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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석 소설가가 그리는 22세기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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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노동은 1년 단위도 길다고 생각하여, 1달 단위로 계약된다. 핵폐기물이 유출된 서해는 죽음의 바다이다. 의식주를 보장하는 SS 울트라돔에서 주인은 시민이 아니라 거대 감시체제다. 이렇듯 『강철 무지개』가 그리는 22세기 대한민국은 통일 한국이라는 설정 외에는 모두가 어둡다. 통일 한국이라는 설정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정도의 설정으로, 희망적인 징후와는 거리가 멀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연애, 하는 날』의 저자 최인석이 12번째 작품을 발표했다. 제목은 『강철 무지개』. 이육사 시에서 따온 말이다. 이육사를 옥죈 게 현실이었다면, 소설가 최인석을 갑갑하게 한 것도 역시 현실이다. 그러한 갑갑함은 미래를 그린 소설로 탄생했다. 최인석 작가에게 던져진 화두는 “지금 추세가 계속되면 22세기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 될까”였다고 한다. 그만큼 『강철 무지개』는 SF적 요소를 띄면서도 현실참여적인 작품이다.

 

최인석01-사본.jpg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중견작가가 SF소설을 쓴다는 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SF소설을 쓰기로 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SF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구상한 건 아마 10여 년 전일 겁니다. 두 배달부 얘기였어요. 중단편이었고요. 이들이 배달하는 물건 중에 가끔은 신장이라거나 간, 특수혈액 같은 것이 있고, 이런 일은 대개 시간을 다투고, 그러니 앞뒤 볼 여유 없이, 신호등 같은 거, 교통법규 같은 거 위반하면서 날아다녀야 하고, 그러다 보면 사고도 생기고, 다툼도 생기고…… 뭐 이런 얘기를 구상했지요. 아직 막연했지만 그런 얘기를 통해서 당대의 세계가 동시대인에게 요구하는 어떤 물질적인, 폭력적인 삶의 방식,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고, 그것이 각인에게 반성적인 인식이나 자의식 같은 것이 거의 없이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런저런 다른 일이 생기고, 또 뭔가 찜찜한 생각도 있고, 해서 미뤄뒀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좀더 구체화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강철무지개』라 할 수 있겠네요.

 

SF를 도입한 것은 이야기를 좀 단순화시켜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을 시간적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남북 문제라거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문제라거나, 노동문제, 특히 비정규직 문제 등을 어떤 식으로건 정리해야겠는데, 그래선 이야기가 난삽해지거나 지루해지고, 게다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야기 속의 세계를 다소 단순화시키기 위해 SF를 도입했습니다. 물론 내가 예언자나 점쟁이는 아니니까 미래를 얘기하려 한 것은 아니고요. 오늘날의 세계,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인지를 다소 극단화시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2번째 작품인데요. 이 작품은 소설가님의 문학 여로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본격적인 SF를 하나 구상하고 있다면 좀 입빠른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목표로 본다면 징검다리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소설 가운데 사기꾼이 엉터리 우주선에 승객을 태워 날려버리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승객의 생사에는 아무런 관심없이 우주여행을 상품으로 그런 사기를 치는 거지요. 사실 오늘날 우주 개발이니, 우주 탐험이니 하는 것들이 어떤 지점에서는 이런 사기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고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류가 달에 간 적이 없다는 음모론이 있지요. 물론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런 얘기가 끈질기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우주개발이나 연구가 결국은 우주무기 경쟁, 그리고 장차는 우주의 분할점령, 지구가 겪고 있는 온갖 재난을 우주로 확대재생산하는 전초전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걱정이나 불안감 같은 것들 아닐까요. 우주 개발의 명분과 실제, 우주 개발의 이면에 자리잡은 어마어마한 무기산업, 그것이 인류에게 초래할 재앙 같은 것, 이런 우려가 그 음모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과학의 발전이 1% 외의 99%에게는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겠군요. 그 가운데 우주 개발 같은 것이 가장 대표적이고요. 과학과 그 발전이 일부 계급, 일부 국가가 이익을 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원되는 한 그런 우려나 불안감은 계속되지 않을까요. 사적 이익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이익을 위한 과학이 되고 발전이 된다면 그런 우려는 절로 사라지게 되리라 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를테면 타임머신을 개발한들 인류 공동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몇몇 사람만이 그걸 이용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이익을 위해, 아마도 어마어마한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과거, 그리하여 미래를 더 교활하게, 더 섬세하게 조작하고, 나아가서는 인류 공동의 과거까지도 조작하고 왜곡하는 짓을 망설이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비행기 엔진까지 찍어낼 수 있는 3차원 프린터, 옥수수로 연료를 만들어내는 기술 같은 것들, 물론 재밌고 유익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인류를 위한 과학인지, 이익을 위한 과학인지를 우리는 살펴봐야 합니다. 옥수수로 연료를 만들어내는 기술이야말로 오늘의 과학기술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사례일 겁니다. 물론 기술 자체는 신기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유용하기도 할 겁니다. 이를테면, 중동의 석유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 미국의 선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세계적으로 10억을 넘나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 기술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굶주린 사람들에게 곧 끓여 먹을 수 있는 옥수수를 짓이겨 자동차 연료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과연 반갑고 신기하기만 할까요? 과연 이런 기술, 이런 과학, 이것이 인류를 위해 기여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얘기하는 대로, 이것이 과연 우선순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항생제 몇 알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 채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DNA 조작이나 줄기세포 연구 같은 데 쏟아붓는 엄청난 투자 같은 것이 진정 우선순위의 문제인가요?

