흔들림, 마음의 질감이 그 글을 쓸 때의 저와 닮아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에요.
이번 작품집을 읽으면서 “권여선 작가님은 모르는 영역에 관해 말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아는 척하는 걸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저도 곧잘 아는 척을 합니다. 아는 척을 해줘야 할 때 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보면 ‘나’라는 주체가 희미해지고 와해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면 무리수를 두는 걸 알면서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게 됩니다. 지금 이러니 저러니 떠들고 있는 것도 좀 그렇다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아는 척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지만, 이게 삶의 스타일이 되어버리면 무척 역겹겠다, 경계하자, 그런 생각이지요.
최근 저작권 양도 문제로 이상문학상을 거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19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윤이형 작가님은 ‘작가 활동 중단’을 선언했고, 수십 명의 작가들이 문학사상사의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작가님도 연대의 뜻을 밝히셨어요.
한번 터질 게 터졌구나. 터지긴 터졌는데, 잘못한 쪽보다 잘못을 당한 쪽 피해가 더 크고, 잘못이 쉽게 고쳐지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상징적 효과는 있다고 봐요. 관행이네 뭐네 하면서 비슷한 류의 잘못들을 버젓이 저지르는 게 예전만큼 쉽지 않아졌으니까요.
『Axt』 18호 인터뷰에서 “작가들이 등단하면 시상식이 아니라 오리엔테이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 오리엔테이션에 작가님을 강사로 초빙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특히 여성작가들에게요.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이 드러난 후 저는 소위 문단이라는 곳에 입문하는 신인작가들이 그동안 얼마나 위태로운 먹잇감으로 존재했는지를 알게 됐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가슴 설레며 등단한 신인작가들에게 성적, 경제적, 인격적 희생과 협박을 일삼는 문인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요. 예술가들은 원래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심리적으로 취약하지요. 그런 취약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약하고 힘없고 물정 모르는 신인작가들에게 몹쓸 권력을 행사하면서 해결하는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다른 데서는 멀쩡한 꼴을 하고 있어서 잘 몰라요. 그런 인간들을 구별해내는 법을 알려주고 싶고, 믿을 만한 작가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연대하는 걸 권하고 싶고, 부당하고 모욕적인 요구를 거절하는 법, 문단 내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협박에 대응하는 법. 아, 정말 제가 해주고 싶은 얘기도 많고 다른 작가들에게서 듣고 싶은 얘기도 많아요. 문단은 결코 상명하복의 문화가 통하는 곳이 아니며 통해서도 안됩니다. 유명작가나 선배문인의 요구라고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가 없어요. 나이와 경력을 떠나서 모든 문인들은 서로 동등하다는 것, 최소한의 존중과 동료의식만 갖추고 대하면 된다는 것, 신인작가라고 절대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 이런 걸 아주 암기를 했으면 해요.
소설을 쓸 때 경계하는 것이 있나요?
제 의도대로 쓰는 것을 경계해요. 제 계획이나 구상 그대로, 의도를 거의 배반하지 않는 글쓰기, 그건 실패, 완전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요. 언어가 언제나 저를 이겨주기를 바라면서 씁니다.
소설가 권여선이 갖고 싶은 능력은 무엇인가요? 인간 권여선은요?
소설가 권여선이라면 당연히 소설 잘 쓰는 능력을 갖고 싶겠지만, 그건 너무 무책임하고 얄팍한 소원 같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능력은 인내입니다. 꾸준히 쓸 수 있는, 그게 언제가 됐든 쓰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쓸 수 있는 인내. 인간 권여선이 갖고 싶은 능력은, 관대함입니다. 제가 속이 좁아서 파르르 끓을 때가 많은데, 나이도 있으니 좀 넓은 품을 갖게 되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둔감해지면 안 되고, 이 밀도로 공간만 넓게. 음… 어렵네요. 그저 더 퇴행하지만 않아도 다행이죠.
작가라서 좋은 때는 언제인가요?
이렇게 책을 내고 독자가 말을 걸어올 때요. 쓸 때는 혼자니까 고독하고 답답하고 뭐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의기소침하다가 자화자찬하다가, 거의 숨이 넘어가게 혼란스러운데, 책이 나오고 누가 제 소설을 읽고 이런 저런 생각이나 감정을 제가 느낄 수 있게 표현해놓은 걸 보면, 아 이런 게 기적이구나 싶어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독자들이 전생에 아주 가깝고 그리웠던 지인들처럼 여겨지는 게, 참 신비롭고 좋습니다. 물론 독자들 중에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지만 그분들은 전생에 저와 별로 안 친했던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전생에 뭐 백 프로 좋은 관계만 맺고 살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웃음)
아직 멀었다는 말권여선 저 | 문학동네
소설집의 제목인 ‘아직 멀었다는 말’은 「손톱」 속의 “문득 소희는 새처럼 목을 빼고 어디까지 왔나 확인하듯 창밖의 거리를 내려다본다. 할머니가 아흐 어하 소리를 내며 하품을 한다. 그건 아직 멀었다 소희야, 하는 말 같다”라는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