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케이팝’이 눈에 띄게 성장한 한해였습니다. 국내를 넘어 해외 팬까지 사로잡으며, 아이돌 산업은 매번 신기록을 경신하는 중입니다. BTS는 10년간 ‘빌보드 핫 100 1위’에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린 아티스트가 됐고, 블랙핑크는 북미 최대 음악 축제 ‘코첼라’의 헤드라이너 공연을 했죠.
그렇다면, 팬의 시점으로 본 케이팝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이돌을 향한 팬의 마음을 이희주 소설가와 최이삭 팬 칼럼니스트에게 물었습니다.
이희주 소설가는 『환상통』, 『성소년』 등 아이돌 팬의 사랑을 소설로 써왔습니다. 특히 데뷔작 『환상통』은 여전히 아이돌 팬들이 ‘최애’를 향한 마음을 표현할 때 인용하는 소설입니다. 주인공 만옥이 아이돌 민규를 볼 때마다 내뱉는 말 “씨발, 죽어도 좋아”는 아이돌을 덕질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명대사죠.
최이삭 칼럼니스트는 팬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팬 칼럼니스트’입니다. ‘인생을 아이돌로 배웠다’고 말하는 그는 <롤링스톤코리아>에서 BTS의 매력을 가장 잘 표현한 칼럼을 썼습니다. 동시에 <K팝 여성 팬의 낮은 인권은 돈이 된다>, <지속불가능 K팝> 등을 통해, 팬들의 인권을 배제하는 케이팝 산업의 이면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아이돌 덕질의 역사를 들려주세요.
최이삭: 시작은 H.O.T였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H.O.T가 데뷔했는데, 가장 지배적인 또래문화가 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였어요.
이희주: 저도 기억나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가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에 놀러 가면 언니 방에 H.O.T 포스터가 마치 서낭당처럼 사방에 붙어있는 거예요. 유년기에 강렬하게 남은 이미지 중 하나예요.
최이삭: 그 뒤에 신화도 좋아했고, 중학생 때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고 일본 문화가 개방되면서 쟈니스 주니어, X-JAPAN 같은 가수도 좋아했어요. 그러다 예비 고3 때, 동방신기가 데뷔를 한 거예요. 친구가 동방신기에게 빠졌다고 해서 이제 고3인데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하다가, 어느 날 CD플레이어로 ‘HUG’를 듣게 됐는데..
이희주: 쿵쿵 쿵쿵(웃음)
최이삭: ‘HUG’가 심장 박동 소리로 시작하거든요. 그때 제 심장도 같이 뛰었어요. (웃음) 당시 동방신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동방신기는 모든 멤버가 노래, 춤 기량이 높았고, 일본 활동을 하면서 더 멀리 뻗어나갔잖아요. 당시만 해도 케이팝 산업의 규모가 작아서 음반 내고, 1년에 DVD 하나 정도 내고 콘서트 한번 하고 그러던 때예요. 공연 문화도 자리 잡지 않았고, 콘서트에 투자를 많이 할 수 없어서 한국에서는 좋은 환경에서 공연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대학생 때 동방신기 일본 콘서트에 가는 게 엄청난 꿈이었어요. 제가 예전에 빅이슈코리아에 <이제 신용카드가 있는데 동방신기가 없네>라는 글을 쓰기도 했거든요. (웃음) 학생 때는 돈이 없어서 콘서트를 못 가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신용카드를 만들었을 때 동방신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희주: 너무 공감돼요. (웃음) 저도 대학 가면 동방신기 일본 콘서트를 꼭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네, 그들은 떠났습니다.
최이삭: 言葉はいらない(코토바와 이라나이)라는 명곡이 있는데 아시나요?
이희주: 아, 있죠! (웃음) 저는 明日はくるから(아스와 쿠루카라)를 좋아했어요.
