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책방을 운영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책방에서의 시간을 기록하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내는 것은 희귀한 풍경이다. 시인이 3년간 운영해온 호숫가 책방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고, 이윽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의 책방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이듬의 시집 『히스테리아』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10월,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아울러 받았다. 한국문학 작품이 전미번역상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행도 연도 구분하지 않은 표제작 「히스테리아」는 불안하고 처절하다. 『히스테리아』 초판 출간일로부터 6년 5개월여가 지났다. 그사이 시인이 자초한 가장 큰 변화는 책방이듬의 문을 닫고 다시 연 것이다. 근작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혼자 먹는 밥이 가장 달았던 이가 더불어 사는 법을 뒤늦게 알아가고 있다. 바람이 없다면 어떻게 항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불어주는 온기로 이 배가 천천히 항해하고 있다.”(37쪽)시인은 이제, 불안보다 온기를 더 자주 생각한다.
송구하게 수상 소식도, 새 책도 아닌 불안에 대해 여쭙고자 뵙자고 했어요.
전혀 미안할 필요 없어요. 불안이라니, 정말 나와 딱 맞는 단어라고 생각한 걸! 책방이듬도 불안 그 자체이고, 하하. 나는 내 운명이 떠돌이라고 생각해요. 이방인으로 산 날도 많아요. 책방 문을 연 것도 그 운명 때문이에요. 베를린에서 파견 작가로 살 때, 매일 가던 북카페가 있었거든요. 이방인들은 한 번씩 사무치게 외로울 때가 있어요. 그런 날 그 카페에 가서 넋 놓고 앉아 있으면 주인이 말없이 커피잔을 채워주기도 하고 말을 걸어오기도 했어요. 어떤 날에는 노벨상 수상 작가가 학생들 몇 앞에서 상기된 얼굴로 자기 작품을 낭독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요. 그러다 바라게 됐죠. 한국에도 이렇게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결국 불안과 외로움이 책방이듬을 탄생시켰군요.
책방을 열겠다고 하니 주위의 작가 열이면 열 말렸어요. 그런데 나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속수무책으로 달려가는 사람이에요. 책방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불이 붙기 시작한 순간, 이미 결론은 정해져 버린 거죠.
그때는 책방이듬이 그토록 많은 불안을 안겨줄지 몰랐던 거죠? 원형탈모를 앓고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내동댕이쳐진 순간들이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에 참 많이도 적혀 있어요.
불쑥 들어와 “시인이라는 사람이 시나 쓰지, 책방을 왜 해요?” 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 ‘김이듬이 저잣거리에서 물장사를 한다며?’ 하고 말하고 다닌다는 소문도 들려왔죠. 그런 건 괜찮았어요. 그런데 한 달째 한 글자도 쓰지 못하니까 미칠 것 같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문학을 떠나는구나, 두려웠어요. 휴지 사러 뛰어다니고, 택배 박스를 이고 지고 우체국을 들락거리고, 커피 원두를 구하러 다니고…. 그러다 집에 들어오면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잠드는 날이 많았어요. 글은, 하물며 시는 엄두도 내지 못했으니까.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많을 때는 두 번씩 낭독회를 하고 섭외부터 설거지까지 다 내 손으로 했어요. 그런데도 그만둘 수 없더라고요. 그때 나는 물에 머리를 처박힌 것 같았어요. 그런데 글을 쓰니까 숨을 쉬더라고요. 비로소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매일 썼어요. 누군가 내 험담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는 그 사람 욕도 하고요, 하하.
이번 책은 산문집이에요. 그럼에도 많은 글이 시였어요. 호흡이 긴 글도 마지막 문장에서는 결국 전복되어 시가 되는 과정을 여러 번 목격했고요.
