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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누가 봐도 명백하게 밝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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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배제를 통해 오로지 ‘정상’만을 재생산하려고 하는 편협한 세계에서 ‘비정상적’ 주체들이 자기기만과 자기혐오의 덫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을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무수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지를 이 소설은 진지하게 묻고 있다.(박선우, 『우리는 같은 곳에서』, 신샛별 평론가 해설, 228쪽) 

2018년 「우리는 같은 곳에서」로 데뷔한 이후 2년 동안 오직 쓰는 일에만 매달렸던 소설가 박선우는 그러나 그간 쓴 소설을 묶은 첫 번째 소설집 『우리는 같은 곳에서』를 출간한 이후에야 발견하게 되는 것들 덕분에 “뒤늦게 배우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겪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주저함에 대해 “성소수자인 사람이 읽지 않는 이상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던 그는 이제 그때의 자신처럼 억압 속에 있는,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작가의 말’에서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의 인사를 적기도 한 그는 용기 내는 일이 누군가를 희망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고, 그래서 아직 두려움이 있긴 하지만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만한 소리로 말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를

‘작가의 말’에서 작품을 쓸 때 번번이 인물의 성별을 고심했다고 밝혔잖아요. 그 뒤에 이유를 짧게 적긴 했지만,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책으로 묶는 과정에서 이 소설들을 쓰는 동안 무엇을 가장 고민했고 힘들어했는지 새삼 되짚게 됐어요.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때에는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주저함이 없었고, 그것이 제 본질과 아주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여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때는 저도 모르게 조금 더 희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고 애쓰는 기분이랄까 의무감이 생기는 걸 느꼈어요. 처음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생기는 거리감이 글쓰기에 자유로움을 주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 것인지 혼동이 왔는데요. 결국 소설 속의 인물들이 전부 ‘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한없이 우울해하고 비극을 당연시하는 나도, 밝아지려 애쓰고 장난치며 웃고 싶은 나도 나니까요. 거의 믿지는 않지만 희망을 찾아보려고, 그것을 다시금 믿어보려고 하는 마음이 저한테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성별을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고요.  

방금 희망을 “거의 믿지는 않지만”이라고 했어요. 

네, 거의 믿지 않는 편이에요. 그보다는 자주 잊어버리게 되니까, 거의 부재하다고 느끼는 편이죠. 살다 보면 희망을 잃어버리기가 더 쉽잖아요. 여전히 혐오는 만연하고요. 최근 온라인상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는데 그곳마저 혐오 세력이 난입해서 방해하는 게시물을 올리는 걸 봤어요.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런데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아 맞다, 그렇지, 원래 세상이 그랬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모든 비극이 오랫동안 현재진행형이었다는 자각을 할 때마다 쉽게 비관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은 곳에서』는 등단 후 꾸준히 발표해온 여덟 편의 단편을 묶었어요. 단편을 발표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주변의 반응, 약간의 희망이나 환대 같은 것이 있었나요? 

단편 발표를 할 때는 수상을 하거나 평론가들이 리뷰를 써주지 않는 이상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여기 실린 단편들은 계속 비슷한 상태에서 썼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한 권으로 묶고 나니까 비로소 좀 놓여나는 기분이 들어요.

이 단편들을 썼을 때의 그 “비슷한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였어요? 

다수에게 읽힌다는 전제하에 글을 쓰다 보니 허공에 편지를 띄우는 기분이 들었어요. 먼 곳의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싶고, 연결되고 싶고, 그래서 어떤 답신을 돌려받았으면 하는 상태로 글을 쓰게 된 거죠. 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아니, 단 한 명이면 족하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책을 내고 나서는 좀 달라졌어요. 개인적인 연결감이나 충족을 넘어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졌달까요. 저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나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졌어요. 사회적으로도 올바른 영향을 주고 싶고요. 

