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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파'의 시선으로 해방공간 3년 다룬 역사학자 김기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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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일제의 항복 조짐이 시작된 1945년 8월 1일부터, 분단 건국이라는 비극적인 역사 사건에 이르는 1948년 8월 14일까지 3년 동안의 역사를 일기체로 써내려간 책이다. 모두 10권으로 분량만 무려 18,210장에 달한다. 매일 12시간씩 꼬박 4년이 걸렸다. 중국사 전공자이자 '역사에세이' 라는 새로운 장르로 그간 폭넓은 저술활동을 해온 저자가 다룬 해방공간에는 우리가 그간 놓쳤던 무언가가 있었다. 분단과 전쟁의 원인이 강력한 외세의 작용 때문이었다는 '외인론(外因論)'의 입장에서 저자는 중도 인사 '안재홍'을 내세워 당시를 바라보았다. 

 

왜 안재홍일까. 해방공간을 말할 때 흔히 떠올리게 마련인 김구, 이승만, 김일성, 박헌영 같은 인사가 아닌 안재홍이었던 이유는 『해방일기』의 작업 이유와도 맥이 닿아있다.


"지금 현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점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과거에 대해서도 겸손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는 저자는 "잃어버렸던 나라를 바로 세우는 올바른 노력"이 '중간파'에 있었다고 보았고,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선인들의 뜻'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해방공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를 정확히 이해하는 시발점이다.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그늘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를 더듬다 보면 많은 부분 뜨겁고 치열했던 당시 상황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도 피 흐르는 역사의 상흔이 어떤 의도에 휩싸여 진행되었는지를 보려면 이 시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그간 많은 사람들이 놓쳤던, 지극히 원칙적이고 상식적인 노선을 주창했던 '중간파'의 가르침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기울어지지 않은 역사의 한 갈래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3부작


『해방일기』 10권을 완간하셨습니다. 엄청난 작업이셨어요. 집필을 시작하실 때와 완간하시고 난 지금, 생각에 어떤 변화가 있으신가요?


바뀐 게 없다면 헛일한 거죠.(웃음) 『해방일기』만이 아니라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냉전 이후'(프레시안 칼럼 연재)와 함께 말하자면 '한국 현대사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00년대를 다룬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1940년대를 다룬 『해방일기』, 또 '냉전 이후'에서 1990년대를 다뤘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나름의 관점을 얻기 위해서였죠. 많이 하는 말로, 역사학을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사실 그 말을 한 E.H.카 자신도 진지한 대화를 위한 자세가 안 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근대인의 오만, 진보에 대한 믿음인데요. 현재가 과거보다 진보된 시기기 때문에 과거의 미개한 것들을 낮추어 보는 그런 시선에서 카도 자유롭지 않았거든요. 61년에 카의 그 (『역사란 무엇인가』)이 나왔고, 제가 68년에 사학과로 전공을 잡으면서 제일 처음 읽은 책 중 하나입니다. 그 책에서 생각을 많이 얻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와서 보면 말이죠. 두 사람이 얘기를 하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의미 있는 대화가 되잖아요? 과거를 깔보는 그런 마음에서 카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에 영향 받은 나도 벗어나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중국 전근대사를 전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 현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점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파악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 과거에 대해서도 겸손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사 작업을 5년 간 해온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사 쪽에서 내가 뭘 밝혀 낸 것 못지않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과거를 보기 위한 현재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하겠죠.

 

무엇보다 중도 인사 안재홍을 내세워 가상인터뷰로 맥을 짚으신 것이 특징적입니다. 특별히 안재홍과의 대화 형식으로 말씀하고 싶으셨던 건 무엇이었나요? 집필을 시작하실 때부터 중도의 시선을 강조하시기도 하셨잖아요.


전체적으로 일기 형식을 취한 것은 통상적인 역사서술에 비해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쪽으로 가고 싶었던 거고요. 대화 형식 역시 그런 의미에서 무게 잡고 과학적으로 확실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추측도 마음껏 하면서 서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은 독자들에게 생각을 보여주는 거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자유롭게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일기 형식, 대화 형식을 취했어요. 안재홍 선생을 모신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선인들의 지혜와 노력을 나도 배우고 싶고,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중간파'에서 많이 배웠으면 하거든요. 당시 해방된 조선의 현실 속에서 중간파의 입장이 잃어버렸던 나라를 다시 제대로 세우기 위한 올바른 노력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때는 여전히 외세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외세에 등 댄 사람들에게 밀려서 현실적인 작용에서는 좌절되고 말았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인들의 힘이 아니라 선인들의 뜻입니다. 그렇게 볼 때 좋은 뜻을 세웠던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중간파, 그 중에서 안재홍 선생을 모셨죠. 안재홍 선생은 다른 분들에 비해서 기록을 많이 남겼어요. 또 역사 연구자였고요. 내가 그 분의 생각을 아무리 추측한다 해도 너무 많이 지어내기는 부담스럽죠. 그렇지만 그 분의 많은 논설, 저술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고, 또 역사학도로서 내 입장, 역사를 생각하는 마음을 이입할 수 있으니까 그런 뜻에서 안 선생을 택하게 된 거죠.

