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말씀대로 세상에는 훌륭한 컴퓨터 전문가들이 많이 있고 삼성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영입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되면 삼성의 조직문화를 새로 익히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과 일하는 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제가 차선으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6개월 정도 일하다 보니, 제가 이전에 하던 가전제품 영업이 건어물 장사라면 새로 시작한 컴퓨터 영업은 생선 장사쯤 된다는 감을 익힌 것 같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생선 장사를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건어물 장사와 생선 장수. 이 같은 비유는 어떻게 나왔을까. 이명우 교수는 당시 소비자들이 찾는제품이 12주 만에 286컴퓨터에서 386SX로, 3주 만에 386SX에서 386DX로 변하는 현상을 보며, 컴퓨터사업에서 무엇보다 제품의 ‘신선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신선도가 사업 성공의 주요 키워드라는 점에서 컴퓨터와 생선이 같다고 본 것이다. 이명우 교수의 명답에 이건희 회장은 방금 지시한 사항을 취소하고, 외부 전문가를 채용해 서포트를 받을 것을 지시했다.
‘컴퓨터 = 생선’이라는 명쾌한 개념을 떠올린 이명우 교수는 말한다. “보통 그런 자리에 가면 대부분 하는 이야기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아니면 ‘앞으로 잘하겠습니다’잖아요.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회전문 인사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고 어떻게든 내가 그동안 깨달은 바를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나가더라도 내 자리로 올 사람에게는 누가 되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24년간 삼성전자에 몸담고 2001년 말 일본 소니로 스카우트돼 소니코리아 사장 역임, 당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초의 현지인 출신 소니 최고경영자로 화제가 됐던 이명우 교수는 치열한 마케팅 세계에서 땀이 밴 통찰로 해외영업 전문가가 됐고 2006년에는 한국코카콜라보틀링 회장, 2007년 레이콤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교 경영대학 특임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눈높이 소통이 커뮤니케이션의 진리
“고3 때만 영화 84편을 볼 정도로 마니아였어요. 대부분 외국 영화를 봤는데, 세계 다양한 나라의 문화나 사람들을 영화에서 만났죠. 그 때부터 글로벌에 대한 욕구가 생긴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만 보던 에펠탑, 개선문을 실제로 보고 싶었으니까요. 요즘 인문학이 유행이잖아요. 대학 때 인문학을 공부한 것도 비즈니스를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싶어요. 교과에 나오는 공부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아는 게 중요해요.”
이명우 교수가 세계 유수의 바이어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바는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새로운 바이어를 만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비즈니스만 이야기하는 건 상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70~80%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나머지 시간에 비즈니스에 대해 논한다. 동질감을 주는 것, 공감하는 부분이 무엇일지, 그것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트 스토밍(heart storming)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진정성과 신뢰가 중요해요. 브레인 스토밍보다 하트 스토밍이 먼저에요. 한국의 일반적인 학연, 지연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를 알면 소통이 되고 그러면 비즈니스 이야기도 잘 풀리게 되죠. 꼭 상대보다 많이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배우는 자세도 중요해요.”
1980년대 중반, 이명우 교수가 눈높이 소통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일화가 있다. 갈비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독일 바이어가 있었는데 사소한 문제에도 클레임을 거는 무척 깐깐한 바이어였다. 정도가 너무 심한 나머지 이 교수의 상사는 ‘바이어가 서울에 오면 먹기 힘든 한식을 먹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하늘과도 같았던 바이어를 두고 이명우 교수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생선회도 먹지 않는 바이어였거든요. 고민 고민하다가 언젠가 영화에 나온 ‘타르타르’라는 요리가 떠올랐어요. 몽골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음식인데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육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바이어에게 ‘한국식 타르타르’라며 육회를 소개했죠. 최고의 한우를 엄선해서 만들고 또 몽골이 세계를 정복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타르타르스테이크와 한국식 타르타르가 뿌리가 갚은 음식이라고 너스레를 떨었고요(웃음) 그랬더니 눈이 반짝반짝하더라고요.”
내친김에 육개장도 소개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출장을 갔을 때 먹어본 ‘굴라시수프’가 육개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독일 사람들도 굴라시수프를 독일식으로 만들어먹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한국식 타르타르에서 이미 재미를 본 바이어는 ‘한국식 굴라시수프’라는 말에 땀을 뻘뻘 흘리며 육개장을 먹었고, 이명우 교수에게 “미스터 리가 미식가인 줄 몰랐다”며 반색했다.
“상사의 말을 거역할 수도 그렇다고 바이어에게 강제로 먹일 수도 없고, 그래서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영화에서 봤던 타르타르스테이크가 떠올랐고, 굴라시수프의 경험도 생각났죠. 바이어가 그동안 먹어왔던 음식들과 같은 뿌리의 음식이라고 소개를 하니, 거부감이 없었던 거예요. 대화의 상대방이 누구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죠. 다행히 그 바이어는 우리의 뜻을 간파했는지 그 후 더 이상 무리한 클레임이 없었어요(웃음).”
