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동네 형' 허지웅이 오랜만에 신작을 펴냈다. 지난 8월 출간된 산문집 『최소한의 이웃』. 전작 『살고 싶다는 농담』이 2020년 8월에 나왔으니 꼭 2년 만이다. 허지웅은 2년 전부터 SBS 라디오 <허지웅쇼>를 진행하며 1천 편에 다다르는 오프닝을 썼다. 작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 라디오 원고를 쓰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할 때부터 쓴 원고들을 살펴보니 모든 이야기에 이웃이 등장했다. '모든 개인사는 타인의 삶과 맞닿아 있다(6쪽)'는 사실은 코로나19 이후 극명하게 드러났고 허지웅은 생각했다. '우리는 이웃과 화해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이웃』은 허지웅이 2년간 쓴 라디오 오프닝 원고를 다듬고 보태어 엮은 책이다. 애정, 상식, 공존, 반추, 성찰, 사유라는 여섯 주제 안에 타인에게 말 걸기를 시도했다. 각 장의 제목은 있지만 글의 제목은 없다. 독자의 몫이 큰 책으로 읽혔다.
"세상 사람들이 전과 달리 악해졌다는 푸념을 들을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람의 악하고 선한 천성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웃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오로지 개인의 성향에만 달려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146쪽)
가장 기능적인 책
라디오 <허지웅쇼> 진행을 마치고 오시는 길이시죠. 시간대가 바뀌었는데, 낮 방송은 어떤가요?
사실 저는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러브FM을 매일 틀어놓는 청취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주파수를 쭉 들으셨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 매번 청취자를 새로 발굴해야 하는 애로 사항이 좀 있죠. 지금 저희 방송은 정오에 시작하는데, 예전에는 퇴근 시간에 방송했어요. 퇴근 시간대는 텐션을 좀 올려도 되는데, 너무 텐션을 올려버리면 또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요. 차 안에서 조금 잔잔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는 시끄럽게 들리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낮 방송은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해요. 잔잔하게 해도 되고 텐션을 좀 올려도 되고. 라디오는 참 재밌어요.
얼마 전 온라인으로 『최소한의 이웃』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쓴 책 중에 마감 기간이 가장 길었다고요.
이번만큼 원고를 많이 고친 책이 없었던 것 같아요. 기본 소스는 제가 쓴 라디오 오프닝이었는데, 시간이 좀 지난 원고도 있으니까요. 거의 다 새로 쓴 원고도 많아서 이런 마감을 또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을 많이 쓴 작업이었어요. 노력을 많이 했죠.
원고를 수정하는 일이 가장 곤혹스럽죠. 차라리 다시 쓰는 게 편할 만큼.
맞아요. 고치는 게 더 힘들어요.
300쪽으로 묶인 책이지만 한 편의 원고는 매우 짧아요. 호흡을 짧게 끊은 이유가 있나요?
『살고 싶다는 농담』을 쓰고 나서 제일 많이 생각한 게, 정말 사람들이 긴 글을 안 읽는다는 점이었어요. 그 글도 그렇게 긴 글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저널리즘 글쓰기로 훈련이 돼 있기 때문에 한 꼭지당 글자수 6천 자 이상은 잘 안 써요. 기사를 쓸 때 가장 적당한 분량이 4천 자에서 6천 자예요. 저도 거기에 딱 맞춰서 훈련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글자수가 2천 자만 넘어도 피곤해 하시더라고요. 글 자체를 안 읽는 시대이기도 하고 글을 읽어야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책을 펼친 분들조차도 소화하는 절대적인 물리량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원래 제가 쓰던 글의 분량보다 더 짧은 호흡 안에서 하나하나 다른 사유를 할 수 있는 책으로 꾸며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6부의 주제가 '사유 : 주저앉았을 때는 생각을 합니다'입니다.
어쩌면 '사유'라는 말 자체가 사라진 시대인 것 같기도 해요. 정말 수사로만 쓰일 뿐, 사고를 확장하고 어떤 생각을 같이 해보자는 의미의 '사유'는 거의 실종됐어요. 글도 마찬가지죠. 뭔가를 지시하거나 매뉴얼을 목적으로 쓴 도구로써의 글은 존재하는데, 사유하는 글들은 점점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이런 측면에서보면 『최소한의 이웃』은 제가 쓴 책 중에 가장 기능적인 책일 거예요.
각 글의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제목을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달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글의 호흡이 짧은데 제목까지 붙여 버리면, 독자의 호흡이 더 짧아지니까요. 온전히 하나의 글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드리고 싶었어요.
