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치기 전, 김헌 교수는 답사를 떠났다. 한 차례 그리스 본토에서 4대 ‘범(汎) 그리스 제전’의 개최지를 찾아 그리스 문명을 탐색했고, 그로부터 8개월 뒤 지중해 문명을 찾아 이집트로 향했다. 책과 사진으로 연구하던 고대 문명의 흔적을 두 눈으로 생생히 바라보자 “신화 속에 들어간 듯 했다”는 김헌 교수. 그 경이로운 경험을 그냥 흘려 버릴 수 없어 적어 내려간 이야기들이 책 『신화와 축제의 땅 그리스 문명 기행』으로 묶였다. 신을 섬기고,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축제를 벌였던 그리스인의 발자취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값진 깨달음을 준다.
현장이 주는 감동을 담고 싶었다
"2019년 5월 30일 목요일, 여행용 가방을 끌고 인천공항으로 갔다."는 문장으로 책이 시작됩니다. 어떤 여행이었나요?
서울대 AFP(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를 수강 중인 한 팀이 그리스에 답사를 가자는 제안을 했어요. 덕분에 10박 12일의 일정으로 '4대 범(汎) 그리스 제전'의 개최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답사 형식으로 그리스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직접 가보니 웅장한 현장감에 감동을 받았어요. 책을 통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알아왔던 곳을 실제로 보니까 '왜 그리스에서 신화가 탄생했을까'에 대한 감각이 느껴지더라고요 문명과 신화에 대한 사유를 깊이 하게 된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기가 책으로 묶였습니다.
그리스 기후를 몸소 체험하고, 현장의 공간감을 느끼다 보니 그리스인들이 왜 이 자리에 신전을 세웠고, 어떻게 모여서 시간을 보냈을지 생생히 그려지더라고요. 신전을 둘러싼 바다, 산, 들판의 어우러짐 등을 피부로 느끼며 역사적 맥락을 보게 된 거죠. 기록을 하지 않으면 이 귀한 경험이 흩어질 것 같아 틈틈이 메모를 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출판사에서 출간 제안을 받았죠. 그리스의 신화와 축제에 대한 책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는데, 답사를 다녀온 덕분에 여행담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어요.
책을 쓰는 것도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여행을 복기하며 글을 쓰는 작업은 어땠나요?
교수들끼리 "논문의 독자는 아무리 많아도 10명이 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하거든요(웃음). 학자로서 논리의 엄밀성을 중요하게 추구하는 글을 주로 쓰다 보니 어느 순간 회의가 들었고, 그래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데요. 앞서 펴낸 책들도 즐겁게 썼지만 이번 책은 특히 더 흥미로웠어요. 몸이 느낀 공간감을 더 많은 분들이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감성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죠. 한 번쯤은 그리스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를 바랐거든요.
장강명 소설가의 추천사가 떠올라요(웃음). "지금 당장 떠나고픈 욕구를 참을 수 없이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이 책의 아주 큰 단점이다."
책을 쓰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을 장강명 작가님이 알아봐 주셔서 고마웠어요. 비단 그리스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명승지 등도 현장을 가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죠.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칭송 받는 것들을 실제로 보고, 경험하는 것은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리스 신화의 배경이 된 풍경
앞서 '현장의 감동'을 거듭 말씀하셨는데요. 실제로 가서 보니, 다르게 느껴졌던 장소가 있다면요.
올림피아가 인상적이었어요. 경기장 역할을 했던 스타디온과 신전들이 배치된 맥락이 보였거든요. 사진을 보거나 책을 읽었을 때는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길이 그렇게 날 수밖에 없는 지형이더라고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스타디온을 짓고, 그리로 들어가기까지 신들의 가호를 받을 수 있도록 신전을 배치한 거예요.
그리스인이 운동 경기를 하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었어요. 하나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죠. 살아있는 사람들이 뛰고, 땀 흘리고, 경쟁하는 모습이 죽은 자에게 위로를 준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생생히 느꼈다고 해요. 그 과정에서 인간은 신 앞의 작은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죠. 현장에 가면 그 맥락이 보여요. 선수들이 연습하는 씩씩한 움직임을 보며 걷다가 벽 너머로 자리한 신상의 위용 앞에서 겸허해지는 일련의 경로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는 거죠.
디오뉘소스 극장 옆에,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병원)이 자리한 것도 독특했어요.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이렇게 지을 것을 제안했다고요.
