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혼자 시를 쓰던 시간이 있었다. 등단은 했지만 시인은 아닌 것 같았던 순간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 서윤후 시인은 “채우는 것에 몰두하며 20대를 보냈다”고 했다.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것들”로 삶이 빼곡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새로운 다짐을 한다. 그만두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여러 번 “선언”이라는 단어를 말했다. 애써 그만둔 일로 노트를 채우는 건,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맹세와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선언이 오랜 결심 끝에 이루어지듯, 무언가를 그만 두는 것 또한 그에게는 큰 용기였다. 서른 세 가지 용기의 결실이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에 담겼다. 그만둠으로써 일상에 여백이 생기자 소중한 것들이 더 선명해졌다.
나는 계속 요동치고 있다
시집(『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과 산문집(『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이 열흘 차이로 출간되었어요. 무척 바쁘셨을 것 같아요.
작업할 때는 힘들었지만, 책이 나오고 나니 좋아요. 책으로 여러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 받고 저도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이번 산문집은 ‘한 권의 노트’에서 시작된 책이라고요.
친구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허름한 수제 노트를 선물로 사왔어요. “너라면 이걸 잘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라며 노트를 건네는데 그 말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노트에 천착해 있었죠. 그러다 문득 흔히 쓰는 ‘To do list’ 말고 ‘안 해도 되는 것’ ‘그만두어야 할 것’에 대해 써볼까 싶었어요. 순수하게 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는데, 혼자 하면 흐지부지될 것 같아서 지난 산문집 약력에 이런 리스트를 쓰고 있다는 소개를 넣었죠. 그걸 보고 편집자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햇빛세입자』 출간 후 인터뷰에서도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 “올해 초부터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 목록의 이름을 번번이 되뇌는 것 만으로도 좋다”고요.
맞아요. 처음에는 큰 부담 없이 적기 시작했는데, 리스트를 채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오늘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가 내일 다시 하게 되는 일들도 있고요(웃음). 그런데 그 불안정한 목록을 보는 게 좋았어요. ‘내가 계속 요동치고 있구나, 요동치는 삶의 감각을 이 리스트로 알 수 있구나’ 싶었거든요.
제목을 보고, 그만 둔 ‘행동’이 많을 거라 예상했는데 대부분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소진된 상태였거든요. 그 즈음 인터뷰를 하면, 기사에 늘 “지난 10년을 온전히 시인으로 살았다”는 문구가 있었어요. 덕분에 제가 20대를 시인으로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죠. ‘20대를 시인으로 산다는 건 뭘까?’ 생각해봤는데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웃음). 단순히 시만 쓴 게 아니라 내 안의 절박함과 겨뤄야 할 때도 있었고 조급해지는 나를 계속 다독여야 했으니까요. 그 과정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첫 시집을 낸 이후, 저를 소진시키기 위해 애를 썼어요. 혼자서 들끓고 에너지가 넘치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빨리 이 에너지를 소진하면 다음 스텝이 오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 시기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괜찮아졌나요? 어떻게 그 마음을 이겨냈을지 궁금해요.
모든 일에는 앞면과 뒷면이 함께 있으니까요. 내가 무언가를 소진했다면, 그만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 마음으로 계속 견뎠던 것 같아요. 저는 성미가 급하고, 생산적인 삶에 대한 강박이 있어요. 그래서 무엇을 그만두거나 멈추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큰 용기였어요.
생활이라는 풍경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리스트를 쓸 때, 가장 먼저 쓴 항목과 마지막에 쓴 항목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요.
생활에 가까운 것들을 초반에 썼어요. ‘빈티지 옷 쇼핑하기’ ‘딸기 집착’ 같은 것들이요. 마지막으로는 ‘고독의 몸부림’처럼 추상적인 것들을 썼네요. 돌아보니 후반에 쓴 목록은 결심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을 그만 뒀고,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 거야’ 라는 자기 선언에 가까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마지막에 떠올랐죠.
마지막에 쓴 항목이 책의 첫 꼭지가 되었네요. “고독에 몸부림치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고독이 나의 모국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12쪽)”고 했어요.
살면서 고독과 우울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만 우울하고 싶어’ ‘그만 고독하고 싶어’라는 생각때문에 사소한 실패를 겪게 되는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고독을 살갑게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삶에서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게 된 거죠. 어쩌면 고독이 문학이라는 형태로 나에게 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고독을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이해하니까 고독이 나의 일부가 된 것 같고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책으로 방공호 쌓기’를 그만둔 것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침실에는 절대 책을 두지 않는다고요. 책과 각방을 쓰니 어떤 점이 좋던가요?
