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국내 과학책 중에서 가장 오래 사랑받은 책.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이하 『과학 콘서트』)가 돌아왔다. 2011년 출간 10주년을 맞아 출간됐던 첫 번째 개정증보판 이후 바뀐 내용들을 점검·수정하고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했다. 두 번째 커튼콜 무대에 오른 저자는 이번 책이 “독자들에게 복잡계 과학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문적 나이테이자, 과학자 정재승이 독자들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문적 주름”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커튼콜에 기꺼이 응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과학 콘서트』가 하나의 아카이브로써 독자들과 호흡하며 성장할 것임을 기대하게 된다.
나를 키운 8할은 『과학 콘서트』
20년 동안 꾸준히 사랑 받아 온 책입니다. 그만큼 두 번째 개정증보판을 출간하시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얼마 전에 독자 분이 찍은 초판과 개정증보 2판의 사진을 봤는데요. 초판은 정말 얇은데 개정증보판 2판은 되게 두껍더라고요. 20년 세월의 역사가 묻어있다는 게 보였어요. 그냥 편집만 잘해서 개정판을 낸 게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이 분야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담았다는 면에서, 개정증보판을 꾸준히 낼 수 있도록 해주신 독자 분들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그게 저의 학문적인 성장의 역사이기도 하죠. 이제는 물리학자들이 물리적인 도구를 이용해서 사회 현상을 연구하고 접근하는 것이 보편화됐고, 그렇게 얻은 통찰이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내놓는 통찰과 조금 결이 달라서 서로 보완이 되고 있는데요. 그런 역사들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 같아서 너무 좋고요. 저의 학문적 주름이자 나이테인 것 같아서 굉장히 뿌듯합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개정증보판도 출간하실 계획이라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학문적 주름, 나이테가 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시게 될 텐데요. 많이 기대되실 것 같습니다.
저한테 『과학 콘서트』는 굉장히 각별한 책인 것 같아요.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책이 아니라 저도 그 위에 탑승해서 함께 세상을 항해하는 책 같거든요. 그러다보니 계속 고쳐 쓰고 새로운 내용들이 드러나면 그것을 넣어서 확장하는 제 삶의 배 같아요. 이 책이 성장하는 모습이 마치 제가 성장한 것 같아서, 그걸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고요. 사실 처음 책을 낼 때도 ‘아마 10년쯤 지나면 새로운 이론들, 연구결과들이 많이 등장할 텐데 그때 개정판을 내야겠다’고 출판사 대표님께 말씀을 드렸었어요. 20주년 됐을 때도 진작부터 그런 논의를 했었고요. 그 마음을 변치 않으려고 30주년, 40주년, 50주년에도 여력이 닿는 한 개정증보판을 내겠다고 썼어요. 쓰고 지키려고요. 그게 저한테도 굉장히 행복한 의무, 과학자이자 작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친근하게 느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데요. 그게 과학자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시나요?
의무이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학자들이 우리 분야에 관한 다른 책이나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책을 내는 일들이 많았는데, 자신이 한 연구를 바탕으로 책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 가설을 대중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논문의 형태가 아니라 책의 형태로 냈잖아요. 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가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썼죠. 우리 사회에 그런 일들이 벌어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제가 했던 연구이고 제가 썼던 논문이라서 남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더 쉬운 언어로 소개해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과학 콘서트』에 나와 있는 내용은 실제로 제가 지난 15년간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내용들이에요. 『열두 발자국』도 마찬가지이고요. 제가 했던 연구 안에 뇌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녹아져 있고, 그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서 설명을 하다 보니까 조금 더 친근하게 와 닿고 쉽게 이해가 된다고 느껴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많은 책을 출간하셨지만, 유독 『과학 콘서트』를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웃음). 서문에서 애정이 듬뿍 느껴져요.
제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만약에 제가 죽으면 부고 기사의 첫 문장이 ‘『과학 콘서트』의 저자가 죽었다’일 거라고요(웃음).
‘뇌과학자 정재승이 죽었다’가 아니고요(웃음)?
네. 제가 아무리 뇌과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를 저를 설명하는 단 한 문장을 생각해 보면 아마 ‘『과학 콘서트』의 저자’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맥락에서 저를 키운 8할이 『과학 콘서트』라고 서문에 쓰기도 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지금 저에게 복잡계 과학에 관해서 책을 써보라고 하면 『과학 콘서트』 같은 책을 못 냈을 것 같아요.
