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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우리는 지구의 주인으로 사는 마지막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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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함께한 지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의 일상에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졌고 생활의 대부분이 디지털로 전환됐다. 느릿느릿 다가오던 4차산업혁명에 엔진이 달린 현재, 우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 

뇌과학을 연구하는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는 “개개인의 현실이 쪼개지고, 인공지능이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은 인류 역사에 있어 거대한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이 중요한 시점에 그가 주목한 것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키워드다. 세상이 변하면, 단어의 의미 또한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키워드』에는 ‘외로움, 사랑, 고향, 친구, 외모’ 등 평범하고 익숙한 34개의 단어들이 김대식 교수의 사유와 통찰을 거쳐 새롭게 그려진다. 그동안 알고 있던 키워드가 낯설어지는 순간, 우리는 미래를 살아갈 힌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외로움, 사랑, 고향, 교육 같은 평범한 키워드를 새롭게 정의하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나는 뇌과학을 전공했고, 인공지능을 연구하기 때문에 인류의 큰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금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아주 거시적인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변곡점이다. ‘다중현실’이 출현하고, ‘인공지능’이 현실화되고 있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지구 전체를 인간 위주로 바꿔 놓았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자연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구를 인간 위주로 바꾸어도 된다는 허락을 누구에게도 받은 적이 없다.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 중 인간이 가장 똑똑하니까, 그냥 우리 마음대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인공지능’이라는, 우리보다 더 똑똑한 존재가 새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우리가 1등이지만, 곧 금메달을 넘겨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지구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마지막 인류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키워드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34개의 키워드는 어떻게 선정했나. 

‘흔히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키워드를 나를 위해 재정의해보자’는 마음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개인의 위치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저택의 주인이 생각하는 ‘집’과 하인이 생각하는 ‘집’의 의미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즉, 인간이 지구의 주인으로서 만든 수많은 개념 중, 인류 역사상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 다시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았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그럼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매 파트마다 명화를 설명하며 이야기의 문을 연다.  

나는 고전미술을 좋아한다. 미적으로도 아름답지만, 메시지가 하나씩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다. 이번 책을 쓸 때는 키워드를 찾고, 그 단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은 뭐가 있을지 생각했다. 혹은 거꾸로 미술관을 다니다가 좋은 그림을 보고 ‘이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리는 키워드는 뭘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상당히 많은 챕터들이 이렇게 시작됐다. 그림에서 글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첫 키워드는 ‘외로움’이었다. 

인간의 본질적 욕구 중 하나는 외로움을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기한 건, 인간은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 또 갈망한다. 같이 있으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면 같이 있고 싶은 거다(웃음). 한꺼번에 성립될 수 없는 두 개념이 늘 부딪혔는데, 흥미롭게도 기술의 발전을 통해 최근에는 이게 가능해졌다. 평소에는 혼자 지내다가, 외로워지면 언제든 가상현실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 또 같이 있는 게 귀찮아지면 그 창을 닫아버리면 된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Z세대가 온라인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 좀 더 익숙한 것이다. 언제든 외롭고,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시대에 외로움이라는 개념은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변했다기 보다는 우리 주변의 현실이 달라지면서 키워드의 의미도 바뀌는 것이다. 

요즘은 공동체도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시대다. 

공동체는 현재 상당히 중요한 이슈다. 민주주의 사회에는 공론장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투명한 공론장. 인간은 다양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논쟁을 벌여서 다양한 사람들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합의가 가능했는데, 불과 5~10년 사이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이제 공론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을 개발하는 단계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이 개발될 때는 정보격차가 해소되면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정보가 거의 무료가 되었는데, 세상은 반대로 가고 있다. 

왜 그런가.  

