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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 “영리한 사람이 망가질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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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60년, 올해 나이 90세. <전국노래자랑>의 히어로, 방송인 송해 선생에 대한 수치를 얘기하면 모두들 깜짝 놀란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다. 실제로 만난 송해 선생은 과연 그랬다. 놀랍게도 나이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30~40년 전의 이야기, 혹은 더 먼 시절 이야기를 할 때는 정확한 수치와 지명, 당시 책임자 이름까지 정확히 읊었다. 그뿐인가. ‘낙원동 칸트’라고 불린다는 송해 선생은 인터뷰 후에도 어김없이 목욕탕에 들렀다 저자 오민석 교수와 소주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다음 달에 녹화를 여섯 개나 잡아놨어, 이놈들이(웃음).” 라는 말마따나 가장 일정이 많아 바쁜 계절, 그 와중에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선생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감탄 또 감탄이다. 체력과 그에 못지않은 젊은 정신력은 과연 1988년부터 지금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이끌었던 제일의 원동력이었음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그는 ‘코미디언’이라는 선입견이 주는 가벼운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외모는 근엄한데, 그 근엄을 언제든지 무너뜨릴 자유와 권리가 대중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만한 인간을 만만하게 횡단할 때 거기에는 아무런 쾌락이 없다. 그러나 전혀 만만하지 않은, 점잖고 근엄하고 게다가 나이까지 지긋한 ‘어르신’을 아무런 경계 없이 허물 때, 대중들은 희열과 해방을 느낀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횡단의 쾌락”이다. (281쪽)

 

송해 선생의 평전『나는 딴따라다』를 쓴 오민석 교수는 송해 선생을 ‘정이 많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 완벽을 지향하는 대중예술가’라 일컫는다. 1년 여 시간을 함께 움직이며 관찰한 결과다. 처음 가졌던 송해 선생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해지고 선생에게 더 깊이 매료됐다”고 말하는 오민석 교수. 그는 송해 선생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를 읽어낸다. 책 『나는 딴따라다』는 어느 한 방송인을 추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픈 기억, 전쟁과 분단, 이산가족으로서의 애끊는 삶과 대중문화 종사자의 불안하기만 했던 삶을 들여다보고 지금 이후를 조명하는 뜻 깊은 작업을 묵직하게 담았다. 지난 시간에 앞으로 다가올 세상이 있다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님을 책은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역사이자 현재진행형인 한 인간의 삶을 읽는 일은 언제나 계속되어야 한다.

 

 

“선생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신 분입니다”


책을 내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먼저 듣고 싶어요.


송해: 여러 군데서 하자고 했었죠. 그동안은 오랫동안 사양했어요. 한 것도 없이 무슨 책을 쓰냐고 했었는데, 오 교수님(저자 오민석)과 아주 인연이 우습게 돼가지고. 이 ‘우습게’ 됐다는 얘기가 굉장히 우습고도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웃음) 아주 한 사람의 마음처럼 의견이 동해서 나만 기억을 하더라도 이제는 한 번 남겨보자고 생각하게 됐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다들 어려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제 경우는 세월이 조금 흘렀고, 요즘 광복 70년이라고 하지만 저는 살면서 전쟁과 분단을 다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는 동안에는 이런 일을 겪은 사람도 있다’고 전해줄 수 있다면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두 분께서 목욕탕에서 만난 장면,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어요.(웃음) 이렇게 책이 만들어지려고 그렇게 만나게 되셨던 것 같아요.


송해: 네.(웃음)


오민석: 그렇죠. 그 후로 20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저는 일요일마다 <전국노래자랑> 화면을 통해서만 선생님을 뵀고, 멀리서 흠모했는데요. 제 주변머리가 <전국노래자랑>을 찾아갈 만큼도 안 되고, 그러기도 머쓱한 일이었고요. 그랬는데 목욕탕에서 만났으니 그 순간에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웃음) 알몸인 채로 락커를 열어서 제 첫 시집 개정판을 드리고 했었죠. “선생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신 분입니다.” 제가 그랬죠. 모든 사람이 선생님을 좋아하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유명하다거나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람들이 선생님을 누구나 좋아하니까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 있느냐 싶은 거죠. 취재 하면서 함께 다녀보면 진짜 누구나 좋아하거든요.

 

오민석 교수님은 1년 여 시간 동안 인터뷰와 취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처음과 지금, 송해 선생님에 대한 인상에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오민석: 바뀌었다기보다 더 깊어졌죠. 목욕탕에서 우연히 만나기 이전부터 선생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갖고 있는 인상이 있는데 그게 전혀 오산이 아니었고요. 오히려 그게 더 깊어지고 더 매료당했죠.

 

책을 읽으면서 저 역시 새롭게 ‘송해’라는 어른에 대해 매료되는 경험을 했어요.


오민석: 이 책에서 딱 한 가지 보람이 있다면요. 선생님을 많이들 좋아하시지만 그 중에도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분들이 이 책을 살 텐데요. 책을 읽고 나서 선생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인간적으로 더 깊이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저의 보람이에요.

