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책방 카페 문을 완전히 닫고 난 자정 무렵, 아무도 없는 3층 의자에 앉아 책읽기에 골몰하다가 문득 정적을 의식하고서, 빈 공간에 흐르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사일런스 앤 아이(Silence and I)> 가사를 훑어본다. 우린 서로 닮아 있어요. 침묵과 나.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해요. 그 밤의 작고 서늘한 평화를 당신께 보낸다. 우리 함께 읽어요. -이동진
책을 다루는 콘텐츠는 많다. ‘책에 관한 책’은 물론이거니와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책에 관한 방송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었다. 여전히 베스트셀러와 유명인 추천 도서들은 중요한 이야깃거리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자주 만난다. 허나 그와 무관하게 책 읽는 인구는 더 늘어나지 않는 것 같다. 읽을 시간이 없다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한다. 바쁜 사람들에게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은지 어떤 책이 어떻게, 왜 좋은지 친절하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곳 어디 없을까. 혹시 이런 고민을 하고 있거나 하는 지인이 있다면 먼저 이곳을 소개해주기 바란다. 책에 대해 심도 있으면서도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단연코 핫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팟캐스트를 이야기할 때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매회 평균 15만(이상) 다운로드 기록, 104회 방송(2014년 12월 현재), 소개된 책 베스트셀러 진입 등 그 외에도 다양한 수식어가 있겠으나 워낙 많이 이야기된 내용이니 생략한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이동진의 빨간책방’에 소개된 책들 중 소설 일곱 편을 골라 실은 책이다. 청취자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외국 소설 일곱 편을 엄선했다. 이언 매큐언에서 밀란 쿤데라까지 소개된 책 목록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두 저자 이동진과 김중혁은 책에서(그리고 방송에서) 마치 ‘책 읽는 방법’을 독자에게 전수하는 듯하다. 소설의 구조, 인물의 성격, 대사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고 검증한다. 문장을 곱씹고 의미를 되새겨 마침내 작품의 숨은 의미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치열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뽑은 문장’으로 자신이 읽은 책에 그은 밑줄을 들어 보여주기도 하고, 소설을 넘어 영화와 소설 이론 혹은 작가의 뒷얘기까지 들려주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샐린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대요. 많은 사람들이 샐린저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각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 같은 데 올린 거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홀든 콜필드를 읽는 장면을 떠올리면 뭉클해져요. (198쪽)”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말과 글 사이 어디쯤에 있는 책이다. 때문에 영화평론가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애서가 이동진과 소설가이자 다양한 칼럼으로 독자를 만나고 있는 작가 김중혁, 이 둘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호흡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말로 발화한 소재들을 글로 다듬고 보충하는 과정에서 저자들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독자들이 책을 통해 그들의 경험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고도. 사인회와 공개방송을 앞둔 빨간책방 카페에서 ‘빨책’의 안주인,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소설가 김중혁을 만났다. 방송만큼이나 화기애애하고 유쾌한 대화가 이어졌다.
표지가 참 마음에 드는 책
책이 참 예쁩니다.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매력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이 마음에 드는지요?
김중혁(이하 ‘김’) : 전반적으로 화이트에, 미니멀한 느낌의 그런 모던한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고요, 괜찮은 것 같아요(웃음). 책을 봤을 때, 이 계단을 둘 다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계단인 줄 모르고, ‘카메라 렌즈인가? 아니면 책을 쌓아 놓은 건가?’ 하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계단이라는 것이 함축적이에요.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하자면 이것이 우리가 밟아온 계단 같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흰색이라서 좋은 것 같습니다. 빨간색이 아니라서 좋은 것 같아요.
빨간색은 왜요?
김 : 김은주 편집자가 강력하게 주장을 했어요. ‘빨간책방’인데 빨간색이 들어가면 안 된다, 절대. 그런 센스가 있는 분이라서(믿었고요), 잘 나온 것 같아요. 특히 녹색을 정말 잘 쓴 것 같아요. 여기서 빨간색 썼으면 별로였을 텐데, 녹색을 정말 잘 쓴 것 같아요.