 

전통의 회복을 많이 말씀하셨는데요. '선인들의 힘'이 아니라 '선인들의 뜻'을 본다는 말씀이 같은 맥락에서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망국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자고 했을 때, 이것이 왕조의 멸망 보다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 그 부분에 변화의 의미가 더 큰 거였어요. 그것보다 더 큰 의미는 문명 전통의 단절이라고 책에서 얘기를 했었는데요. 저는 전체적으로 문명 전통의 좌절과 단절을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문제로 보거든요. 지금 이민족 지배는 벗어났잖아요. 미국을 숭상하는 사람들 보면 마음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구나, 싶기는 하지만 그게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 상황은 아니고요. 이민족 지배는 벗어났지만 아직까지 문제를 겪고 있는 이유는 문명 전통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거죠.

 

앞서 E.H.카를 말씀하셨지만 근대가 더 우월하고, 중세와 같은 과거가 미개하다는 시선이 말씀하신 문명 전통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씀하신 거군요.


크게 보면 문명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킨 게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인데요. '서세동점' 현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동아시아에는 19세기 중엽에 닥쳤어요. 제가 희망을 가지는 근거는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현시점에 '서세동점'이 퇴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는 '자본주의 이후'라는 제목을 내걸고 '서세동점'의 퇴조라는 명제를 분명히 밝히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망국 때나 해방 때, 좋은 뜻을 가진 선인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비참한 역사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세계정세가 불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는 제일 기본적인 문제로 봅니다. 그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으로 보는데, 지금 그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거예요. 정신을 제대로 차리면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다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지금 맞고 있어요. 기회를 잘 받아들이는 데 내 작업이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기본적으로는 먹물의 공부지만 현실적으로도 이것이 보람을 거둘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없지 않죠.

 

서양중심주의를 벗어야


지금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후대에 가장 비판 받을 역사적 사건에 대해 생각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어려운 질문인데.(웃음) 역사학도의 입장에서는 사회가 역사의 흐름을 잘 읽어서 그 흐름에 순조롭게 어울려가길 바라는 마음이 제일 앞서죠. 이완용을 욕설의 대명사처럼 말하지만 그런 성향의 사람이 그 상황에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에 비해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 이야기 나왔을 때 내가 하도 화가 나서 칼럼을 쓰면서 '이완용 못지않은 놈들이다' 이렇게 욕을 했어요(관련기사 보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7701). 그랬다가 지난 연말에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 나오는 것 보고는 '이완용 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고쳐서 했죠. 지금 생각하니까 '이완용한테 미안하다' 그러면서(웃음). 이완용은 고종이 맡겨놓은 총리대신으로서의 역할을 팔아먹은 건데, 이 여덟 명은 누가 맡겨주지도 않은 권한을 팔아먹었으니까 말이에요. 이완용이 국가 절도범이라면 이건 완전히 국가파괴범이다, 그렇게 욕을 했습니다. 이완용 시대에 그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한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요. 또 해방 때 못마땅한 행동이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이해가 가요. 미국 헤게모니가 퇴조하고 있다는 얘기는 서양에서 70년대부터 나왔고, 이제 어느 정도 자본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얘긴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것을 붙잡고 민주 정책부터 시작해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이거에 매달리는 건 이완용이나 과거의 못난 사람들보다도 더 한심한 거죠.