'이웃'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요즘 거의 안 쓰는 단어인데요.
거의 죽은 말이죠. '타인'이라는 말과 바꿔 써도 됐겠지만, 우리가 속한 우리나라 공동체 안의 타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웃'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그냥 '이웃'으로 제목을 할까도 염두에 뒀어요.
이웃이요?
결국,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이웃'이고, 모든 글에서 관통하고 있는 주제도 '이웃'이라서요. '이웃'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이 말을 쓰는 순간 뭔가 따분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잖아요. 마치 명절이나 성탄절에 이웃을 돌아보자고 이야기하는 뉴스 단신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개인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체감했어요. 내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어떤 무언가가 실제로는 내 삶에 굉장히 깊게 관여돼 있고, 연결되어 있는 정도를 넘어서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 중 저도 한 명이고요. 그래서 이 책을 썼어요. 글로 쭉 풀어보고 싶어서요.
일종의 불행 앞에서 무능할 것 같은 거예요
산문집도 여러 종류가 있죠. 고백적인 서사가 중심을 이루는 책도 있고, 또 독자에게 계속 말을 건네는 느낌의 책이 있어요. 이번 책은 후자의 느낌이 강했어요.
기자 일을 하기도 했고, 글을 쓸 때 항상 읽는 사람의 입장을 많이 생각해요. 『최소한의 이웃』은 목적성이 뚜렷한 글이에요. 생각해보자, 사유해보자고 말을 걸고 싶었어요. 요즘은 그냥 딱 결론만 제공하는 콘텐츠가 너무 많아요. 훨씬 편하고 간단하고 조회수도 많이 나오니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전략일 거예요.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한번도 어떤 깊은 고민을 해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항상 결론만을 외우며 살아갈 때, 과연 자기 회복이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일종의 불행 앞에서 너무 무능할 것 같은 거예요.
자판기에서 툭 나오는 심플한 해답을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유튜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시도일 수있고요. 하지만 우리의 삶은 한 가지 정답이 아니잖아요.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훈련이 무척 필요하고, 아이들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어른들이 노력해야 해요. 이건 어른의 몫이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공동체를 배웁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개인주의자가 돼요. 그러다 나이가 들고 중년이 되면 그때서야 다시 공동체를 생각하죠. 일종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 작가님 또래의 사람으로부터 공동체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요?
글쎄요.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제가 개인주의자여서 공동체주의자가 된 건지 아니면 시대마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문제인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개인주의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개인을 너무 인정을 안 해주니까. 지금도 우리 사회가 '개인'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가치를 온당하게 보장해준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공동체를 우선하는 마음이 상당히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방송인'이라는 타이틀로 불리실 때가 많아요. 허지웅의 글보다 말이 익숙한 독자들도 있을 거고요. 몇 권의 책을 낸 작가라면 내 글을 읽는 독자층을 이미 파악하고 있잖아요. 허지웅의 독자는 그간 변화가 있었을까요?
제가 아팠을 때 만났던 사람들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병실에서 만난 사람들은 글 자체를 읽지 않는 경우가 되게 많았어요. 너무 이해하는 게 아픈 기간 동안에는 웃음이 너무 중요한데 웃을 일이 전혀 없거든요. 그러니까 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거예요. 그분들께 『살고 싶다는 농담』을 선물해드리기도 하고, 예전에 썼던 글을 보여드리기도 했는데 대개 낯설어하셨어요.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이웃』을 쓸 때는 글을 자주 접하지 않는 분들, 혹은 글을 읽을 기회가 적은 분들을 고려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목적성이 중요한 글처럼 여겨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무척 중요했어요. 길고 어렵고 현란한 글은 일종의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전보다 더 가독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어요.
2018년 12월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 림프종을 진단받아 투병하셨어요. 전작 『살고 싶다는 농담』으로 투병 후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셨고요. 독자들의 큰 응원도 받은 동시에 고민 상담도 쏟아졌던 걸로 기억해요.