(두 작가가 노래를 한 소절씩 부른다)
최이삭: 동방신기 이후에 다시는 아이돌 덕질을 안할 줄 알았어요. 그러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고 있어요.
정말 유년기에 큰 영향을 미쳤네요.
이희주: 제가 청소년이었던 2000년대 중후반의 아이돌 문화는 이삭 님의 청소년기 때만큼 지배적인 또래문화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방신기의 팬클럽 ‘카시오페아’의 회원 수가 80만 명을 기록해서 화제가 되었었는데요,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동방신기를 ‘오타쿠’처럼 깊게 좋아하는 친구들은 전교에서 10명 안팎이었어요. 그 대신 삼촌 팬이나 이모 팬의 개념이 부상하는 등, 케이팝이 10대만의 서브컬쳐가 아닌 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문화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지요. 조금 딴 얘기지만 저는 이삭 님께서 예비 고3 때 동방신기가 데뷔했다는 말씀을 듣고 나이를 바로 알았어요. 86년생. 시아준수와 동갑이십니다. (웃음)
최이삭: 맞아요. 나이를 들으면 ‘RM이랑 동갑’ 이런 식으로 연상이 돼요.
이희주: 저는 백현과 동갑입니다. 92년생의 자랑 백현! (웃음) 기본적으로는 저도 이삭 님과 덕질의 궤도는 흡사합니다. 제가 5살 때 벽에 크레파스로 ‘강타 사랑해’를 쓰면서 한글을 깨쳤거든요.
최이삭: 영재네요. 선행학습을 하셨군요.
이희주: 시작은 H.O.T.이었고, 그 뒤로 god나 세븐도 좋아했습니다. 주로 인기 많은 가수들을 좋아했고요, 초등학교 5학년 크리스마스 때 <보아&브리트니 스페셜>에서 HUG를 부르는 동방신기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바로 입덕한 건 아니었고, ‘The Way U Are’ 때 입덕을 했어요. 동방신기 오빠들이 망사를 입고 춤을 추는 노래였는데… 2차 성징기의 소녀에게 얼마나 고자극이었을까요. (웃음) 저는 아이돌이 등장하는 여러 소설을 썼지만, 이삭 님처럼 어느 한 그룹을 깊게 좋아하기 보다는 짧게 짧게 좋아하는 편이에요.
아이돌 덕질의 경험은 두 분 글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이삭 칼럼니스트님은 케이팝 비평으로, 이희주 작가님은 여전히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인용되는 『환상통』 등의 소설로요.
이희주: 사실 무언가를 알리고 싶다는 욕망에 아이돌 팬을 다룬 소설을 쓴 건 아니었어요. 『환상통』을 썼을 당시 정말 좋아하던 ‘최애’가 있어서, 사랑으로 소설을 쓴 거죠.
최이삭: 제가 예전에 국회와 여성단체에서 일했거든요. 그래서 우연히 <빅이슈 코리아>에 n번방 국회 청원에 관련된 글을 한 번 썼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편집장님과 식사를 한 번 했는데, 제가 하는 아이돌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나 봐요.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아이돌과 관련된 글을 2019년부터 쓰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덕질 경험을 재미있게 쓰는 정도였는데, 2017년에 방탄소년단이 빌보드뮤직어워드에서 상을 받고 그 이후 UN 연설도 하게 되면서 대중적인 관심이 폭발했어요. 기사는 쏟아지는데 방탄소년단의 여정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팬의 입장에서 납득할 수 있는 글은 적어서, 방탄소년단의 성공 요인과 멤버 개개인의 매력에 관한 연재를 하게 됐어요. 그걸 많이 읽어 주신 덕분에, 취미 생활로 시작했는데 좀 진지하게 쓰게 됐어요.
