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게, 마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보내진 발령지에서 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가 이승우는 말했다. 모두가 그렇게 왔다. 알지 못하는 곳으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그럼에도 누군가는 '외부인'이 된다. 이곳에 살던 사람이 아니면서 여기에 머무르고 있으니 당신은 외부인이라고, 타인에 의해 규정된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이국에서』의 황선호도 그 중 하나다.
그도 한때는 내부인이었다. 작지 않은 도시에서, 광역시장을 '보스'라 부르며 일했다. 그러다 재선이 다가왔고 시장의 뇌물 스캔들이 터졌다. 대책으로 떠오른 것은 '책임자의 완벽한 한시적 실종'. 황선호는 '책임자'가 되어 이국으로 떠난다. 완벽하게 숨어있기 좋은 곳 '보보민주공화국'으로. 보보를 선택할 때 황선호는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하늘은 투명하고 태양빛은 순수하다.'
오래 전에 읽은 보보 여행기의 한 구절이었다. 문장을 쓴 이는 여행 작가 김경호였고, 책의 편집자는 세상을 떠난 황선호의 어머니였다.
황선호는 '강진'이라는 이름으로 보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보 정부는 모든 외부인의 입국을 차단한다. 국내 거주 중인 외부인은 속히 떠나야 하고, 체류 허가증을 받은 외부인의 투숙만을 허가한다는 포고령을 내린 것. 체류 허가증을 받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황선호는 수많은 난민들을 목격한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도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도 없는 사람들.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그들 속에 황선호가 있다.
갈 곳 없는 황선호를 맞아준 유일한 사람은 '쟝'이었다. 그는 '머물 곳 없는 사람들이 임시로 같이 모여 사는' 천연 동굴로 황선호를 안내한다. 모두가 친구인 그곳에 머물면서 황선호는 이와 유사한 '친구들의 집'이 과거에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운명처럼, 김경호의 흔적과 마주한다.
외부인은 누구인가
<악스트Axt>에 연재됐던 소설입니다. 연재 기간이 10개월이었는데, 집필은 그 전부터 시작하셨을 것 같아요.
원고를 미리 많이 준비해놓고 쓰는 편인데, 이번 소설은 구상만 해놓은 상태에서 연재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연재하는 과정에서 (원고가) 계속 생겼죠.
작가의 말에서 '연재를 마친 후 소설을 고치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나로서는 드문 일이다'라고 하셨는데요.
고치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는데요.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에 쫓기면서 썼던 것도 있었고, 연재 끝나고 코로나 상황을 맞이했어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국경이 자연스럽게 닫혀버린 상황을 직면했고, 또 분위기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잖아요. 그런 기운 같은 것도 담아내야 하니까 개작할 때 공을 많이 들이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이 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다른 작업도 많이 했어요. 연구년 동안 엑상 프로방스에서 썼는데, 거기에서 일을 되게 많이 했거든요. 전작 『캉탕』이 500매 가까이 되는 분량인데, 그 소설도 『이국에서』를 연재하는 중에 썼어요.
두 편의 소설을 동시에 쓰시면서 고민은 없으셨나요?
『캉탕』도 외국의 한 지역, 더군다나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이야기거든요. 물론 두 작품에서 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는 다르지만, 배경도 비슷하고 극단적 상황에서의 실존적인 결단 같은 문제도 동시에 있기 때문에, 작품을 구별 짓는 과정에서 세밀한 공정이 필요했어요. 『캉탕』이 조금 더 인간 내면의 의식이 표출된 존재론적이고 사색적인 작품이라면, 이번 작품은 사건이나 서사,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인물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훨씬 더 강조해서 쓰려고 했어요. 그렇게 두 작품을 차별화했죠. 두 작품이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저는 "쌍생아 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생김새와 성격이 다른 쌍둥이다" 그렇게 비유를 하죠.
그 시기에 몰두하셨던 문제가 담긴 거겠죠?
