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일제강점기의 조선. 김해의 작은 마을 ‘어진말’에 살던 열여덟 살 소녀 세 명이 하와이로 건너간다. 버들, 홍주, 송화. 세 사람은 바다 건너 전해진 남편 될 사람의 사진 한 장과 결혼 지참금을 들고 고향을 떠난다. ‘이곳’과 달리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그곳’, 큰돈을 벌어 친정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그곳’을 그리면서. 역사는 이들을 ‘사진 신부’로 기억한다.
우리는 ‘사탕수수 밭의 노동자’로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남성 서사로 점철된 그 이미지 안에 여성들의 모습은 지워지고 없다. 이민 1세대 남성과 그 자녀들의 가족 구성원이었을 여성들. 분명 역사를 함께했을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에게 하와이는, 그곳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이금이 작가는 재외 동포에 관한 책 속에서 세 명의 ‘사진 신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서 버들과 홍주와 송화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낯선 땅에서 세 사람이 마주했던 녹록치 않은 현실과 그 속에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삶, 그 모두를 가능하게 했던 여성들의 연대와 새로운 가족 탄생의 모습을 그려낸다.
세 명의 ‘사진 신부’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처음 사진을 보신 건 언제였나요?
다른 작품의 자료 조사차 재외 동포에 관한 책들을 보다가 발견했는데,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가 2007년이더라고요. 책 속에 하와이 이주민에 대한 자료들이 있었고 ‘사진 신부’에 대한 사진들도 있었어요. 그 중에 하나가 이번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부채와 양산, 꽃을 든 세 명의 여성이 찍힌 사진이었어요. 그걸 보는데 저한테 이야기가 확 들어온 거죠. 그 옛날에 어떻게 그렇게 먼 하와이에 갈 생각을 했을까...
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을까, 궁금해지셨군요.
그렇죠. 그 책에 보면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간 여성들이 고생했던 이야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노동자로 일하며 고생한 이야기와 관련 자료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때는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준비할 때라 마음 한 구석에 놔두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자료 조사차 요코하마 항에 갔었는데 이민사 박물관이 있는 거예요. 당시에 우리나라 노동자 7천여 명이 하와이에 갔는데, 일본은 20만 명이 갔어요. 그들이 먼저 ‘사진 결혼’을 했어요. 우리나라의 ‘사진 신부’는 천 명 정도가 갔고요. 이 이야기는 빨리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007년부터 생각해 오셨던 이야기인 거네요.
앞서 말했던 그 사진 한 장이 계속 마음속에 들어 있어서, 그러면 그 세 명을 주인공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사진으로 남은 그 인물들한테 생명을 넣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마음속에서 구상을 한 거죠.
작품을 다 쓰신 후에 하와이에 가셨다고 들었어요. 느낌이 어떠셨어요?
감회가 새로웠죠. 사실 하와이를 여러 번 가서 취재를 할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한 번밖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가면 현재의 하와이를 보는 거잖아요. 나는 백 년 전의 하와이를 그려야 하는데. 현재의 하와이를 보고 나면 상상력에 방해를 받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자료를 통해서 백 년 전의 풍경들을 보면서, 구글맵을 활용해서 동선을 짜면서(웃음), 소설을 먼저 다 써놨어요. 나중에 하와이에 간 건 내가 쓴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자료에서는 느낄 수 없는 햇살이나 바람, 풍광 같은 걸 보고 싶어서였어요. 하와이에 딱 내렸는데, 낯선 곳에 생전 처음 간 건데도 너무 낯익은 거예요. 전생에 많이 와본 곳인 것처럼(웃음). 이 글을 쓰면서 너무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작품에 나오는 지명들, 거리들을 다니면서 주인공이 경험했던 곳을 내가 가서 확인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게 되게 재밌었어요.
자료 조사에 많은 공을 들이셨을 것 같은데, 책에 실린 참고문헌 목록이 짧아서 놀랐어요. ‘분명 이것보다 더 많은 자료를 보셨을 텐데’ 싶었어요.
그런데 자료가 이것 이상으로 있지가 않아요. 저도 놀란 게, 그렇게 자료가 많지가 않아요.
하와이 이주민이라고 하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가 떠오르는데요. 그들 가족의 일원이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요.