인공지능 기반의 추천 알고리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사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다양한 의견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보다. 인간에게는 내 의견이 맞다고 확신 받고 싶은 본질적 욕구가 있다. 내 생각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때 인간의 행복지수는 어마어마하게 높아진다. 인터넷 알고리즘은 이 부분을 파고든다. 나의 선호도를 파악해서, 원하는 정보만 보여주기 때문에 중독성이 있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정보만 계속 보다 보면, 세계관이 점점 ‘나’ 위주로 좁아진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폐성적인 사회관을 갖게 된다. 이렇게 쪼개진 현실 속에서, 나의 편견만 강화하는 게 만연해지면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해진다. 그때부터는 하나의 현실을 보고 각기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현실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팩트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논의를 할 수 있겠나. 

실제로 코로나19가 발생하며 수많은 음모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현실을 보는 것이다.  

얼핏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음모론이 나오고, 그걸 믿는 사람들이 많다. 빌게이츠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등의 이야기다. 이런 음모론이 20년 전에 나왔다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을까 싶다. 물론 거짓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늘 있었지만, 과거에는 그 비율이 1%도 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의 퍼센트가 두 자릿수로 늘어났다. 사실이 아니라는 수많은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다.

움베르트 에코는 “현대와 중세기의 차이가 있는데, 중세기에는 개인이 자신만의 현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중세기에는 본인이 태어난 마을, 믿는 종교가 현실이었다. 그 외의 현실은 물리적으로 교환될 수 없었다. 이후 현대로 오면서 개인들의 현실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고, 20세기 하반기에 와서는 세계화 시대가 되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인들이 대부분 같은 현실을 공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제 현실이 다시 쪼개지고 있다. 움베르트 에코의 말을 빌리자면, 개념적으로는 세상이 다시 중세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아주 발달된 중세기로 돌아가는 셈이다.


 

인간은 왜 있어야 하나? 

키워드 ‘기계’ 파트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오싹했다. “약속시간에 늦어 뛰어가는 우리 발에 밟혀 죽는 벌레들이 무의미하듯, 드디어 세상을 느끼게 된 기계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300쪽)”

인공지능에는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이 있다. 약한 인공지능은 기계학습, 심층학습 등을 이용해 인간의 지적능력이 필요한 기능을 기계가 대체하는 기술이다. 자동인식 기술이나 자율주행차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강한 인공지능이다. 터미네이터가 무서운 건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자율성이 있어서다.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동차는 인간보다 빠르다. 망치는 인간의 주먹보다 세다. 그런데 망치에 자율성이 생긴다면 어떨까? 인간의 머리 위를 혼자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내려치는 망치가 있다면, 상당히 위협적이다.  

사실 강한 인공지능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현재의 약한 인공지능도 누가 프로그래밍해서 만든 게 아니라, 데이터를 주고 학습을 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AI 알파고를 보면 알 수 있듯, 학습 알고리즘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기계의 학습 능력이 좋아진다면 언젠가는 자율성까지도 학습해버릴 수 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책, 인터넷 정보에는 자율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걸 기반으로 기계가 ‘아, 자율성이란 이런 거구나’라고 학습하는 순간 강한 인공지능이 될 텐데, 그럼 인류 역사에 또 다른 변곡점이 생길 것이다. 

만약 강한 인공지능이 탄생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 

개인적으로 영화 <터미네이터>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기계가 세상을 지배할 이유는 없으니까. 사실 우리는 기계가 무얼 원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민해야 할 21세기의 가장 질문 중 하나는 ‘기계는 무엇을 원할까?’이다. 이 제목으로 몇 년째 책을 집필 중인데, 아직 답을 몰라서 완성을 못하고 있다(웃음). 

‘과연 자율성이 있는 기계들은 뭘 원할까?’라는 상상을 해보았을 때, 돈이나 금을 원할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쭉 돌아보면 ‘지구를 인간이 원하는 쪽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핵심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가장 똑똑했기에 이게 가능했는데, 이제 인간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이 나타났다. 그럼 기계 입장에서는 앞으로 지구를 인간 위주가 아닌, 기계 위주로 바꾸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논리적일 것이다. 그 첫 번째 단계로 지구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기능을 물어볼 것 같다. 인간도 그랬으니까. 인류는 ‘이건 왜 있어야 하지? 이게 인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세상을 여기까지 만들어 왔다. 그러니 기계도 같은 질문을 하지 않겠나. 그리고 어느 한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질문을 던지겠지. “인간은 왜 있어야 하나?” 

