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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교회 안 나가는 성도, 교회에도 책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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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2013년 1월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이 10%라고 밝혔다. 이를 수치로 환산하면 100만 명에 달한다. 100만 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가나안 성도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안 성도를 사회적 현상으로 주목하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결정으로 봤다. 이렇다 보니 왜 가나안 성도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됐는지를 고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청어람아카데미에서 대안적인 기독교 생태계를 기획하고 있는 양희송 저자가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가나안 성도가 사회적인 현상이며 추세라 판단한다. 즉, 한국교회의 위기를 반영하는 증상으로써 가나안 현상을 볼 수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이뤄졌다. 1부는 가나안 성도의 현상학이다. 통계, 지표 등을 인용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2부는 가나안 성도의 사회학이다. 가나안 성도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생기게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3부는 가나안 성도의 신학이다. 신앙 이야기라면 결국은 신학적인 문제를 벗어날 수 없다.

 

가나안 성도, 교회 중심부로부터의 이탈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은 두 부류의 독자 염두에 뒀다고 썼다. 어떤 독자 염두에 두고 쓴 책인가.

 

모든 독자를 다 잡고 싶었던 건 아니다. 첫째는 가나안 성도다. 가나안 성도가 ‘안나가’를 거꾸로 한 말이다. 교회 밖으로 나갔지만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목회자다. 이 두 부류를 염두에 두면서 썼다. 지금까지는 가나안 성도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봤다. 그래서 이들이 왜 떠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묻거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가나안 성도는 전체로 보면 추세나 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가나안 성도에게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나안 성도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하고 그 사람 이야기를 듣도록 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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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를 적게는 100만 명, 많게는 300~400만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가나안 성도는 어떤 사람인가.

 

계산법에 따라 다르긴 해도 100만 정도가 근사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을 단일한 집단으로 볼 수는 없다. 그들의 신앙 전체를 미화하거나 폄하하거나 할 필요도 없고. 현상은 현상대로 들여다 봐야 한다. 다만 2013년 조성돈ㆍ정재영 교수팀이 실시한 조사에서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가나안 성도가 우리가 생각했던 모습과 달랐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하면, 귀찮아서 안 나가거나 생활이 바빠서 안 나가는 성도를 생각했다. 설문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문에 답한 사람은 평균적으로 14년 넘게 교회에 나갔다. 이 말은 교회 언저리에서 탈락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중심부로부터 빠져나가는 사람이 가나안 성도라는 의미다. 청어람 아카데미를 10년째 하면서 만난 사람 중 가나안 성도 성향이 많았다. 이들은 질문이 많다. 신학, 교회 운영 방식에 의문이 많은데 교회 안에서는 풀 수 없다. 질문을 부여잡고 씨름하다 어느 순간 교회를 떠나는 걸 많이 봤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성도에만 물을 수 없다. 성도에만 묻는 게 아니라 교회에도 동일하게 책임과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역시 기업화, 대형화인가.

 

설문 결과를 보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앙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답답하니 여기에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응답이 40퍼센트 정도다. 두 번째가 목회자와의 불화, 성도와의 불화 이 두 가지를 더하면 40퍼센트 정도다. 즉, 이탈 원인의 가장 큰 두 가지는 신앙 문제와 교회에서의 인간 관계다. 이 두 가지는 한국교회가 대형화되어서 나타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는 대형화만을 원인으로 지목할 수 없다고 본다. 대형교회 아닌 교회도 성장 드라이브를 걸고 있고, 목회자 윤리 문제, 설교의 질적 문제, 추락한 개신교 평판 등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책 속에서 신학교 커리큘럼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기도 했다.

 

신학교도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교단 신학교 체제라서 교단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을 목회자가 접하기가 쉽지 않다. 문제는 목회를 할 때 생긴다. 성도들이 고민하는 질문은 교단을 가리지 않는다. 목회자가 신학교에서 난해한 상황에 개방적으로 대처하고 자연스럽게 토론하는 훈련이 됐더라면, 목회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교단 신학 틀 안에서 모든 걸 풀려고 하다 보면 무리수가 빚어진다.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을 반복하거나, 질문 자체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질 수 있다. 자연스레 해결 능력도 떨어진다. 이러면 성도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유연하지 못한 태도는 근본주의 특징 아닌가. 그런 면에서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교회의 구조적 한계로 볼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이 복음주의, 근본주의를 혼동하는데 내가 받아들이는 복음주의는 한국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복음주의보다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 교회가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라 말하는 흐름 위에 있는 게 사실이지만 최근 한국교회가 드러내는 성향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본주의에 가깝다. 신학적 문제, 사회적 이슈에 강경하고 공격적이다. 자신의 신학을 성찰하거나 반성하는 게 없다. 언제나 옳다는 독단적 태도로 일관한다. 이런 게 근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주의보다는 근본주의 성향이 짙다. 세계의 다른 복음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한국교회가 갖췄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에서 흥미로운 건,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사람이 과거 이탈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지금 가나안 성도는 신학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거나 기존 신앙을 부정해서 교회를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이 틀리지 않았고,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지점까지 와 있다.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신교의 논리적인 귀결로 가나안 성도를 볼 수도 있겠다.