 

우선순위가 아니라 이익이 문제겠지요.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얼마나 있느냐. 하지만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는 한 인류에게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기한 재앙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막연하게 구상 중인 작품이 있긴 하지만, 언제 쓸 수 있게 될지는 아직은 짐작도 내놓기 힘듭니다.

 

『강철 무지개』를 쓰며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나요.

 

문학은 죽었다, 는 얘기가 오래 전부터 입 가진 사람은 다 숟가락 하나씩 올릴 정도로 유행이 되었지요. 그 유행마저 한 물 빠진 셈입니다. 소설이 현실의 총체성을 담기 위한 장치로는 이미 무의미하다는 얘기도 있고요. 하지만 아주 소박하게 보더라도 소설이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세계의 생김생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총체성이라 부르느냐 현실주의라 부르느냐, 총체성을 담을 수 있느냐 없느냐 따위의 논의도 이 소박한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인간이 없는, 인간이 사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문학에 대한 선호는 출판 시장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으로 인해 나를 포함하여 많은 글 쓰는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오늘날, 이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지불해야 하는 작은 세금이라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세금을, 목숨을, 생존을, 자존심을, 삶의 모든 것을 세금으로 내면서도 오직 눈물과 고통과 절망만을 겨우 받아드는 이들이 무수하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질문에 대답하자면, 어려웠던 점 없습니다.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이 아둔하고 지루한 상상력 때문이었을 겁니다.

 

넌덜머리 나는 현실, 인간으로 살기가 불가능해

 

미래를 어둡게 그린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의 현실 인식과도 관련이 있을 거 같습니다.

 

요즘 특히 넌덜머리가 나는군요. (웃음) 젊은이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형편입니다. 현실이 불안정하여 연애도 못할 정도라는 얘기도 들립니다. 젊은 시절에는 모름지기 하루도 쉬지 않고 연애를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요즘은 연애도 스펙이라는 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면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연애 역시 시장에서 벌어지는 사업이 되고 말았다는 것인지……. 지금 최저임금이 시간당 얼마던가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세월호 침몰, 소름끼치지 않아요? 남과 북에서 벌어지는 협잡과 거래와 다툼, 욕 나오지 않아요? 금융장사꾼들의 협잡, 그놈들의 사치스러운 파티 비용, 휴가 갈 때 타고 다니는 전세 제트기 비용을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빚 내고 집 팔아 지불한 셈입니다. 화나지 않아요? 석유 때문에, 세계 제패를 위한 전략적 지정항적 고려 때문에 학교에, 시장에, 거리에 미사일을 쏘고, 테러를 하고, 콜래트럴 대미지라 떠벌이는 게 아무렇지 않은 세계의 꼬락서니, 무시무시하지 않아요?