 

'서세동점'이 물러나고 있는, 그런 지금 시점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전혀 없는 발걸음들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세계관에서부터 완전히 이용당하는, 정복당하는 사회의 멘탈리티가 내면화 되어 있는 거예요. 학술 분야, 당장 역사학만 하더라도 그래요. 카의 얘기라든지 그런 차원의 얘기에 대해서 나 역시도 대학에 그냥 있었으면 그만한 의심도 갖기 어려웠을 지도 몰라요. 그게 여기서 교수노릇 잘해서 명예교수 되고, 학술원 회원 되고, 그런 길에서 함부로 의심을 품으면 별로 유리한 길이 아니잖아요.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지, 이런 식으로 지내기가 훨씬 쉬웠겠죠. 역사학은 그래도 나은 편이고, 사회과학 쪽은 미국에서 공부해 온 사람들이 다 쥐고 있어서 더욱 문제예요. 세계체제론이라든가 유럽중심주의, 서양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그런 노력에 대해서도 아마 우리만큼 외면하고 있는 동네가 별로 없을 거예요.

 

우리나라만큼 엘리트, 지식층이 거의 없는 나라도 드물다고도 하셨어요.


엘리트의 자격기준 중, 도덕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스스로 엘리트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 엘리트의 자격에 도덕성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기서는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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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속성이 내면화된 사람들


해방공간은 참 독특한 시기입니다. 국가 이름 정하기 일화에서 보듯 지금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그 시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결정되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이 시기를 정확히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1945년 상황은 지금에 비해서 종속성이 덜 내면화 되어 있었어요. 35년 일제지배를 겪기는 했지만 그때는 친일파라고 하면 인근 동네에서 누구, 누구 전부 이름을 꼽을 정도로 분명히 드러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종속성이 일반적으로 강해요. 자기의 우월한 위치를 정당화 시키는 기준이 대개 종속성을 배경으로 해서 설정됐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요. 말하자면 미국 박사를 받아왔다, 하면 떠받들어주는 게 있고, 그 속에 이미 종속성이 들어있는 거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종속적이다, 우리 사회가 종속적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걸 자신의 기득권,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마음에는 종속성이 깃들어있는 거거든요. 그런 내면화의 정도가 그때는 훨씬 덜했기 때문에 갑남을녀들도 이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는 방향에 대해 지금 사람들에 비해 훨씬 잘 통했다는 걸 이번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었죠.


인상적인 것이, 1946년 8월에 군정청 여론국에서 여론 조사를 했어요. 길 가는 사람들 팔천 몇 백 명을 대상으로 했으니까 아마 해방공간에서 한 여론조사 중에는 제일 규모가 큰 여론조사 중 하나였을 겁니다. 문항 중, 어떤 체제를 원하느냐고 물었는데 사회주의가 70%, 자본주의가 14%, 공산주의가 7%, 아무거나 좋다가 8% 이렇게 나왔다는 거예요. 사회주의를 사회과학자들이 규정해 준 명확한 개념으로써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극단이니까 절충적인 노선이라고 본 거죠. 자본주의는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체제고, 공산주의는 소유권을 부정하는 체제인데 이것은 소유권을 적정선에서 인정해주는, 생산 수단만 개인 소유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절충적인 노선이라고 봤던 거예요. 그런데 그 정도 개념의 사회주의라면 그 상황에 맞거든요. 자본주의는 산업화가 된 국가한테 유리한 체제였고, 공산주의는 문명 수준이 어느 이상 되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시행에 문제가 있는 체제였죠. 문명 수준이 있으면서 산업화가 되지 않은 그런 사회로서는 사회주의가 정답 맞아요. 당시 사람들이 그걸 잘 알고 쉽게 판단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그런 질문이 주어졌을 때 대답이 명쾌하게 나오질 못하겠죠. 

 

당시보다 훨씬 자본주의가 내면화 된 상태기 때문인가요?


어떤 면에서 문화가 된 거죠. 그 당시에는 입장이 친일파들과 일반인들 외에는 근본적인 이질감이 없었는데요. 지금은 경상도, 전라도 사이의 이질감을 비롯해서 강남 주민과 어디 주민 사이에 어떤 이질감을 일상생활에서 다들 느끼잖아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나왔을 때가 분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내가 살던 명륜동도 같은 골목 안에 부잣집 있고, 가난한 집 있고, 다 어울려서 살았거든요. 같은 가게 이용하고요. 근데 지금은 자기 계층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그저 동네의 종업원들 빼고는 접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인구의 대부분이 됐죠. 그런 것을 포함해서 사회 문화 현상이 여러 조건에 의해 진행되어 그게 사회 전체의 진로를 놓고 얘기를 할 때도 자기가 속한 집단 정체성에 의해서 흐려지는 거예요.