팟캐스트 방송이 무려 100회가 넘었습니다. 소개된 책들이 새로 베스트셀러로 오르는 일도 있었고요. 팟캐스트 ‘빨간책방’의 인기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동진(이하 ‘이’) : 신뢰도요. 100회 넘게 하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들으면서, 최소한 ‘이 사람들이 사(私)가 있는 사람들은 아니구나, 다른 속셈이 있어서,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걸 책으로 위장해서 말하지는 않는구나, 정말 그 책을 좋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구나.’라는 것은 대부분 믿어주시는 것 같아요. 그것은 굉장히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 일단 균형 같아요. 균형이라는 게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중앙에서 좌우를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편안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신뢰도 더 쌓이는 것 같고. 그리고 그런 편안함 때문에 들으면서 많이 주무시는 것 같아요(웃음).
이 :저희 궁극적인 목표입니다(웃음).
책은 팟캐스트로 들을 때와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청취자와 독자로서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지는 것 같고요. 두 분 다 책도 쓰셨고, 방송도 하고 계신데 이야기를 할 때와 글을 쓸 때 어떻게 다른가요? 어떤 쪽이 더 어려운지 궁금합니다.
김 : 저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인데요. 서문에도 썼지만 제가 말을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구 할이 이동진 선배 덕이에요. 정말 농담이 아니고요, 이끌어주시는 걸 잘하세요. 방송에서 제가 잘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잘해 보이는 면이 확실히 있습니다. 제가 진짜 혼자 말을 하라면 잘 못하거든요. 강의 같은 거 해보면 혼자 동분서주하고 이상하게 다른 얘기만 하다가 ‘어?’ 이러고 끝이 나요. 그러다보니 확실히 곁에서 이끌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방송에서 이동진 선배는 끌어주면서 정돈을 하고, 저는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데 그런 게 서로 잘 맞는 것 같아요.
이 : 저는 상대적으로 좀 더 분석적인 면이 있어요. 중혁 작가님은 통찰이 담긴 이야기를 하시고요. 저는 어쨌거나 아웃사이더,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잖아요. 제가 작품을 쓴 건 아니니까요. 반면에 중혁 작가님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동료들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거니까, 그런 점은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글 쓰는 게 힘듭니다. 백 배 쯤 힘들 거예요. 글은 문장을 다듬는 것부터 시작해서 단어 사용, 문장의 흐름과 리듬 이런 걸 다 생각해야 하니까요. 저희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대략 약간의 메모들을 준비는 하지만 말을 하는 건 다 즉흥적인 거예요. 말을 하다가 무언가 격발이 되지 않으면 그건 안 해도 되는 말이고요.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 나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글이란 건 그렇지 않잖아요. 말을 할 때는 농담도 많이 하고 그렇지만요. 말은 내가 백을 준비했을 때 삼십만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뭐가 전달된다고 생각하는데 글을 그렇지 않아요. 글은 정말 사력을 다해서 써야죠. 에세이든 소설이든 영화평론이든 말이에요. 그래서 글 쓰는 건 보람도 크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그래서 중혁 작가가 놀라워요. 이분은 글 쓰는 게 즐겁대요.
이동진 작가님은 책이 나올 때만큼 좋을 때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작업한 책이 나왔을 때의 만족감은?
김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죠. 말하는 게 훨씬 쉬워요. 그렇지만 만족도는 훨씬 덜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나면 굉장히 힘들지만 끝내고 난 후의 만족도가 말하고 났을 때보다 훨씬 커요. 말은 자책하게 되는데 글은 절대 자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말하는 게 늘 두려운데 그 두려움을 잘 커버해주시니까 좀 편하게 하는 거죠.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주고 컨트롤 해주시니까요. 그런 점에서 믿고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책을 낼 때 좋기도 한데 반반인 것 같아요. 책을 딱 받으면 정말 좋은데, 심란하게 돼요. 여러 번 책을 내다보면 둔감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늘, 언제나 그렇더라고요. 딱 받아들면 기쁜 마음과 함께 ‘심란하다, 몇 번째 책이지?’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 저는 첫 책, 두 번째 책 이렇게 나올 때는 부끄러웠거든요. 근데 점점 뻔뻔해지면서, 좋아요. 그게 잘 썼다는 것이 아니고 ‘아, 그래도 내가 헛살지 않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정말 글을 쓰고 싶지만 글 쓰는 것을 힘들어하거든요. 그런데 어쨌건 ‘결과물이 또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결실로 나왔구나.’생각하면 좋습니다. 이런 면에서 책 나온 순간이 정말 좋아요.
