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 젊은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정세랑 작가와 신작 『시선으로부터,』를 두고 짧은 이메일 인터뷰를 나눴다. 구상과 집필까지 5년이 걸린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올해 3월에 오픈한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 당시 가장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심시선’은 살아생전 대한민국을 대표한 미술가이자 작가. 심시선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족들은 단 한번뿐인 심시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하와이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이라고 제사를 강경하게 반대했던 심시선의 제사를 왜 굳이 하와이에서? 가족들은 심시선을 어떻게 추억하려는 걸까?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의 가계도를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의 결혼으로 독특한 가계의 구성원을 만들어낸 심시선. 그가 남긴 많은 작품과 말, 그리고 흔적들을 통해 독자들은 대한민국의 여성사, 현대사의 비극, 따뜻한 개인주의를 발견한다.
영화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은 “이 책은 가부장제에 포섭되지 않은 여성이 가장이 될 때, 가족들이 어떠한 결을 갖고 살아갈지에 대한 기분 좋은 전망을 준다. 내게 위로와 계보를 선사한 이 근사한 작품이 페미니즘 영화의 고전 <안토니아스 라인>처럼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추천사를 썼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코로나19를 대하는 소설가의 요즘이 궁금합니다.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 라이브 행사를 해보았는데, 공간적 제약 없이 독자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앞으로도 온라인 위주로 하고 싶어졌어요. 코로나 사태가 확실하게 잡힐 때까지 오프라인 행사는 하지 않으려고요. 전염병에 관한 소설도 썼기에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시선으로부터,』를 퇴고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한동안 장편소설을 쓰지 못하다가 쓴 거라, 힘든 것보다 반가운 마음이 컸어요.
소설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구상과 집필까지 5년이 걸렸다고요.
엄마가 자주 하시는 농담에서 출발한 소설이라 오래전부터 계속 쓰고 싶어하다가 2016년에 조사를 위해 하와이에 갔었고, 그 이후로도 하와이에 대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서 큰 도움을 받았어요. 실마리만 있는 상태에서 자료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씁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을 한 글자 바꾼 것이 이 책의 주인공 ‘심시선’입니다. ‘시선’이라는 이름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관용구를 살짝 비트는 것을 좋아해요. 자주, 여러 의미로 쓰이는 단어라서 제목을 떠올리고 나니 딱 들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막혔던 순간이 있었나요?
화산 지형을 직접 못 가보고 써서, 조사는 열심히 했지만 힘들었습니다. 2018년에 화산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이후 가볼 기회가 없었어요.
심시선의 인터뷰, 강연록 등을 쓸 때는 왠지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웃음)
처음에는 20세기 말투를 흉내 내는 게 어색했는데 하다보니까 무척 즐거워졌습니다. 마음껏 능청스러울 수 있었어요. (심시선의 옛 자료를 소설에 넣은 건) 20세기와 21세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형식이었어요. 그리고 세상을 뜬 작가,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애정이기도 했고요.
가계도가 나올 만큼, 다양한 인물이 나옵니다. 특별히 애정을 가진 인물이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화수, 지수, 우윤, 해림에게 가장 애정이 갑니다.
125쪽의 문장이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단단히 마음 먹고선, 어찌 살아 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참 어려운 일인데,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해치는 사람들로부터 있는 힘껏 벗어나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가끔 세계 전체가 우리를 해치려 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지지대가 될 수 있으면 합니다.
208쪽에 “무신경하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문장이 나와요. 심시선은 무신경한듯 보이지만, 가족들을 각각의 고유한 인물로 사랑해줬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심시선의 가장 큰 장점, 그리고 약점은 무엇일까요?
원하고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고, 살아남으려고 말을 많이 했다보니 모순을 끌어안게 되었다는 게 약점이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님께 ‘심시선’은 어떤 존재인가요?
가지지 못한 과거, 가지고 말 미래였으면 합니다.
191쪽에 “웬만한 헛디딤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딸들을 비난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라는 말이 나와요. 심시선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20세기 중반 사람들은 분단 이후에 태어난 이들보다 한결 더 코스모폴리탄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가고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던 데에서 호방함이 비롯되지 않았을까 추측해요. 현대사의 참혹함을 정면으로 헤치고 나간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심시선이 중요하지 않은 것에 연연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책을 인쇄할 때 재생 용지를 사용해달라고 요청하셨다고요. 1쇄본은 양장본으로 제작되었는데, 양장본은 선호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계속 재생용지를 쓰고 싶은데, 사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콩기름 인쇄도 꿈꾸고 있습니다. 종이가 재생될 때 중금속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독자 분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콩기름이 낫지 않나 하는데 제작비가 역시 많이 들겠죠? 양장본은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 책이 도서관에서 자주 읽힌다고 해서 기쁜데, 가끔 사진을 보면 너무 심하게 망가져 있더라고요. 격한 사랑을 받은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모습이라, 양장본이라면 더 버텨주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소설 집필을 위해 참고로 읽은 책들이 많습니다.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책은 무엇인가요?
『하와이 원주민의 딸』입니다. 내용은 물론 시각에도 큰 영향을 받았어요.
후속작의 힌트를 조금 주신다면요?
잡지 <미스테리아>에 발표했던 단편을 연작 장편으로 확장하고 싶어요. 통일신라 시대의 탐정 이야기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시선으로 문학을 읽으면 좋을까요? 그리고 작가의 말에 “죽는 날까지 쓰겠다”는 심오한 글을 남긴 이유가 있나요?
열린 대화로 여겨 주시면 좋겠어요. 작가의 말에 “죽는 날까지 쓰겠다”고 말한 이유는요. 작가들이 활동을 멈추거나 사라지는 게 속상하더라고요.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로 그렇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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