 

역사의 새로운 팩트를 찾는 과정에서 '가정'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해방 이후 경찰 개혁에 대한 아쉬움이 곳곳에 읽혔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고, 만일 제대로 경찰 개혁이 있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경찰이 그렇게 커지면 안 되는 거였어요. 치안 유지를 위한 무력으로 일단 미군이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경찰 인원이 1945년 8월 당시에 비해 1948년 8월까지 세 배가 늘어났단 말이에요. 그 문제가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게 제주도였죠. 당시 기존 인원의 몇 배가 늘어났는데 몇 배 늘어난 숫자가 그것이 질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고 질서를 파괴하는 역할을 했던 거죠. 제주에서 4.3 사태로 해서 극단적으로 드러났잖아요. 그런 것처럼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아니어도 그로 인한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났던 거예요.

 

그런 문제가 쌓이고, 왜곡 되고 하면서 지금까지도 경찰조직에 대한 불신에 영향을 준 것 같은데요.


물론이죠. 이 정도 규모의 국가에서 국립 경찰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규모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문명국이라고 할 수가 없죠. 이런 대규모의 경찰을 일원 조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 문명국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디 가 봐요. 우리나라 경찰의 10분의 1 규모 되는 경찰이나마 일원 조직으로 운영하는 곳이 어디 있는지 말이에요.

 

그것이 도리어 권력의 손, 발이 돼서 오히려 국민들의 자유나 권리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이 되잖아요.

그럼요. 61년 이후는 군사독재라고 하는데 60년 이전은 경찰독재였거든요. 그때는 여순 반란 사건이라든지 제주 4.3사태라든지 이런 것을 보면 군대는 경찰 앞에서 전혀 힘을 못 써요. 그렇게 경찰이 판을 치다가 6.25 때 군대가 커졌지만 군대는 미국의 컨트롤을 받았기 때문에 정치에 이용되는 데 한계가 있었죠. 경찰 규모는 상대적으로 군대에 비해 작아졌지만 계속해서 권력 운용의 수단으로 이용이 됐어요. 61년 이후를 군사독재라고 하지만 결국은 유사 경찰, 기본적으로 경찰의 성격을 가진 조직에 의해서 권력이 유지가 됐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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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변하고 있어요


독도폭격연습 사건 말인데요. 당시 민족의 공분을 샀지만 속 시원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비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게는 주한 미군 범죄에서부터 전작권 관련한 문제까지 아직 미군과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이에요.


왜 자꾸 욕을 시켜요?(웃음) 사실 그 못지않게 억울한 일 일본놈들한테 많이 당했잖아요? 1910년 이전부터 20세기 내내 겪어온 일이니까요. 그래도 명목상의 주권 국가가 되면서 그래도 좀 그런 폐단의 범위는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미선이 효순이 사건처럼 21세기에 들어와서까지 계속 되고 있죠. 지금은 눈에 보이는 그런 일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불평등 관계에 대한 건 엄연히 계속 되고 있어요. 거기서 일어나는 문제들, 강정 해군 기지 문제라든지, 나토 배치 문제라든지, 조금만 따져보면 명백히 국익 내지 민익에 배치되는 그런 것이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계속 되는 일이잖아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타파해야 할까요?


한국의 대외경제 의존도가 미국에게 2000년도까지 압도적으로 높았고 그 때문에 IMF 사태까지 당하고 그랬죠. 하지만 그런 상황과 대외 경제 관계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지금은 중국이 몽니 부리면 그게 더 무서워요. 미국이 예전 같은 장난질 이제 못해요. 중국이 쐐기를 박을 수 있으니까요. 상황은 변하고 있어요. 상황을 직시하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진로에 대해서 새로 생각할 것들이 많아요.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분들의 노력이 은연중에 쌓인 측면도 있고요. 그런데 특히 지식층의 의식이 그렇게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이제는 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되고도 말하면 안 되는 줄 알고(웃음).

 

친일파에 대해서 말인데요. 올림픽 참여라든지 초창기 체육계 이바지했던 이상백의 사례처럼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수완을 발휘한다는 자체가 후세의 눈에 일본과 타협 내지는 충성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잖아요. 그 내용을 다룬 경향신문은 친일파로 매도되기도 했다는데 이런 복잡한 역사의 다중성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지금 돌아보면 이상백 씨가 살아있을 때 손가락질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해방 전에 어떤 식으로 놀았는지 다들 아는데 손가락질 받던 그런 얘기를 그 뒤에는 자랑스럽게 주변 사람들이 '훌륭한 분이었다' 그러니까요. 내가 아마 기사를 인용했을 거예요.(228~230쪽) 일본에 가서 호탕하게 월세가 얼마라도 좋다고 하며 집을 구했다는 이야기요. 여기서 소작인들이 뼈골 빠지게 바친 돈을 가지고 거기서 그렇게 거들먹거리고, 그것으로 영향력을 발휘한 거죠. 본인이 잘나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인들의 피와 땀을 뿌려서 얻은 결과잖아요. 그걸 자랑스럽게 내놓는 이후의 상황이 문제예요. 장택상이나 조병옥이나 행적을 살피는데 작업이 쉬웠던 것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문제 되는 행동들을 자랑스럽게 전기 같은 곳에 막 찍어 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들이 무슨 짓을 했지,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어요. 만약 그 사이에 사회 분위기가 그 말도 안 되는 인간들, 이런 식으로 제대로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다들 감춰서 내가 조사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웃음)