“소설을 쓰면서 우연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요. 사실 우연이라는 말이 겁나요. 현실에서는 더 심한 우연이 있기도 하지만 소설에서 ‘지나친 우연 아니야?’라고 지적받는다면 그 우연을 쓸 수 없거든요. 소설은 필연성이 중요하니까. 다시 말해서 우연을 최대한 필연적인 것처럼 만들어 보이는 게 소설 쓰기죠.”(99쪽)
김중혁만 생각했다
김중혁 작가가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책을 읽어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을 또 이동진 평론가가 잘 정리해주시고. 그런 점이 듣는 사람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 :다양하게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보면 상대방이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도 궁합이라는 게 있어요. 능력의 궁합이라는 게. 제가 갖고 있는 능력이 제가 1이고 그 사람이 1일 때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합쳐서 1.4 쯤 되는 궁합이 있고요, 똑같은 1인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4.5쯤 되는 엄청난 궁합이 있어요. 근데 이 궁합은 후자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저와 굉장히 다른 사람이에요, 중혁 작가님은. 제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갖고 계시고요. 대화를 할 때 같은 얘기를 두 사람이 나눠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얘기를 서로가 쌓아가는 느낌이거든요. 제가 X축으로 간다면 (김중혁 작가님은)Y축으로 가서 그 좌표평면 안에서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지는 식으로요. 그렇게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그런 대화하는 재미가 있어서 방송을 백회가 넘도록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까지는 매너리즘이 없어요. 그만해야겠다,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현재까지는.
김 : 책 읽을 때 처음에는 열심히 읽고 그랬었는데요, 자료도 찾아오고요. 그 재미도 물론 있지만, 요즘은 읽다가 어떤 부분을 딱 만나면 이제 이동진 선배를 좀 아니까, ‘이거 어떻게 얘기할까?’ 그게 굉장히 궁금해져요. 이 부분에서 뭔가 나와 의견이 다를 것 같다든지, 색다른 의견을 얘기할 것 같다든지, 이 부분과 이 부분을 어떻게 정리할까에 대해서 궁금해 하면서 오게 됩니다. 그걸 듣는 재미가 있으니까 저도 일단은 지겹지가 않은 것 같아요. 말을 하면서 오히려 청취자 입장에서 듣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고 그런 면에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굉장히 이상적인 관계입니다.
김 :말을 하니까 이상적으로 보이지. 사실 잡음도 많고, 술자리에서 싸우기도 하고 그렇습니다(웃음).
이 :사실은 퀴퀴하죠. (웃음)
팟캐스트를 함께 하기로 했을 때 이렇게 궁합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하리라고 예상했나요?
이 : 처음 할 때 2차, 3차 생각 안하고 중혁 작가님만 생각했었어요. 안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에 대한 대비책도 없었어요. 더 웃긴 건, 당시 중혁 작가를 잘 몰랐어요. 그냥 독자로서만, 중혁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만 알고 있었고, 방송 한 번, 술자리에서 지나가면서 한 번, 그렇게 본 게 전부였거든요. 그렇지만 그때 받은 사람의 느낌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그렇게 했는데 제가 운이 굉장히 좋은 거죠.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방송에 소개했던 책들 중 일곱 권을 실었어요. 이 작품들을 꼽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 : 일단 말씀 드리면, 빨간책방에서 다루는 모든 책은 이동진 선배가 고릅니다. 출판사도 관여를 안 하고 저도 관여를 안 해요. 모든 선택을 혼자 해서 이 책들이 이렇게 방송하는 자리로 나왔던 거예요.『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낼 때는 반응이 좋았던 것들을 고려해서 상의한 후 의견을 나눠서 싣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소개한 『속죄』는요?
이 :제 뜻이기도 하고. 출판사 담당 편집자 뜻이기도 해요.
김 :제일 반응이 컸으니까요.