「고요한 열정」에 “나 같은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생을 견디다가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것일까”(154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요. 어떤 마음으로 쓴 문장일지, 상상해보게 됐어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이 쓴 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작품에서 미진함을 느끼곤 했죠. 그런데 어쩌다가 아주 몰입해서 읽은 작품들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저처럼 혼란과 억압에 갇혀 삶을 꾸려가는 인물들이 나오는 걸 봤죠. 그 후로는 비슷한 이야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이런 이야기가 읽고 싶다는 것은 쓰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아요. 김봉곤, 박상영 작가님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례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누군가 하고 있고, 해도 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디선가 주저하고 있던 이들에게 용기가 된다는 사실을 체감했어요. 분명히 영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아직 두려움이 있긴 하지만 제가 읽고 싶은 글을 써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세상 어딘가에 남아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바랐던 것 같아요.

얼마 전 트위터에 책 출간 소식을 이제야 가족에게 말했다고 올렸잖아요. ‘작가의 말’에는 남자친구에게 인사도 전했는데요. 지금 말씀을 들으면 이런 생각의 변화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것 같아요. 

맞아요, 책을 묶을 즈음에야 진지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 굳이 그런 인사를 넣은 건 저라는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알기 때문이에요. 돌이킬 수 없도록 명시해야만 했던 거죠. 은근슬쩍 물러설지도 모르는 미래의 저를 다그치는 정언명령처럼 말이에요.(웃음) 이렇게까지 함으로써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선 안 된다, 라는 다짐을 첫 책에 써두고 싶었어요. 그러면 지금처럼 그 말이 질문으로 돌아오고, 그때마다 제 안에 새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사실은 작품 안에도 작가님이 많이 있잖아요. 이미 작품으로 발언을 하고 있는 셈인데 그보다 더 분명하게 밝혀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들려요. 

어중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밝히고 싶었죠. SNS로 ‘작가의 말을 보고 감동했다’, ‘그런 말을 해주셔서 고맙다’는 쪽지도 받았거든요. 그런 걸 보니 어쩌면 누군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제가 대신 쓴 거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분명한 문장을 쓰는 게 점점 후회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 내용을 쓰고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기까지 3일을 망설였거든요.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지 저 스스로 오래 고민했는데요. 항상 문턱에서 망설였던 시간이 길었고, 그때마다 뒷걸음질쳤던 기억이 나서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고,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기로 했어요.



주저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작품에서 흔히 사용되는 쉬운 말로 간편하게 정의되지 않는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어요. 가령 「우리는 같은 곳에서」에서 주인공 ‘나’와 ‘영지’는 한때 사귄 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채 지낸 시간이 더 길죠.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분명한 관계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불명확한 관계가 훨씬 많은데 사람들은 친구나 연인, 동료, 선후배처럼 분명하게 명명해야 안심하죠. 관계는 아주 복잡하고 이름 붙이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데뷔작 「우리는 같은 곳에서」를 쓸 즈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요. 사실 작업할 당시에는 이렇게 다양한 관계를 써보자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어요. 책으로 묶고 보니까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보려 했구나, 싶더라고요. 계속 저의 위치를 바꿔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신샛별 평론가는 “관계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이 박선우의 신념이자, 그의 글쓰기 동력이 아닐까”(245쪽)라고 했죠. 

해설자는 책의 첫 번째 독자라고 생각해요. 첫 독자 분이 제가 막연하게만 감지하고 있던 부분들을 하나 하나 짚어주시니까 울컥하는 게 있었어요. 작가로서 울컥한 것을 넘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사적인, 내밀한 울컥함이 있었는데요. 사실 책을 묶으면서도 제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주저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읽는 사람들이 알까 싶었거든요. 발표하는 내내 공식적으로 그런 피드백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우리처럼 성소수자인 사람이 읽지 않는 이상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어요. 그러다가 신샛별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꼭 그런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덕분에 좀 더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북테라피라고, 흔히 책으로 아픈 마음에 대한 처방을 내린다고 하잖아요. 제게는 이 해설이 그랬어요.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 시차로 인해 달라지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점도 주목하게 돼요. 편지가 뒤늦게 도착하거나 메일을 뒤늦게 보는 과정을 통해 관계가 재정의되는 거예요. 

