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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살아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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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시인이고 싶었습니다


시인의 숨결로 호흡한 지 45년, 미당의 극찬을 받으며 등단한 ‘천재 문학 소녀’는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그러나 문정희 시인은 여전히 젊은 작가다. 새롭게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열정,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목소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늙음이 아닌 낡음을 경계하며 살아왔기에 그녀는 오늘도 ‘생애 가장 젊은 날’을 맞고 있다.

 

“45년 동안 시를 써왔지만, 저는 오늘 등장한 시인이 제 라이벌이라고 생각해요. 시의 연조가 깊어졌다는 건 시의 계단이 높아졌다는 뜻과는 별개잖아요. 잘못하면 상투적이거나 낡아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죠. 그나마 한 가지 자부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썼다’는 거예요. 좋은 작품이었건 실패작이었건 일단 썼다는 점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한 번도 붓을 멈추거나 쉬지 않았으니까요.”

 

『살아 있다는 것은』 안에서 시인은 “오직, 순간만이 나의 전부다”라고 말한다. 지나간 시간도 다가올 시간도 아닌 지금의 순간을 살아냈기에, 신선한 시선과 생동하는 감성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에는 모든 순간이 숫처녀였던 생의 비의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순간도 이전의 경험으로 인해 익숙해지지는 않잖아요. 그런 점에서 인생은 철저히 처음인 것이고, 다시 반복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순간인 거죠. 다행히도 그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선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45년 동안 시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살아있다는 건 순간순간 파도치는 것이고 그 파도는 영원히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거죠.”

 

‘살아 있다는 것은 /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살아 있다는 것은」). 이번 책에 실린 시와 수필들은 문정희 시인이 탄생시킨 리듬의 조각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소리들을 따라가다 보면 시인의 지난 시간과 만날 수 있다. 그곳에는 “젊은 날의 나의 슬픔과 상처, 그리고 나의 사랑과 절망”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노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제가 이미 떠나온 기억에 대해서 낡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기억은 생명을 이루는 나이테처럼, 진액처럼 여전히 제게 묻어있기 때문이에요. 그 진액이 흘리는 피 때문에 지금 제가 살아있는 것이고요. 『살아 있다는 것은』을 읽으면서 다소 간지럽고 창피한 순간도 많았어요. 그런데 어차피 지나온 것들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즐겁게 읽을 수 있더라고요. 자칫하면 수다 정도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들인데, 다행히 글로 남은 덕분에 후배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아요?”

 

문정희 시인은 책의 서문에 “나는 오직 시인이고 싶었습니다”라고 적었다. 시라는 모국어로 자신을 혁명하고 싶었기에 가능하면 산문도 피해왔다는 것이다. 시의 호흡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걱정과 달리 『살아 있다는 것은』에 수록된 수필들은 그녀의 시 세계를 보다 깊고 넓게 조명해준다. 시 안에 담긴 감성과 시간들을 또 다른 호흡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등단 후 20여 년 동안은 수필집을 출간한 적도 많았어요. 그때는 시라는 틀 안에서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격정이나 젊음의 에너지가 많이 있었거든요. 시대도 그걸 요구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까 시로써 얘기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나는 시인이었으니까 시로 끝까지 한 번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산문을 자제했죠. 자신이 빼든 칼에 대한 철저함이야말로 목숨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설령 많은 명예나 돈을 가져다주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칼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살아 있다는 것은』에는 시와 산문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그 모두가 문학이라는 호흡 속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자유라는 이름의 공기, 고독이라는 이름의 음식


문정희 시인에게 있어 시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호흡이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스스로를 시의 집에 살고 있는 존재라 정의한 그녀는 ‘이보다 더 최상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수긍이 가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호흡에 이끌려 시의 공간으로 들어섰던가.

 

문정희 시인은 국내의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며 대중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2012년 프랑스 퀼트르(France Culture)의 인기 프로그램에 번역 시선집 『찬밥을 먹던 사람』이 소개되었고, 최근에는 프랑스의 예술전문방송 아르테 텔레비전이 <기적을 이룬 한국>이라는 5부작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그녀를 취재하기도 했다. 시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문정희 시인은 자신만의 영역을 성공적으로 구축해 낸 것이다.