『속죄』는 두 분이 굉장히 작품에 매료돼서, 좋아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 : 책 따라 운명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은데요. 『속죄』는 말하기 좋은 책이기도 했어요. 책이 워낙 좋았고, 그 책에 대해서 말하기도 좋았고요. 둘의 의견이 갈리기도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다른 책들도 그만큼 좋았지만, 어떤 책들은 좋은 것에 비해 말을 덜할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었거든요. 『속죄』는 책의 질과 이야깃거리들이 잘 맞아서 시너지가 난 것 같습니다.
이 :우리가 다룬 모든 책 중에 『속죄』가 최고의 소설은 아니에요. 물론 굉장히 훌륭한 소설이고 저는 이 작품이 걸작이고 명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여기 명작 아닌 소설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예를 들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룬다고 해봅시다. 사실 그 책은 문학적인 평가가 끝난 책이잖아요? 이미 고전이 된 책이고요. 쿤데라 같은 훌륭한 작가의 가장 많이 읽힌 베스트 책이라고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에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이야기를 해봤자 발견의 느낌 같은 건 없겠죠. 다만 다르게 볼 수는 있겠지만요. 그런데 『속죄』 같은 경우는, 이언 매큐언이 굉장히 훌륭한 작가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작가고, 국내에서 그리 명성이 있는 작가가 아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속죄』라는 소설에, ‘아니 이렇게 좋은 소설이 있었단 말이야?’ 하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줬던 것 같아요. 『속죄』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 쓴 소설이에요. 그런 면에서 말로 풀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소설이었어요. 굉장히 깊은 반면에요. 타이밍이 맞은 거죠. 그렇게 딱.
이 외에 추가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우리가 사랑한...』시리즈로 계속 나와도 좋을 텐데요.
이 :저는 항상 양으로 승부하는 사람이라 이번에 일곱 개가 적다고 느꼈어요. 우선 더 보충하고 싶었어요. 『속죄』가 대략 60페이지라고하면 더 늘려서요. 사실 내용이 많이 빠진 거예요. 덜 중요한 것들은 빼서 굉장히 잘 압축이 됐지만 저는 다, 낱낱이 말하고 싶어 하는 타입이거든요. 그러니까『속죄』만 해도 예를 들면 150 페이지 쓰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면 『속죄』를 보지 왜 그 책을 보겠어요?(웃음) 또 이 책이 작품을 열다섯 개 정도 다루면 좋았겠죠. 저는 그랬어요. 그런데 상업적인, 책의 부피라는 게 있을 테고 그러려면 책마다 내용을 반씩 줄여야 되잖아요. 저는 그건 또 못 보니까 일곱 개밖에 못 들어간 거예요. 그렇게 치면 이 책은 당장이라도 세 권 더 나올 수 있어요.
소설만 해도 못 다룬 책이 얼마나 많아요. 『개구리』도 못 다뤘죠. 이 작품은 반응이 상대적으로 덜 좋았거든요. 하지만 이 소설도 훌륭한 소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소설을 안 읽어서 그렇지, 중국 현대문학 수준이 상당하다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노벨문학상도 받았고요. 또 한국 소설이 못 들어갔어요. 예를 들어 이번에 한 『칼의 노래』라든지, 오늘 다루게 될 『당신들의 천국』이라든지 이런 작품들 넣고 싶거든요. 너무 많죠.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도 있는데 쿤데라 작품을 두 개 넣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김 : 저는 사실은 이게 이야기의 베스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요. 오히려 다른 것들이 조금 더 드러났으면 좋았겠죠. 말한 것처럼 『다섯째 아이』그런 작품이 사실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덜 좋아했지만 이야기가 더 깊었던 것도 있거든요. 그런 부분도 약간 아깝기도 한데, 내자면 다 낼 수도 없죠. 하지만 그런 상업적 고려는 안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가 책을 내기 위해서 이걸(방송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방송에 충실하고 있어요. 책이 나오는 건 부차적인 문제라서요. 저는 그냥 코앞에 닥친 방송만 걱정할 뿐이지 책으로 어떻게 묶일지는 편집자들의 몫이겠죠.
