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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근하, 사랑하는 이모들과 보낸 파랑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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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하 작가의 ‘파랑’은 늘 특별했다. 한 가지 색깔로 오해될 수 있는 ‘정상성’ 바깥의 삶은 차갑지도 들끓지도 않은 사려 깊은 푸른색을 만나 생기를 띤다. 그의 첫 장편 만화 『사랑하는 이모들』 역시 파랑의 온도로 ‘정상가족’ 바깥의 이야기를 비춘다. 갑작스러운 상실을 겪은 중학생 효신과,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는 이모와 이모의 연인.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적정 온도의 사랑이 독자에게도 푸른빛으로 스며든다.



세상과 내가 연결되는 기분

‘끝까지 읽고 엉엉 울고 말았다’는 리뷰가 많았어요.

리뷰 하나하나 감사히 읽고 있어요. 다들 정상성 바깥에 놓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주시더라고요. ‘내 이야기가 잘 전해졌구나. 다 이뤘다.’고 생각했어요.

각자 인생에서 ‘이모’가 되어주었던 존재를 떠올리는 것 같아요. 

정작 저한테는 이모가 없어요.(웃음) 작품을 통해 새로운 이모를 만들어보고 싶었죠.

작가님의 만화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대상화가 없어요. 질끈 묶은 머리, 담담한 표정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라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한때 여성 서사라면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 인터넷상에 많이 떠돌았잖아요. 저 역시 ‘여성의 이야기는 이래야 해’ 하는 기준에 매몰된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기준을 의식하지 않고, 제 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대로 인물을 그려요.

만화는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나요?

어린 시절에 타인과 연결되는 유대감이 중요한 아이였어요. 그런데 항상 친구를 사귀려고 하면 대화에 실패하고 외로움을 느꼈죠. 그런 제게 만화는 새로운 연결을 경험하게 해주는 일이었어요.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종합 예술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사랑하는 이모들』은 오래 품어온 이야기라고 들었어요. 어떻게 시작됐나요?

김초엽 작가님의 『원통 안의 소녀』 삽화를 그릴 때, 편집자님으로부터 만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정상성 바깥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수도권에 살지 않거나 여성, 퀴어인 이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2019년 당시에 여성 서사가 이미 쏟아지고 있어서 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중학생 ‘효신’이를 떠올리게 됐죠.

중학생 효신이 갑작스러운 상실을 겪은 후, 이모와 이모의 동거인과 함께 살게 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예요. 첫 작품 <천사를 위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2017년에 발표한 <천사를 위한>은 소중한 가족을 하늘나라로 떠내 보낸 뒤, 남은 이들이 시골집에서 보내는 하루를 그린 만화인데요.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저 자신을 많이 투영한 인물이에요. 첫 만화를 그릴 때는 아빠에 대한 생각을 저 멀리 떠나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다 풀지 못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 마음이 『사랑하는 이모들』을 그리면서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아요. 효신이가 엄마랑 함께 산을 오르는 회상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장면을 그릴 때, 이제는 완전히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후련함을 느꼈죠.



‘서로’ 사랑하는 이모들의 이야기

효신과 이모의 동거인 ‘주영’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굉장히 섬세해요. 미묘한 관계의 변화나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요.

작가마다 자신이 잘하는 주제가 있잖아요. 저는 만화를 그릴 때, 친구와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저는 겉으로는 소박해 보이지만 관계의 미묘한 부분을 잘 그린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로맨스거나 로맨스는 아니지만 긴밀한 관계에 관심이 많고, 특히 서로를 싫어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서로의 균열을 맞춰가면서 싹트는 감정이 있잖아요. 그래서 효신과 주영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서서히 가까워지는 장면을 그릴 때 즐거웠어요.

효신을 만나자마자 이모가 끌어안아 주는 장면이 나올 법한데 그런 과잉이 없더라고요.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 태도로 보였어요. 

진희는 효신이가 담담해지기를 기다리는 이모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주영도 먼저 나서지 않고 효신을 기다려주는 인물이죠. 섣불리 개입을 안 하는 느낌은, 제가 캐릭터에 보인 태도이기도 해요. 소수자성을 지닌 인물을 그릴 때, 창작자는 정말 많은 고민을 하거든요. 그 지점을 굉장히 조심했기 때문에, 저도 효신과 이모들이 서로를 조심스러워하는 것처럼 인물을 그리지 않았나 싶어요.

