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일생에 한 번 받기도 쉽지 않은 문학상을 한 해 두 번이나 받으며 등단한 서유미 작가. 2007년 『판타스틱 개미지옥』으로 문학수첩작가상을, 『쿨하게 한 걸음』으로 창비장편소설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당신의 몬스터』에 이르기까지 서유미 작가는 이야기의 힘을 증명했다. 그녀가 쓴 소설은 현실을 향한 비판적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었다.
『판타스틱 개미지옥』은 욕망이 집약된 백화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추리소설 기법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쿨하게 한걸음』은 별 것 없는 30대 인생을 실감 있게 묘사해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당신의 몬스터』에는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하면서 자본주의의 욕망을 속도 있게 묘사했다.
전작이 인물과 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에 집중했다면 『끝의 시작』은 사건을 겪어내는 인물의 내면 묘사가 두드러진다. 어머니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영무. 그에게 여진은 이혼하자는 말을 건넨다. 한편 20대 취업준비생 소정에게 삶은 고되기만 하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녀를 보는 남자친구 진수의 눈빛도 예전처럼 애틋하지는 않다. 세월은 꽃피는 봄 4월로 향하고 있지만 소설 속 인물들에게 이 기간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우리 모두 얼마나 외로운지, 사랑하고 싶어하는지
2013년 2월에 임신한 걸 알았고, 임신 기간 내내 『끝의 시작』을 썼어요. 10월 22일에 겨울호 마감하느라 원고를 보내고 10월 23일에 아이를 낳았어요. 그 이후에는 아기 키우고 틈틈이 에세이 쓰고 새 소설 준비하며 지내고 있어요.
이전에 쓰신 장편 3편이 개성 강한 인물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그 인물 사이에 사건이 있었다면 이번 책은 서사보다는 분위기, 정서가 중요한 작품 같습니다. 『끝의 시작』은 다르게 써 보자는 계획이 있었나요.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은 서사와 배경, 인물이 중요한 작품이었고 『당신의 몬스터』는 영화 같은 소설을 써 보고 싶어서 상상력을 많이 동원했었죠. 첫 책이 나왔던 2007년 무렵에는 소설에 재미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재밌는 이야기, 한 사건에 얽힌 여러 유형의 인물들,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고요. 빠르게 읽히는 작품을 쓰고 나니까, 이번에는 차분하게 인물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 좀 더 사람들의 이야기를 깊이있게 다룰 수 없을까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4번째 장편입니다. 『판타스틱 개미지옥』이나 『당신의 몬스터』가 어두운 느낌을, 『쿨하게 한 걸음』은 상대적으로 밝은 느낌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 중간에 있는 듯합니다.
『끝의 시작』은 어떤 경계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는 당분간 인물의 심리, 내면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제가 서사를 해체하는 걸 쓰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그 속에 서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겠지만 좀 더 인물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쓰게 될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시작점이 되겠죠.
작가님의 작품에는 ‘자본주의와 욕망’이라는 화두가 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판타스틱 개미지옥』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을 상징화하는 공간인 백화점이 전면에 등장했고요. 『당신의 몬스터』에서도 욕망으로 부서지는 인간 군상을 묘사하셨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욕망’보다는 ‘절망’이나 ‘체념’과 같은 정서가 두드러지는 듯합니다.
그동안 체제나 세태에 대한 고발과 그 안에서 욕망하는 인간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는데, 이번에는 그 인물들이 겪었을 상처, 상실에 대해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관계나 상황 속에서 느끼게 되는 근원적인 절망인 이별, 가난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결국 모두 얼마나 외롭고 사랑하고 싶어하는가 보여주고 싶었어요. 독자가 읽었을 때 ‘이거 내 모습인데?’ 하고 공감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20대 취업준비생인 소정, 결혼과 일로 고민하는 30대 여성 여진, 딱히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일상을 견디는 40대 영무, 죽음을 앞둔 60대 영무의 엄마 등은 우리와 주변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죠. 어떤 기자 분이 요즘 한국 소설이 많이 어두운데 그래도 『끝의 시작』은 결말 부분이 희망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우리 현실이 어둡고,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영향을 받는 작가들의 글이 어두워진 것 같아요.
4월은 누군가에게 깨지고 헤어지는 때
한 인터뷰를 보니 세월호 사건이 있고 퇴고하기가 어려웠다고 말씀하셨던데요.