처음에 사실은 이 기획에 반대했었어요. 말로 다 한 것들을 굳이 책으로 내야 하느냐, 그것에 대해서 반대를 했었는데요. 여러 가지 얘기를 하다 일단 해보자, 고쳐나 보자고 고쳤죠. 그런데, 이상한 게 있었어요. 말로 한 것들을 글로 고치니까 날아가려고 하는 말들을 붙잡아서 묶어 놓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참 희한한 작업이었어요. 이런 작업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고치고 싶은데 고치지 못하는 것들도 있어요. 방송에 남아 있기 때문에 고치지 못하는 것들, 하지만 그래도 고쳐야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말과 글이 얼마나 다른지 한 번 느꼈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괜찮구나. 이렇게 묶어 놓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그런 책은 아니구나.’를 느껴서 충분히 낼만한 책이었다고 나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이 : 이 책은 말과 글의 경계선 상에 있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말이라는 머테리얼(material)이 있었고, 그 머테리얼은 우리가 글이 될 거라고 처음에는 생각 안했던 머테리얼입니다. 그래서 저도 사실은 책이 나왔을 때 어떨까 궁금했어요. 이 책이 얼마나 훌륭한 책인지, 이 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책인지는 독자들이 평가해 주시겠죠. 다만 저희가 보기에는 충분히 보람이 있는 그런 작업이었어요. 사실 말을 그대로 옮겨서 풀어쓴 게 아니에요. 재구성 됐다고 말할 수도 있고, 보완한 부분도 있어요. 그렇지만 완전히 새로운 걸 창작해서 넣을 수는 없죠, 말이 기본적으로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었어요. 게다가‘우리가 사랑한 논픽션들’도 해야 하잖아요? 예를 들자면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이 책이 어느 정도 반응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저는 내고 싶은 생각이 있죠.
“저는 소설 속 조르바만 놓고 보면 문학사상 손꼽힐 만큼 잘 만든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정말 하루도 못 견딜 것 같아요. (249쪽)”
소개된 책 일곱 권 중 무려 네 권이 영화화된 작품입니다(『속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파이 이야기』, 『그리스인 조르바』). 또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영화화는 되지는 않았지만 영화적으로 책을 읽은 대목도 눈에 띄고요. 아마 콘텐츠의 힘이겠죠. 이 외에 영화화를 기다리는 소설이 있나요?
이 :중혁 작가 소설들이죠. 저는 중혁 작가의 몇몇 단편들이 굉장히 영화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좀 더 느슨한 각색으로 영화화되면 좋겠죠. 왜냐면 문학은 문학의 영역이 있으니까요. (영화화)하면 굉장히 좋을 것 같은 작품들 많아요. 『1F/B1 일층, 지하 일층』만 해도 그런 단편이 여러 개가 있고요, 최근에 나왔던 구동치 장편도(『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잘되면 프랜차이즈도 될 거예요. 계약 잘하셔야 될 걸요(웃음). 한국 영화 쪽에 계신 분들이 책을 잘 안 읽으세요, 솔직히. 그러니까 그 분들이 읽으면 한국 소설 중에서도 영화화될 것들이 많이 있어요. 웹툰이 굉장히 많이 영화화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안 보고 웹툰만 보고, 영화 제작자들이 소설을 안 보고 웹툰을 보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영화 쪽에 계신 분들 중 한국의 문학들을 계속 팔로우업 해서 보는 분들의 퍼센티지가 얼마나 되겠어요? 있겠지만 말이죠. 근데 그 분들 중에 웹툰을 계속해서 보는 분들(의 퍼센티지)은 또 얼마나 높겠어요? 그러다보니까 웹툰으로써 함량 미달인 것들을 심지어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영화화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생기잖아요? 품질 면에서요. 굉장히 안타깝죠. 영화화되기 좋은 텍스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중혁 작가 책, 아직 한 번도 영화화된 적이 없어요. 저는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김 : 내년 4월에 단편집이 나옵니다. 거기에 좋은 단편들이 있어요(웃음).