처음 『과학 콘서트』를 쓰셨을 때는 스물아홉의 젊은 과학자이셨죠.
젊은 나이에 되게 호기롭게, 잘은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이거 너무 중요한 건데...’ 하면서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책이 다른 과학책들보다 훨씬 훌륭해서가 아니라 ‘이 젊은이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 봐’라는 맥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해줬던 것 같거든요. 그렇게 애정해주신 것이 마치 우리 사회가 젊은 물리학자의 가능성을 응원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책과 함께 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말씀을 드린 거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더 각별한 책이죠. 『열두 발자국』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알쓸신잡>에 출연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더 늘어났고, 학문적으로는 최근에 네이쳐지에 논문도 냈고... 제가 생각하기에 되게 뿌듯하고 좋은 일들도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쭉 돌아보면 『과학 콘서트』가 굉장히 의미 있는 저작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금은 호기로움이 조금 사라진 것 같으세요(웃음)?
네, 지금은 조금 더 사려 깊어진 것 같아요. 초판을 쓸 때는 저 혼자 알게 된 걸 누구한테 말해주고 싶어서 ‘이거 모르지? 진짜 재밌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통로로 책을 쓴 거예요. 그런데 20년이 지나니까 ‘10년 후에도 이걸 맞다고 이야기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과학이라는 건 끊임없이 변하고, 공격받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기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썼다면 ‘이런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밝히고 조심스러운 글을 썼을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호기롭기보다는 더 사려 깊은 글이 나왔을 것 같고요. 그렇게 했다면 사람들이 ‘나이가 있으니까 성찰적 글쓰기를 하는구나’라고 봐주셨을 것 같고, 만약 스물아홉에 그런 글쓰기를 했다면 ‘너무 돌다리를 두들기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아요.
비합리적이지만 훌륭한 선택?
20년 동안 일어난 변화들 중에서, 뇌과학자로서 가장 인상 깊고 의미 있었던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복잡계 과학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다양한 영역에 응용되기 시작했고 인간관계, 뇌, 심리 같은 것과도 접목되게 됐죠. 그 확장된 스케일을 이번 개정증보 2판에 담으려고 애썼어요. 뇌 안에서 벌어지는 일부터 시작해서 한 도시의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복잡계 과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적용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미 초판에 그 정신을 담기는 했어요. 영국 레스토랑의 소음부터 시작해서 반딧불이 콘서트까지, 이 관점으로 들여다보니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현상들이 하나로 잘 꿰어지는 거죠. 마치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와 지구의 주위를 도는 달이 같은 물리 법칙으로 설명되듯이. 사실 그게 물리학의 매력이기 때문에 『과학 콘서트』에서도 ‘사회 현상도 그렇게 하나로 꿰어서 설명할 수 있겠구나’라는 걸 담으려고 애썼어요.
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어요.
도시야말로 그 어떤 시스템보다 복잡한데 그럼에도 도시를 운영하는 방식 자체가 복잡할 필요는 없고, 복잡한 도시의 현상도 기본적인 근본 원리를 통해서 컨트롤할 수 있어요. 옛날에는 운영자가 도시를 잘 운영해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행복과 삶의 질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도시의 시스템이 작동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뇌과학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이 그렇게 모호한,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만이 아니거든요.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는 굉장히 구체적인 지표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도시에도 이런 걸 적용해 볼 수 있다는 걸 이번 책에 담으려고 애썼어요.
『열두 발자국』에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우리 뇌가 생각보다 합리적으로 작동해서 결과를 도출하지는 않는다는 거였어요. 교수님도 가끔은 ‘내 뇌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정말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세요(웃음)?
그럼요(웃음).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서 얻어진 결과와 감성적으로 끌리는 것 사이에서 제가 늘 합리적 결과를 좇지만은 않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행동 같은데요. 예전에는 그런 행동들을 보고 ‘인간은 비이성적이다, 합리적이지 않다’고 간주했어요. 특히 경제학자들의 관점이 그랬죠. 요즘 뇌과학자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들여다봤어요.
결과는 어땠나요?