 

자본과 권력은 틈만 보이면 거기에서 장사를 하고 세금을 걷습니다. 장사를 위해, 이익을 위해 전쟁이라도 벌입니다. 그들 사이의 결탁은 점점 더 완강하고 철저해질 겁니다. 인간은 그들에게는 돈 조금 주고 일 시켜먹는 존재, 노동이나 하고 소비나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국이니 민족이니 하고 선동하여 총 하나 쥐어주고 전쟁터로 몰아낼 때는 또 애국전사가 되기도 하구요. 그 이상의 인간을 그들은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노동하고 소비하는 기계로 진화, 또는 퇴화시키려고 작정을 한 듯 보입니다. 전투까지도 이제는 봉급 주고 시켜먹습니다. 노동처럼 죽이고 노동처럼 피살당합니다.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인간으로 살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인간, 가장 소박한 의미에서의 인간 말입니다. 홍익인간, 이라 할 때의 인간, 사람이 곧 하늘이다, 할 때의 사람, 멀리 갈 것도 없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라 할 때의 인간 말입니다. 연애하는 젊은 인간, 어떻습니까? 그마저도 어려워지는 형편이라니,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인간 하라는 겁니까?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보면, 오스카가 태어나기 싫다고 뻗대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런 놈의 세상에선 태어나기도 싫고 살기도 싫다는 겁니다. 이러다 정말 인간 하기 싫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타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농담이지만 단순한 농담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 동물들의 정글, 아니면 노예들의 수용소가 되겠지요.

 

넌덜머리가 안 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서 하는 얘깁니다. 아침에 깨어나면 전철 시간표가 아니라, 주차장에 엉망으로 뒤엉킨 차들 사이를 속히 빠져나갈 궁리 같은 것부터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일모레까지 요금 내지 않으면 끊겨버릴 전기와 전기요금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옆에서 자는 아내ㆍ남편의 숨소리, 옆 방에서 자는 아이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 어제 서운한 낯으로 헤어진 여자친구ㆍ남자친구의 심사, 이런 게 먼저 궁금하고, 보고 싶고, 그렇게 사는 세상 말입니다. 이게 욕심인가요? 이게 게으른 건가요? 아닙니다. 이걸 게으르다 하고, 이걸 욕심이라 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이 세계를 동물 농장이나 노예 수용소로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구상 중인 작품 가운데에서 한 인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닙니다.) "인간이 그런 자들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싸우는 것이다.”

 

등장인물 이름이 영어가 많은데요. 세계화가 극한으로 실현된 세상을 예견한 걸까요.

 

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지금 말씀하신 대로 세계화,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자기정체성, 일관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세계의 면모를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각인에게 요구하는 바는 노동자와 소비자로서의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외에도 무수한 면모와 성격, 생각과 정서 등이 존재하지만, 극단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되고 인간이 객체화되고 나면, 노동자와 소비자로서의 기능 외에는 무용지물로, 귀찮은 것으로, 어쩌면 범죄적인 것으로 취급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어쩌면 노동자ㆍ소비자에게서 이름조차도, 성별조차도 제거하고자 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요? 그런 세계에서 각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그 정체성이 성가신 것, 무의미한 것, 보잘것없는 꼬리뼈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면 아마도 자신의 촌스러운 본명을 버리고 세련된 가명 또는 예명을 선호하는 영화배우들, 연예인들처럼, 사람들은 기꺼이 멋진 다른 이름을 지니고 싶어하게 되지 않을까요? 어제까지 공장에서, 또는 편의점에서 일할 때의 불쾌감, 슬픔, 절망을 다 지워 없애버리는 심정으로 머리칼을 자르듯, 샤워를 하듯, 이름을 바꾸는 거지요. 또는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제복으로 갈아입듯이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자아를 배급받는다고나 할까요. 직업을 바꿀 때마다, 셋집을 바꿀 때마다, 어쩌면 화장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또는 날씨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한다면, 더구나 세상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미 출판된 작품에 대해서도 누군가 저작권법으로 걸면, 판매가 금지되고, 도서관에서는 열람이 금지돼요. 책 일부에 먹물이 칠해지거나, 철편으로 책장이 봉쇄되거나.”


환경보호법 역시 검열을 위한 중요한 장치였다. 종이책 제작이 환경파괴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2067년 환경부는 출판을 심의하고 허가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이유 없이 출판이 방해받는 것을 막는다는 취지로 출판진흥부가 그 권한을 나눠 갖게 되었다. 이들이 무엇을 근거로 출판을 허가하고 불허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333쪽)

 

미래의 책을 묘사하는 대목이 재밌었습니다. 소설가는 일반인보다 독서의 형태를 더 고민할 것 같아요. 미래 어떻게 될까요?