물론 처음 하와이에 간 1세대 이민자들도 되게 용기 있었지만, 여성들도 그게 대단한 모험이잖아요. 알 수 없는 곳에 미래를 걸고 떠난 거니까요. 또 남성들의 이야기는 더러 나온 것들이 있잖아요. 어쨌든 저는 여성의 삶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런 작품들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 소설도 쓰게 된 것 같아요. 실제로 자료들을 보면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에 가서 결혼을 하면서 하와이 미주 동포 사회가 안정됐다고 해요. 독신 남성들만 있을 때는 술 먹고 도박하고 문제들이 많았다는데 여성들이 와서 결혼하고 가족을 이루면서 교육열도 생기고, 그러면서 동포 사회가 안정되면서 독립 자금을 후원할 수 있는 첫 기틀이 마련됐다고 하더라고요.
독립운동사도 남성 중심으로 다뤄지는 경향이 짙죠.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는 하와이 이주민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여성들의 단체도 엄청 많았어요. 만들어졌다가 다시 나뉘었다가 하면서요. 미국이 배경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조선보다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덜했던 것 같고요. 여성도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조선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조국이 독립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더 알았던 것 같고요. 그렇게 해서 여성들이 되게 열심히 활발히 독립운동을 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가슴이 막 뜨거워졌어요. 제가 본 자료 중에 독립운동 후원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후원 금액이 기록된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 보면 여성들 이름도 되게 많이 나와요.
말씀하신 것처럼, 소설 속 여성들이 하와이에 간 뒤에는 조선에 있을 때보다 비교적 지위가 높아져요.
네, 남성과의 관계에서 거의 동등해지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조선에서는 여자들이 집안일만 했지만 거기에서는 실질적인 경제 활동을 했어요. 독신자들을 위해서 빨래와 밥을 해주고 돈을 벌거나, 아니면 밭에 나가서 일을 했어요. 똑같이 밭에서 일해도 여성이나 아이들은 남성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았지만, 그렇더라도 똑같이 일을 하고 경제활동을 했어요. 그래도 남성들의 삶보다는 힘들었겠죠. 여전히 가부장적인 생각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도 되게 많았어요.
여성들의 ‘연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작품이에요. 버들, 홍주, 송화가 친구이자 가족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데요. 이들의 ‘연대’는 처음부터 생각하셨던 건가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 마을에서 살던 세 명이 같이 낯선 곳에 간 거잖아요. 우리가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을 하는데, 외국에서는 얼마나 더하겠어요. 지금처럼 외국을 많이 나가는 시대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그들이 처음부터 갈등 없이 자매애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에는 버들이도 홍주를 조금 질투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송화를 약간 무시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갈등했다가 다시 더 깊이 우정을 느끼게 되죠. 저는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우선시해서 충분하게 그런 토대를 쌓고 결국은 자매애로 나아가는 걸 생각했어요.
이룬 게 없어도 박수 받을 수 있는 삶
버들, 홍주, 송화는 각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하나의 공동체로써 같이 살아가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보여주죠.
그런 의미에서 현재성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그런데도 여전히 4인 가족을 정상으로 보는 시각들이 존재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대안 가족이 ‘정상 가족’이라고 일컫는 가족보다 못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 점에 주력해서 쓴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의도는 했죠.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이 마음을 내어주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 싶어요.
다른 나라라는 환경이 그렇게 해준 것 같기도 해요. 서로가 아니면 기댈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만약 조선이었다면 내 부모가 있고, 내 가족이 있고, 각자의 울타리가 있는데 하와이에서는 오롯이 자기 혼자인 거잖아요. 거기다 남편들도 다 떠나고, 죽고, 버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들 셋만큼 가까운 존재가 또 어디 있겠어요. 소설에 ‘반얀트리’의 이미지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 나무를 보면 서로 엉켜서 어떤 게 이 나무의 뿌리이고 어떤 게 저 나무의 가지인지 모르잖아요. 그런 것처럼 버들과 홍주와 송화가, 비단 그 세 명뿐만 아니라 ‘무지개회’의 인물들이 혈연 관계처럼 된 거죠. 그들은 조선에서 같이 배를 타고 떠나온 존재들이기도 하고 같은 ‘사진 신부’ 출신이기도 하잖아요. 그럼으로써 끈끈한 자매애를 깨달은 거죠. 환경이 힘들었던 만큼 저 아이가 없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더 끈끈해지는 거죠.
오랫동안 여성의 서사를 써오셨는데요. 작품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나 독자들의 반응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느끼시나요?