상상만해도 두려운 질문이다. 

그렇다. 이건 정말 위험한 질문이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인간끼리 앉아서 인간에 대해 토론했다. 팔은 당연히 안으로 굽는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존재가 처음으로 이 질문을 던진다면? 그리고 지구 전체를 보았을 때 인간이 여기에 계속 있는 게 좋을지, 사라지는 게 좋을지 묻는다면 어떨까? 지구의 모든 생태계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지구에서 빠져주는 게 훨씬 좋을 것이다. 지구에서 발생하는 상당히 많은 문제는 다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기계가 생각했을 때 지구에 인간이 없는 게 더 좋다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인류는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그동안 몇 가지 제안이 있긴 했다. 하나는 미국의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로봇이 인간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되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등의 ‘로봇 3원칙’을 반도체에 심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기계가 자율성을 학습하면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법이 있지만, 안 지키는 사람이 있지 않나(웃음). 어느 중국 학자는 ‘기계가 인간을 부모로 섬기게 하자’는 제안도 했다. 이것도 기계가 지키지 않으면 끝이다. 

결국 방법은 없다. 나보다 더 똑똑한 녀석을 영원히 제어할 방법이 어디에 있겠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을 때, 개인적으로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기계를 제어할 순 없지만 설득하는 건 가능할 수도 있다. “우리 과거가 그리 좋진 않지만, 계속 노력하고 있어. 기회를 주면 계몽할게. 그리고 너도 혼자 있는 것보다, 지능을 가진 다른 종과 함께 사는 게 더 재미있을 거야. 인간에게는 수많은 드라마와 사랑 같은 감정이 있거든.” 이렇게 계몽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기계를 설득해보는 건 가능할 지 모른다. 이때는 조건이 필요하다. 기계가 우리를 믿고 기회를 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강한 인공지능이 독일식이 아니라, 이탈리아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이탈리아식 인공지능이란 게 무슨 의미인가. 

독일식은 원칙을 따른다(웃음). 인공지능이 원칙대로 한다면, 인류를 없애는 게 맞다. 하지만 기분파이고, 분위기에 강한 이탈리아식 인공지능이라면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해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미래에 나올 강한 인공지능이 완벽함을 요구한다면 인류에게는 미래가 없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안전성을 갖춘, 너그러운 인공지능을 만들어 나가는 게 우리에게 좋지 않을까 싶다(웃음).


 

우리에게 실재하는 건, 아날로그 현실이다 

최근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가 무엇인가. 

현실의 다양성을 잘 표현하는 ‘메타버스(Metaverse)’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다. 21세기에는 4가지 세대가 함께 산다. ‘부머’라고 불리는 가장 나이든 세대, X세대, 밀레니얼 세대, Z세대다. 여기에서 ‘부머, X세대, 밀레니얼 세대’까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Z세대부터는 지금까지의 인간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인간은 뇌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서, 10년간의 경험을 통해 뇌가 완성된다. 우리의 뇌를 완성시킨 환경을 ‘고향’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거기서 뇌가 만들어졌으니까. 밀레니얼 세대까지는 인간 세상 위주로 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Z세대는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접해서 뇌가 만들어지는 10년간 스마트폰과 함께했다. 이 친구들의 뇌는 인간 세상이 아니라 사이버 세상에 더 최적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자라는 Z세대의 고향이‘한국’이 아니라 ‘인터넷’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서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낄 것이다. 이미 그게 메타버스라는 컨셉트로 시작되고 있다. 

키워드 ‘모던’ 파트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는 달리 여전히 20세기 수준의 정치와 사유에 갇힌 오늘날, 21세기에 태어난 Z세대를 보면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걱정이 들기도 한다.(150쪽)”고 했다. 