 

개신교가 그랬다. 오직 성경으로 판단하자는 건데, 한국 상황에서 가나안 성도의 이탈은 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에 대한 충성, 헌신이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외국에서도 ‘예수를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 면에서 가나안 성도는 저항과 항의도 내포하고 있다.

 

몸집이 아니라 영향력의 사이즈가 중요해


가나안 성도는 결국 교회란 무엇인지를 묻는 듯하다. 교회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이니까 가나안 현상은 교회론 문제다. 우리는 지나치게 현실 제도로써의 교회를 신성시,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성경에서 교회를 언급할 때는 캐쥬얼한 느낌이다. 교회가 헬라어로 에클라시아인데, 구약이나 신약 시대에는 군대, 시민 회집도 에클레시아라 불렀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사명을 위해 모인 집단을 의미했다.

 

교회의 구조, 형태를 절대시하기 이전에 무엇 때문에 모였는가, 사명을 되묻는 게 중요하다. 현재 한국 교회는 일단 모이면 영속적으로 모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물, 조직, 목회자를 갖춰야 하고, 이렇게 하려면 자연히 성장에 집착한다. 대안을 생각하자고 하면 건물을 갖춰야 한다, 목회자가 필요하다, 이런 말을 한다. 여기서 대안이 나오기 어렵다. 오히려 원점으로 돌아가서 사명만을 생각한다면 다양한 교회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벙커원 교회도 그렇고 건물이 없다든지, 전임 목회자를 두지 않는다든지 다양한 실험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은 한국보다 일찍 가나안 현상을 겪지 않았나.

 

서구는 사회 전체가 기독교화된 사회였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서구가 그 과정을 통해서 경험한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서 한국 상황에 대입할 필요가 있겠다. 한국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세계적 유례가 없을 만큼 성장세를 달렸다. 지금은 꺾이는 상황이다. 지표를 보면 상당 기간 감소세가 지속될 거라 본다. 이 시점에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성장 드라이브를 거는 게 적절할까.

 

서구 교회는 평소에는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힘이 빠져 있고 소박한 형태로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는 종교 지도자 역할이 부각된다. 한국은 덩치는 큰데, 사회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중요한 건 영향력의 사이즈지 몸집의 사이즈가 아니다. 작은 몸집이라도 큰 영향력이나 좋은 평판을 가질 수 있다. 덩치가 큰데 영향력이 없고 평판이 낮으면 그것만큼 보기 난감한 게 없다. 한국은 거꾸로 가는 게 자주 보여서 아쉽다.

 

책의 주제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앞에서 복음주의를 이야기했으니 반대쪽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자유주의, 민중신학 쪽은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 교회사에서는 신학 논쟁이 첨예하게 펼쳐졌다. 과거 한국교회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이분법으로 쭉 흘러왔기 때문에 양쪽이 서로 불편해한다. 나는 영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는데 한국의 대립 구도는 좀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지금 상대가 무엇을 공부하고 입장이 뭔지 상호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 이 구도가 계속 유효할 것 같진 않다. 서로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노력을 조금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 예수는 전통적으로 자유주의, 진보주의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도 복음주의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흐름을 소개하는 일을 했다. 그랬더니 민중신학 하는 분들이 분들이 토론하자고 하더라. 참석해서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해 발표하고 토론하면서 친해졌다. 입장 차이는 분명하게 있지만 대화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소통 가능한 선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

 

기독교 외에도 한국에서 주류 종교는 성장세가 주춤한 것 같은데.

