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먹는 존재>의 작가 ‘들깨이빨’의 첫 에세이집 『나의 먹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꿔보’일 것이다. 의미가 아리송하면서도 귀여운 이 단어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준말.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꿔보라고 규정하며 “멋짐을 뽐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첫 번째 전략은 바로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하는 것. 음식을 주제로 이보다 더 웃긴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작가가 즐겨 먹는 12가지 식재료에 담긴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저절로 꿔보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
데뷔 후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하시는 거죠? 출판사의 요청인가요, 작가님의 용기인가요?
둘 다예요(웃음).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치열하고 어려운 작업이잖아요. 여기서 작가의 마지막 역할이 있다면 최전방에 나가 열심히 책을 홍보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제약이 생기더라고요. 또 마흔 살이 넘으니 귓가에 저승사자 숨결이 들리는 것 같아요(웃음). 주변에 여러 친구, 지인들이 아프고 불시에 세상을 떠나는 일들을 여러 차례 겪다 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동안 두려워했던 것들을 깨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책을 받아본 소감이 어때요?
머릿속에 있던 막연한 그림이 부피와 질감을 가진 물체로 탄생하는 감동은 만화 단행본과 비슷하지만, 에세이집이 훨씬 더 감격스러운 것 같아요. 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 선 채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었어요. ‘이게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을 만큼 몰입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퇴고를 많이 했는데도 여전히 고칠 게 보인다는 건 절망스러웠지만요(웃음).
꿔보라는 화자를 내세워 먹고 사는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드는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18쪽)”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꿔보(꿔다놓은 보릿자루)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떠올렸나요?
평생 함께한 자아였어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말 한 마디 못하고 돌아오는 답답한 날이 많았거든요. 이 성격을 타개해보려고 없는 사교력을 짜내서 활발한 연기를 하거나, 개그를 치려고 노력하다가 처참한 결과를 얻었죠(웃음). 그러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꿔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살았어요. 자연스럽게 그 자아가 글 속에서 ‘변사’ 혹은 ‘나레이터’의 역할을 하게된 것 같아요.
자신이 꿔보인지 알아보는 ‘꿔보 테스트’도 흥미로웠어요. 각 항목에 체크를 하다 보니, 꿔보가 되는 게 결코 쉽지 않더라고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꿔보의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요즘 유행하는 MBTI를 의식하고 만들었습니다(웃음). 아무래도 기본적인 욕구가 흐릿한 사람들이 꿔보에 적합하지 않을까 싶어요. 누가 뭘 강하게 하자고 해도 큰 불만 없이 따르는 사람이요. 그런데 꿔보가 쉽게 될 수 없는 이유는 욕구가 흐릿한 사람이라 해도, 그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도 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싶다’는 것도 욕구잖아요. 사실 저도 꿔보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작가님도 통과하지 못했다니, 반전인데요.
저도 언젠가는 남들이 나를 알아봐 줄 거라는 욕망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나와 인터뷰도 하는 거고요. 진정한 꿔보는 득도한 종교인쯤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얼굴 가득 평온함을 품고 계신 스님이나 수녀님들을 길가에서 보면 ‘저 분들이 꿔보가 아닐까’ 생각해요. 옷도 약간 보릿자루 느낌이 나고(웃음).
책을 읽으면서 어디까지가 픽션일지 궁금했어요. 매일 사람이 없는 무덤가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채식주의자인 짝사랑남에게 거절당한 후 그가 좋아하는 반려동물의 그로테스크한 간식(양 뇌, 오리 혀, 캥거루 꼬리 등)을 주문해 먹으려는 이야기 등을 읽으면서요. 만화적인 요소일 거라 생각했는데요.
다 사실입니다(웃음). 시간 순서나 이야기의 배치가 달라진 부분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은 다 제 경험이에요. 오히려 더한 내용도 많았는데 편집자님이 ‘이건 너무 심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삭제되기도 했죠. 허구의 내용을 넣어볼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왠지 양심에 찔리더라고요. 에세이니까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한 만큼 재미있고 통쾌하게 읽었어요. 그 간식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궁금해서 맛을 보긴 했는데 못 먹겠더라고요(웃음). 나머지는 동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열등감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웹툰 작가로 사는 열등감, 불안감에 대한 문장이 많았어요. 어떤 심리적 어려움을 겪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수입이 불안정하고, 심지어 점점 끊겨간다는 게 저를 옥죄는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그 와중에 주변의 동료들은 찬란하게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재능에 대한 회의가 들더라고요. 저는 원래 제 작업물에 대한 자신감이 적은 편이었는데, 이게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언젠가부터 내 작업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하지만 그걸 해결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실천하지는 않았어요. 대신 재능을 회의하기만 하는 아주 게으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소진시켰죠. 온종일 쓸모 없는 생각으로 정신력을 공회전시키다 보니 자존감이 점점 더 떨어졌어요. 제가 하는 일의 태생적인 조건 때문에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웹툰은 대중의 평가가 실시간으로 보이고, 그게 곧장 생계와 연결되는 일이죠.