물론 그때 제가 이국에 있었죠. 거기에서 오는 단절의 느낌이 있었어요. 일단 프랑스 말을 잘 못하는 상태였고, 문화도 다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없는 상태로 지내면서 내가 있는 현장에 이질감을 느꼈어요. 그게 일단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했을 거고요. 엑상 프로방스는 굉장히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캉탕이나 보보의 이미지가 스며들어 있기도 해요. 집필할 때의 그런 컨디션도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어냈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그런 걸 다루는 작품들을 즐겨 써온 것 같아요. 원치 않는 발령이나 출장으로 익숙한 자기 공간을 떠나서 낯선 곳에 처하게 됐을 때, 거기에서 타자들과 접촉하면서 겪어야 되는 실존적인 갈등이나 고뇌. (두 소설도) 그 연장선에 있는 거죠.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게, 마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보내진 발령지에서 사는 것과 같다는 생각. 유배지나 객지 같은. 그런 개념이 '이국'으로 발전했다고 생각됩니다.
『이국에서』의 황선호는 정치적인 사건에 얽혀서 떠나게 됩니다. 원하지 않지만 낯선 곳에 가게 되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설정이에요.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강요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유로운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황선호도 김경호도 자기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요된 추방 같은 거예요. 추방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지만, 이곳에 살지 못하고 떠나야 된다는 측면에서, 결국 내용은 추방이죠. 두 인물 모두 정치적인 맥락과 관련이 있는데요. 저는 정치, 구조, 권력 같은 것이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을 하면서 살지 못하는 하게 외부 환경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권력이 한쪽으로 집중하면서 생기는 정치나 구조가 하나의 틀이 되어서 그 안에 있는 개별적 존재인 인간을 소모시키고 희생하게 만드는데, 이번 작품은 그 부분을 조금 더 과하게 몰아본 거예요.
처음에 이 소설을 구상하실 때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하셨나요?
네, 처음에는 난민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관련 책도 많이 봤고, 여기에서 떠나간 사람이 난민들을 만나면서 겪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다큐멘터리처럼 난민들의 실상을 본격적으로 담으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제가 글 쓰는 스타일 때문인지, 한 인간의 족적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황선호, 김경호, 쟝과 같은 개인들의 삶과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 그들이 하는 선택에 더 초점을 맞춘 거죠. 난민 문제는 섣불리 다루면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보보민주공화국'에 간 황선호는 난민과 다름없는 처지가 됩니다. 난민들의 상황을 타인이 아닌 당사자의 시선으로 보고 느끼게 돼요.
사실상 난민이 된 거잖아요. 여기에서 떠났고, 돌아갈 수 없게 됐고, 나중에 보니까 버려진 존재가 됐고. 그리고 정착할 곳도 없는 거예요. 보보에서도 나는 외부인이고 원래 살던 곳에서는 이미 나를 잊어버렸고, 그런 점이 난민이랑 마찬가지인 거죠.
그러면서 황선호는 '외부인'이 되잖아요.
제가 '외부인'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사실은 외국인이라고 써야 되죠. 보보 공항에서 외국인을 (국외로) 보내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외국인이라는 건 국적의 문제인 거예요. 국적이라고 하는 내용이 있어서 그에 따라 외국인이 되거나 내국인이 되는 거죠. 유사한 단어로 이방인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방인은 언어나 문화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칭인 거죠. 특히 언어, 관습, 문화가 달라서 통하지 않는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 역시 나누는 틀이 있어요.
그런데 외부인이라는 건 내용이 없어요. 그냥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외부인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근거가 없고, 얼마든지 섬세하게 나눌 수 있는 개념이에요. 밖에 있는 건 모두 외부니까. 나의 밖에 있는 사람을 모두 외부인으로 볼 수도 있고, 내 방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외부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광범위하고 내용이 없는 채로 섬세하게 인간들 사이를 가르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흐름에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느낌이 있어서 외부인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쓴 것이고요.
반면에 '친구들의 집'은 외부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예요.
이 공간이나 저 공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 내지는 층위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친구들의 집'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층위에 있을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유령이 있다고 본다면, 나하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층위에 있는 거잖아요. 그런 존재는 이 땅의 어떤 조건들에 구애 받지 않죠. 그런 걸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현실의 삶을 살아내야 되는 존재이지만 항상 현실이 아닌 다른 차원을 염두에 두면서 사는 것, 또는 다른 차원을 향해서 환기창 같은 걸 내고 살면서 그쪽의 공기를 유입시키면서 사는 것, 나의 내부에 그런 영역을 만드는 것. 어떤 초월적 정신 같은 거죠. 우리가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게 중요하고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야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대, 혐오의 시대, 모든 사람을 외부인으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낼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는 거죠.
