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두 분야가 만나 시너지를 내는 경우를 흔히 본다. 『명화남녀』가 그렇다. 어렵게 느껴지는 미술을 소재로 하면서도 단기간에 예술 분야 팟캐스트 1위를 한 데에는 영화와 시너지를 낸 덕분이다. 이혜정 저자에게 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미술을 쉽게 알릴 수 있을까였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영화와 명화를 함께 엮어보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영화는 미술보다는 대중에게 친숙한 소재니까.
그렇게 이혜정 저자와 한기일 저자는 서로 힘을 합쳤다. 한국의 웬디 수녀가 되는 게 목표인 이혜정은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대학에서 예술경영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유학시절 미술에 매료된 뒤 예술을 대중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한 한기일 저자 역시 PC통신 시절부터 여러 매체에 기고하면서 영화를 소개해 왔다. 여기서 보듯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전달’이다.
명작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명화남녀』는 영화 한 편과 예술가 한 명을 교차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샤갈과 <노팅힐>, 로트렉과 <물랑 루즈>, 쇠라와 <비포 선라이즈>를 포함하여 총 12편의 영화와 12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대화체로 구성된 문체는 독자에게 편안함을 주고 ‘영화관 옆 미술관’, ‘미술관 옆 영화관’에서는 작품 감상에 필요한 실질적인 팁을 제시했다.
미술 콘텐츠를 원하는 수요가 있었다
어떤 계기로 두 분은 함께 하셨나요.
이혜정 (이하 이) :어떻게 하면 미술을 거리감 없이 전달할까가 제 고민이었어요. 미술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좀더 친근한 매체를 이용해서 미술로 접근하면 사람들이 더 편하게 생각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죠. 특히 영화와 접목해보고 싶었어요. 미술작품에 영감을 받아서 만들어진 영화도 많고 실제로 명화가 영화 속 장면에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요. 제가 미술은 알지만 영화는 잘 몰라서 영화 쪽 전문가가 필요했어요. 영화에 박식하면서도 목소리가 좋은 사람을 추천 받았는데, 그게 기일 씨였죠.
한기일 (이하 한) : 그때 후보가 두 사람이었어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장철수 감독님이랑 저였는데, 그때 감독님은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촬영하는 중이어서 제가 ‘간택’됐죠. (웃음) 저는 영화를 전공했지만 그림을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이었거든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혜정씨의 기획이 참신하다 생각됐어요. 일단 제가 설득됐으니 다른 사람들도 동감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처음부터 확신을 했던 것은 아니에요. 6개월만 해보고 안 되면 관두자고 했는데, 책으로까지 나왔으니 제 예감도 틀리지 않았던 거죠.
팟캐스트 예술 분야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비결은 뭘까요.
이 :보통 예술 분야 팟캐스트는 알려진 사람이 진행하고, 분야도 문학이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일반인이 진행하고 카테고리도 시각예술이었는데 1위를 할 수 있었던 건, 첫째는 수요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수요를 충족시킬 적절한 콘텐츠가 없었지 않았나 싶어요. 미술에 관한 콘텐츠가 TV에도 거의 없고, 신문도 마찬가지죠. 단행본도 그리 많지 않고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대화 형식으로 진행한 컨셉트에 있었다고 봐요. 한 사람이 진행하게 되면 강의식이 되니 딱딱하고 기존 프로그램들과 비교해 신선하다는 느낌이 없었을 거예요. 남녀 두 사람이 대화하는 2인 체제가 전달하는 데 효율적이었던 것 같아요.
한 : 저희가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도 다른 팟캐스트 방송에 명화를 소개하려는 시도가 있긴 했지만 들어보니 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명화남녀』는 영화로 밥상을 차려주고 미술을 떠먹여주는 구조다 보니 청취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어요.
『명화남녀』를 팟캐스트로 들었지만, 책으로 다시 읽은 독자도 많다고 들었어요. 어떤 반응이었나요?
한 : 오디오 방송의 특성상 시각적인 부분을 함께 커버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책으로 나오니까 청취자 분들이 쉽게 텍스트와 이미지를 함께 만날 수 있어서 편안하다는 반응을 보여주셨어요. 또한 방송에서 들을 수 없던 내용까지 추가되면서 유익함이 배가 되었다는 반응을 많이 보내주셔서 감사했어요.