그러다 작년에 방탄소년단이 부산에서 세계 박람회 유치 기원 콘서트를 했는데, 방탄소년단의 공연 자체는 굉장히 훌륭했지만, 공연장 밖은 아수라장이었어요. 주최 측이 대규모 관객을 맞을 준비를 제대로 안 해서 안전 문제가 우려될 정도였어요. 이 잘못된 상황을 짚는 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매체를 찾아봤고, 한겨레21에 글을 쓰게 되었죠. (‘BTS 콘서트 인파도 감당 못 한 부산시, 박람회 유치 가능할까’, 한겨레21, 제1436호(2022.11.07))
그 글을 계기로 ‘팬 칼럼니스트’로서 케이팝 산업을 둘러싼 문제점을 팬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자각한 것 같아요. 경향신문에 <지속 불가능한 케이팝>, <케이팝 여성 팬의 낮은 인권은 돈이 된다> 등을 썼죠. 케이팝 문화는 팬의 경험을 통해 산업을 종합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돌 팬들이 글을 읽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는 반응이 돌아올 때는 기분이 어떠세요? 지금은 아이돌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희주 작가님의 『환상통』은 선구적인 작품이었잖아요. 최이삭 평론가님의 칼럼은 당사자인 RM이 리그램하기도 했고요.
이희주: 소설가의 역할은 작품을 내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안의 내용을 인용하고 즐기는 건 독자들의 몫이죠. 독자의 반응에 제가 한 마디를 보태는 건 월권이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의견을 제시하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작가의 권위가 작용해서 그 해석이 절대적인 것이 되잖아요. 그래서 많은 독자분들이 『환상통』을 마음껏 자기 멋대로 해석하시며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작가로써 제일 가는 영광이 아닐까요.
최이삭: 방탄소년단 글을 보고 팬분들이 “내가 쓴 줄 알았다”는 말을 많이 해주셨어요. 공감하면서 읽어주실 때 굉장히 감사하죠. 그리고 최근에 RM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제가 롤링스톤코리아에 쓴 ‘RM의 획’이라는 글을 올려줘서 ‘성덕’이 되었습니다. (웃음) 그런데 이게 저 혼자 기쁘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끝나기보다는, 요즘엔 뭔가 책임감을 느껴요. 저 혼자 기쁘고 끝나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죠.
두 분 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하십니다. 아이돌 덕질을 하면서 주어를 젊은 여성으로 두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도 궁금해요.
최이삭: 1세대 아이돌이 활동하던 당시, 아이돌 팬덤 문화를 주도한 10대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가시화되지 않은 집단 중 하나였어요. 계도해야 하는 미숙한 대상으로 취급됐죠. 아이돌의 음악도 음악도 댄스 가요의 하위장르로 낮은 취급 받았어요. 그런데 케이팝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아이돌 음악은 대중화되었지만, 팬의 지위가 높아지지는 않았어요. 1세대에서 4세대 아이돌로 넘어오는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 사회의 여성 차별 문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아이돌 팬 사인회 속옷 검사 사건, 엠카운트다운 인 프랑스 관객 과잉 진압 사건 등의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죠.
아이돌 여성 팬에 대한 혐오는 굉장히 복잡하고 방대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말해진 적 없는 것 같아요.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낼 구심점이나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희주: 구심점과 계기가 없었다는 말에 공감해요. 아이돌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발적으로 뭉쳐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쉽지 않죠. 개개인에만 기대할 수 없는 문제니까요.
최이삭: 맞아요. 그래도 시대가 진보하면서 사람들의 권리 의식이 높아졌어요. 가령, 아이돌 팬 사인회 속옷 검사 사건의 경우에는 그 아이돌이 신인이라 아직 팬덤이 크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논란의 불씨가 케이팝 팬덤 전체로 옮겨가 함께 타올랐죠. 케이팝 팬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정치적 발언권이 약한 젊은 여성이 다수지만, 계속해서 힘을 모아서 공론화하고 서로의 화력을 보태며 ‘계기와 구심’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돌 팬덤을 바라볼 때 팬과 아이돌의 관계를 유사 연애의 성격으로 생각하거나, 현실의 관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편견도 있는데, 이희주 작가님의 소설을 보면 아이돌 팬을 납작하게 대상화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보여주면서, 이들의 사랑을 조금 더 깊숙한 관계와 감정으로 다룬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희주: 특별히 아이돌 팬에 대해서 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소설가가 관심을 갖는 인간관계를 썼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저는 특히 마음의 공동에 대해 궁금해하는데요. 마음의 빈 부분에 다양한 입력값을 넣고 어떻게 출력되는지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써요.