손님처럼 살 수 없다
동굴 공동체의 사람들은 보보를 '거쳐 가는 곳'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다 쟝의 제안으로 태도를 바꾸죠. '정착지'로 생각하며 살기로 해요.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은 불가피한 선택인 거예요. (보보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고 있고, 또 여기에서 나갈 수도 없죠. 그래도 (지금까지는) 언젠가 나갈 걸 기다리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현실적으로 인정하게 된 거죠. 나갈 곳이 없고 여기에서 살아야 된다는 걸. 그렇다면 '여기는 지나가는 곳이다'라고 생각할 때와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잖아요. 내가 여행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하고 여기가 내 주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는 다를 거란 말이죠. 그냥 지나가면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 공간이나 도시에 대해서 아무런 기대도 없는 거예요. 이곳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되죠.
삶에 대한 비유 같아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도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아까 제가 얘기한 것처럼, 저는 인간이 유배지나 발령된 곳에 던져진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런 존재로서 허둥지둥하면서 살아내야 되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거기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거나 태만하게 살아야 되는 게 아니고, 유배지나 낯선 발령지처럼 느끼더라도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님처럼 살 수 없다. 통과하는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최선의 삶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친구들의 집'이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내부에 그런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사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황선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죠. "네가 원하는 일인지 생각해라. 너를 위한 일인지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이 말의 의미가 더 또렷해졌습니다.
네가 원하는 일과 너를 위한 일이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거죠. 남을 위한 일을 하는데 내가 원하는 일일 수도 있어요. 반대로 나를 위한 일인데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고요. 처음에 황선호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내가 보스를 따라가는 게 보스를 위한 일이지만 그건 상관없구나,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보보에서 깨닫게 된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일을 한 게 아니었구나,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았을 뿐 나는 없었구나. 그걸 깨닫고 (소설의 끝에서)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죠. 위하는 일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일 거고, 원한다고 하는 것은 내 존재 자체를 바로 세우는 일과 관련돼 있다고 생각해요. 나의 내면이 정말 원하는 일.
작가의 말에서 자전거 여행가 임송학 님께 감사를 표하셨어요. "내가 1년간 머물고 있던 엑상 프로방스에 들러 세계를 떠돌며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었다"고 하셨죠. 김경호도 자전거 여행자인데, 이 인물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받으셨나요?
그 분을 만나기 전에는 김경호가 자전거 타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여행 작가였어요. 그런데 그 분이 너무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당시에 그 분이 4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떠돌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다니다 보면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어울려 다니고,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자연주의자들의 개더링에 가서 머물다가 오기도 한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경호를 자전거 여행자로 만들었던 거고요. 자전거 여행을 한다고 설정하니까 이미지도 훨씬 더 선명해지고 괜찮더라고요. 그러면서 소설에 자전거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왔고, 영화 <E.T.>에서 봤던 자전거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장면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고 그 이야기를 넣었죠. 그런 식으로 서사가 맞춰졌어요.
김경호에게는 벗어나기 힘든, 그렇기에 너무나 벗어나기를 갈구하는, 과거가 있잖아요. 그래서 떠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친구들의 집’은 이상적인 공동체인데, 그래서 김경호가 정주할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요.
김경호는 어딘가에 정착할 생각을 안 하고 떠돌아다니기만 했죠. 어디도 자기 집이 아니라는 생각에, 머물 곳이 없으니까 떠돌아다닌 거겠죠. 이 땅이냐 저 땅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차원이 달라져야 하는 거죠. 그게 상징적으로 시각화된 공간이 '친구들의 집'이었고 그래서 거기에 자기 삶을 의탁해요. 그런데 현실이라는 건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였죠. 김경호는 가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려서 한국을 떠났는데, 그곳에서는 거꾸로 희생당하는 사람이 되잖아요.
쟝은 성인 같기도 하고 선지자 같기도 한 인물이에요.