이야기로 써놓으니까 장치처럼 보이는데 저는 그게 아주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상대가 저를 기쁘게 했든 불쾌하게 했든 어떤 영향력을 끼쳤을 때 분명하게 반응을 해야 하는데요. 대부분 저는 그때 반응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시차라는 게 저라는 사람한테는 일상적으로 발생했던 거죠. 그 순간 말하지 못했다면 결국 나중에 말할 수밖에 없는 건데, 한번 놓쳐버린 타이밍 때문에 시간은 계속 벌어지고, 그럼에도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몇 년이 지나서야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이것이 자연스러운 관계의 흐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시작과 끝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관계 안에는 뭔가가 미진하게 남아서 영구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라고요. 그러다가 한 번씩 봉합되는 듯한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 매듭의 순간이 단편소설의 미학과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작품들에는 ‘왜 이렇게 사나’ 하는 감각도 있죠. 「휘는 빛」의 “왜 이렇게 살까”(197쪽)나 「그 가을의 열대야」의 “살고 싶나, 이렇게 계속...”(122쪽)같은 문장처럼 지금의 자신의 회의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면들이 있잖아요.  

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문학 출판을 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고, 소설 공모전에서 수상해 책도 내고 싶었고, 그렇게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원했어요. 그렇게만 되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는데요. 막상 바랐던 모습에 가까워졌는데도 딱히 행복하다는 느낌이 없더라고요. 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예전보다 더 행복해지거나 충만해지진 않았어요. 물론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고 생활도 좀 나아졌고 응원도 받았지만요. 근본적인 우울감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라는 사람은 왜 이 모양인가, 그런 자문을 하다 보면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이란 결론에 이르게 돼요. 혼자서 이 악물고 지내온 시간이 워낙 길었으니까, 이를 상쇄해줄 만큼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누적된 비관이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아요. 

비슷한 기분이었을 때 정희진 선생이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부정적 감정(dark emotions)’은 현실 인식이기도 하죠. 극복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죠.(중략)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는, 누구나 힘들다는 것 그래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죠.”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고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작가님의 작품 속에서 그렇게 비관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비슷하게 안도하게 되는 묘한 경험을 했어요. 

김연수 작가님도 책을 읽는 이유를 비슷하게 짚어주신 적이 있어요. 내가 막연히 하던 생각을 누군가 명료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보는 일은 이런 상태의 인간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준다고요. 글을 읽는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타인과 연결되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그게 곧 ‘우리가 함께 있다’는 감각이기도 한 것 같고요. 보통 독서를 고독한 취미 활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이곳에 없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뭔가를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

책에서 딱 한 문장만 꼽으라면 「밤의 물고기들」에 나오는 이 문장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39쪽)를 꼽고 싶어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한테 늘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반이어도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데, 꼭 대놓고 저를 싫어하고 조롱하던 애들이 있었거든요. 남중, 남고, 군대를 거치는 내내 그랬어요. 그 시절의 만연한 여성혐오는 여성스러운 남자 또한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거든요. 그저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죠. 제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처럼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고,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한 거예요. 그런 이들에게 방금 꼽아주신 문장을 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예술대학원에 진학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게 되면서는 조금씩 그런 식의 괴롭힘과 멀어질 수 있었지만 이 영역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여전히 혐오 발언을 많이 듣게 돼요. 멀리 갈 것도 없죠. 그렇기에 계속 써야만, 뭔가를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요.

책 가장 뒷부분에 수록 작품 발표 지면이 나와 있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짧은 기간 동안 굉장히 발표를 많이 했어요. 

2년 동안 계속 쓴 것 같아요. 회사를 다니니까 퇴근한 다음에 쓰고, 주말에도 쓰고요. 매일이 작업 상태였죠. 그때는 남자친구가 없어서 몰입할 게 이것뿐이기도 했어요.(웃음) 계속 마감이 있으니까 쓰는 일에만 매달렸던 것 같아요. 말하다 보니까 그 시간들이 떠올라 점점 슬퍼지네요.(웃음)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분들일까요? 

특정 시기에 몰입이 잘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그 글을 쓴 작가와 가장 유사한 상태일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그래서 이제 막 정체화를 시작했거나 시작하려는 분들이 읽어주시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채널예스> 독자 모든 분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웃음)



우리는 같은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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