잠을 더 잘 자게 됐어요. 언젠가 정세랑 작가가 “집에 노페이퍼존이 있고, 침실에 절대 책을 두지 않음으로써 수면의 질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최근 이사를 하면서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침실에 종이 한 장도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꾸몄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저는 독서도 노동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공간을 분리하니, 내가 전환되는 느낌이에요. 서재와 침실에 들어갈 때의 마음가짐이 달라요. 서재에 갈 때는 마음을 다잡고, 침실에서는 읽고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시적 허용’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삶에 시적 허용을 적용하며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자기합리화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는 못마땅 했다(151쪽)”고 했죠.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겪으면서 그 생각이 명확해졌어요. ‘문학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그릇된 의식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니까요. 시인이라면 누구나 문학적인 자의식이 있을 텐데요. 이게 외부로 발현되었을 때 과대포장되거나 권위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죠.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해도 “시인이잖아. 시 쓰려면 그럴 수 있지”하고 넘어가는 게 너무 싫어요. 저는 시인이지만, 시인의 티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모를 자의식은 작품으로 보여줘야지, 이해 못 할 행동으로 나타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시인도 좀 포멀하게 살 수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썼어요(웃음).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그만두고 보니 어떤가요. 생활이나 마음가짐에 뚜렷한 변화가 있나요?
생활의 바탕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그만두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확 달라지진 않는 것 같아요. 타고난 기질이 있으니까요. 저는 ‘권태로움’을 두려워하거든요. 애써 발버둥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이 두려울 때가 있는데, 이 목록을 쓰면서 좀 나아졌다는 걸 느껴요. 무언가를 그만 두고,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것을 하는 과정이 계속 순환하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감각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가장 좋은 점이었어요. 이 목록은 앞으로도 계속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제 삶에 있어서도 굉장히 의미있는 책이죠.
33가지의 ‘그만두길 잘한 것들’을 곱씹어보니 하나의 결론에 이르더라고요. 얽매이지 않고,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생활을 잘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요.
맞아요. 저는 생활이라는 풍경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심적으로 힘들고 사는게 벅차면 집이 엉망이 돼요. 마음이 엉망인 상태에서 그 풍경을 보면 더이상 갈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늘 생활을 정돈하려고 하죠. 생활에서 내가 묻어나고, 나에게서 생활이 묻어나니까요. 이 목록을 쓰면서 일상의 풍경을 곡진히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잘 견딘 것 같아요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젊었을 땐 나를 소진시키기 위해 안간힘(31쪽)”을 썼지만, 현재는 “내 여분을 나의 모자람에 정확히 두는 일(33쪽)”이라는 걸 안다고 했어요. 여백을 채우기만 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텅 비웠을 때 오는 불안감은 없었나요?
여전히 불안해요(웃음). 저는 원고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아무도 날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박함이 몸에 배인 것 같아요. 청탁을 받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하겠다고 응할 때가 많아요. 저는 마감 독촉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정말 성실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독촉전화를 종종 받게 되면서 깨달았어요. 무언가를 그만두는 건,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요. 여백은 불안감을 주지만, 동시에 원동력이 되기도 해요. 불안할 때는 ‘이 여백을 채우고 싶은데,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 생산적인 기회로 만들려고 해요.
그 절박함은 일찍 등단한 데서 비롯된 걸까요?
연관이 많죠. 문단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고 하지만, 젊은 것과 어린 것은 다르거든요. 어리면 좀 더 지켜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일찍 등단한 친구들을 보면 좀 안쓰러워요. 기회를 갖지 못할 때,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나아갈지가 보이니까요. 저도 등단하고 2년 정도는 불러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거든요.
문예지 청탁도요?
네, 전혀 없었어요. ‘이게 무슨 시인이지?’ 라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 좀 힘들었죠(웃음). 그래서 입대를 했어요. 어차피 그 사이에 다 나를 잊을 테니, 시인 생활을 이대로 끝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계셨고, 다행히 기회를 얻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물리적인 나이 탓은 아닌 것 같아요. 문학은 자기탐구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 작품을 쓰느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어려서 기회를 안 줬던 게 아니라, 작품에서 저의 부족함이 보였을 수 있겠죠. 그래도 그 시간을 잘 견딘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견디지 못했다면 지금은 시를 쓰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것밖에 없었다”는 말이 의미있게 들려요. 시가 어떤 존재였어요?
아마 시를 쓰지 않았어도 저는 회사에 잘 다니면서 계속 밥벌이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심적인 부분을 기댈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가 시였던 것 같아요.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면 한 가지 음식만 먹는 사람들이 있잖아요(웃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심적으로 힘들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을 때 그걸 먹고 나아서 맹신하게 된 경우가 많더라고요. 어린 저에게 시가 그랬던 것 같아요. 외롭고 두려울 때 시를 쓰는 게 위안이 됐어요. 글쓰기가 친구 같았죠. 요즘도 “제가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건 그만큼 괴로웠단 뜻”이라고 자주 말해요. 저는 주로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거든요. 그래서 “그땐 그것밖에 없었다”는 말은 결국 20대의 초상이 그만큼 외롭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잘 견딘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겠어요.