당시 아테네는 혼란의 시기였어요. 밖으로는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고, 안에서는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갔죠. 사람들을 치료하고,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는 게 국가적 과제였던 그때, 아테네인들은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시는 신전을 세우고 대규모 희생제를 열어 돌파구를 찾으려 했어요. 그리스인들은 병이 나으려면 의술이 아니라 신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오이디푸스 왕』의 작가 소포클레스는 병을 고친다는 건, 국부적인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건강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극장에서 비극, 희극 공연을 보며 인생에 대해 통찰하고, 신전에 돌아와서는 신체의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러한 제안을 한 거죠. 실제로 신전에서 극장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걸으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몸과 마음을 모두 치유해야 한다는 개념은 현대 의학에서도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네요.
우리의 병원이 어떤 모습인지 역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죠. 현재의 병원은 의사의 권위에 환자가 주눅들고, 기능적인 측면에 치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물론 병원 안에 극장을 지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심신의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리스인의 정신은 배울 수 있어요. 코로나19가 전세계를 덮친 이 시점에서도 아테네인들이 신전을 지어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우던 방식 등은 시사하는 바가 많죠.
여전히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경험 혹은 장소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지역이 다 기억에 남지만 특히 크루즈를 타고 에게해를 나갔을 때 너무 좋았어요.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고, 곳곳에 육지와 섬이 보이는데 그 질감이 무척 거칠어요. 황토빛 땅과 새파란 바다빛, 하늘빛의 대조가 정말 신비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시각적인 선명함이 주는 유쾌하고 명랑한 기운이 자연조건으로 자리한 게 인상적이었죠. 그런 독특한 풍경들이 먼 옛날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신화를 만들도록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고전, 선조들이 필사적으로 전한 이야기
고대 그리스 문학의 어떤 점에 매료되어 서양 고전학자의 길을 걷게 되셨어요?
아버지 서재에 철학책이 많아서 어린 시절부터 철학에 관심을 가졌어요. 복잡하고 어렵지만 멋있는 학문이라는 생각으로 철학과에 진학했죠. 본격적인 공부는 대학원에 가면서 시작됐어요. 저는 플라톤을 연구했는데, 플라톤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그리스어를 잘 알아야겠더라고요. 때마침 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협동과정이 생겨서 참여했는데요. 매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만 읽다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등을 읽으니까 너무 재밌는 거예요(웃음). 또 그걸 표현하는 그리스인들이 상당히 매력적이었죠. 고대 철학의 산문에서 느끼지 못했던 그리스 운문의 운율,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치열한 행위들을 보는 게 흥미로웠어요.
그리스 신화를 아는 게 현대인의 삶에도 유용할까요?
플라톤의 『국가』는 2400여 년 전에 쓰여진 책인데 여전히 사람들이 진지하게 읽어요. 그 시대에 플라톤만 철학을 하고 책을 쓴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여전히 플라톤은 살아남았을까 생각해보면 저는 플라톤이 '수천 년 뒤에도 통할 수 있는 게 뭘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의 문제를 탐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수백, 수천 년 뒤를 예측하고 통찰했던 사유와 태도를 배우는 것은 우리 삶을 내다보는 데 아주 유용하죠.
그리스 로마 신화도 마찬가지예요. 단순히 기괴한 괴물들이 나와 요술을 부리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여태껏 읽히지 못했겠죠. 그 이야기 속에는 인생에 대해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삶의 지혜가 담겨 있어요. 이걸 전제하고 신화를 들여다보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죠. 예컨대 제우스가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자식을 통해 자기 권력을 확장하기 위함이었어요. 제우스가 결합을 시도하면 언제나 여자 쪽에서 다 거부를 하는데요. 그는 포기하지 않고 상대가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 변신해서 끊임없이 다가가죠. 결국 제우스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인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에도 질문을 던질 수 있어요. '당신은 자기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제우스만큼 적극적이었는가. 그만큼 자기를 낮출 수 있는가.' 이러한 지혜가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거죠.
갑자기 제우스가 다르게 보이네요(웃음).
저는 제우스 앞에서 항상 부끄러워요. 어떤 일을 할 때, 종종 자존심을 내세우며 주저 앉을 때가 많거든요.
언젠가 독자들이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 꼭 가보면 좋을 장소를 추천해 주세요.
어디로 가는 여정이든 한 번은 배를 타는 기회를 꼭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그리스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바다의 기운을 통해 해양문명을 이룬 그리스의 정수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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