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에 ‘글쓰기’를 입력하고 책을 검색하면 1만 5천 여권의 책들이 얼굴을 내민다. 팔리니까, 원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책일 텐데 ‘노하우’, ‘비법’, ‘매뉴얼’이란 카피를 맞닥뜨리면 다소 머뭇거리게 된다. 그래도 필요해서 책을 골라 읽다 보면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고쳐야 할 부분이 많아서 글을 쓰고 싶던 마음이 달아난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책은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글쓰기의 최전선』을 만났다. 글쓰기 책에 전쟁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무얼까. 치열하게 쓰라는 의미일까? 책 표지에는 7개의 가지각색 펜이 사이 좋게 누워있다. 두께도 길이도 펜촉도 모두 다르다. 다만 촉이 바라보는 방향은 같다. 7개의 펜은 독자들에게 단 한마디를 던진다. “’왜’ 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어렵다. 역시, 글쓰기는 심오해야 하는가? 저자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의 글로 여는 글을 대신했다. 미셸 푸코의 말로 시작되는 17쪽 장문의 글. 밤마다 구직 사이트를 헤매다 글을 쓰게 됐고 자유기고가가 된 저자는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고 고백한다. “글을 쓰고 있으면 물살이 잔잔해졌고 사고가 말랑해졌다”는 그는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했다. 이어지는 서문의 글 ‘글쓰기의 최전선으로’. 저자가 글쓰기 수업을 열게 된 까닭을 차분히 밝힌다.
글쓰기 수업은 내 생애 최고의 배움의 장소였다. 학인들이 ‘이런 삶을 살았다’고 불쑥 내미는 글은 늘 압도적이었다. 질박하고 진지하고 열띠었다. 철학과 문학에서 읽지 못하고 신문과 라디오 사연에서 들을 수 없었던 삶의 진귀한 이야기는 많고도 많았다. 그 비밀스러운 생의 이야기들 덕분에 나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타인과 관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나의 무지를 깨우치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깨칠 수 있었다. 인간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려는 본능을 가진 존재임을 믿게 되었다” (33쪽)
최근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 자신의 트위터에 “읽기와 생각하기와 글쓰기에 대해 매우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삶의 최전선에서 글쓰기를 가르쳐온 경험집약. 책 뒤 ‘글쓰기 수업시간에 읽은 책들’은 아주 잘 짜인 추천도서 목록이다”라고 적었다. 은유 저자는 친구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어디 신문에 대서특필 난 것보다 만 배쯤 더 좋았다”고 했다. 무명작가의 책을 꼼꼼히 읽어준 선생의 평에 평소와 다른 달뜬 기분을 느꼈다고.
‘글 쓰는 사람’ 은유는 2011년부터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2015년부터 학습공동체 가장자리에서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평소 니체와 시(詩)를 읽으면서 질문과 언어를 구한다. 월간 『나.들』에 성폭력 피해 여성 인터뷰를 1년간 연재했고, 산문집『올드걸의 시집』과 인터뷰집 『도시기획자들』등을 펴냈다. 황지우 시인의 「산경」 시구인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를 마음에 새기고 글을 쓰는 저자 은유. 그녀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던 건, 『글쓰기의 최전선』이 가져다 준 감응 때문이었다. 진짜 글을 쓰고 싶은 감흥 아닌, ‘감응’.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후, 사람에 대해 조심스러워졌다
서문만 읽었을 때부터 막 설렜다. 글쓰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다. 책을 내게 된 과정, 계기가 궁금하다.