 

제1세계에서 저작권법을 운영하는 방식은 지극히 위험해 보입니다. 저작권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 조직들이 독점과 최대이윤 추구라는 목적으로 저작권법을 악용하거나 왜곡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과도한 제약이 가해져서 오히려 세계의 지적 창의적 발전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거지요. 아마 앞으로도 저작권법은 더 배타적으로 운영되리라고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어쩌면 검열 못지 않은 장치, 오히려 창조적 발전이나 자연스러운 발전을 제약하는 장애가 되지나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아리엘 도르프만이라는 희곡작가가 쓴 『독자들』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 작가는 환경 독재라는 재미있는 발상을 통해 검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작품인데, 우연한 기회에 제가 그 작품을 번역한 적이 있고, 출판사 <창작과비평>과 한국작가회의의 초청으로 아리엘 도르프만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작품이 한국에서 초연되는 것을 같이 본 적도 있습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몇 해 전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강철무지개』에서 출판과 검열에 대한 에피소드 가운데 일부는 그 작품에서 시사받은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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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늘 고민거리

 

노동, 소외가 어쩌면 거대 담론인데요. 요즘 문단에서는 다소 드문 거대 담론 같아요.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는 편인가요?

 

물론 봅니다. 거대담론이라는 말 자체를 참 오랜만에 듣습니다. 그만큼 작가들의 관심이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문학에 대한 계몽주의적 태도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폭압적 독재시기를 거치면서 당당한 명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모든 자유가 억압되어 있는 상황에서 문학은 어쩌면 언론의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사실주의, 요즘은 현실주의라는 말도 쓰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사실주의적 문학이란 사실상 무한히 사실주의적이 되고 보면 역사가 되고 말 것이요, 그렇다 하여 역사로부터 멀어지고 또 멀어지기를 거듭하면 그때는 덧없는 공상적 헛소리가 되고 말 거라는 얘기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글쟁이들은 모두 그 중간 어딘가에 서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거대담론이냐 미시담론이냐는 관점은 어쩌면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이 딱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거든요.

 

다만, 아까도 잠깐 얘기된 것 같은데, 문학이 시장에 너무 가까워지고, 출판사가 시장에 예속되고, 매몰되고, 그렇게 해서 문학 자체가 선별 과정을 통해 왜곡되거나 기형적으로 과장되는 일이 잦고, 그런 일이 제법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이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여행할 기회가 흔해지면서, 외국에 대한 이야기, 해외에서 벌어지거나, 제가 보기엔 별로 필연적 동기가 없는데도, 공간적 배경을 외국으로 삼아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 자체, 나쁠 것이야 없지요. 하지만 어디서건 결국은 문학이란 사람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그들이 몸 담고 살아내야만 하는 이놈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기나 진기명기 같은 걸 쓸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저는 더 젊은 작가들, 작가 지망생들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신춘문예나 소설 공모의 심사를 하면서도 종종 느끼는 일인데, 젊은 작가들, 작가 지망생들은 꾸준히 오늘날 그들이 처한 세상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 탐구 방식은 아직 다소 서투를지라도 그 탐구의 정신을 놓치지 않는 한 그들의 시야에서 새로운 문학,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또는 학교를 떠나서 세상에 나서는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라는 덫에 빠지고 마는 이 낯설고 잔인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런 난감함을 나는 자주 발견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해방 이래 이 나라에 이처럼 많은 직장이 생긴 적이 없었을 겁니다. 동시에 이처럼 많은 비정규직, 시간제 일자리가 생긴 적도 없을 겁니다. 사실 이 나라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비슷한 일은 이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그 세대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또래의 작가들에게 계몽주의가 헤어날 수 없는 화두였듯이 말입니다. 그 가운데 그들은 질문자가 얘기한 동시대의 노동과 소외를 발견할 것이요, 자신들의 화법과 이야기를 찾아낼 겁니다.

 

지금까지 작품이 현실과 문학의 경계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지금 작가님의 주된 고민은 무엇인가요.