타인에게 보여주려고 쓴 글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다잡기 위해, 나에게 말하기 위해 썼어요. 그러지 않으면 속물이 되거나 문학을 버리고 살게 될 것 같았으니까. 이 책은 제 이야기를 담은 첫 번째 산문집이에요. 시집 외에 두 권을 더 냈지만 『모든 국적의 친구』는 파리지앵 인터뷰집이고, 『디어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 안내서 성격이 짙거든요.
책방을 연 지 오래지 않아 쓴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세상에 지친 이웃들에게 이곳이 위안의 최전선이 돼줬으면 좋겠다.”(29쪽) 그 바람은 얼마나 이뤄졌을까요?
처음에는 안 이뤄졌어요. 그래서 절망했고, 내가 허황된 꿈을 꿨구나 했죠. 변곡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데드 포인트에 대해 썼더군요. 정말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지나면 호흡이 편해진다고. 참 신기하게도 죽을 것 같을 때 한 사람, 한 사람 제게 왔어요. 넋 놓고 달을 쳐다보고 있으면 세탁소 아주머니가 오곡밥에 나물을 가져오시는 거예요. “정월 대보름인데 밥은 먹었어요?” 하며. 너무 이상한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저한테. 돌이켜보면 저만 몰랐던 것 같아요. 어떤 이유로 은폐하고 있을 뿐, 작은 틈만 있으면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을 꺼내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진실을.
책방이 삶에 온기를 전했다는, 어쩌면 뻔한 이야기인데 읽고 들을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요. 아마도 우리 모두 진심으로 ‘연대’를 바라고 있었나 봐요. 당연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느슨한 연대를요.
베를린에서 제가 꿨던 꿈이 제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지금은 모두가 다정하고 자유로우며 평화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믿어요. 그렇게 하나둘 모인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서울 사는 사람이 두물머리로 점심을 먹으러 가고, 서로 일자리를 알아봐 줘요. 이사하던 날도 참 추웠거든요. 새벽 여섯 시 반에 이사 준비하러 갔다가 가슴이 철렁했어요. 정말 많은 사람이 책방 앞에 모여 있더라고요. 포장이사라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사양해도 끝까지 가지 않고 이사를 도왔어요. 저한테는 묻지도 않고 테이블이 부족한 것 같으니 돈을 모아서 사자, 책장은 내가 사겠다, 나는 배관 공사를 돕겠다. 두 번째 책방이듬은 그렇게 완성된 공간이에요. 매일 슬리퍼를 신고 찾아와 말동무를 해달라시던 같은 건물 주민은 이제 택시를 타고 오세요. 사실 책방을 접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여는 건 제 맘대로 했지만, 닫는 건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 같아요.
단편영화 <하필이면 코로나라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어요. 불쑥 찾아온 손님에게 영화 출연 제의를 받은 책방 주인, 그 자체로 한 편의 단편영화 같잖아요. 또 책이 창작에 미치는 일파만파 영향력을 확인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네요.
네, 일파만파! 우리 낭독회 타이틀이 ‘일파만파 낭독회’인 건 아시죠? <하필이면 코로나라서> 박성경 감독과는 만취 손님과 책방 주인으로 처음 만났어요. 그러다 꽤 오랜 후인 작년 가을 책방에 와서 출연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장소는 빌려주겠다, 출연을 해주면 장소를 빌리겠다,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둘 다 하게 됐어요. 그 영화가 지금 부천판타스틱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심사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
수상 소식도 책방에서 들으셨잖아요.
아휴,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저를 책방 주인으로만 알고 있던 동네 주민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단골손님들이 현수막을 붙이는 바람에 온 동네가 알게 됐어요. 문을 열려고 책방에 나가니 건물 관리하시는 분이 “아이고, 시인님!” 하고 인사하시는 거예요. 한동안 편의점 가는 마음도 불편했죠. 그래도 참 재미있었어요. 혼자만 들뜨는 것보다 좋았어요. 두 상 모두 번역에 준 상이지 제게는 상금도 없는데 말이죠. 아, 어쩌면 저 곧 부자가 될지도 몰라요. 엊그제 사라 맥과이어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거든요. 이번에는 시인에게 주는 상이에요. 이 또한 책방의 마법일지도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책을 처방하는 책방이, 그것도 시인이 운영하는 책방이 있다고 소개된 이후 부쩍 책 처방 요청이 늘었다고 하소연하셨잖아요.