글쓰기 수업을 하기로 했을 때, “내가 글쓰기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가르쳐도 사람들이 글을 안 쓰면 그만인데”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내가 아는 걸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를 고백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감응을 이끌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마치 글쓰기에 관한 진리의 터득자인 양 수업하는 건 있을 수 없고. 나도 고민하고 방황하고 회의하고 질문하는 가운데,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 생각을 정리했던 글이 서문이었다. 글쓰기 수업을 3년 정도 했을 즈음, 글쓰기 책을 내고 싶다는 제안을 조금 받았다. 글쓰기 책이 워낙 많이 나오는데, 나까지 낸다는 게 민망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일반인들이 글쓰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관심을 갖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눈떠가는 과정이 신비로웠다. 배움과 우정이 일어나는 걸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웠다. 그래서 좀 써보자고 생각했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시작해 올해는 학습공동체 ‘가장자리’에서 글쓰기 강좌를 하고 있다. 책에 글쓰기 수업에 오는 수강생들을 ‘학인’으로 지칭했는데, 대개 뚜렷한 목적 없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 이 책을 ‘목적 없는 글쓰기’라고 지을까도 생각했다. 소설가 되기, 기자 되기, 시인 되기도 아니고 치유 글쓰기도 아닌, 특정한 목적 없는 글쓰기 수업이었다. 목적 없음에서 드러나는 쓸모 없음의 쓸모랄까? 수업을 하면서 그런 부분들이 발견됐다.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가장 많은 수강 동기는 “나를 알고 싶어서”였다. 책을 내고 싶은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홈스쿨링을 하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블로그 인사말이 황지우 시인의 시구,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다 아프지 않나. 우울증도 많고 공황장애도 많고. 글쓰기 수업에 오는 분들이 모두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아프다는 내밀한 고백을 해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게 질병이기도 하고 병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고통이기도 했다. 다 개별적으로 아픈 거다.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고 한 건, 나의 아픔을 사회에 나가 말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좀 나아지니까. 치유가 된다기보다 아픔을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약간’의 믿음이 있다. 글 쓰면 다 좋아지는 것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개인차가 있으니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학인들에게 오히려 배운 것도 많았을 것 같다.
사람에 대한 공부일 거다. 사람들이 대개 자기 개인의 경험의 폭을 넘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도 보고 문학작품을 접하면서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데, 글쓰기 수업에 온 학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상세한 이야기를 통해서 삶이란 게 개개인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 좀 조심스러워졌다. 쉽게 단언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이를테면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이렇게 하면 되지 않아?”라는 생각을 덜하게 됐다. 모두 저마다 삶의 고유한 배경과 조건에서 고통이 발생하는 거고, 이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조금 더 섬세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조심스러워진 것도 같고. 그동안 지은 죄도 생각나고 그랬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나?
이를 테면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쉽게 말했던 것들이다. 글쓰기 수업에 17살 소년이 오는 경우도 있었고 20살 학생이 오기도 했다. 그들이 어릴 적 엄마와 겪었던 갈등 상황들을 듣고 ‘이런 것도 아이들한테는 상처가 되는 구나’를 알게 됐다. 다양한 세대가 모여있으니까 학인들도 서로 인지가 되는 거다. 나이를 좀 드신 분들은 ‘엄마 입장에서는 그렇겠구나’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다양한 입장에서 볼 수 있었다.
최근에 “글 쓰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불행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꽤 공감했다. 저자도 그러한가?
처음 글쓰기 수업을 열었을 때, 토요일 오후 2시에 시작했다. 강의실에 젊은 친구들이 와 있는데 마음이 짠했다. “이 화창한 봄날에 왜 여기에 와 있냐? 행복해지면 잡지 않을 테니 언제든지 나가라”고 했다. 행복한 사람은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글쓰기, 정말 힘들지 않나.
요즘은 SNS 시대다. 사람들의 자기표현도 많아졌는데.
페이스북 같은 곳에 올리는 글은 사소한 자기표현인데, 자기과시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내가 좋고 행복할 때는 말을 많이 할 수 있다. “나 책 나왔어”, “좋은 일 있어”, “나 상 받았어” 같이 이야기할 수 잇는데, 어두운 감정, 고통이나 상실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발언할 장이 별로 없다. 왜냐면 내 아픔, 약점, 상실을 이야기했을 때 개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 우리는 불행을 받아들이는데 훈련이 안 되어 있다. 연습이 안 되어 있어서 큰일날 것처럼 반응한다. 불행도 해석된 고통을 앓고 있다.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감정이든 불행한 감정이든 밖으로 나오는 게 중요한데, 우리 사회에는 공론의 장이 없다. 기껏 하는 게 술 먹고 친한 사람들이랑 하소연하는 일인데, 그건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푸념을 늘여놓는 거다. 이걸로는 고통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불행한 일이나 개인의 고통은 공적인 자리에서 안전한 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테면.
부모가 “우리 아이가 대학을 안 가서 슬퍼.”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탈학교 아이가 밖에 나와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 “이렇게도 살 수 있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우리 글쓰기 수업에도 알고 보니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들이 많았다. 부모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서 오랫동안 말하지 못하다가, 어느 시점에 말할 수 있게 되면 홀가분해진다. 그런 게 좋은 거다. 지지해줄 수 있고 다독거려줄 수 있으니까. 내가 처한 불행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행한 건 아니다. 행복적인 요소도 줄 수 있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불행이 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답답하니까.
글을 쓴다는 건,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에게 “서점으로 산책을 가보라”고 썼다.
