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2015년, 영화연구자 손희정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중문화와 SNS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보고 들었고, 새로운 흐름을 ‘페미니즘 리부트’라 명명했다. 달라진 세상만큼이나 영화관의 풍경도 바뀌었다.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한 여성 영화감독들이 등장했고, 관객들은 기꺼이 스크린 앞에 모였다. 그리고 2021년, 손희정은 13인의 감독들을 만나 고유한 우주를 들여다본다. 팬데믹으로 영화관이 닫히고 광장에서 어떤 말들은 지워지지만, 손희정은 여전히 ‘우리’를 말하는 유니버스의 중심에 있다.
손희정은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대중문화와 한국사회를 비평하는 영화연구자다. 첫 영화책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는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이후 네 번째 단독 저서다. 공저로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이 있고,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에서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과 함께 <권손징악>을 진행하고 있다.
여성영화의 새로운 물결
영화에 대한 첫 단독저서입니다. 작가님의 본업은 영화연구자인데, 여성학을 전공한 여성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많은 분들이 저를 1990년대 페미니즘 운동을 했던 ‘영 페미니스트’ 출신인 줄 아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지금의 동료들이 광장에 모일 때 극장에 가고 영퀴(영화퀴즈)를 풀던 시네필이었거든요.(웃음)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까 여성영화를 많이 봤고, 『씨네21』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을 접했죠.
책 앞날개의 자기소개가 꽤나 디테일했어요. <E.T>, <아마데우스> 등 영화에 대한 애정을 밝히셨더라고요.
처음 본 영화가 <E.T.>였는데요, 깜깜한 극장 안에서 스크린을 보고 경이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나요. 영화에 푹 빠진 건 역시 이야기가 좋아서예요. 제 전공이 한국사였는데, 그중에서도 고대사를 좋아했거든요. 고대사는 돌덩어리 하나 보고 우주를 상상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역사가 재밌었던 거죠. 영화도 상상력의 세계여서 푹 빠졌던 것 같아요.
영화를 완전히 다르게 보게 된 계기가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였다고요.
그 영화를 처음 볼 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원래 영화학과를 들어가기 전에 <예술영화TV>라는 케이블 방송국에서 1년 정도 일을 했어요. 외화 판권을 사서 TV에 거는 부서에 있었는데, 팀장님이 아녜스 바르다가 한국의 여성영화제에 방문하면서 본인의 영화를 한국 에이전시에 판매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 미팅에 가면서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굉장히 유명한 페미니스트 감독이라고 하면서.(웃음) 실제로 아녜스 바르다를 그의 호텔방에서 만났는데, 그땐 그 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 후에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봤고, 완전히 다른 세계였던 거죠. 회사를 그만둔 후에 영화 공부를 하면서 에세이를 아녜스 바르다로 썼어요. 그때 주진숙 교수님이 저를 눈여겨 보셨고, 석사 논문 주제를 고민하니까 “너 페미니즘 한다고 해서 뽑았는데. 안 할 거니?”라고 하셨죠. 그게 시작이었어요.(웃음)
이번 책은 비평가 손희정이 여성영화감독 13인을 만나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기획이에요. 인터뷰와 평론의 중간인데요. 어떻게 기획이 시작됐나요?
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새로운 여성영화의 물결이라는 주제로 강의한 적이 있었어요. 2019년은 참 특이한 해였어요. 김보라의 <벌새>, 윤가은의 <우리집>, 유은정의 <밤의 문이 열린다> 등 여성 감독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고, 인디스페이스에서 이 새로운 경향을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어준 거예요. 거기서 인디스페이스 관장님과 마음산책 출판사 대표님 사이에 이야기가 오갔고, 기획이 시작됐어요. 인터뷰 형식이 된 건, ‘감독과의 대화’ 행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에요. 제 본업 중 하나가 영화가 끝나고 관객과 감독이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거든요.
인터뷰할 감독을 정하는 데 고심했을 것 같아요.