저자들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방송 같은 공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크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래서 인터뷰 도중 이런저런 농담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인회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쌓은 오랜 시간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 싫은 사람, 예의 없는 사람
“정말 찰나지만 계속 되뇌고 싶은, 무한반복하고 싶은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죠.”(39쪽, 김중혁) 라고 했습니다. 두 분에게 혹시 그런 순간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김 :기본적으로 무한 반복되는 거 싫어요. 그냥 빨리 빨리 지나가버리는 게 좋아요. 아무리 좋은 기억이라도 무한 반복되는 건 지옥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반복하고 싶은 거지 반복되는 건 아닌데요, 반복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들은 있겠죠. 예를 들면 초심?(웃음) 자기가 놓치지 말아야 할 어떤 순간들에 대한 것들을 반복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반복되진 않죠. 늘 반복하려고 할 때마다 다른 의미일 테고요. 그런 의미에서 말을 했던 거예요. 저는 반복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든지 간에. 아마 고통스럽겠죠.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알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179쪽, 이동진)라고 하셨는데요. 그 부분이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 나온 스칼렛 요한슨의 대사(“저는 좋아하는 건 없고 싫어하는 것만 많아요.”)도 떠오르게 했어요. 두 분이 싫어하는 건 무엇인가요? 독자들에게 두 분을 좀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이 : 싫어하는 것은 너무 많아요. 책 한 권, 브리태니커 같은 거 쓸 수 있어요(웃음). 그런 거 차치하고 사람으로만 얘기하면, 꼬인 사람. 꼬인 사람을 너무 싫어합니다. 그 사람이 똑똑하건 아니건 관계없이 꼬인 사람은 일상에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 너무 많이 만났어요.
김 : 저는 예의 없는 사람이요. 비슷한 얘긴데, 예의 없는 사람 굉장히 싫어해요. 예의라는 게 광범위한 얘기긴 한데요. 이기적인 사람이 예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요. 또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 싫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굉장히 화가 나서 갑자기 욱할 때가 있어요.
이 : 그런 면에서는 둘이 비슷하네요.
두 분 모두 굉장히 섬세하게 책을 읽는다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 읽을 때 특별한 습관이 있나요?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주는 팁 같은 게 있을까요?
이 :원래 저는 잡생각이 많고, 분석적으로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제가 평론가로, 기자로 ‘영화’라는 텍스트를 20년 정도 다뤘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아, 좋다’로 끝내지 않는, ‘왜 좋을까’를 스스로 계속 물어보는 그런 작업을 계속 해왔어요. 경우는 다르지만 그런 태도 자체는 책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거든요. 스타일 자체가 책에 메모를 많이 한다거나 동그라미를 쳐놓는다거나 이런 식의 것들을 많이 해요. 그렇지만 메모를 어디 쓰려고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어요.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옛날에는 책을 깨끗하게 봤어요. 그런데 요즘은 책을 완전히 학대하면서 보고 있네요. 제가 읽는 책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그런 식으로 생각이 뻗어나가는 것을 스스로 컨트롤 하지 않아요. 그게 제 말이나, 책에 쓰여 있는 것을 언급하는 방식에서도 제 독서법을 따라가는 거겠죠.
김 :저도 책 지저분하게 봐요. 예전에는 사실 그렇게 꼼꼼하게는 안 봤어요. 방송을 하면서 꼼꼼해진 게 있습니다. 꼼꼼하게 보지 않으면 말을 못하니까 메모를 계속 해야 해서 책에다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고요. 책은 역시 지저분하게 봐야 하는 것 같아요. 예쁘게 보는 것보다는 메모도 하고 접기도 하고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소설을 사실 잘 안 사게 되잖아요. 그런데 소재 같은 것도 떠오르는 것들을 책에다 적고 이러면 굉장히 좋거든요. 자기가 떠오르는 것들을 막 적어놓으면 그게 확장돼서 다른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전 최대한 지저분하게 봤으면 좋겠어요. 지저분하게 보고, 지저분해져서 또 사고.
2014년을 마무리하는 시기입니다. 올해의 책 세 권을 꼽는다면요?
김 :저는 소설리스트(http://sosullist.com/)에 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목록도 있으니 와서 봐주세요(웃음). 제가 꼽은 올해의 소설 세 권은 『무의미의 축제』, 『성소녀』, 『언더 더 스킨』입니다.
이 : 저는 너무 많아서 못 꼽겠네요. 진짜 어려운 일이에요. 김중혁 작가님 꼽으신 거 좋은데요?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이동진,김중혁 공저 | 예담
이번에 예담에서 출간한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그동안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메인 테마 도서로 다루었던 80여 권의 책 중 청취자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외국 소설 7편을 엄선하여 방송 내용을 다시 글로 옮겨 정리하고 보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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