소설을 쓴 건 그 전인데 사고가 터지고 나서 제가 죽음을 너무 피상적으로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부분인, 4월이 지나가는 장면을 많이 만졌습니다. 세월호는 공간적으로는 멀리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일처럼 느꼈잖아요. 슬프고 힘들어하고 아주 힘들게 거기서 빠져나와서 현실로 돌아가는 과정을 저도 겪었어요. 그 과정을 생각하면서 퇴고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죠.
열린 결말인데요. 분량을 조금 늘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요.
책을 읽은 분들 중에서 소정은 어떻게 되느냐, 영무와 여진은 정말 이혼하느냐, 이렇게 묻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냥 이 소설은 이 정도인 게, 이만큼 보여주고 끝을 맺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 독자들이 저마다 인물의 끝과 시작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소설에서 그리는 분위기는 어두운데, 시공간적 배경은 4월 여의도 벚꽃축제입니다. 또 4월은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기도 하고요.
처음부터 벚꽃이 피는 4월에 엄마가 죽고, 연인과 이별하는 이런 밑그림을 그렸어요. 꽃 피는 계절인 봄이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고, 시작되는 느낌이지만 누군가의 삶에서는 죽어가고 깨지고 헤어지고 끝나는 계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반대와 역설의 이미지를 잘 그려낼 수 있을까 걱정은 됐어요. 잘 쓰면 상생이 되는데,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으니까요. 퇴고하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만졌죠.
뉴스에서는 여의도 벚꽃 축제가 성황리에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주말을 맞아 윤중로를 찾은 사람들이 벚꽃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그곳 어디에도 개인의 사연 같은 건 등장하지 않았다. 짧은 영상 안에는 꽃과 거리, 웃는 사람들만 존재했다. 축제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듯. ( 137~138쪽)
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님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된 장면인가요?
개인적으로 여의도를 좋아하진 않습니다. (웃음) 매년 뉴스에 나오니까 호기심이 나서 여의도는 실제로 딱 한 번 가 봤어요. 벚꽃길이 예쁘긴 한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던 상황이 이런 장면과 비슷했겠구나 싶더라고요.
신인 시절과 지금의 글쓰기, 스스로 변했다고 느낄 때가 있나요. 초기 작품도 좋았지만 이번 작품에는 특히 문장이 촘촘하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다른 것도 잘 못하지만, 가장 자신 없는 게 사실 문장이었어요. 아직도 저만의 문장을 찾아가는 중이죠. 전작에서는 상황을 설명하고 서술하는 문장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서는 인물 내면 이야기를 쓰다 보니 필연적으로 문장이 촘촘해졌죠.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보다 소설을 쓰는 게 어려워졌어요. 오래 걸리고요. 예를 들어서 노을 지는 장면을 묘사한다고 한다면, 한 번 쓴 묘사를 다시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작품이 나올 때마다 단어나 문장이 가난해지는 걸 느끼죠.
표지가 참 예쁩니다. 혹시 표지에 얽힌 뒷이야기도 있나요.
소설에 상처 입은 사람들 이야기가 많다 보니, 처음 표지는 상처받은 여성의 모습이었어요. 그것도 매력적이었지만 너무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더라고요. 어차피 이야기가 어두운데, 굳이 표지까지 그럴 필요는 없겠다 싶었죠. 지금 표지는 휴양지 느낌이 많이 나요. 상처받은 주인공들에게 꼭 필요한 게 휴양지가 아닐까 해서 이걸로 정했어요. 이전 소설의 표지도 좋았지만, 『끝의 시작』은 다시 이런 표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 만큼 좋아요.
소설가 서유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계속 글을 쓴 게 아니라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신 기간이 꽤 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직장을 관두고 전업작가를 결심하셨나요.
이 이야기는 예전에는 많이 했는데, 오랜만에 하게 되네요. 국문과에 갔을 때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는 기자가 각광받는 직업이었고, 실제로 잡지사에 들어가서 3~4개월 생활을 해봤어요. 기자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다른 업무가 참 많더라고요. 기자는 안 맞는구나 해서 관뒀어요. 그 뒤로 일을 한번 시작하니 관두기가 쉽지 않아요. 마침 IMF까지 터지고 나니 더 일에 매이게 됐어요.『끝의 시작』의 소정처럼 뭔가를 위해 1년을 준비할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 뒤로 이런 저런 회사에 잘 다녔어요. 여름휴가가 오면 휴가 때 많이 읽고 써야지 생각했지만 별로 못 읽고 못 쓰고 다시 일하고, 가을이 지나면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신춘문예 생각나고, 연초에 당선작을 읽으면 부럽고 이런 생활을 몇 년 했어요. 그러다가 2005년에 관두고 신랑과 원주로 글 쓰러 갔죠. 명절에 늘 들었는데, 그 해 유난하게 걸린 말이 있었거든요. 어른들이 술 드시면 “나도 왕년에 ~을 꿈꿨는데, 내 인생 이렇게 꺾일지 몰랐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최고인지 알지?” 이런 말씀하시잖아요. 그 말을 들으니, 아 나도 이대로 늙으면 저런 말을 하겠구나 싶더라고요. 만약 인생을 한 번이라도 걸어봤다면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없을 텐데, 저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랑도 그런 느낌을 받았나 봐요. 한 번 사는 건데, 한 번 써 보자 해서 원주로 간 거죠.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거기서 2년을 썼어요. 원주에서 나온 작품이 『쿨하게 한 걸음』, 『판타스틱 개미지옥』이고 남편도 『굿바이 동물원』초고를 썼고요.