사람이 단 음식이 당기면 푸드코드를 지나가다가도 케이크에 눈길을 뺏긴다. 몸이 필요한 부분을 반응하는 거다. 뇌도 몸이라서, 정서적인 부분이나 보충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책이 신호를 보낸다. “이 책을 읽으면 좋지 않을까?”하고. 그런데 요즘은 서점이 모두 베스트셀러 위주로 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좀 힘들어진 것 같다.
내 상황, 나에게 지금 필요한 책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많이 접하면 조금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책도 많이 실패해봐야 한다. 요리사의 혀가 예민해져야 하듯이. 이것저것 읽어보면서, 책에 소개된 또 다른 책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읽다 보면, 맞는 책도 만나고 안 맞는 책도 만나면서 훈련이 된다. 나한테 딱 맞는 책을 자주 만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나기 위한 시행착오고, 그것이 헛된 게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글 쓰는 일이 행복하지만은 않다. 일로써 글을 써야 했을 때, 힘들었던 순간은 없었나.
프리랜서로 사보 일을 했을 때, 막판에 되게 힘들었다. 기업 이데올로기에 맞는 뭔가를 만들어내야 했는데, 본질적인 구조적인 문제는 덮고 계속 아름다운 말만 끌어내야 하는 게 힘들었다. 세상은 아픈데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까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 일이 재미없어졌다.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할 때, 그 사람에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건데 좋은 점만 써야 했으니까. 그 사람이 겪은 역경은 모두 성공으로 가기 위한 어떤 극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로 풀어졌으니까. 뭔가 구도화된 느낌이 들어서 내가 여기에 익숙해지면 다른 글, 진실한 글을 못 쓸 것 같아서 불안했다. 내 글이 정형화된 틀 안에서 잔재주를 부리게 되는 게 슬펐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느낌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일을 관뒀다. 배운 것도 많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써도 비슷한 글이 나올 것 같아서,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그 후로는 힘든 글은 별로 쓰지 않은 것 같다.
“글 쓰고 싶다”, “책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
한 수업에 한 두 분은 책을 내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다. 조언을 많이 구하는데, 내가 가장 자주하는 말은 쓸 수 있으면 우선 써보라는 거다. 수업이 짧게는 10번, 많게는 16주차까지 진행되는데 매회 과제만 꼬박꼬박해도 16편의 글을 쓰는 거다. 쉬울 것 같지만 되게 어렵다. 얼만큼 쓸 수 있는지를 써보는 게 중요하다. 책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한테는 일단 다 쓰고 이야기하자고 한다. 대개 “내가 살아온 거 다 쓰면 전집 한 권이야” 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막상 쓰려고 하면 두 페이지도 채우기 어렵다. 현실을 아는 게 중요하다. 내가 쓰고 싶은 것과 쓸 수 있는 것의 차이가 있다. 어떤 학인은 글쓰기 수업 때 자기가 썼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앞으로의 30대를 잘 살기 위해서 20대를 정리하고 싶었다면서, 나한테 추천사를 써달라고 했다(웃음). 작게라도 해보는 게 중요하다. 어떤 감정이 많은 것과 언어화를 할 수 있는 건 다르다. 그건 기능적인 부분이다. 일단 어떤 방향성, 테마를 잡아서 써봐야 한다.
책 속에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학인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부록으로 학인들의 글을 실었는데.
인용도 많이 했다. 한 분 한 분 다 허락을 구했다. 책에 들어간 게 영광이라며 되게 좋아하셨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뭉클했다.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데,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글쓰기의 최전선』이 내 이름으로 쓴 책이지만,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학인들의 생각이 많이 들어 있는 것처럼, 내 삶도 누군가의 생각, 미디어의 생각, 선생님의 말, 부모님의 말로 구성된 거다. 항상 이 점을 중요하게 이야기했는데, 학인들이 잘 이해한 것 같아서 고마웠다. 가슴으로 받아들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의 최전선』이 말하는 글쓰기 노하우는 “왜 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이다.
왜? 라고 묻는 게 정말 중요하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갖고 있는데, 누군가가 “왜?”라고 물으면 대개 대답을 못 한다. “왜 기자가 되고 싶었어?”라고 물을 때, 말을 못한다. 내가 가진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 어디에서 온 건지, 진짜 나의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를 잘 모른다. 니체는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생각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내 욕망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나에게 어떤 느낌이 들면, “왜?”라고 물어보는 게 중요하다. 대부분 ‘왜?’는 생략하고 바로 문장이 나오는 데, 글을 쓰는 건 왜?라고 묻고 나에게 일어나는 느낌에 충실해야 내 고유한 글을 쓸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책에서 들은 것, 멘토가 했던 말,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의해서 글을 쓰면 고유한 글이 안 나온다. 내 느낌에 충실해서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글은 정답이 없는 건데, 뭔가 모범답안처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물며 인터뷰도 그렇다.