좋은 감독이 많아서 13인만 뽑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웃음) 제일 중요한 기준은 2019~2020년, 여성영화의 새로운 물결로 포착할 수 있는 젊고 새로운 감독인가였어요. 그리고 이 흐름을 맨 앞에서 이끌어가는 사람이 이경미 감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경미 감독은 상업 영화를 찍어 오기도 했고, 1990년부터 봤을 때 분기점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니까요.
개성이 뚜렷한 감독들을 ‘여성영화’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묶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했겠어요.
‘여성영화의 새로운 물결’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어떤 경향으로 묶는 게 감독들에게는 족쇄일 수 있잖아요. 13인 모두 개성이 달라서 이 다양한 세계를 여성영화 하나로 꿰는 게 괜찮을까 계속 생각했죠. 근데 어느 한 분도 왜 나를 여성 감독이라 묶느냐고 안 하셨어요. 이건 새로운 현상이기도 해요. 예전에는 ‘나는 여성 감독이 아니라 감독일 뿐이다’라는 사람이 더 많았는데, 2019년에 등장한 김보라, 이옥섭, 윤가은 등의 감독들은 서로를 여성 감독이라 부르면서 같이 행사도 하고 연대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여성 감독이라는 말을 쓰는 게 덜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해석이 빗나가는 곳에 영화가 있다
영화 하나를 깊게 다루려고 하다가 감독의 고유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작업이 확장됐다고 하셨어요.
지금까지 제 입장은 감독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영화 강의할 때도 늘 “감독은 천재가 아니다. 그보다는 작품의 사회적 맥락이나 효과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거든요. 근데 영화를 만든 사람을 앞에 놓고 대화해보니 ‘당신은 사회의 결과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웃음) 20년간 해온 생각이 많이 깨지면서 지금껏 편협하게 작품을 읽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그동안 여성 감독들이 길고 성실하게 작업해온 덕분이기도 해요. 한 작가를 논하려면, 여러 작품이 필요하잖아요. 지금까지 작업해온 시간 속에서 여성 감독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죠. 천재여서 훌륭한 작품이 나온 게 아니라, 꾸준히 작업을 이어오면서 작가가 된 과정을 포착하는 게 굉장히 즐겁더라고요.
계속 영화를 찍어온 감독들이 있어서 가능한 거군요.
한국 사회에서 여성 감독이 장편을 만드는 게 아직은 힘든 일이잖아요. 장편 영화까지 간 감독들은 엄청난 뚝심을 갖고 자기 이야기를 해온 사람들이더라고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전 영화에서도 드러나는 거예요. 김보라 감독의 초기 단편 <리코더 시험>이 <벌새>로 이어지고, 차성덕 감독의 단편이 장편으로 확장되는 것처럼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더라도 일관된 관심사가 있었어요. 그걸 발견하는 게 재밌었죠.
감독의 말 앞에서 평론가의 해석이 빗나갈 때도 있잖아요. 이번 책에서는 그런 순간도 그대로 담아내셨어요.
사실 비평가로서 인터뷰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초반에는 인터뷰라고 해도 내 비평글이라는 자의식이 컸던 것 같아요. 감독의 의견보다는 이 작품을 내가 어떻게 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예전 영화를 다 찾아보고 인터뷰를 할수록 그게 아닌 거예요. 결국 ‘감독과의 대화’ 행사와 똑같이 저는 관객과 감독을 잘 연결하는 매개가 되어야 했던 거죠. 그게 인터뷰를 하는 비평가의 태도고 임무구나 싶었어요. 글을 쓸수록 감독의 작품 세계를 잘 전하려면, 나는 어떤 장을 깔아야 하나 고민이 들었죠.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로 시작하는 김초희 감독에 대한 글이 그랬죠. 질문을 던지면 감독님은 매번 다른 대답을 내놓아요.(웃음)
김초희 감독과의 대화는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서 너무 즐거웠어요.(웃음) 종이 한가득 질문을 써 갔는데 다 아닌 거예요. 이렇게 해석했는데 맞냐 물으면, 감독님은 “제작비 없어서 그랬는데?” 하시고. 근데 저는 제약 속에서 선택한 전부가 영화 같아요. 제 해석에서 영화 속 찬실이네 집이 중요했거든요. 집주인 할머니 방, 딸의 영화 아카이브 방, 장국영의 방 모두 하나의 공간에 있어요. 감독님한테 공간 구조가 특이하다, 이런 집은 어떻게 구했냐 했더니 사실은 다 개별 공간이었는데 돈이 없어서 그렇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도 재밌어하셨어요.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을 ‘참여형 영화’로 조명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조조 관람 시간에 여성 관객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울기도 하면서 영화를 함께 봤죠.