지금은 일시 정지 상태예요. 제가 처방하기 어려운 주제를 들고 오는 분이 많아져서, 하하. “돈 잘 벌게 하는 책을 알려달라”고 하시는데, 제가 알 리 없잖아요. 마음이 힘들기도 했고요. 책 처방을 원하는 손님 중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분들 이야기를 한두 시간 듣고 나면 그 고통과 슬픔이 온통 저에게로 와요. 그런 날에는 밤새 끙끙 앓아요.
그렇다면 잠시 일시 정지 해제를 부탁드려야겠군요. 품고 있는 불안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때이니까요.
책방이듬에는 자기계발서가 없어요. 이 사람이 산책을 더 많이 하길 바랄 때는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추천하는 식이죠. 오늘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용산에서 찾아온 손님에게는 고전을 몇 권 권해드렸어요. 『폭풍의 언덕』을 구입하신 것 같네요. 칩거의 시절이잖아요. 이럴 때는 두꺼운 책 몇 권을 머리맡에 두고, 꼭 끝까지 읽겠다는 결심 없이 이 책 저 책 옮겨가며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책 읽는 마음은 가벼이 하고 좋은 책을 읽는 자신을 어여삐 여길 수 있도록 말이에요. 얼마 전 입원한 친구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권했어요. 지금 우리가 바로 그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이참에 묵혀뒀던 불안과 직면하고 자신이 정말로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요? 『장자』도 좋을 것 같고요. 선택할 수 있다면 현암사 버전을 권해드려요. 네, 읽을 책은 무한해요!
책에서 고 황현산 선생의 글을 빌려 시인의 변을 남기셨어요. “내 존재 자체의 바탕을 변화시키고 삶의 목적까지 다른 것이 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지속될 수도 있고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런 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한다.”(『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코로나가 생산해낸 불안은 당분간 유지될 것 같고, 불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해요. 시가 우리에게 그 일을 해줄 수 있을까요?
황현산 선생은 “과거의 나를 자빠뜨리지 않는 예술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까지 말씀하셨죠. 어떤 사람은 제 시를 읽고 “이게 무슨 시야?” 하겠죠. “대체 무슨 말이야?” 할 수도 있고요. 저는 그 순간이 좋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아집이나 편견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쾅!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죠. 도종환 시인이 썼듯이 흔들리며 꽃도 펴요. 씨앗이 꽃 안에 갇혀 있어서는 꽃이 되지 못해요. 바람에 불안스레 흔들려 날아가야 비로소 다른 토양에서 꽃을 피울 수 있죠. 시는 바람이나 파동을 일으키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이에요.
지금, 머리맡에 두고 읽을 시를 한 편 권해주실 수 있을까요?
심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에 「두 번은 없다」라는 시가 있어요.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좌절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답죠. 단 한 번뿐이니까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대로 살아야 하고요.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제가 이렇게 책방에 앉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맞이하며 살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 밤에도 시를 쓰겠지요? 김이듬의 새로운 시들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2019년에 나온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와도 많이 다를 거라는 기대도 되고요.
거기 실린 시들은 책방 초기에 쓴 시예요. 가장 최근에 쓴 시를 보면 굉장히 밝아요. 코로나 한가운데 쓴 시임에도. 저는 어려서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했고, 그래서인지 늘 어둡고 버려진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책방을 하면서 사람을 믿게 됐어요.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은 계속해서 있겠지만, 아마도 나는 계속 불안하겠지만, 이제는 굳건하게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싶어요. 물론 여전히 해야 할 말은 하겠죠. 그런데 말하는 방식은 조금 바꿀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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