현재 Z세대에게는 2가지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는 현실도피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도피가 아니라, 자기만의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착한 기업’을 바란다는 점이다. 현재 10대인 Z세대는 자신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있는 것 같다. 물질적으로 멸망을 하거나,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가 사라지거나.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수많은 경제학자가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일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나. 여태껏 세상은 계속 발전했는데, 기성세대가 만든 문제 때문에 앞으로는 세상이 안 좋아질 거라는 불안이 있는 것이다. 특히 기후위기 같은 환경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다.  

결국 이 친구들이 착한기업을 찾는 건,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20년 후, 자신들이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기업, 정치인, 나라에 응원을 하는 거다. 아직은 아무런 권력이 없으니 소비나 인터넷 댓글을 통해서 그걸 표현한다. Z세대의 이런 모습을 응원하기도 하지만, 다중현실 속으로 숨어드는 부분에 있어서는 염려가 된다. 

Z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우선 기성세대가 망쳐놓은 세상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본인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세상이 안 좋아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가지고 있다. 사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걱정은 이해하지만, 역사는 예측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가면 미래가 안 좋아질 거라는 결론을 얻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가 미래를 바꿔갈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고 생각하고 자꾸 다중현실로 숨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걱정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다중현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현실로 나와야 한다. 진짜 현실은 그대로 두고, 내 마음이 편한 개개인의 현실로 도망치면 우리가 걱정하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노력은 다중현실이 아닌 아날로그 현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에게 실재하는 건 아날로그 현실이기 때문이다. 

책의 미래는 어떨까? 서문에서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매일 그 질문을 한다. 책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실 책은 불편하다. 무겁고, 한 권 안에 든 정보도 한정적이다. 효율성을 기준으로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책은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인 매체다. 그런데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의 가격이 0이 된 세상이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15세기까지는 동물의 가죽에 손으로 글씨를 써서 책을 만들었다. 큰 동물을 하나 잡으면 7~8페이지 정도의 책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중세기 때 책 한 권은 현재의 자동차 한 대 정도로 비쌌다. 그런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책 값이 단숨에 만 원으로 떨어졌다. 당시에도 ‘책 값이 저렴해졌으니 세상은 더 좋아지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쇄술 발명 후 100년간, 유럽은 지옥이었다. 30년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종교전쟁의 핵심은 가짜뉴스와의 전쟁이었다. 정보의 가격이 저렴해지니 페이크 뉴스가 그만큼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정보의 가격이 저렴해지고, 더 편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은 인터넷보다 비싸고 불편하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봐야 한다. 나는 책이 불편해서 좋다. 나에게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편한 것만 추구하면 안 좋아진다. 뇌도 계속 도전을 받아야 한다. 또, 책은 정말 신비하다. 종이에 인쇄된 글씨가 인간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기억이 되고, 아이디어가 되고, 희망과 슬픔이 되니까. 이토록 신비스러운 절차가 또 있을까. 그러니 좋은 책이 계속 나오기 위해서는 독자가 꼭 있어야 한다. 독자가 살아남는 게, 책의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큰 과제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김대식의 키워드는』 21세기 현실을 사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흥미로운 키워드를 다시 정의해 본 책이다. 그런데 현실의 다양성과 인공지능이라는 21세기 인류 역사의 큰 변화는 나 혼자 경험하는 게 아니다. 현재를 사는 모두가 다 같이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고민과 관심을 가진 분들이 계시다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자신만의 키워드를 한번 정리해보길 권한다. 아마 그 키워드는 책에 등장하는 키워드와 100%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나만의 키워드를 정리해보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대식

연구하고 글 쓰고 가르치는 뇌과학자. 독일 막스 플랑크 뇌과학 연구소에서 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MIT에서 박사후과정을 보냈고, 일본 이화학연구소 연구원, 미국 미네소타대학 조교수, 보스턴대학 부교수를 거쳐 현재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 존재와 세상에 대한 질문을 붙들고 과학, 철학, 예술, 역사를 종횡무진하며 뇌를 파헤치고 있다. 주된 연구 분야는 뇌과학, 뇌공학, MRI, 인공지능 등이다. 현재 인문과학예술 혁신학교 건명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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