‘애썼다’ 싶어요(웃음). 같은 해에 등단한 시인들이 여러 곳에서 청탁 받고 시집을 내는 걸 보기가 괴로웠거든요. 그때 주변 선배들에게서 다 때가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을 생각하며 버텼고, 버티니까 정말 기회가 왔어요. 그래서 요즘은 당시의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동료들을 보면 꼭 한 마디라도 힘이 될 말을 해주려고 노력해요.
30대의 속도를 즐기려고요
몇 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현재의 가장 큰 화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른”이라고 답했어요.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다”고요. 지금도 그런가요?
저는 20대와 30대가 정말 다르게 느껴져요. 완전히 다른 몸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죠. 첫 번째로 육체적인 부분이 많이 달라졌어요. 20대때도 아주 건강한 건 아니었는데, 돌아보면 진짜 건강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지금은 체력이 소진될 걸 예상해서 최대한 나를 아끼려고 해요. 그러다보니 도약할 수 있는 동선이 좀 짧아지는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있죠. 20대가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는 시기였다면, 30대는 그걸 솎아내는 시기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속도감이 달라요. 저는 글을 빨리 쓰는 게 굉장한 장점이었거든요. 마감을 어긴 적 없다는 사실이 늘 저를 떳떳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글을 쓰는 속도가 점점 느려져요. 예전에는 뭘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문장이 팡팡 터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이야기를 품고 품어서 겨우 써내죠. 고민도 더 많아지고요.
정말 공감해요(웃음). 저도 20대때 쓴 기사를 보면 생경하더라고요. 왜 그럴까요?
내 안의 유속이 달라진 게 아닐까요? 그냥 그 유속에 맞게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20대때의 나는 이랬는데’라는 단서가 자꾸 실패를 만드는 것 같아서 30대의 속도를 즐기려고요. ‘좀 더 여유롭게, 느긋하게 해보자’ 같은 맹세를 자주 하게 돼요(웃음).
편집자로 일하는 동시에 작품활동도 하시잖아요. 편집자와 시인, 모두 정신력이 필요한 일인데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세요?
예전에는 퇴근하면 스타벅스로 출근해서 배고파질 때까지 글을 쓰고 집에 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밥이 안 들어가면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웃음). 그래서 평일에는 저를 좀 놔주는 편이에요. 대신 주말에 전환을 해서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는 글쓰는 일에 매진해요. 20대 때는 회사에 다니면서 작품을 쓰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할 게 많아서 오히려 좋았는데, 30대가 되니 ‘할 게 왜이렇게 많아?’라는 뉘앙스로 바뀌었어요(웃음). 그래도 회사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균형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자가 되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나요?
작가 혼자 오롯이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편집자 분들이 제 시와 글을 내밀하게 읽어줄 때 정말 좋았기 때문에 저도 글자 하나, 문장부호 하나까지 세세히 보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이 작가를 지구상에서 가장 지지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지’ 싶어요. 어느 누가 이 책을 반대해도, 편집자라면 끝까지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제가 편집자 분들의 지지를 많이 받아보았기 때문에, 그 믿음이 창작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거든요.
책 사인본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가는 당신의 생활에게”라고 쓴 문구를 보았어요. 어떤 의미였나요?
생활이 늘 자기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 그 순간을 얼룩으로 보느냐, 무늬로 보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것 같아요. 얼룩은 지우고 싶고, 털어버리고 싶지만 무늬는 괜찮게 느껴지죠. 제가 얼마 전에 흰색 고양이를 입양했는데요. 다리 한 쪽에만 검은 털이 조그맣게 있어요. 그걸 보고 정말 예쁜 무늬라고 생각했어요. 오로지 그 아이만 가질 수 있는 무늬요. 먹고 사는 게 다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시행착오, 기쁨, 노력 같은 과정을 통해 각자의 무늬가 생겼을 거예요. 우리 모두가 그 무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삶이 나쁘지도,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은 상태일 때 이 책을 읽으며 작은 파동을 느끼셨으면 해요. 그만두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쓰면서 제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던 것 처럼요.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에게 시가 그렇거든요. 어떤 시든 읽고 나면 아주 조금씩은 달라진 저를 발견할 수 있어요.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생활의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서윤후 1990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9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과 『휴가 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그리고 여행 산문집 『방과 후 지구』, 『햇빛세입자』, 만화 시편 『구체적 소년』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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