 

앞서 잠깐 언급하셨는데요, '자본주의 이후'를 다루려고 하신다고요. 그 외에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시기가 있으신가요?


일단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간단히 '서세동점'의 퇴조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하고 있어요. 서양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여러 방면에서 나왔거든요. 내 경우에는 과학 기술사의 관점에서 이게 막장에 왔다, 는 판단을 하게 됐고요. 세계체제론의 경우 경제면에서 비슷한 의견이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학술 사상 면에서 또 비슷한 의견이 있었죠. 서로 다른 경로에서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건 개연성이 굉장히 높은 거예요. 세계체제론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다른 경로에서 비슷한 결론이 어떻게 서포트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죠. 그것을 분명히 중국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많이는 아니라도 그런 방향에 맞는, 중국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함께 소개해서 '서세동점의 끝' 이걸 분명히 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금년 말까지 1년 정도 하려고 해요.


그것보다 더 큰 일은 나의 원래 놀던 동네, 중국사로 돌아가서 일단 '자치통감'을 다시 읽어보려고 해요. '자치통감'을 전에 읽을 때는 카의 눈으로 읽었었거든요. 다시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눈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중국인들도 20세기 들어오자마자 노신이라든지, 신문화운동 일으킨 그런 것들이 전통을 두드려 패면서 서양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환이었어요. 그 이후로 학술계, 역사학계에서도 중국 역사를 서양인의 눈으로 보는 것만 통용되어 왔거든요. 맑시스트 사관이든, 자본주의 사관, 진보주의 사관이든 중국인들조차도 다 서양의 눈으로 읽었어요. 이제 중국인들도 다시 봐야겠어, 하는 시선이 틀림없이 나올 거예요. 지금 한국에서 내가 그럴 필요를 느끼고 있는데 당연히 나오겠죠. 그런데 중국인의 눈으로 중국을 보는 것과 중국이 주도하는 천하체제에 속해 있던 한국인의 눈으로 보는 것 사이에는 또 어떤 상당한 편차가 있겠죠. 그래서 새로운 시각을 빨리 제시할 경우에 새로 형성되는 관점에 공헌을 하면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중국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한국의 비중을 키운다든가 그런 효과도 지금 우리 할 나름이거든요. 여태까지 미국이 우리를 잘 봐줬으면, 해서 많은 노력들을 했잖아요? 나에게 친중파라고 해도 좋고, 사대주의자라고 해도 좋은데 나는 그게 필요한 일이라고 봐요.

 

『해방일기에서 다룬 3년의 역사 중에,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1945년 말, 반탁운동의 시작이 마음 아픕니다. 반탁 운동의 주류는 미국의 힘에 기대어 기득권을 지키려는 친일파 집단이었지요. 민족주의의 상징인 김구 선생이 여기에 말려듦으로써 민족주의가 해방공간에서 제 몫을 못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민족 수난사의 주된 원인이 민족 사회 내부의 결함보다 외부의 국제정세에 있었다고 보는 '외인론(外因論)'에 기울어진 관점이지만 김구의 반탁운동 한 가지는 변명할 길 없는 민족 사회의 오류라고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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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10권 :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김기협 저 | 너머북스
“대한민국을 ‘권력의 시장’으로 만든 이승만” - 해방일기 10권 개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대한민국 건국과정이 본 궤도에 들어섰다. 한독당과 중도우익 정당들은 5. 10 선거를 보이콧했고, 남북협상을 주도한 민족주의자들은 분단건국의 길 위에서 방향을 잃었다. 한민당과 독촉은 힘을 합쳐 이승만을 제헌국회 의장으로 밀었고, 김구도 김규식도 없는 국회 안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런데 ‘공공의 적’을 따돌리고 나자 이승만과 한민당은 ‘지분’ 싸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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