물론이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가 있다. 이게 안 좋다고 생각하면 왜? 라고 묻고, 그 근거를 생각해서 문장을 이어가는 건데, 내가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남도 설득하지 못한다. 글 쓰는 건 곧 질문하는 일이다.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답은 있지도 않은데 있다고 생각해서 어려운 거다. 질문을 구성하는 능력이 곧 글 쓰는 능력이다. 질문이 처음에는 유치해지다가 날카로워지는 게 글의 수준이 높아지는 거다. 물론 그게 어렵다(웃음).
공적인 공간에서의 글쓰기도 강조했다.
글도 사람처럼 혼자서만, 사적인 공간에서만 쓰면 성장할 수 없다. 글도 사람이랑 똑같다. 세상에 나와 부딪히고 넘어져야 글도 성장한다. 블로그에 일기를 한 장 쓰고 비밀글로 처리하면, 글이 안 는다. 부끄러워도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가 쓴 걸 읽어보고 피드백을 받는 게 중요하다.
자기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인터뷰를 해오고 있다. 재밌지만 동시에 힘든 일이다.
인터뷰를 정말 좋아하는데, 사보 인터뷰를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비슷비슷한 글이 나오더라. 그게 싫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의미를 마음껏 부여할 수 있고 해석을 어떻게 내려도 좋은 장에서 인터뷰를 할 때는 보람도 크고 재밌었는데, 그것도 일년 넘게 하니까 어느 순간,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이야기가 다 비슷했다. 내 가치관이 너무 투영돼서 누굴 인터뷰해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더라. 그 사람의 고유성도 살리면서 내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녹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느끼는 순간, 인터뷰를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진행했던 ‘전선 인터뷰’를 그만뒀다. 그렇게 좀 쉬다가 재개한 게, 한겨레 <나.들>에서 한 성폭력피해여성 인터뷰였다.
섭외뿐 아니라 속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야 한다는 게 어려웠을 것 같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보다 장애인 안에서의 차이가 더 큰 것처럼, 성폭력피해여성도 개인차가 크다. 똑같은 성폭행이어도 어떤 집안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다르고, 부모의 태도에 따라 다 다르다. 그래서 더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노력한 게 성폭력피해여성 인터뷰였다. 내 선 판단으로 그 사람을 미리 재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쉽지만은 않았다.
성폭력피해여성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생각을 많이 했나?
나의 무지를 많이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그저 막연히 ‘되게 힘들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평소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무관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인터뷰를 하면서 ‘글쓰기 수업을 함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피해여성이 있었겠다’ 싶었다. 실제로 고백한 사람도 있다. 폭력 문제가 그렇듯이 이게 힘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약한 자를 강한 자가 억압하고 힘으로 짓누르는 거다. 동물 같은 놈이 섹시한 여자를 보고 본능적으로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게 아니라, 치밀한 계산에 의해서 아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밤보다 낮에 더 많이 일어나고, 어떠한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꼭 인터뷰를 해보고 싶거나,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나.
특별히 만나고 싶은 유명한 분은 없다. 관심이 있는 건,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발언을 할 수 있게, 소통을 할 수 있게 어떤 매개자 역할을 해주고 싶다는 거다. 그 중 하나가 성폭력피해여성이기도 하고. 그 여성들은 정말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피해자이면서 숨어 지내야 하고, 죄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그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사회적인 약자들, 자기의 삶을 자기 언어로 말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은 큰데 생각보다 어렵다.
처음부터 원하는 글을 쓰고 원하는 일만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는지.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좀 재미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직장에 들어가도 하기 싫은 일은 해야 하니까 그런 상황이 주어질 가능성도 없겠지만.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도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일을 배울 때, 하고 싶은 일만 한다는 건 내 세계 안에 갇혀 있는 거다. 먹기 싫은 걸 먹어 봤을 때, 그걸 좋아할 수도 있는 것처럼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 책도 생전 안 읽어본 책, 불편한 책을 읽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학인들이 가끔 “선생님, 제가 사르트르를 읽게 될 줄 몰랐어요.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싫어하는 일을 안 하려고 해서 그런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 일 저 일 해본 게, 나에게 필요했던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학창시절, 책벌레였나?
그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좋아했다. 시 읽는 것도 좋아했고. 어릴 때 꿈은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굳이 따지면 기자? 그것도 막연했다. 직업적인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직업이 별로 없었으니까.