 

늘 인간이지요. 인간과 세계의 관계이고요. 세계라 할 때 그것은 때로는 독재이기도 했고, 자본이기도 했고, 혁명이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또래 작가들에게 자아는 한때 역사와 세계의 지평으로 확대되어야 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 거대담론이나 계몽주의가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것은 우리의 자아가 그처럼 확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자본의 공격은 거세지고 있는데,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좌파는 보잘것없이 수세에 빠져 쩔쩔매고 있는 형국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이라거나, 들뢰즈, 지젝, 임마뉴엘 월러스틴 같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물론 그들의 지혜에 감탄하면서도, 아직은 여전히 암중모색의 지경이라고 여겨지고요.

 

인간과 인간관계의 영역은 지속적으로 점점 좁아지고 그 자리를 자본, 시장, 폭력, 선전, 그리고 욕심과 절망이 야금야금 차지해 들어오는 중입니다. 인간이 쫓겨날 때마다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늘 거대한 소외, 거대한 욕망, 막강한 기형이지요. 온갖 무리를 무릅쓰고 잠실에 들어서는 중인, 한국에서 가장 높고 가장 막강해질 작정이라는 거대 쇼핑몰 건물 같은. 그런 공허, 그런 기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글을 좋아하게 된 건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책 읽는 게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신장하고 폐가 약해져서 2년 동안 학교를 아마 대여섯 달이나 갔을까요? 그래도 다행히 입원은 하지 않고 집에서 누워 지냈어요. 그때 부모님이 스물네 권짜리 어린이 문학전집을 사주셨는데, 그걸 정신 없이 읽은 것이 최초의 강렬한 독서 체험이었어요. 며칠 사이에 그걸 다 읽었을 겁니다. 그 뒤부터는 눈에 띄는 건 다 읽었어요. 읽을 게 떨어지면 아무도 안 보는 백과사전까지 뽑아 읽었어요. 특히 사람이나 동식물 사진이 붙어 있는 항목을 골라 읽었지요. 거기 보면 그 인물의 일생 같은 것이 요약되어 있거든요. 그거 재미있더라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반항적이었는데, 선생님, 부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여, 그때 나를 설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책이었고, 날 위로한 유일한 것이 책이었어요. 성경, 외경, 불경, 영문판 바가밧기타, 그런 것까지 그 시절 다 읽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요. 책은 평생 지긋지긋하게 읽으며 삽니다. 평생 읽기나 하고 살았더라면 정말 속편하고 좋았을 것을 괜히 쓰겠다고 나서서 이 꼴입니다. (웃음)

 

창작 중간에 어떤 방법으로 머리를 식히나요.

 

걸어다니는 걸 좋아해요. 산에 가는 걸 좋아하고요. 한 동네, 정하고 무작정 걷기 시작하여, 일주일, 때로는 보름, 골목까지 돌아다닙니다. 가장 최근에는 창신동 언저리를 한 일주일 돌아다녔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르고 매일매일이 다르거든요. 걷다가 피곤해지면 어디 들어가 맥주 한 잔 마시고, 맥주집 구경하고, 사람들 구경하고, 허름한 동네 식당 들어가서 백반 한 상 먹고. 또 나와서 걷고. 피곤하면 또 아무데나 들어가 커피 한 잔 하며 구경하고. 그게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게 사람 구경입니다. 젊은이들의 변화, 특히 놀랍고 재미있지요. 슬프기도 하구요. 나도 베냐민처럼 서울 둔촌동 아케이드를 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거기서만 이십오 년을 살아서. (웃음) 영화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합니다. 바흐, 평생 듣습니다.

 

다음 작품은?

 

앞에서 얘기한 지점의 연장인데요, 이런 기괴하고 험악한 세상에서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한 남자와 무수한 남자를 조금씩 사랑하는 여자,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구상 중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머리 속의 일입니다. 머리 속으로는 아무리 궁리해봐야 사실 쓰기 전엔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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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무지개최인석 저 | 한겨레출판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견고한 작품 세계를 축적해온 중견작가 최인석의 열두 번째 장편소설. SS 울트라마켓의 계산원 '지니(차지연)'와 서울클라우드익스프레스의 화물 배달기사 '제임스(윤재선)', 세상을 바닥부터 경험하며 분노와 복수로 살아온 '멜라니(안영희)'와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간호사 '아이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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