2007년에 문학수첩작가상,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셨는데요. 한해에 두 번이나 상 타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굉장히 좋았죠. 그때 등단한 뒤로 연차로는 올해가 9년차인데, 장편이 4편이고 소설집이 1편이면 아주 많지도 적지도 않아요. 하지만 첫 두 작품이 2007년, 2008년에 나왔으니까 중간에 공백이 길었죠. 2007년에 상을 두 개나 받으니 ‘이 작가는 얼마나 잘 쓰나, 한번 보자’ 이런 시선도 의식했던 것 같고요. 그 뒤로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이었어요. 자뻑에 빠졌다 자학에 빠졌다 정신을 못 차리다 지금은 어느 정도 평정을 찾은 것 같아요. 2007년의 서유미를 생각한다면, 제가 아닌 느낌? 그 사람 정말 좋았겠네,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었지, 이런 느낌이 들어요.
어머니가 된 작가의 가장 큰 고민은 책 읽을 시간과 쓸 시간이 없다는 점일 텐데요.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신랑과 제가 전업 작가다 보니 육아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바통을 이어받듯 하루씩 번갈아보고 친정어머니도 도와주시고요. 아기만 봐야 하는 다른 작가 엄마보다 자유로운 편이에요.
임신과 출산이라는 경험이 창작에 영향을 많이 줄 것 같아요.
아직 글 자체가 막 달라졌다는 느낌보다는 사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모든 사람이 엄마 뱃속에서 나온 사람인데, 왜 세상은 점점 악하게 가는지가 고민이 돼요. 세상에 대한 관심이 훨씬 많아졌고요. 그런 시선이 소설에 반영되는 때가 오겠죠. 간혹 소설을 쓰려면 결혼하는 게 좋을까, 아이 낳는 게 좋을까를 묻는 후배가 있어요. 저도 예전에 선배 작가들에게 묻기도 했었고요. 물리적으로는 도움 안 되죠. 결혼도 절대로 하면 안 되고요. (웃음) 읽고 쓸 수 있는 자신의 시간을 확보해야한다는 점에서는 혼자서 자유롭게 쓰는 게 어쩌면 좋을 수도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좋게 작용할 수 있겠다 생각하는 점은, 시선이 건강해져요. 예전에는 이따위 세상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이런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향한 관심도 제가 죽을 시점인 50년 이후까지 만이었죠. 지금은 100년, 200년 이후까지는 세상이 건강했으면 해요. 제 아이의 아이까지 생각하다 보면 나무도 있어야 하고 식량도 있어야 하고 세상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몬스터』가 나왔을 때 했던 인터뷰에서 깊이와 재미를 놓치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실지 알려 주신다면.
2007년에도 그랬고 『당신의 몬스터』 쓸 때까지도, 영화는 보지만 책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을 책으로 끌어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지금은 읽는 사람만이라도 충족시키자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좀 체념적인 심정인지도 모르지만 읽는 사람은 계속 읽어요. 한국소설을 읽는 독자도 있고, 외국소설을 읽는 사람도 많고요. 언젠가 카페에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고 있더라고요. 읽고 싶어하는 갈망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느꼈어요. 앞으로는 현실을 비판하고 빠르게 가는 작품보다는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요.
끝의 시작서유미 저 | 민음사
서유미의 장편소설 『끝의 시작』. 문학성과 다양성, 참신성을 기치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의 작품을 엄선한 「오늘의 젊은 작가」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보통 사람들이 한두 번씩은 다 경험하는 이별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그것들이 극복되는 예민하고 섬세하고 신성하기까지 한 과정을 특유의 서사성과 서정성 짙은 슬프고 담백한 이야기로 표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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