아이돌을 향한 애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사실 제 개인의 경우엔,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유사 연애’를 엄청나게 했습니다. (웃음) ‘넌 내꺼’ 하지만 ‘가질 수 없는 너’ 같은 마음이죠. 『환상통』은 아이돌을 다룬 소설로 많이 사랑해 주시지만, 당시의 ‘최애’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쓴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돌 팬분들을 비롯한 아이돌 문화를 잘 모르는 독자분들도 많이 읽어주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근본적으로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최이삭: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사랑’의 가능성이 이성 간의 사랑에 국한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시에는 덕질도 ‘유사 연애’의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사랑의 방식과 대상이 다양하게 인정되고 이야기되고 있죠. 그래서 덕질도 최애에 대한 감정과 관계가 다양해졌어요. 예전에는 최애가 같으면 라이벌이었는데, 요즘엔 최애가 같으면 동지가 돼요. 같이 화력도 보태고 즐거움도 나누게 되니까요.
아이돌 덕질을 한다는 것은 집단적인 경험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른 팬들과 함께 함께 CD를 모으고, 콘서트에 가고, 사인회를 가기도 하잖아요.
이희주: 같이 노는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래 집단 안에서 아이돌을 좋아할 때는 실제로 그 아이돌이 좋은 것도 있지만, 같은 집단 안에 속하기 위해 열심히 좋아하는 척을 하기도 하거든요. 같이 생일 카페도 가고요. 그런 집단 문화의 맛이 있죠.
케이팝은 팬이 없이는 이어지지 못하는 산업이잖아요. 그럼에도 교묘한 지점이 있는 것 같거든요. 주체적인 소비자지만 그들이 폭력적으로 제압되는 경우가 있고, 소비 주체와 노동 주체 사이의 복잡한 관계성도 있고요. 누군가의 권리를 조금씩 건드리면서 유지되는 곳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최이삭: 케이팝 산업을 건강하게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뒷받침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케이팝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화려해졌지만, 그 장막을 조금만 걷어보면 썩어있는 지점도 많거든요. 근본적으로 독과점 시장이라 팬들이 문제를 제기해도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기도 해요. 이대로라면 이 산업이 지속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희주: 갑자기 폭발적으로 시장이 성장했다는 대목에 공감해요. 과거에는 아이돌 문화가 비교적 소수만이 좋아하는 문화에 가깝던 시절이 있었어요. 2009년에 동방신기가 Mirotic앨범으로 발매 100여 일 만에 50만 장을 팔았던 것이 뉴스에 나올 정도였죠. 그런데 요즘에는 신인 아이돌 가수의 데뷔 싱글 초동 판매량이 100만 장이 넘어요. 정점에 있던 동방신기가 음반 50만 장을 팔았다고 뉴스에 나오던 시대와 비교하면 시장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거죠.
문제는 산업의 규모에 비해 제도가 하나도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산업이 커졌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거죠. 만약 팬 사인회에서 아티스트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팬들이 카메라를 들고 오는 것을 막고 싶으면, 적합한 절차를 만들면 되죠. 그런데도 상식적으로 불쾌할 수 있을 몸수색을 강행하는 거예요.
한편으로, 잠깐의 만남을 위해 팬들은 많은 돈을 내는데, “나한테는 이거 안 해줘?”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 같아요. 모든 팬이 다 올바를 수는 없겠죠. 그걸 알고 리스크를 대비해야 하는 건 소속사예요. 그런데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값이 싸니까, 그 리스크를 팬들에게 전가하는 거고요.