사실은 쟝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그림자죠. 스승이 '형제'라는 단어도 서열과 위계가 있는 단어라는 말을 하잖아요.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 이 공동체(친구의 집)의 정신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거예요. 남녀노소도 없고, 인종도 종교도 다 어우러지는 거죠. 쟝은 스승의 정신이나 삶의 태도를 충실하게 이어받아서 살고 있었어요. 그러다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일종의 선의의 공동체를 만들게 돼요. 자비와 호의, 무조건적인 베풂, 그런 것들이 구체적인 삶의 태도로 나타나는 거죠. 그 공동체에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쟝은 현지인으로 베푸는 자의 입장으로 거기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지도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그게 종교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고요.
제가 방금 한 말을 쟝이 들으면 싫어할 것 같아요.(웃음) "리더는 없어요. 우리는 다 친구예요. 나도 그냥 친구라고 불러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죠, 쟝은 싫어하죠.(웃음)
되풀이 돼 왔고 되풀이 될 수 있다
쟝이 황선호에게 '어릴 때 자기 마을에 있었던 공동 우물'에 대해 들려주는데요. 굉장히 인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 우물 앞에 세운 비에 쓰여 있는 문장이 있잖아요. '어리석음과 비극의 되풀이를 막기 위해' 그런데 역설적으로 되풀이 된다는 거죠. 계속 (그런 일이) 되풀이 돼 왔고 되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드러내는 부분이에요.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적인 대처가 얼마나 뿌리 깊은가. 이 소설의 다양한 이야기를 압축하면 그 우물 이야기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쟝은 어릴 때의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통해 다시 떠올리게 되잖아요. 그 기억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결단하는 데 영향을 미치죠. 우리가 과거에 겪어냈던 어떤 시간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쳐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쟝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게 된 거죠.
황선호는 호텔에서 '류'를 만납니다. 추리 소설 애독자이자 작가 지망생으로 호텔에서 근무하는 직원인데요. 류는 황선호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의 집' 이야기를 써서 첫 책을 출간합니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일, 그것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하게 해요.
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썼는데, 그 호기심이 처음에는 문학적인 것이었어요. 계속 추적하고 집요하게 모든 곳에 따라다니고, 그러면서 첫 소설을 쓰게 되는데요. "사실 이건 내가 상상한 게 아니고 있었던 일을 쓴 거다"라고 말해요. 처음의 소설적인 호기심이 나중에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궁금증, 진실을 드러내려는 욕구로 발전해간 것으로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류의 작업도 그렇지만 황선호도 기록을 하는 사람이고, 여행 작가 김경호도 계속 기록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김경호는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해서 알리려고 하다가 차단당했어요. 기록을 통해서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이나 그런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힘, 그럼에도 류처럼 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알리는 시도들은 의미 있다고 봐요.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옛날에 이 지역에 그런 형벌이 있었다. 기억하지 말 것.' 가슴 아프게 읽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떠오르더라고요.
고대에 그런 형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어요. 그리고 '이건 누가 벌을 받는 걸까' 생각했죠. 기억하지 말라고 하면 잊혀야 되는 사람에 대한 형벌이잖아요. 근데 그걸 시행해야 되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들이에요. 기억을 하면 벌을 받는 거예요. 그 벌을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까, 어떻게 이런 형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어요? 이를테면 월북 작가들도 이름이 언급되지 못하다가 나중에 해금된 경우가 많잖아요. 억압된 정권에서는 민주 열사들의 이름이 그랬죠. 과거사진상위원회 같은 곳을 통해서 최근에 다시 밝혀지는 것들을 보면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수장돼 있어요? 기억하면 안 된다는 것이 지배와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된 건가 싶고, 그런 생각을 하면 아찔하죠.
그렇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러시아나 중국에서 간혹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은폐되거나 감춰지는 정보들이 있잖아요. 결국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은 전체주의적인 통치와 연관된다고 봐요. 인간을 억압하는 체계죠.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고 있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늘 다른 차원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한테는 약간 종교적인 색깔을 띤 초월성인데요. 메시지는 말씀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게 위에서 오거나 아주 깊은 데서 오는 거죠. 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심연에서 올라오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 같은 거예요. 그런 상징이라고 하는 것에 기대면 우리가 이 현실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다고,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승우 1959년 전남 장흥군 관산읍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신학대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중퇴하였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1991년 『세상 밖으로』로 제15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1993년『생의 이면』으로 제1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고, 2002년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로 제15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여 형이상학적 탐구의 길을 걸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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