 

천주교는 늘고, 개신교가 줄고 불교는 유지라고 하는데 조금 더 들여다봐야 한다. 내년 실시할 센서스 결과를 본다면 지난 10년 사이의 추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산업화가 계속되면 세속 사회로 간다는 게 피터 버거의 의견이었다. 이른바 세속화 이론이다. 그런데 이 양반도 단속적인 세속화 이론을 더 쓰지 않는다. 종교 인구가 늘고 종교 활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관철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봐야지 쉽게 속단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개신교는 감소세가 유지될 것 같다. 최근에 나온 교단 통계만 봐도 감소세가 보인다. 천주교는 아무래도 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한국사회에서 종교 간 평판이 재조정되는 시기가 닥칠 수도 있겠다.

 

교회론을 더 많이 논의해야


쉽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가나안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회론이 중요하다. 의외로 교회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딜레마다. 올해 교회론 세미나를 몇 주간 진행하며 여러 신학교 커리큘럼 비교했다. 목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이 실용적 프로그램은 많은데 교회론이 드물었다. 교회란 목회자와 성도자가 같이 있는 곳인데, 목회는 목회자 쪽 관심만 있으니까 목회론이 곧 교회론은 아니다. 이처럼 성도와 함께 만들어가는 그림이 빠져 있다. 성도 사이에서는 이런 고민이 아예 없고. 그러니까 자기가 겪은 문제에서 이게 아니다 싶으면 교회에서 나가버린다. 교회론이 더 공급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경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지금을 논의할 자원이 생긴다. 지금은 불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무런 대책이 없고 지속되고 있다. 교회성장론만 있을 뿐이다. 교회성장론만을 붙잡고 지난 30년을 달려온 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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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아카데미는 교회인가.

 

교회라는 표현을 안 쓰는 편이다. 기존에 있는 교회 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신 기독교 생태계라는 말을 쓴다. 청어람아카데미가 지역교회에는 바로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기독교 생태계를 위해서는 도움이 된다. 교회 목회만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 아니라 개신교 전체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나.

 

처음은 2005년도 명동에 있는 높은뜻숭의교회 내부 기관으로 시작했다. 교회 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역할로 시작하다 여러 강좌를 열면서 청어람 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문학 강좌, 정치사회, 문화예술, 소셜미디어 이런 이슈를 다룬다. 크리스천에게도 필요하지만 교회 안에서 하기에는 버겁거나 적절하지 않은 이런 주제를 열심히 다루자고 해서 운영해 왔다.

 

운영하면서 자금적으로 힘든 적은 없나.

 

늘 힘들다. (웃음)

 

그럴 때는 성장 드라이브가 옳은 면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나.

 

모든 인간이 안고 사는 딜레마 아닐까. 직장 생활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꿈이 있고, 생존도 있는데 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야지.

 

내년 기획하고 있는 활동은?

 

공간이 한정되다 보니 온라인을 강화해보자 해서 고급 강좌를 온라인으로 계속 공개하고 있다. 유료로 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1차는 저변을 넓히자고 해서 무료로 공개했다. 올해 중반부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1,100쪽짜리 책을 20회 분량으로 팟캐스트와 유튜브로 내보냈다. 반응이 좋았다. 외국에서도 반응이 오고. 의외로 수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기획하는 건 동서양 고전 읽기다. 플라톤, 맹자 강좌다. 당장은 수익이 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써야 하는 활동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책 읽는 힘도 키워지고 좋은 강의 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

 

플라톤도 플라톤이지만 맹자는 기독교와 접점이 보이지는 않는데.

 

플라톤은 신학에 많이 활용된 철학자다. 맹자는 낯설지만 관심을 가질 만한 사상가다. 지식을 많이 갖게 되었다고 해서 잃어버릴 신앙이면 옳지 않다. 알면 알수록 본인 신앙도 깊어지고 남에 대한 이해도 넓고 깊어질 수 있다. 몰라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게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다. 크리스천이란 어떤 사람일까.

 

전통적인 신앙 고백 안에 잘 표현된 대로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고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혜나 인도가 동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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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저 | 포이에마
선행 연구들과 저자 자신의 이론적 탐구, 우리보다 앞서 가나안 현상을 경험한 영국과 미국의 사례, 그리고 실제 저자 자신이 만난 수많은 가나안 성도들의 목소리를 담아 가나안 성도에 관한 신뢰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나안 성도는 누구이며 왜 교회를 떠났는지, 이들을 탄생시킨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은 무엇인지, 아울러 이들의 존재가 한국 교회에 던지는 물음은 무엇이며, 이들이 찾아가는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하나씩 짚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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