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생각』은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이이화가 쓴 역사적인 첫 책이었다. 1980년에 출간되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허균의 혁명적인 정치사상이 신군부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균은 민중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누고, 억압적인 지배 계층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민중을 호민으로 정의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호민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그는 한 사회나 나라의 여러 모순과 부조리와 부패세력을 없애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를 ‘호민’이라 했다.
-『허균의 생각』p. 104~105
허균은 당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었다. 그는 당대 지식인을 지배했던 주자학에만 함몰되지 않았다. 특히 주자학을 거부했던 좌파 양명학자 이탁오를 조선 지식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허균의 생각』은 이러한 허균의 혁명적인 모습을 정치, 학문, 문학 등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허균이 품었던 생각을 알 수 있도록 원문을 풍부하게 수록했다.
허균이 쓴 글은 촌철살인
1980년 출간하고 초판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금서로 지정된 이유가 무엇이었나.
신군부가 들어선 뒤 <창작과 비평>, <월간 중앙> 등 정기 간행물을 폐간시켰다. <뿌리깊은나무>는 시사 잡지가 아니어서 폐간시킬 이유가 거의 없었는데, 폐간되었다. 연재 중이던 『허균의 생각』을 바꾸라고 지시했는데 바꿀 시간이 없고 해서 그냥 실었기 때문이다. 이게 종간호가 됐다. 그 뒤에 『허균의 생각』이 나왔고 한동안 잘 팔리다 뒤늦게 금서로 지정됐다. 몇 달 지나서 풀렸다. 허균의 호민론, 이런 부분이 신군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때 『허균의 생각』을 쓰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허균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는지.
역사 기록을 보니 허균은 역적, 나쁜 놈이고 그 당시에도 나쁜 이미지였다. 불쌍한 사람 도와주자, 양반사회 깨자, 신분 철폐하자, 이런 주장을 했으니까. 거기에 매료됐고 푹 빠졌다. 허균의 문집이 굉장히 어렵다. 왜 어려우냐 하면 허균의 독서량이 많으니까. 제자백가를 다 읽은 사람이다. 나도 그 속으로 들어가야지. 당시 유명한 한문학자를 다 찾아다녔다. 그분들도 처음 볼 때는 해석이 잘 안 된다. 그렇지만 달려들었다. 허균의 글은 짧은데도 핵심을 찌른다. 시대의 아픈 곳, 고쳐야 할 곳을 찔렀다. 놀랐다. 촌철살인이다.
1980년 초판과 비교하면 어떤 내용이 바뀌었나.
첫 책이 원고지 1,000매 정도였는데 글자가 작았다. 그런데도 한자가 하나도 안 들어갔다. 필요하면 들어가야 하는데도 말이다. 프랑스는 개정판을 3~4번 낸다고 한다. 초판과 마지막 판이 반 이상은 달라진다. 『허균의 생각』도 초판과 비교하면 반 이상 달라졌을 거다. 그만큼 많이 고쳤다. 허균에 관한 기본적인 관점을 고친 게 아니라 허균의 글을 많이 넣었다. 편집자의 요구이기도 했고. 이 책은 ‘이이화 저’이지만, 어떻게 보면 허균의 글을 번역해서 수록했다.
호민론 외에도 인상적인 부분이 학문이었다. 허균이 이탁오와 같은 문제적 사상가를 좋아했는데.
탁오의 본명이 이지다. 중국의 좌파 양명학파로 현실 개혁, 신분 평등 성향이 강하다. 주자학은 귀와 천, 상과 하가 원래 있다고 주장한 데 비해 세상을 뒤집어엎자는 쪽이었다. 이탁오가 좌파의 선봉이다. 이탁오도 감옥에서 죽었는데, 허균과 비슷하다.
허균, 전봉준 등 민중, 민족 지향적 인물을 좋아하는데, 이이화가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정신문화원에 있다가 전업작가가 된 뒤로 글을 많이 썼다. <월간중앙>, <창작과 비평> 지금은 안 친하지만 당시 <월간조선> 같은 지면에 실렸다. 독자들이 인물에 관심 많으니 인물을 썼는데, 독특한 사람을 개발해야겠다 싶더라. 내 취향이 이런 쪽이라 허균, 전봉준, 정여립, 홍경래 등을 재평가했다. 농담으로 이이화는 죽어서도 술 대접 잘 받을 거라고 하더라. 허균, 전봉준 이런 사람이 역적이었는데 좋게 써줘서. 그분들이 잘해 줄 거라고. (웃음)
허균은 조선이 땅이 좁아 인재가 드물다고 말했는데, 이런 의견에도 동의하나.
허균만이 아니라, 허균 이전에도 임백호가 조선이 좁은데 양반 상놈 따지지 말자고 했다. 허균이 땅이 좁다고 한 건 비하가 아니라 우리끼리 오손도손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한탄한 것이다. 허균은 중국을 자주 다녔다. 안목이 넓었다. 중국에는 중동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과도 대화했다. 게12장을 최초로 들여온 사람이기도 하다.
허균이 활동하던 시기와 지금의 한국도 많이 다르지 않은 듯하다.