사실 <82년생 김지영>은 제가 비판하는 칼럼도 썼던 작품이에요.(웃음) 근데 한국 영화계에 큰 의미를 던진 작품이니까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했죠. 섭외해놓고 김도영 감독의 이전 영화들을 보는데 감독의 세계가 너무 좋고 더 알고 싶은 거예요. 굉장한 호의를 갖고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감독님은 제 비판글을 보고 정말 뭐가 부족했는지 궁금해서 나왔다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은 <82년생 김지영>이 출발점이고 이제 어디로 나아갈지 고민하고 계셨어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자신의 시간을 사는 여성들
‘느슨한 연결’이라 했지만, 13인의 영화 감독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이 있다면요?
여자들이 자신의 시간을 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간 한국 영화에서 시간은 남성만이 사는 거였어요. 남자 주인공이 성장을 해서 이 사회가 원하는 아버지가 되거나, 도달하지 못하면 죽거나 했죠. 반대로, 여성들의 현실에서는 시간은 여자 편이 아니었죠. 예전에는 여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가격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곤 했거든요. 근데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터져 나온 여성영화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자신만의 시간을 살면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등장해요. 이건 여성 감독들에게도 마찬가지죠. 10년 전만 해도 경력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여성 감독들이 버텨서 대중과 교감하기 시작했어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전후로 여성 관객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죠. 영화 <걸캅스> 개봉 당시, 티켓을 여러 번 사서 객석을 채우는 ‘영혼 보내기’ 운동을 하기도 했고요.
맞아요. 그동안은 여성영화를 만들어주세요 하면, 한국 영화계의 반응이 ‘만들어 봐야 흥행이 안 된다’였거든요. 그러자 관객들이 ‘안 봐서 안 만들면 우리가 보자’고 응답하게 된 거죠. 그게 <걸캅스>와 <정직한 후보>, <82년생 김지영> 같은 영화로 이어진 거고요.
“여성영화는 한마디로 규정될 수 없고, 정답을 줄 수도 없다”(235쪽)고 쓰셨습니다.
‘여성서사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떠올라요. 남성들만 나오는 영화에서여성이 주인공이고 탈코르셋을 하고 연애를 하지 않는 ‘페미니즘 영화’까지 줄을 세운 온라인 밈인데요. 저는 이런 줄 세우기가 마이너스 담론처럼 느껴졌어요. 이런 식으로 다 배제했을 때, 마지막에 남는 게 과연 여성서사일까. 제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건 여성서사를 풍부한 결을 포토샵 레이어를 씌우듯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이것만이 여성서사라고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요.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으로 영화를 본다는 건 무엇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임무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에요. 여성영화가 무엇인지 답을 내리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알고, 이제껏 던지지 않았던 질문을 찾아내는 거죠. 페미니즘 비평의 핵심도 그런 것 같아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현상에 질문을 던지고, 그 다음을 생각하는 일이요. 13인의 감독과 만나면서 좋은 질문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질문이 독자에게 잘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손희정 손희정은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대중문화와 한국사회를 비평하는 영화연구자다. 첫 영화책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는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이후 네 번째 단독 저서다. 공저로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이 있고,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에서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과 함께 <권손징악>을 진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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