글쎄요. 작가와 독자들은 같이 나가는 것 같아요. 제가 쓴 책으로 인해서 독자들이 ‘아, 이런 여성들의 서사가 있구나’ 하고 알기도 하지만, 더 앞서나가면서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독자들에 의해서 작가들이 자극을 받고 쓰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요즘 들어서 달라졌다는 생각보다는 늘 있어왔던 이야기인 것 같아요.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시면서 여성의 서사에 더 깊이 천착하게 되셨다고요.
맞아요. 저는 대학을 다닌 게 아니라서 여성 문제 같은 것을 새롭게 생각할 계기가 거의 없었어요. 또 제가 장녀에다 맏며느리여서 전통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게다가 약간 착한 여자 콤플렉스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전통적인 방식의 여성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서 그 전에 내가 받았던 차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전에는 그게 차별이라는 생각도 못 했던 거예요. 내가 경험할 때는 아무 문제의식도 못 느꼈지만, 그런 게 내 딸한테 올 때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제가 결혼해서 살던 곳이 시골이었는데, 그곳에 살면서 여성민우회에 가입을 했어요. 거기 주부 연극 동아리가 있었어요. 시골에 살고 아이들이 있으니까 문화생활을 할 수가 없었는데 연극반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가입을 했죠.
당시의 활동이 많은 영향을 미쳤나요?
거기 가입을 하면 여성학 강의를 기본으로 들어야 했어요. 공부를 하면서 내가 미처 몰랐던 것들, 딸을 키우면서 느꼈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죠. 그리고 우리가 했던 연극들도 다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였어요. 그런 걸 하면서 뒤늦게 페미니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된 거예요, 깊게는 아니더라도. 제일 처음에 여성에 관한 생각을 의도적으로 하면서 썼던 작품이 『너도 하늘말나리야』 거든요.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을 쓸 때만 해도, 그 작품 속의 팥쥐 엄마에 대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는데, 그렇게 분명한 의식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런데 『너도 하늘말나리야』 를 쓰면서 조금 더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쓰게 됐죠.
『알로하, 나의 엄마들』과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보면, 역사에 기록된 사람들보다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아요.
관심도 가질뿐더러, 저는 우리 사회가 너무 성공 지향적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하지 않으면, 그가 성공적인 살았다거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의 수남이도 그냥 그가 살아낸 삶만으로 충분히 존중 받고 잘 살았다고 박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뭔가 이룬 게 하나도 없어도요. 저는 거기에 중점을 뒀던 거예요. 그 작품을 읽는 청소년들에게도 ‘크게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꼭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지 않아도 좋은 곳에 취직하지 않아도 그냥 너의 본성대로 사는 것만으로도 너는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한 거야’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수남이가 더 큰 일을 해내기를 바란 독자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삶을 고민했었어요. 성노예 할머니들의 대모를 할까, 아니면 사업적으로 아주 성공한 여장부로 할까, 온갖 고민을 다 했어요. 제일 많이 고민한 게 수님이의 마지막이었어요. 그러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 결국 그렇게 썼어요. 이번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분들 중에 이름 있는 독립운동가, 우리가 들으면 알 수 있는 독립운동가가 몇 명이나 돼요. 그런데 그 분들 뿐일까요? 소설에도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 나오지만, 꼭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어도 독립에 이바지한 거죠. 그런 사람이 더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동청소년 문학가의 특권
그동안 아동청소년 소설을 써오셨지만, 이번 작품은 청소년 소설로 한정 지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저는 평생을 아동청소년 문학을 하면서 산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저의 첫 번째 독자는 늘 어린이나 청소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 책도 처음에는 청소년 문고로 내려고 했어요. 그리고 어른들도 같이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저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아동청소년 문학의 결이나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오랫동안 아동청소년 문학을 써 온 사람으로서. 그런데 너무 고맙게도 이번 소설을 성인본으로 내자는 결정이 났는데, 애초에 저는 청소년 문학으로 쓴 거예요. 그리고 이 소설이 이방인, 경계인의 이야기인데 사실 청소년들도 그렇잖아요.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고. 그들의 존재가 성적이나 대학으로 인정받거나 평가되고. 어떤 면에서는 이방인들의 삶이 청소년들의 삶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역사를 알려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요.
작품 활동을 쉬지 않으시잖아요. 항상 작가님의 작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젊은 작가로 느껴지는데요. 1984년에 등단하셨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예요. 작가님의 첫 작품부터 읽은 독자들은 이제 40대가 되었을 텐데요. 느낌이 어떠세요?