 

“시는 광장의 장르가 아닌 밀실의 장르죠. 밀교와도 같은 거예요. 그러나 모든 사람 속에는 시를 갈망하는 원시림이 있다고 봐요. 다만 그 원시림을 깨우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인데, 조금의 촉매를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 안에 잠들어 있는 욕구를 살아나게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시가 대중화 되지 않은 현상에는 시인의 잘못도 크다고 할 수 있죠. 너무 암호 같은 이야기를 한다거나, 육화되지 않은 소리로 괴성을 지르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예요. 진정으로 인간 본래의 좋은 숨결을 내뿜어 준다면 사람들이 시를 멀리할 이유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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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함께 고독을 화두 삼아 시를 지어온 작가로 평가받는 문정희 시인. 그녀가 들려주는 삶의 고독에 관한 이야기는 『살아 있다는 것은』안에서도 이어진다. 시는 고난의 산물이고 시인은 고통과 깊이 손잡고 있는 존재라는 독백을 들려주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에게 어쩌면 고독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 주는 것은 / 오직 이것뿐이네 // (중략) //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의 이불 속에 / 알몸을 넣으면 /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쓸쓸」)

 

“고독하지 않으면 시혼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고독을 섭취하지 않으면 포만해져서 짐승같이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철저히 자유로워야 하죠. 자유라는 건 인간으로 태어나 당당히 마셔야 할 공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성’ 역시 문정희 시인의 시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화두다. 제도와 전통의 틀에 얽매인 여성의 몸, 자본에 치우친 여성의 몸, 에로스의 몸, 아이를 낳는 생산자로서의 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여성의 존재를 고찰해 온 시인은 ‘여성적 생명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혀 왔다.

 

그러나 지난해에 시집 「응」을 발표하면서 그녀는 “그동안 피지배자로서 억압받은 여성의 삶을 많이 노래했는데 여성성이라는 문제에 너무 오래 집착하는 것도 굴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야성의 목소리로 생명을 품고 키우는 대지로서의 여성성’에 대해 노래하겠다며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한국 현대시의 역사를 보면 근본적으로 여성호흡이에요. 김소월, 한용운, 서정주, 박목월, 정지용, 모두가 그렇죠. 그것은 좋다 나쁘다로 이야기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에요. 여성 호흡을 차용할 수밖에 없었던 전통적이고 현대사적인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세계에 한국 문학을 내놓으려면 많은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닌 유일하고 가장 좋은 것이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글로벌한 감성 속에서 여성 호흡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제게는 견딜 수 없이 지루해요(웃음). 제 내면에 여성과 모성마저 벗어버리고 싶은 야성이 있기도 하고요. 시집 「응」에서 이야기한 여성성은 남녀의 틀 속에 갇힌 것이 아니에요. 여성이 가진 생명 본래의 창조성에 대해 말한 거죠. 자신 있고 당당하게 하늘 아래에 여성을 내놓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 파도치는 삶


또한 문정희 시인은 “오늘날 남자를 통과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시를 쓰기 어렵다. 남성을 이해하고, 남성의 원형질을 살려주는 것도 시의 역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남성을 배제한 채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 『남자를 위하여』에 수록된 시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에서 진정한 남성성을 찾던 그녀의 목소리는 『살아 있다는 것은』 속에도 녹아있다.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 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오는 / 거대한 파도를 // 몰래 숨어 해치우는 /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 /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뿐 /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 (중략) //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 검은 눈썹을 태우는 /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 멸종위기네’ (「다시, 남자를 위하여」)

 

“시 안에서 남성을 말할 때 가장 큰 부담은 문학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문인이지 여성학자나 여권운동가가 아니잖아요. 문학성을 획득한 작품으로써만 남성을 노래해야죠. 그것이 제일 어려웠어요. 문학성이 있는 작품을 생산해서 감동이든 충격이든 변화든 끌어내야 하니까, 많은 고민을 했죠. 남성도 한 존재로서 보면 가엾고 예쁘고 사랑스럽잖아요. 그래서 남성도 타인으로만 보이지 않았어요. 다만 어린 여자를 찾거나 돈이나 힘으로 성을 취하는 것이 사내다움인 양 오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죠. 그건 사회가 잘못 기른 것이고 교육에 의해서 고쳐질 수 있다고 봐요.”

 

문정희 시인과의 만남은 『살아 있다는 것은』이 담고 있는 그녀의 순간들을 되짚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 과정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인이 짓고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한 시 세계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순간’으로 돌아왔다. 한 번 뿐인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 살아온 시간들이 시인의 세계를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너무 소중한 거니까 순간순간을 시시하게 보내서는 안 되죠. 저는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요.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있느냐고요. 그리고 항상 같은 대답을 하죠. 나는 시 한 편이면 된다고요. 살아가는 일이 생명이 가진 존귀함 그대로 숨 쉬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존재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잖아요. 인생은 축구 게임이 아니에요. 모든 판결에서 이겨야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최선을 다해서 파도치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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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은문정희 저 | 생각속의집
《살아 있다는 것은》 이 책은 올해로 등단 45년을 맞은 문정희 시인의 주옥같은 시와 에세이를 엮은 것이다. 이 책에는 시에 목숨을 걸 듯 치열하게 살아온 문정희의 뜨거운 시(詩) 인생이 아낌없이 펼쳐져 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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