이 : 기일 씨가 말한 것처럼 방송을 할 때 어려운 점은 말로써 이미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거예요. 가능하면 그림을 자세히 묘사하려고 애썼죠. 저희가 따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자료들을 올려놓긴 하지만 팟캐스트의 특성상 청취자 분들이 이동하면서 듣는 경우가 많아 그림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죠. 책으로 나오면서 내용과 그림을 바로 매칭시켜 읽다 보니 분명히 들은 방송이었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고도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팟캐스트는 아이폰 유저가 아니면 접근성이 어려운데 책으로 나와서 주변에 선물도 많이 하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작품 선정의 기준, 대중성과 예술성
다양한 영화와 명화를 소개해주셨는데요. 독자로 느끼기에는 사랑을 다룬 작품이 많았습니다. 작품 선정에는 어떤 요소를 고려하셨나요.
한 : 영화는 연출을 많이 봤어요. 감독의 연출이 가장 중요하죠. 감독의 연출에 따라서 같은 이야기라도 다르게 흘러갈 수 있으니까요. 사랑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건, 아무래도 진행자가 남녀다 보니 주고 받을 수 있는 확실한 주제거든요. 약간의 의견 차이도 보여줄 수 있으니 독자도 재밌어할 수 있죠.
이 : 사랑 이야기를 많이 다뤄야겠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에요. 영화는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성까지 함께 갖춘 작품을 고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신작도 있지만 지난 영화 중에서 현재까지도 계속 회자되며 생명력 있는 작품들이 주로 선택됐고요. 이런 익숙한 영화들을 미술이란 렌즈를 통해 새롭게 볼 수 있었던 것도 저희 프로그램의 장점인 것 같아요.
저는 베이컨이라는 화가를 몰랐는데, 매력이 있더군요. 책에 소개한 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나 예술가를 꼽아 주신다면.
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쉽지 않네요. 책 속에 소개된 작가들 중 한 명만 고르라면 저도 <배트맨 x 베이컨> 편에 등장한 20세기 최고의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에요. 가장 보람 있을 때가 지금 같은 상황이에요. 베이컨은 유명한 화가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을 텐데 『명화남녀』를 통해 인상적인 화가를 알게 되었다고 많이들 얘기해주셨어요. 기존의 미적 기준으로는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그림에다 파격적인 러브스토리를 가진 화가의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주셔서 저도 놀랐어요. 몰랐을 때는 그냥 지나치거나 아니면 불쾌하다고까지 느꼈겠지만, 앞으로 베이컨의 그림을 만나게 된다면 한동안 그 앞에 서 있게 되실 테죠.
한 :다 좋아하는 영화들인데요. 책에 있는 작품 가운데서는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 루즈>가 먼저 떠오르네요. 저는 영화를 공부하다 보니 테크닉이 뛰어난 감독들에게 정이 많이 갑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리들리 스콧을 가장 좋아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영화라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를 주저 없이 꼽아요.
방금 질문과 같은 답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요. 가장 재밌게 쓴 장은 어떤 장이었나요.
이 :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첫 편인 <노팅힐 x 샤갈>이에요. 첫 편을 준비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죠. 뭐든지 처음이 가장 조마조마하잖아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베이컨이나 로트렉은 낯설지 않게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고요.
한 :저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제일 재밌었어요. 우디 앨런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그의 매력을 새삼 확인했죠. 그리고 파리라는 공간도 알게 돼서 즐거웠어요.
명화남녀가 원하는 건 독자가 직접 작품을 보는 것
미술관 옆 영화관, 영화관 옆 미술관이 꼭지로 감상 팁도 알려주셨는데요.
이 : 저희가 원하는 건 결국은 독자들이 미술관, 영화관에 가서 그림과 영화를 직접 보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팁을 드려야겠다 싶어서 넣었어요. 어느 미술관을 가야 하는지, 미술관의 숨겨진 기능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림을 어떻게 보면 좋은지를 설명했습니다.
한 : 똑같은 영화라도 어떤 상영관에서 관람하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요. 감독 연출 의도를 가장 잘 구현하는 스크린을 찾으면 최적의 영화 관람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사운드, 화면비, 포맷 정보를 알면 영화를 더욱 풍부하고 재밌게 볼 수 있죠. 그래서 간단히 영화관 스펙 확인하는 법을 알려드렸어요. 최소한 아이맥스를 볼 때는 아이맥스가 뭔지는 알고 봐야 하잖아요.