평소처럼 빵을 먹다가 주영이 효신에게 이모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죠. 그 사실을 들은 효신이의 반응을 어떻게 그릴지 고민하기도 했나요?

처음에는 효신이를 굉장히 퀴어 프렌들리한 친구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실제 중학생이 이모의 관계를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당황하는 게 더 흔한 반응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사실 효신이는 이모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민의 입장이기도 해요. 처음에는 이모들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마음을 여는 효신처럼, 독자분들도 그런 변화를 경험했으면 했어요. 퀴어의 관계성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예요.

효신이 정상가족의 틀에서 일상적인 배제를 느끼는 순간이 그려져요. 부모님의 전기를 쓰라는 방학 숙제를 받고, 제사에서는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하죠. 

실제로 제가 중학생 때, 똑같은 방학 숙제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럼 부모님이 없는 친구들은 숙제를 어떻게 하지.’ 걱정했거든요. 그 기억이 만화를 그릴 때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효신이라면 돌아가신 엄마에 대해 쓸 것 같다고 생각했죠. 제사 장면은 경상도에서 자란 딸로서 제가 보고 느낀 모습을 넣은 거예요. 처음에는 대놓고 차별적인 대사를 넣었는데, 편집자님과 상의 끝에 톤을 좀 낮췄죠. 그 편이 독자에게 잘 다가갈 것 같아서요.

효신의 관점에 이입해서인지 두 이모의 동거 생활이 좋아 보이기도 했어요. 서로 규칙을 정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니까요. 

이전 작품 『지역의 사생활99 대구광역시 : 달구벌 방랑』은 두 친구가 동거하면서 겪는 갈등을 보여주니까 그에 비하면 진희와 주영의 생활이 안정됐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이런 감정도 들어요. 여자 둘이 이루는 가정은 굉장히 이상적이고 안전할 것 같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도 있고,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똑같이 충돌의 연속이거든요. 이상적인 면을 부각하기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싸우고 헤어지는 관계도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효신과 두 이모의 생활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혹시 다른 결말도 떠올리셨나요?

처음부터 이 이야기는 효신이 이모들과 지내다가 떠나는 이야기로 하자고 정해 뒀어요. 심지어 이모와 효진이가 영영 연락을 못하게 되는 결말도 떠올렸죠. 내가 나로서 살려면 결국 떠나야 한다는 걸 깊이 느낀 것 같아요. 떠난다고 해도 마음에는 함께한 기억이 남잖아요. 엄마 무덤 앞에서 “이제 우리 둘뿐이다”라고 아빠가 말하자, 효진이가 “아니, 이모들도 있어”라고 답하는 것처럼요.



지역에서 창작한다는 것

작가님의 작품은 한 편의 소설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평소에 어떤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나요?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계기는 황정은 작가님의 「상류엔 맹금류」였어요.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 황정은 작가님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 ‘나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됐죠. 최근에는 박상영 작가님의 『1차원이 되고 싶어』, 시그리드 누네즈의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그래픽노블 『셀린 & 엘라』를 인상 깊게 읽었어요.

작가님은 대구에 대한 만화 『지역의 사생활99 대구광역시 : 달구벌 방랑』을 그렸고, 지역 창작자로서 칼럼을 쓰고 있어요. 작품에도 지역을 살아가는 일상적인 청년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는 늘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자연스럽게 작업할 때도 지역성을 고려하게 돼요. 물론 지방에 과제가 굉장히 많은 건 사실이지만,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사람들은 항상 있거든요. 대구에 여성 창작자 모임 ‘어나더스’가 있는데 문화 기획자 세 분이 책방을 하나씩 맡고 매년 페미니즘 행사를 열어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묵묵히 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저 역시 만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이모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창작자이자 독자로서 앞으로 기다리는 이야기가 있나요?

창작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펼쳤으면 좋겠어요. 여성이 100명이면 100개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에 동의하거든요. 여성 창작자분들을 만나면 다들 고민이 너무 많거든요. 내가 그리는 이야기가 올바른 여성 서사가 맞냐는 자기 검열도 있고, 상업적인 기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 조건 속에서도 다들 자신만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근하(글·그림)
  
서양화를 공부하고, 다양한 출판물에 만화와 삽화 작업을 하고 있다. 『천사를 위한』을 시작으로 『봄이 오고 있어』, 『youyouyou』, 『언니에게』 등을 냈다. 『사랑하는 이모들』은 첫 장편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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