두 아이의 엄마다. 글쓰기 교육에 열을 올리는 학부모들도 많은데,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나?
전혀 안 한다. 권유를 한다고 해도, 애들 입장에서 강요라고 생각하면 그건 강요인 건데.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쓸 이유가 없다. 글을 안 써도 살 수 있으면 제일 좋은 거고(웃음). 재밌는 일도 많은데 굳이 써야 하나? 친구랑 수다 떠는 거, 길고양이랑 놀고, 집에서 뒹굴 거리는 게 더 행복하지 않나? 그 나이 때는 이런 게 훨씬 중요한 것 같다. 너무 그 권리를 일찍부터 빼앗는 건 어떻게 보면 폭력이다. 물론 책 읽는 것 좋다. 어휘력도 풍부해지고 공부를 잘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좋은 성적이 나오는 건 책을 안 봐도 가능한 일이다. 저마다 고유성이 있는 건데,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한테 굳이 읽힐 필요는 없다. 내 아이들을 봐도, 그다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의 본성을 꽃피우는 일이 중요하다.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걸 바라지, 글 쓰는 걸 바라지 않는다(웃음).
간혹 좋은 책을 알게 돼서, 그 책이 정말 꼭 필요할 것 같은 사람한테 추천을 해주는데. 사줘도 안 읽는다(웃음).
(웃음) 사람들은 자기 싫은 건 안 하고 필요한 건 한다. 나도 그런 집착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내려놓았다. 그거 되게 용 쓰는 거다. 내 주관으로 남에게 권유하는 건데, 좋은 건 사람마다 다르고 자기 좋은 건 다 알아서 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게 정말 어렵지 않나. 예전에는 막연히 알았다면 지금은 조금 실질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이 책이 나한테 필요하다는 건, 마치 영양분이 필요한 것처럼 몸이 필요로 하는 건데, 사람마다 다른 거다. 권해서 읽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꼭 해야 하는 거, 그런 거 없다. 자기마다 다 다르다. 사람마다 다르다.
『글쓰기의 최전선』이 필요한 독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도구적 글쓰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삶의 속도에 너무 지쳐서 조금 물러앉아 나를 돌아보고 싶을 때, 사람들이 올레길도 가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것처럼, 사유의 여행을 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다. 걷는 것처럼 생각의 보폭을 짚는 행위로써의 글쓰기? 이 정도를 생각하는 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사실 글을 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글쓰기 수업을 들은 분들 중에 더러 직장을 관두고 새로운 일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개 원래의 삶을 그대로 산다. 사람의 삶이 바뀐다는 거, 관점을 바꾼다는 건 엄청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왜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은 생긴다. 너무 열심히만 살면 어느 순간, 이상한 데 가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런 건 조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저자에게 신문 1면이 주어진다면, 쓰고 싶은 글은.
세월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왜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았는지,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무것도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가족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됐는지, 그 절실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세월호 사건은 불행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유를 모르는 고통이 너무 답답한 거 같다. 왜 아이를 구하는 척했지?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턱턱 막힌다. 다들 우리나라가 선진국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많은 사람이 수장된 걸 방관하게 된 이유 하나를 못 밝히는 걸 보면, 우리나라의 일상이 중지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요즘 궁리 중인 것은.
얼마 전부터 가정폭력피해여성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한 번 수업을 했는데 되게 막막하고 난관에 봉착했다. 책 읽을 시간이 없고 독해할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6월부터는 저소득층가정 여성 분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기로 했는데, 어떤 책을 가지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까가 내 고민이다. 전향적으로 사고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서 계속 고민 중이다.
다음 책이 무척 기대된다.
모르겠다. 굳이 내가 안 써도 좋은 책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안 쓸 것 같고. 내가 꼭 해야 할 말이 생기면 쓰지 않을까.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저 | 메멘토
이 책은 “삶의 옹호로서의 글쓰기”를 화두로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과 학습공동체 가장자리에서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은유의 글쓰기론이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 고민들, 깨침들에 관한 이야기와 지난 4년간 글쓰기 수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섬세한 변화의 과정을 담았다. 특히 ‘안다는’ 것보다 ‘느끼는’ 것에 굶주린 이들을 위한 글쓰기, 그리고 ‘나’와 ‘삶’의 한계를 뒤흔드는 책읽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르포와 인터뷰 쓰기’를 중심으로 풀어냈다.
[관련 기사]
- 셀피족의 어머니 비비안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 자기 과시의 시대, 조용한 진짜 영웅들
- 우리말 전문가에게 듣는 동사 이야기
- 소이 “지금도 무언가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