최이삭: 소속사에서 팬들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무척 잘못됐죠.
이희주: 맞아요. 다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팬들이 약자성에 너무 매몰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폭력은 양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거든요. 이삭 님이 말씀하셨듯이 팬과 아이돌의 관계는 등가교환의 불가능성 안에 놓여 있는데, 그래서 폭력적인 순간이 발생할 수 있죠. 팬 사인회 가서 “왜 나만 손깍지 안 해줘”라고 아이돌 개인에게 무리한 감정 요구를 하게 될 수도 있고요. 일상에서는 길 가는 낯선 사람에게 1분 대화를 하고 싶으니 돈을 지불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아이돌의 세계에서는 그게 가능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아이돌 산업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면서, 제대로 된 체계 없이 급성장한 시장이에요. 『환상통』에 팬 사인회 당첨을 위해 음반 40장을 샀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소설을 쓸 당시만 해도 40장 정도면 됐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100장은 사야 한다고 해요.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두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고민이 필요하죠.
아이돌의 앨범을 여러 장 사는 행위가 팬들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최이삭: 저도 앨범을 정말 많이 사거든요. 한우 한번 사 먹었다고 치고 이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초동 경쟁이 과열되면서 모든 팬덤이 지나치게 많은 앨범을 사고 있어요. 이 상황이 끝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제가 먼저 덜 살 생각은 없어요. 음반 판매량은 중요한 지표니까요. 딜레마죠. 부족하나마 해결책을 제도를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판매를 부추기는 요인 중 하나인 포토 카드는 게임으로 치면 확률형 아이템이거든요. 게임산업에서는 이걸 법적으로 규제할 근거가 만들어졌어요. 케이팝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몇 달 전 포토 카드를 끼워팔기 행위라고 보고 대형 기획사 현장 조사도 했고요. 그리고 음반 판매량을 출하량이 아닌, 실제 판매량만 홍보하도록 엄격한 지침을 적용하면 부풀려진 시장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희주: 앨범 구매가 아이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팬덤 안에서 인정욕구를 해소하려는 방법이기도 하거든요. SNS를 통해 팬들 간 교류가 일어나면, 아무래도 분위기에 휩쓸리기 마련이니까요. 성취감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면, 앨범 구매는 의외로 값이 싸죠. 예를 들어 제가 트위터로 팬 활동을 활발히 했을 당시에 최애가 새 앨범을 냈어요. 만약 제가 팬덤 내부의 지인도 없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앨범을 많이 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새 앨범이 나오면 자연스레 ‘우리 딱 초동 얼마만 하자’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휩쓸려서 사게 되거든요. ‘네임드’로서의 나의 책임감도 있고, 그렇게 해서 초동이 목표치에 도달하면 성취감이 들기도 하고요.
최이삭: 승리의 대리 체험이라고 볼 수 있죠.
이희주: 맞아요. 요즘은 뭐든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사회인 데다 아이돌을 덕질하는 연령대의 여성들은 사회에서 성취를 해서 인정 욕구를 채우기가 정말 어렵기도 하잖아요. 팬 중에는 자식을 잘 키운 부모가 대리 성취감을 느끼듯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분도 있어요. 만약 정말 아이를 키워서 성공시키려면 학원도 보내줘야 하고, 이런저런 케어도 해줘야 하는데 얼마나 돈과 시간이 많이 들겠어요. 게다가 입력값에 비해 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그것보다 아이돌 앨범을 사서 최애를 일 등 시켜줌으로써 성취감을 얻는 건 값이 정말 싼 거죠.
최근 이희주 작가님 소설에 등장한 마유미 같은 버추얼 아이돌이나 웹소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처럼 활자 속의 아이돌까지 다양한 매체에서 팬들이 아이돌의 형태로 즐기는 콘텐츠가 많아졌어요.