나한테 합리적이라는 이름의 경제적 이득을 주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행복하려면, 일종의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요. 예를 들면, 내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한다는 관점으로 보자면 기부를 할 필요가 없죠. 내 목숨을 던져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할 필요도 없고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있는 사회는 전체적으로 만족도도 높고 삶의 질도 높고,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어지잖아요. 다음 세대에게는 그런 사회를 물려주고 싶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의 이득을 생각하면서 의사 결정을 하기도 하는 거예요. 마음이 끌리거나, 왠지 도와주고 싶거나, 공감이 가면 경제적 이득을 기꺼이 포기하는 일들도 뇌과학적으로는 충분히 설명 가능한 행위가 됐죠. 그런 걸 알고 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죠. 비합리적인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죠(웃음).
교수님의 시각이나 가치관에 큰 변화를 주었던 연구 결과나 이론, 법칙이 있나요?
네, ‘스티글러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요. 어떠한 법칙도 그 법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경우는 없다는 법칙이에요. 재밌죠?
상식과 너무 다른 이야기인데요?
그렇죠. 예를 들면, 알츠하이머 치매라는 병은 알츠하이머 박사가 연구해서 그의 이름을 딴 병명인데, 실제로 알츠하이머 환자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알츠하이머 박사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뉴턴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게 아니에요. 심지어 스티글러의 법칙조차도 스티글러가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아니에요. 되게 놀랍죠?
정말 그러네요. 그럼 어떤 방식으로 이름이 붙은 걸까요?
최초의 발견자는 그걸 발견한 후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진짜로 그것에 천착해서 연구하고, 학계에 중요성을 보고하고 알리고, 그걸 넘어서서 꾸준히 계속 연구했던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일 수밖에 없어’ 하고 이름을 붙인 거죠. 결국 발견의 영광을 가져가는 건 최초로 잠깐 기록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진짜로 그 주제에 대해서 깊이 천착한 초기 인물인 거죠. 그 사람이 명예를 가져가는 거더라고요. 제가 이 법칙을 되게 좋아하는데, 처음 이 법칙을 듣고 ‘맞아, 과학이란 건 이런 거구나’ 하고 약간 감동했어요. 우리가 우연한 발견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고 꾸준히 연구했던 학자를 더 존경하는구나,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경계에서 피는 꽃
“세상의 모든 경계에선 꽃이 핀다고 하지 않았던가!”라는 문장이 있어요. 교수님은 소설가와 함께 책을 쓰기도 하셨고, 방송에서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셨는데요. 그런 작업을 해보시니까 어떠셨어요? 정말 좋았나요?
네. 진짜 강추드리는 게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예요. 결국은 그게 <알쓸신잡>의 정신이기도 한데요. 나와 굉장히 다른 경험, 관점,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건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행위예요. 우리 분야의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때도 즐겁고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 있지만, 나와 굉장히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분야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겠죠. 그런 영역에서 저는 협업을 굉장히 즐기는 편이에요. 그때 진짜 중요한 게 나와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거든요. 인정하고 존중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분야에 대한 자부심은 있어야 되고요. 서로 다른 생각들을 조금 더 큰 틀에서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 경계에서 꽃이 핀다고 생각해요.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 꽃인지, 저는 아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일하면서 만끽하며 살아왔어요.
<알쓸신잡>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보였어요.
그래서 아주 자신 있게 권해드리죠. 어쩌면 『과학 콘서트』는 그런 경계에 핀 꽃들의 다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이라는 큰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사실은 물리학자들이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복잡성의 본질을 캐려고 애썼고 인문학자들, 사회과학자들, 공학이나 예술 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새로운 이해들을 얻어낸 거예요. 그건 물리학자들끼리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것이겠죠. 전통적인 물리학 분야 안에 있었다면 거기까지 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세상의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는 걸 만끽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뇌를 관찰해 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순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영역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연결된다면서요? 가끔 ‘딴짓’을 하는 게 창의적인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교수님도 일부러 ‘딴짓’을 할 때가 있으세요?
통상의 경우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조금 엉뚱한 곳에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엉뚱한 곳을 조금 뒤지는 작업들을 해야죠. 그러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굉장히 몰입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아주 완전히 끊고 며칠 엉뚱한 곳에서 머리를 다른 방식으로 말랑말랑하게 하는 과정은 필요하고요. 다시 돌아와서 예전 같지 않은 머리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죠. 제가 하는 건 공연을 본다거나, 엉뚱한 분야의 책을 읽는다거나, 나와 완전히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고 수다를 떤다든가 하는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럴 때 야구도 보시나요(웃음)?