시대의 모순은 언제나 있었다. 구한말 동학농민운동, 3.1운동, 해방공간, 4.19에 요동을 친다. 최근에는 6월 항쟁이 그랬다. 이런 시기에 단체도 많이 생기고 다 잘난 척을 하려 한다. 오늘날 보수진보 갈등이 엄청나다. 지금이 해방공간과 비슷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고. 오늘날 이상한 현상이 있다. 정치적 문제로 아버지와 아들이 갈등하는 거다. 사회적 갈등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척, 형제끼리 갈등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경상도 출신으로 전라도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경상도에 가면 나보고 전라도 사람이 되었다고 비난한다. 나는 그 사람들이 꼴통이라 말하고. 이런 갈등이 참 기가 막히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삶, 학문
역사학자 이이화의 원래 전공은 문학이었다. 서울에서 문학에 관심을 두고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이내 중퇴하고 한국학 및 한국사 탐구에 열중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연구했고 역사문제 연구소 소장, 계간 『역사비평』편집인, 서원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원래는 문학을 전공하려다 역사로 전향했다. 계기가 있었나.
고등학교를 고학했다. 여관에서 지냈는데, 오늘날 모텔을 생각하면 안 된다. 칸막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방에서 헐떡거리고 싸우는 소리 다 들린다. 집중할 수 없으니까 복잡한 수학 문제는 풀 수 없다. 대신 책을 읽었다. 시도 써놓고 수필도 썼다. 써 놓은 걸 학생 잡지에 보냈더니 실어 주더라. 잡독이자, 난독이었다. 여관에 있는 신문 쪼가리, 이상한 잡지, 인쇄물이라면 다 읽었다. 읽을 게 많지 않았으니. 문학으로 자연히 빠졌는데 그때 김동리도 만났다. 문학 평론도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쯤 되니, 식민지와 분단을 왜 겪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고민 끝에 문학보다는 역사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학교 안 보내고 한문만 가르친 게 쓸 데가 있더라. 원전 보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좀 나았다. 한국사는 영어보다도 한문 잘하는 사람이 유리하다. 난독, 잡독으로 빠진 덕에 쉽게 쓸 수 있는 능력을 자연스레 습득했다. 온갖 경험은 다 했다. 가끔 꿈에 배고프고 잘 데 없이 돌아다니는 장면이 보인다. 다 어린 시절 영향이다. 이런 경험도 내게 자산이 됐다.
수많은 책을 냈는데 몇 권 냈는지 기억하나?
정말 이 말 할 때마다 쩔쩔맨다. 공저가 있다. 글 한 편 썼는데 공저자다. 어린이 책도 기존에 쓴 책을 어린이에게 맞게 바꾼 거라 빼야 한다. 이런 걸 다 빼면 한 100권 정도 된다.
그중에 가장 아끼는 책은?
『허균의 생각』은 첫 번째 낸 책이다. 대표작은 21권짜리 『한국사 이야기』. 10권짜리 『인물로 읽는 한국사』. 제일 많이 팔린 건 『이이화 선생님이 들려주는 만화 한국사』다. 보통 만화 한국사는 이현세처럼 만화가가 대표 저자인데, 만화가가 아니면서 대표 저자로 내세우는 건 이이화의 만화 한국사밖에 없다. 나도 몰랐는데 누가 지적해주더라.
여전히 대한민국에는 민족이 필요해
민중, 민족을 강조하는데, 한때 민족을 해체해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유행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 박원순 서울 시장이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같이 일하자고 해서 세미나 팀 만들고 젊은 사람과 토론했다. 그때가 막 포스트모더니즘 시작할 때였다. 그 시기를 참 진지하게 보냈다. 연구소가 현대사, 근현대사 중심이어서 나도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고대사를 중요하게 생각 안 한다. 단군은 뜬 구름 잡는 소리 같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는 침략을 받고 분단이 됐다. 이럴 때 민족주의는 필요하다. 민족주의가 필요 없다는 건 진보적 사상일 수 있지만, 유럽 쪽 이야기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침략적 제국적 우월적 민족주의가 아니고 방어적 생존적 민족주의다. 특히 남북 분단 상황에서 무기는 한민족,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 물론 개혁은 해야겠지.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 하고.
여전히 강의도 많고, 집필도 많이 하시는데 이런 에너지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8년 전에 위암수술하고 더 좋아졌다. 원동력보다도 선천적인 것 같다. 아버지가 몸이 호리호리하고 날랬다. 산도 잘 타고. 축지법을 쓴다는 말까지 있었는데, 그건 거짓말이고. (웃음)
끝으로 독자에게 한 말씀.
허균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다. 차별 없는 세상,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인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다. 사상적으로 한 틀에 박힌 게 아니라. 넓게 봤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익한 부분이 많다.
허균의 생각이이화 저 | 교유서가
이 책은 허균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조일전쟁(임진왜란) 이후의 시대상황과 그의 집안내력을 살핀 다음 정치, 학문(종교), 문학의 세 갈래로 그의 삶을 재조명한다. 사대부의 자제로서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도 당대의 권위에 과감히 도전했던 그의 고발정신과 저항정신, 그리고 개혁의지와 냉철한 현실인식은 지금의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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