SNS 메시지나 메일로 자신의 상황을 알려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제가 눈썹이 하나도 없을 때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계속 답장만 썼던 날도 있었어요. 사연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세상은 양극단만 이야기해요.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네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되묻거나 "네가 잘못한 거 없어"라고 말해요. 이런 대답은 상대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대답이에요. 상대를 사람으로 여기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죠. 특정 세대, 또는 어떤 특정한 일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조언을 하고 싶다면 일단 그 상대를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답장을 쓰실 때 가장 자주 한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평정을 찾으시라고, 그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어요. 제가 아팠을 때 그게 가장 어렵고 중요했거든요. 사실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처음엔 정말 너무 어이가 없었거든요. 저는 죽을 고생을 해서 겨우 살아났는데 저한테 "죽고 싶다"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 할 이야기는 아닌데, 그분들에게는 너무 절실하고 중요한 고민이라 표현이 그렇게 나오는 거죠. 한창 아팠을 때, 저 역시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 의지가 없었고, 죽고 싶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순간을 통과하고 나아지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극복하려면 평정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더라고요. 일단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실제보다 더 불행하게 보지 말고, 또 실제보다 더 희망차게 볼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게 중요했어요. 이 능력이 저는 '평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이 평안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사람이 되게 드물어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서로에게 최소한의 이웃이 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평안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에도 '평안'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갔을 거예요.
심각한 질병을 앓는 사람이 주변에 있을 때,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작가님의 경우는 어땠나요?
제가 원래 개인주의 성향이 커서 그런지 아플 때도 치료 과정에서도 다 혼자 버텼거든요. 신세 지고는 못 살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데, 오히려 내가 이 세계와 아직 연결이 돼 있다는 감각이 제게 힘이 됐어요.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했고요. 사는 일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하루아침에.
투병 중에 있는 분들께 힘이 되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되게 어려운 이야기이긴 한데요. 살려고 하는 의지와 희망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려고 결정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내가 살려고 병원에 다니고 있지 않냐?"고 말하지만 실제로 스스로에게 낙관적이지 않은 분들이 대다수예요. 내가 진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병원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해요.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안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사실 저는 너무 이해해요. 계속 아프니까 못 믿어지는 거예요. 의사가 시킨 대로 했지만 병이 안 나으니까. 그래도 믿어야 해요. 이게 정규 과정이니까요. 의학을 믿지 않고 자꾸 유튜브나 대체 의학을 찾아보는 건 좋지 않아요.
최소한의 이웃, 결국 나를 생각하는 일
2009년에 첫 단행본을 썼고, 잡지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여러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셨어요. 방송 출연을 활발하게 하고 투병 이후에도 글을 쓰셨고요. 글 쓰는 사람으로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을까요?
글쓰기는 저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2005년부터 계속 글로 먹고 살았으니까요. 물론 중간에 방송에도 많이 나왔지만, 글과는 한 번도 멀어지지 않았어요. 글은 항상 쓴다고 생각하니까요. 여전히 저의 정체성에서 가장 큰 범주는 글 쓰는 사람이에요.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셨으니,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질문인데요. 때마다 사실 달라지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내가 정답을 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안 됐으면 좋겠어요. 만약, 제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면, 일단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상황일 거고, 그럼 평정도 없을 거고 분명히 사기를 치고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제가 정답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10년 넘게 고생했으니까요. 절대로 오만방자하게 내가 지혜를 알고 있고 '선(善)'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 제일 무서울 것 같아요.
식상한 질문이지만 묻고 싶네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스스로 좀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지금까지 별로 즐기면서 못 살아서요. 어렸을 때도 여행을 못 갔어요. 가봤자 출장으로 간 거였고요. 남들이 즐겁다고 말하는 것도 좀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청년들이 저처럼 안 살도록 힌트를 좀 주고 싶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상을 쫓으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무 안타까워요. 그걸 제가 물리적으로 못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게 맞는 길이 아니다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대안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제가 살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한 독자께서 허지웅 작가의 신작을 읽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고 리뷰를 남기셨어요. 저자로서의 소회, 또는 소망을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이 책을 쓸 때 가장 많이 생각한 게 있어요. '이웃에 대해 생각한다는 게 결국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과 같다.' 정말 이 생각 때문에 책을 썼거든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운명 공동체예요. 너무나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것과도 같아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실제로 목격했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눈으로 보면서도 더 싫어하게 됐잖아요. 나의 진짜 본심과는 달리 평정을 잃어서, 누군가를 너무 증오하게 된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내 본 모습을 찾는다면 제가 글을 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평정을 찾아서 스스로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이상한 사건사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 것 같아요.
후속작은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사유'를 깊게 파보는 책을 쓸 거예요. 그리고 책에 관한 책도 생각하고 있어요.
*허지웅 <필름2.0>과 <프리미어>, <GQ>에서 기자로 일했다.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 『나의 친애하는 적』, 소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60~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다룬 『망령의 기억』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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