그래서 일체의 반응을 보지 않았어요. 저처럼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작품에 대한 칭찬을 받아도 불안하거든요. ‘저 관심이 언제 외면과 무관심으로 변할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하니까요. 오로지 비난만 나에 대한 진실된 평가라고 느껴졌죠. 이걸 마음에 담아두면 너무 힘드니까 어떤 반응도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는데, 그렇게 하니 또 고립감이 심해지더라고요. 특히 저는 친한 작가 동료가 하나도 없었거든요. 작품에 대한 어떤 피드백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만화라는 노동집약적인 일을 계속 하니까 언젠가부터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일의 의미가 뭐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괴로웠어요.
책의 헤드 카피가 ‘만화가가 제안하는 열등감을 치료하는 기적의 밥상’이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견디는 방법을 찾으셨을지 궁금해요.
임시적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무인도로 들어가서 혼자 살지 않는 한, 열등감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죠. 대신 그 감정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찾은 방법은 내 직업과 다른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거예요. 대표적인 게 ‘농사’죠. 농사일을 할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들거든요. 또 몸은 고되고 힘들지만, 내가 움직인만큼 일의 성과가 그대로 보이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이 엄청나요. 며칠 전에도 농사 짓고 왔어요(웃음). 올해는 감자를 심었어요.
대부분 ‘식재료 헌터’로 살아요
작가님의 힐링푸드는 무엇인가요?
역시 빵만한 게 없죠. 저는 빵이야말로 인간 기술의 정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강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이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어떻게 하면 사람의 쾌락을 최대치로 만들까’만 생각해서 나온 맛인 것 같아요. 특히 디저트는 모양이 너무 아름답죠. 형편없이 망가질 게 예정된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정말 호화스럽게 느껴져요. 빵을 볼 때면 가끔 ‘사치품을 소비하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음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데요. 평소 음식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인가요?
밥 먹으면서 다음 끼니를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이에요(웃음). 폭식을 할 때는 다음 끼니를 기대했고, 절식을 할 때는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다음 끼니는 어떻게하면 적게 먹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죠. 음식에 대한 생각을 매일, 매 순간 하는 것 같아요.
트위터의 소개글도 ‘식재료헌터’예요.
저는 일하지 않는 시간의 대부분은 ‘식재료헌터’라는 정체성으로 사는 것 같아요(웃음). 아보카도 싸게 파는 곳 없는지 찾아다니고, 재래시장을 절대로 지나치지 못하죠. 도서관을 가는 길에 재래시장이나 농산물을 파는 마트가 보이면 반드시 그쪽으로 꺾어서 한참 구경을 해야 하고요. 동네에 새로운 중저가 마트가 생기면 얼른 달려가서 세일할 때 식재료를 잔뜩 사와요. 그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에요. 저는 먹는 얘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작가님께 음식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저에게 음식은 ‘쾌락, 형벌, 죄악’이에요. 음식은 가만히 앉아서 입에 넣었을 뿐인데 확실한 행복이 느껴지잖아요. 혼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요. 이만큼 편리한 쾌락은 없는 것 같아요. 반면 이게 무시무시한 형벌처럼 느껴질 때도 많아요. 맛있는 음식을 계속 먹으면 체중 증가나, 건강 악화 등의 대가가 반드시 따라오잖아요. 늘 노심초사하며 그 대가를 신경 써야 하는 게 굉장한 굴레죠.
또 결국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사실 다른 누군가를 죽여서 만든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는 거대한 죄악이라고도 할 수 있죠. 요즘 대체육이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고 대체 계란, 우유 등이 나온다는 소식도 들리는데요. ‘드디어 인류가 과학기술로 이 카르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에게 가장 유용한 식재료가 있다면요.
계란이요. 제일 싸고,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단백질이라서 좋아요. 고기를 조리하면 반드시 기름이나 핏물을 닦아야 하는 등 귀찮은 일거리가 생기는데, 계란은 삶아서 껍질만 까면 남김없이 먹을 수 있죠. 유제품 중에서는 치즈를 제일 좋아해요. 치즈는 한국인에게 제2의 김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식에 곁들이면 무엇이든 다 맛있어지잖아요. 지방 중에서는 견과류를 자주 먹는데, 집어먹기만 하면 된다는 미덕이 있죠. 특히 캐슈넛을 너무 좋아해서 만약 제가 나라를 만들면 법정 화폐는 무조건 캐슈넛으로 할 거예요(웃음). 물물교환을 할 때 사람들이 저에게 모두 캐슈넛을 줬으면 좋겠어요.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이 “이만하면 엄청 복 받은 인생이네요(215쪽)”였습니다. 글을 쓰면서 달라진 생각이 있을까요?
열등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글을 쓰다 보니 제가 열등감을 느낄 처지가 아니더라고요. 다음 끼니는 뭘 먹을까 고민하지, 굶주리는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는 기회도 있고요. 사실 글 쓰는 게 굉장히 고된 작업이었는데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싶어요.
*들개이빨 구석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펴낸 책으로 『먹는 존재』 시리즈와 『족하』, 『홍녀』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방황하다 어영부영 고시촌에 흘러들어 갔습니다. 큰 점수 차로 연거푸 시험에 낙방하고 고시촌을 떠나 방송국과 사교육 업계를 전전한 끝에 인터넷 폐인이 되었습니다. 블로그 및 익명게시판 곳곳에 뻘글과 낙서를 올리며 현실 도피를 하던 중 불현듯, 진지하게 만화를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언젠가는 정말로 진짜 멋진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어딘가의 구석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생각하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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