편할 길 대신 어려운 길 선택, 미국에서 MBA 취득
1977년 신입사원 시절, 이명우 교수는 ‘하면 된다’를 좌우명으로 정말 물불 안 가며 일했다. 하지만 직급이 점점 올라가며 무조건 열심히 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15년차 차장의 직급을 달고 있을 때, 미국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으로 MBA를 따러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만해도 MBA가 대중화되지 않았고 이명우 교수처럼 집까지 팔아 유학을 떠나는 케이스는 정말 흔치 않았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어요. 유럽지사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갔으면 더 편했겠지만, 유럽은 이미 경험했으니 공부를 하면 미국으로 가야겠다 싶었죠.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회사에서 승진도 안 되고 평가도 어정쩡해서, ‘나랑 이 일이 안 맞나?’ 이런 심정이었어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포기를 하거나 이직을 하는 게 대부분인데 저는 휴직을 하고 공부하기로 결정했죠. 회사를 관두는 시점이 오더라도 인정을 받을 때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미국에서 2년간 공부를 하고 오니, 굉장히 중요한 자리로 저를 부르더라고요. 중동, 유럽에서 일하고 공부는 미국에서 했으니 지역전문가로서는 제격이었던 셈이죠.”
이명우 교수는 삼성전자 유럽 정보통신ㆍ컴퓨터 판매법인장, 본사 해외본부 마케팅팀장을 거쳐 미국의 가전사업을 총괄하는 부문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삼성전자의 북미시장 진출에 앞장서 대형 유통업체와 거래를 성사시키는 등, 국내에서도 드문 해외 영업 전문가이자 유통 전문가로 실력을 쌓았다. 1999년에는 컨설팅기업 ADL이 미국 가전업계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국제휴머니테리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1년 말에는 삼성전자의 경쟁사인 일본 소니로부터 스카우트돼 소니코리아 사장을 역임했다.
“삼성전자에 24년 동안 있으면서 미국에서 일한 시간들은 자기실현을 하면서 회사에도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정말 재밌게 일하고 있었는데 소니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죠. 사실 삼성에 있으면서 임원들이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처음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상황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나중에는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하나의 기회라고도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람들의 행보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랬죠.”
와튼스쿨에 MBA 원서를 낼 때,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서술하라’는 문항이 있었다. 이명우 교수는 integrity(진실성), consistency(일관성), reciprocity(호혜성)이라고 답했는데, 평상시 이 교수가 비즈니스를 할 때의 원칙과도 같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파트너십도 마찬가지에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측 가능하게 일관되게 소신 있게 해야죠. 신세를 지면 갚기도 해야 하고, 받은 것은 사회에 돌려줄 줄 알아야 하고, 진실성은 물론 1순위이고요.”
이 정도면 됐다?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와인 애호가인 이명우 교수에게는 특별히 잊히지 않는 와인이 하나 있다. 로버트몬다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나파밸리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으로 캘리포니아의 포도주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와인이다. 이 와인이 특별한 이유는 10년 전, 삼성전자가 후발업체 시절 브랜드 인지도가 약해서 겪었던 애환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이다.
“유독 중부에 있는 한 대형 유통업체의 문이 열리지 않았어요. 아예 사람을 만나주질 않아서, 인맥을 총동원해서 간신히 저녁 약속을 잡았죠. 어떻게든 담당자를 설득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담당자들이 와인에 대해 까다롭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몬다비리저브’라는 와인을 좋아한다고요. 근데 가격이 문제였어요. 당시 한 병에 300달러 정도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하며 보통 몬다비와 몬다비리저스를 두고 블라인드 테스팅을 해보기로 했어요. 가격 차이가 큰 두 와인을 상표를 보지 않고 마셨을 때, 과연 구분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한 거죠. 운이 좋았는지 한 사람만 중립을 지켰고 모두 보통 몬다비를 선택했어요. 이 결과를 설명하며 바이어들에게 말했죠. ‘두 와인의 수준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가격은 리저브가 훨씬 높다. 마치 삼성과 소니의 제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의미 있는 테스트가 된 것 같다’고요(웃음).”
와인 시음회가 열린 날, 이명우 교수의 테이블은 더 이상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식사를 즐겼고, 다음 날 본격적인 거래가 성사됐다. 이명우 교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둘 때, 비로소 비즈니스에도 성과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글로벌하게 일했던 것이 후에 모두 자산이 됐어요.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여행을 하고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해보는 것이 언젠가 반드시 도움이 됩니다.”
이명우 교수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다. 과제가 주어지면, 최고의 대안이 만들어질 때까지 데드라인 안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수정하는 것.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만족을 절대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명우 교수가 33년 동안 비즈니스 분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항상 내 한계까지 가보자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면서 ‘이 정도면 됐다’는 식으로 했으면 오랫동안 필드에서 일하진 못했겠죠. 보고서를 써도 10년, 20년 후가 되더라도 후배들이 찾아봤을 때 도움이 되게 써야 해요. 잘 써야죠. 제가 대리였을 당시, 과장님께서 보고서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셨는데 그땐 피곤했지만 지금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 때 같은 부서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 7명이 임원이 됐어요. 무관하지만은 않겠죠.”
『적의 칼로 싸워라』를 읽을 예비 독자들에게 이명우 교수가 조언한다. “말이 되네. 재미있네. 이렇게 책을 읽지 말고 ‘내가 그런 상황이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 적의 칼로 싸워라이명우 저 | 문학동네
이 책은 저자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국내기업과 해외기업, 전자회사와 소비재회사 등 33년 동안 다양한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에서 MBA,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습득한 첨단의 경영이론을 화학적으로 결합해, 남과 달라지고 이로써 탁월해지는 차별화의 방법을 전달하는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비즈니스를 경험하며 겪었던 생생한 실제사례와 ‘아웃사이드인 마인드’ ‘업의 개념’ ‘마켓센싱’ ‘풀ㆍ푸시전략’ 같은 체계적인 경영의 방법론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다름’을 경영하는 2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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