최이삭: 버추얼 아이돌은 고유의 맥락과 유구한 역사를 가진 애니메이션, 게임 문화에서 창조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케이팝 장르의 하나인 것처럼 얘기되는 이유는 생일 카페, 슬로건 나눔, 포토 카드 인증 같은 케이팝 팬덤 문화를 향유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런 이벤트가 대중들 사이에 많이 퍼지면서 재미있는 놀이가 된 것 같아요.
이희주: 아이돌 문화 자체가 방대해져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국내에 ‘플래이브’라는 버추얼 아이돌 그룹이 나왔을 때, 한 기사가 “팬들도 안전한 사랑을 원한다”고 현상을 분석했어요. 하지만 저는 안전한 사랑을 원해서 버추얼 아이돌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면에 버추얼에 대한 끌림이 있으니까 좋아할 수 있는 거죠. (웃음) 본말이 전도된 거예요.
팬 칼럼니스트로서, 소설가로서 ‘아이돌 덕질’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최이삭: 언젠가부터 저에게 ‘대중음악 평론가’라는 수식이 붙더라고요. 그런 얘길 들으면 ‘내가?’ 허파가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케이팝 아이돌 음악은 조금 아는데 ‘대중음악’은 잘 모르니까요. 그래서 급하게 아는 척하기 위해,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매일 초조하게 헤매다가 어느 순간 내려놨어요.
제가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노래는 트와이스의 ‘Feel special’이에요. 2019년에 발매됐는데 아직도 들을 때마다 새로운 용기를 얻어요. 저는 자칭 팬 칼럼니스트로서, 이 노래가 아티스트와 팬에게 주는 울림과 의미에 집중하는 글 같은 걸 계속 쓰고 싶어요. 그리고 1세대 아이돌부터 현재까지 덕질하고 있는 이 판의 고인물로서, 나름의 책임감을 갖고 케이팝 산업의 화려함에 감춰진 이야기를 꺼내는 글도 열심히 써 나갈 예정입니다. 물론 대중음악도 열심히 공부할 겁니다. 대중음악 평론가라고 불러주는 분들이 계시니까요. 이게 저의 덕질 방법이에요.
이희주: 앞서 말한 ‘안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저는 소설가로서 아이돌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사랑에서 안전함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사랑은 뱃속에서 불쑥불쑥 토해지는 깨진 유리 같은 충동이라 나도 남도 다치게 하죠. 저도 동방신기를 좋아할 때, 오빠들의 모든 것이 궁금했어요. 제가 행동력이 없어서 그렇지, 행동력이 있었으면 일부 팬들처럼 오빠들을 따라다녔을 거예요.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하지만 친구도 없고 그 정도로 배짱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죠. (웃음)
어쩌면 생판 남인 사람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에 내재된 폭력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모든 팬들은 안전한 사랑을 원한다’고 표현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존재는 지워져요. 그리고 그건 저 자신을 지우는 행동이라고요 보고요. 이삭 님같은 평론가분들이 팬의 인권이나 사회적으로 개선이 필요한 부분 등 케이팝 산업 안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하신다면, 제가 소설가로서 궁금한 건, 말하자면 사생의 마음, 촬영금지 이벤트에 규칙을 어기면서 카메라를 숨겨서 들어가는 마음이에요. 선을 넘는 마음이랄까요. (제가 쓴 소설 『성소년』은 그런 폭력성에 좀 더 집중한 작품이에요.) 앞으로도 옹호하기 어려운 마음, 포섭되지 않는 마음, 제 안에 있는 숨기고 싶은 마음들에 대해 문학의 영역에서 탐구하고 싶어요.
*이희주 |
*최이삭 케이팝 팬 칼럼니스트. 인생을 아이돌로 배운 사람. '롤링스톤 코리아' 객원 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
같은 키워드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두 사람을 인터뷰합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두 가지 깊은 관점을 만나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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