네(웃음). 요즘은 사실 야구를 본 지 조금 오래 됐는데요. 제가 한국야구학회 초대 회장이거든요.
한국야구학회를 출범시키셨죠.
제 인생에 가장 즐거운, 남들은 인정해주지 않는 저만의 업적이죠(웃음).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 못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야구를 글로 분석하고 연구하고 통계하는 학회를 만든 거였어요. 일종의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를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야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자기가 분석한 걸 나눴는데, 저에게는 너무 즐거운 일이었죠. 뇌를 리프레쉬하는 작업 중에 하나였어요. 제가 진짜로 좋아했던 선수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들에게 야구 이야기를 듣고... 옛날에는 진짜 TV에서만 보던 백인천, 마해영 선수 같은 분들을 만나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가슴도 뛰고. 슈퍼스타 물리학자, 뇌과학자를 만난 것 같은 기쁨을 느꼈죠.
최근에 야구 경기를 안 보신 이유가 있나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시잖아요.
제가 대전에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한화이글스에 정이 가고, 자이언츠의 오랜 팬이기도 하고, 늘 그렇듯이 자이언츠와 한화가 저를 득도하게 만들었는데요... 경기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 한화 팬 분들이 마음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전 국민이 한화의 1승을 염원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러니까요(웃음). 삼미슈퍼스타즈가 가지고 있던 연패의 기록과 타이를 이뤘죠. 오늘 져도, 그동안 계속 졌어도, 내일 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진정한 야구죠.
역시 한화 팬 분들은 보살이군요(웃음).
어줘야구는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살아있는 생명체예요. 어떻게 잘하든 보듬야 됩니다(웃음).
야구는 전술게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어떤 선수를 언제 기용해서 어떻게 경기를 풀어갈지, 두뇌 플레이를 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할까요. 그런 점이 교수님의 성향과도 잘 맞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야구를 좋아하시는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야구 경기가 2시간 반 정도 펼쳐진다고 하면 실제로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시간은 20분 내외예요. 대부분의 시간들은 기다리고 예측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운동량이 많지 않아요. 저는 야구는 머리를 쓰는 운동이지 몸을 쓰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또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이기도 해서, 저처럼 몸보다 뇌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더없이 매력적인 스포츠죠.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이공계열, 과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고요. 문과 출신이 ‘나 수포자였어’라는 말을 할 때는 스스럼이 없는데, 이공계열 출신은 ‘나는 데카르트가 누군지도 몰라’라는 말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거죠.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면 굉장히 많이 바뀐 지적 풍토 중에 하나가 ‘그래도 과학을 조금 알아야 돼’ 하는 변화인 것 같아요. 진짜 옛날에는 수학을 못 한다는 게 되게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그렇지만 철학이나 역사를 모른다고 하면 굉장히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양자역학의 한 마디 정도는 알아야,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뭔지는 알아야, 전전두엽이 어딘지는 알아야 되는 시대로 많이 옮겨왔어요. 인문사회과학자들도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애써주는 시대가 됐죠. 그런 건 되게 좋은 것 같고요. 한편으로는 과학 기술이 지나친 위용을 갖게 되기도 했어요.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학문적으로는 대학 안에서 인문사회과학이 과학 기술과 접목되지 않으면 제대로 지원 받기 어렵고, 그래서 정부 예산이나 기업의 지원을 많이 받는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의 목소리가 학계 안에서 지나치게 커졌죠.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수조원이 연구비로 집행되는데, 실제로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지급되는 연구비는 몇 천 억 정도 수준이거든요. 이공계열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죠. 이런 것들이 균형이 잡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인사이트를 제공해야 하는데 편향이 심해서 그걸 바로잡는 게 학계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숙제 중에 하나입니다.
정재승으로 설명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앞서 ‘경계에서 꽃이 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만,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통합적 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죠? 이유가 있나요?