되게 큰 힘이 돼요. 가끔 블로그에 신작 소식을 올리면 와서 댓글을 달아주시는데 ‘어릴 때 작가님의 작품을 읽으면서 자랐다, 성인이 되면서 청소년 책과 멀어졌는데 작가님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이런 글을 쓰고 계신다는 게 뭉클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초등학생 때 작가님한테 메일을 보내서 답장을 받았었다, 이제 선생님이 돼서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글을 써주기도 하세요. 독자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아동청소년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특권인 것 같아요. 예전에 ‘언제까지 글 쓰실 거예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말을 했었거든요. 여러분이 자라서 부모님이 됐을 때 서점에 가서 ‘이 작가님이 지금도 글을 쓰시네?’ 하고 책을 사다가 자녀와 같이 읽을 수 있도록, 그때까지 쓰고 싶다고 했는데요. 어느덧 그렇게 되고 있어요.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제목에 있는 ‘알로하’라는 말의 의미가 묵직하게 다가와요. 세 명의 주인공이 삶 속에서 그 정신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겠죠.
네. 알로하가 담고 있는 정신을 하와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면, 세상이 정말로 평화롭고 살기 기쁜 곳이 될 것 같아요. 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서 찾다가 알로하의 뜻을 알게 됐지만, 되게 의미 있는 이야기더라고요.
‘레이’가 함의하고 있는 바도 큰 것 같습니다. 버들이가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레이에 마음을 뺏기기도 하죠.
그럴 것 같아요. 저도 네팔을 여러 번 갔었는데요. 거기에서는 금잔화 꽃을 엮어서 목에 걸어줘요. 레이라고 부르지는 않고요. 처음 공항에서 나와서 그 꽃목걸이를 받았을 때 정말 환대 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당시의 자료들을 보면, 부둣가에 큰 배가 들어오면 사람들이 다 마중을 나왔고 레이를 파는 장수들이 엄청 많았다고 해요. 거기에서 레이를 사서 걸어주는 거죠. 버들이 처음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불안함이 있었을 텐데 그럴 때 남편이 꽃목걸이를 걸어줬다면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그런 안타까움도 있었어요. 그리고 저도 레이가 단순한 환영의 꽃목걸이인 줄 알았는데 레이에도 여러 의미가 있더라고요. 끝과 끝이 이어져 있으니까 꼭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도 있고, 목에 걸었을 때 두 팔로 안은 것 같다는 의미도 있다고 해요. 하와이에서는 환영, 위로, 이별, 축하 등 일상의 모든 순간에 레이가 쓰인다고 하더라고요. 레이라는 형태로 마음을 전하는 거죠.
작가의 말에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주 여성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어요. 백 년 전에 조선을 떠났던 세 여성들의 상황과 지금 그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맞아요. 자료 조사하면서 저 스스로도 굉장히 놀랐어요. 지금의 사회 현상과 너무 흡사한 거예요.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될 때, 맥 빠지지 않으세요?
맥은 빠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손 놓고 있는 건 아니지 않아요? 맥 빠지고 절망적으로 생각한다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요. 해 봤자 또 이럴 건데, 하면서요. 제가 이 글을 하나 쓴 걸로 세상이 바뀌는 건 전혀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예요. 그게 티끌만한 점 하나 찍는 것일지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잖아요. 그러면서 세상은 조금씩 변화되고, 그러다 다시 되돌아오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무언가를 바라는 건 아니고요.
낯선 곳으로 이주를 결심하는 여성들의 이유도 백 년 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은 것 같고, 그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하와이는 무지개가 상징적인 것이더라고요. 단지 자연현상이 아니라, 그렇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도시가 된 거예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서로 어우러져서 살아가더라고요. 백 년 전에 그렸던 미래가 지금의 모습인 거죠. 우리는 지금이 과도기인 것 같아요. 우리 일상 속에서 외국인들을 익숙하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게 계속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백 년 전의 하와이에서 있었던 현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아요.
독자들이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읽는 사람마다 자 자기 감정대로 읽고, 그러면서 이 책이 계속 새로운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옛날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의 우리 삶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알로하, 나의 엄마들이금이 저 | 창비
사진 한 장에 평생의 운명을 걸고 하와이로 떠난 열여덟 살 주인공 버들과 친구들의 삶을 그렸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하와이라는 신선하고 새로운 공간을 배경으로, 이민 1세대 재외동포와 혼인을 올리고 생활을 꾸려 가는 강인하고 개성 강한 여성들의 특별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