두 분은 어떤 계기로 미술, 영화에 끌리게 됐나요.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이유와 연관해서 말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한 : 저에게 영화는 지상 최대의 쇼입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청량리에 있는 오스카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봤어요. 집에서 거리가 제법 멀었는데, 다음 날에는 혼자서 오스카극장에 가서 똑같은 영화를 또 봤어요. 그 이후로 지금도 1년에 극장에서 200편 정도는 꼬박꼬박 봅니다. 영화가 주는 2시간의 거대한 꿈을 좋아해요. 현실을 잠시 잊고 그 세계에 빠져드는 매력은 거부하기 힘든 것 같아요. 어떤 이들은 영화를 보고 영화를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할 사람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 파생적인 영향력을 많이 줄 수 있는 매체가 영화라고 봐요. 가끔은 숙제로 영화를 본다는 느낌도 들지만, 영화가 없었다면 얼마나 슬펐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저에게 영화만큼 좋은 소통 수단도 없다고 봐요. 영화든 무엇이든 예술 매체를 즐기는 건 누군가와 소통을 위해 중요한 연결고리 같아요.
이 :원래는 문학을 좋아했고 미술은 좀 늦게 좋아했어요. 한국은 미술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이 아니어서 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아직도 시 단위에서 미술관이 없는 곳이 많죠. 영국으로 유학 갔을 때 미술에 깊이 빠지게 됐어요. 영국에 계신 선생님을 따라서 미술관을 돌아다녔거든요. 그때 미술의 매력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미술작품은 영화나 음악처럼 짧은 시간에 보는 이를 매료시키지는 않는 것 같아요. 느린 자극이거든요. 관조해야 하죠. 어쩌면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미술을 좋아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한 작품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끈기가 필요하죠. 요즘은 즉각적인 자극이 많은데, 이런 데 의존하다 보면 효과도 짧잖아요. 반대로 이런 느린 자극은 오래 가고 또 깊은 데까지 갈 수 있다고 봐요.
개인적 차원에서, 또 사회적 차원에서도 예술의 효용은 열거하자면 셀 수 없이 많겠죠. 그런데 그런 효용보다는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에서 느끼는 기쁨에 주목하고 싶어요. 저에게 미술은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과 똑같아요. 그렇게 많은 전시를 지금껏 봐왔지만 전시장에 들어갈 때면 아직도 설레요. 순수한 즐거움, 그게 우리에게 예술 작품이 필요한 이유 아닐까요.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술가들의 삶을 다루셨습니다. 이렇게 쓰시다 보면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고민하게 될 텐데요. 두 분은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지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한 :영화과에서 제 세부 전공은 예술경영이에요. 대학 들어갈 때 고민이 많았죠. 그때만 해도 예술경영이 한국에 막 생길 때였으니까요. 자신에게 물어봤어요.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니 찍는 걸 좋아하니? 전 보는 걸 더 좋아하더라고요. 그렇게 답을 내리니 일말의 고민이 없어졌어요. 아직까지 영화와 권태기가 있었던 적은 없어요. 군 복무 시절에도 외박을 나오면 영화만 여러 편 보고 복귀했고, 지금도 한 해에 200편 정도는 보니까요. 앞으로도 영화와 함께하려고 해요. 제가 직접 영화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계속 영화를 보고 저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 『명화남녀』를 하면서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으니, 이 또한 영화로부터 얻은 축복이죠.
이 :화가 베이컨을 떠올려보면 알코올중독에 도박 등 그가 규칙적으로 작업 했다는 건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데요. 의외로 이런 작가들이 많아요. 몇 해 전에 창의성이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창의성이란 성실함과 집중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들이 창의성 있는 집단으로 여겨지는 듯 보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무언가를 꾸준하고 집요하게 탐구하다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술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화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에게 재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실한 노력이 있었어요. 제가 예술가들을 인생의 선배로 바라볼 때 깨닫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죠. 저는 더 공부하고 싶은 게 있어 내년에 다시 학교에 들어가는데요. 앞으로도 미술을 친근하게 접근하는 매개자로서 역할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또 다른 책도 준비 중이고 기회가 된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싶고요. 사실 제 어릴 적 꿈은 DJ가 되는 거에요. (웃음) 저를 미술 세계로 이끌어준 좋은 선생님들이 계신데, 저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목표예요.
명화남녀이혜정,한기일 공저 | 생각정원
예술경영을 전공한 이혜정과 영화를 전공한 한기일이 직조해내는 미술과 영화의 교집합. 향유하는 예술인 영화를 통한 감성과 재미, 가치의 예술로 인식되는 미술을 통한 깨달음과 감상의 즐거움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다 보면 영화는 좀더 풍부하고 깊이있게, 미술은 좀더 흥미롭고 친숙하게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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