예를 들면, 학부 때까지는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머릿속에 잘 집어넣는 일을 하잖아요. 그게 공부였죠. 그런데 대학원에 가면 연구를 해야 되잖아요. 연구는 남이 던지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답을 내고, 그 답이 중요하다는 걸 논문과 학회 발표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 되는 작업이에요. 그런데 점점 중요한 문제들은 어느 한 영역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꽃이 피는 경계에 모여 있어요. 분야를 넘나들고 통합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좋은 연구를 하기 어렵죠. 통합적 사고가 잘 이루어진 학생들의 경우에는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를 만나는 데에 두려움이 없어요. 기꺼이 넘고 그 분야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답을 향해 가거든요. 그런데 어느 특정한 영역에 머물러 있는 학생은 답을 향해 가다가 만나게 되는 (다른) 분야라는 벽에서 뒤로 물러나거나, 그냥 돌아가거나, 자기 분야의 방식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진짜 좋은 문제를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풀기가 어렵죠.
예를 들어 설명해주신다면요?
심리학과 학생들이 뇌를 연구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중요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작업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심리학과가 문과이다 보니까 학생들이 겁을 내는 경우가 있어요. 생물학적인 뇌를 탐구하는 법, 뇌를 촬영하고 측정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법, 컴퓨터상에 가상의 뇌를 만들고 관찰하는 법, 이런 접근들을 두려워하죠. 학부 때부터 통합적 사고를 하는 게 너무 중요해요. 최근 카이스트에서도 융합학부를 만들었어요. 제가 학부장을 맡게 됐는데요. 분야라는 틀에 자신의 지적 사고를 가두지 않고 ‘진짜 중요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뭐든지 익히고 배운다, 배운 것들을 서로 연결해서 통합적으로 사고한다’ 이런 훈련들을 가능하면 빨리 할 수 있으면 좋죠.
지금까지 쓰신 책들을 보면 ‘과학 이야기’라는 알맹이는 같아도 계속 형식에 변화를 주셨던 것 같아요. 다음 책에서도 그러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떠세요?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제 부고 기사가 나온다면, 사람들이 정재승이라는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봤을 때, 제가 했던 일들이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직업군 혹은 개념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냥 ‘정재승’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교수가 왜 저런 일을?’, ‘과학자가 왜 저런 일을?’, ‘책 쓰는 작가가 왜 저런 일을?’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하고, 그런 것들이 쌓이고, 사람들이 거기에 충분히 적응하고 나면 ‘저 사람이니까 저렇게 했을 거다’라고 생각될 것 같아요. 그래야 다음 세대에는 교수가 되든 과학자가 되든 직업의 선입견에 갇히지 않고 ‘저런 사람도 있었잖아’ 하면서 자기가 꿈꾸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떤 다른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는, 정재승으로 설명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요. 지금도 그런 것들을 계속 탐험하는 과정이죠.
그 과정 속에서 다음 책도 나오겠죠? 현재 집필 중이신 책이 있나요?
지금 쓰고 있는 책은 얼마 전에 EBS에서 방영했던 <뇌로 보는 인간> 5부작인데요. 뇌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와 문명의 특별함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예요. 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나고 얻게 된 수많은 석학과의 대담이나 지식을 책으로 담아내려고 합니다. 인류학자나 고생물학자들,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관심 있을 만한 주제인데 뇌과학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해 보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그런 걸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아요.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쓸 책도, 그게 뭐가 됐든 간에, 과학이 담뿍 담겨있는데 인문사회과학적인 느낌들을 주고 예술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비빔밥이나 잡탕, 짬뽕이 아니고 중요한 심지는 있는 글들을 계속 쓰고 싶어요.
『과학 콘서트』의 초판본을 읽은 독자가 첫 번째 개정증보판, 두 번째 개정증보판까지 읽고 소감을 남긴 경우도 있었나요?
네, 굉장히 많으셨어요. 인스타그램에 보면 대개 초판을 사신 분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때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과학 콘서트』를 사서 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 인생의 첫 번째 과학책이었다’고 하시고요.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 이제는 아이에게 ‘엄마가/아빠가 읽었던 책이야’ 하면서 개정증보판을 선물해주신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바람직한 사회 현상이 아닌가(웃음)... 더 많이 퍼졌으면 하고요(웃음). 부모님과 자녀들이 ‘내가 읽었던 책인데 되게 좋았어, 너도 읽어 봐’, ‘네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사이에 이 분야도 굉장히 발전했나 봐, 그래서 개정증보판이 훨씬 더 두껍고 재밌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 네가 읽고 얘기해 줘’ 그런 대화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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