 

표지가 책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우리가 흔히 아는 송해 선생님의 웃는 얼굴은 진중하고 권위 있는 표정 뒤에 가려져 있거든요. 대중이 느낄 법한 ‘낯설음’이 잘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오민석: 출판사의 아이디어죠. 겉표지의 엄숙한 표정은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고난과 고통, 결핍이 집약된 표정이에요. 그렇지만 이 모습만 있는 게 아니죠. 고통의 끝에 승리한 선생님의 얼굴이 바로 이 환하게 웃는 표정이거든요. 책을 쓰면서 쓰려고 했던 것이 선생님의 이 두 가지 모습인데, 출판사에서 그 의도를 딱 맞춰주어서 아주 감탄했어요. 보통 책을 사면 띠지를 버리는데, 이 책은 띠지가 이렇게 크게 올라와서 거기 선생님의 엄숙한 표정을 담았으니까요. 또 재미있는 것은 표지에 활자가 전혀 없다는 점이에요. 저는 영문학자기 때문에 국내서와 외국 저서들도 많이 보는데요. 타이틀이 없는 책은 정말 드물어요. 이것은 송해 선생님만 가능한 거예요. 이렇게 두어도 책을 보면 누구든지 송해 선생님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표지에 타이틀을 붙일 필요가 없는 거죠. 이런 과감한 발상은 출판사에서 잘 해주셨어요. 저도 처음에 표지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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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즐거워하는 단어 ‘딴따라’


제목도 여쭤보고 싶은데요. ‘딴따라’라는 단어가 가진 함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송해: ‘딴따라’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라고 밝혀진 게 없어요. 그게 한 가지 재미있고요. 또 그때 그 시절에는 ‘딴따라’에 준하게 부를 이름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아주 쉽게 부르는 대로 나왔던 게 이 단어였구나 생각해볼 수 있죠. 저희가 ‘딴따라’라는 말을 들을 때는 상당히 소외감도 있었고, 스스로도 자신을 비하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때였거든요. 제가 학교를 ‘해주음악전문학교’를 갔는데, 당시는 그런 학교를 선택한다고 하면 집안에서 쫓겨났어요. 소위 ‘딴따라’, ‘띤따라’라고 해서 경시 받았었죠. 저 역시 그 말을 들어오면서 소외 받고 경시 받는 느낌도 다 가졌었지만 결국 이것은 소중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우선 알리기가 제일 좋아요. 또 ‘딴따라’라는 얘기로 경시하던 사람들이 이 즐거움이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러면서도 이 소중함을 몰라주니까 답답했다, 이런 것도 있었어요. 지금은 상황이 아주 반전되어 있죠. 그런 세월의 흐름도 함께 느끼는 거고요. 출판사에서 강력히 주장한 제목이지만 내가 정말 여러 세인(世人)들 앞에서 부르짖고 싶었던 말이 이거예요. 저는 아주 즐거워하는 단어가 ‘딴따라’라는 말입니다.

 

오민석 교수님도 ‘딴따라’라는 단어에 많은 의미부여를 하셨잖아요.


오민석:선생님이 작년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그보다 먼저 2003년에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으셨는데, 그때 수상소감으로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번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면서는 수상소감으로 “한국 대중문화 만세”라고 하셨어요. 딴따라로서의 승리감을 표현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며칠 뒤 제게 사석에서 하신 말씀이 “나는 이겼다”였어요. 이 말 한마디를 하기까지 시간을 생각하게 됐죠. 올해가 데뷔 60년이에요. 60년 세월의 말할 수 없는 파고(波高)들, 천시, 때때로 경험한 작은 승리들, 좌절 모두가 그 안에 있어요. 저는 원래 ‘송해, 90년의 기억’이라는 제목을 생각했었는데 선생님께서 지금의 제목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죠. 책의 일관된 주제를 압축한 제목이 『나는 딴따라다』예요. 나는 제목 다는 재주가 없구나 생각했죠.(웃음)

 

송해 선생님의 말씀에서 어른의 마음이 느껴지는데요. 경시하듯 불렀던 ‘딴따라’라는 말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다 품으신 거잖아요.


송해: 숱한 일이 많았죠. 잡을 것 없는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기분이 늘 들었어요. 우리 계통에 오랫동안 있던 사람들은 그만 두어야겠다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평생 3년 계획을 못 세워봤어요. ‘딴따라’에게는 기약이 없어요. 방송은 춘하추동, 4계절 개편을 하잖아요. 다음 계절에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첫 프로그램부터 떠오르는 것이라. 그게 힘들어 중도하차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하는 모든 걸 다 해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유랑극단도 많이 했으니까요. 어떤 연기를 하면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경험으로 사회를 볼 때는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고요. 그런 이득도 있어요. <전국노래자랑>이라는 게 각 분야 사람을 다 만나잖아요. 예전에 했던 경험으로 지금 득을 얻고 있죠.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모든 것들이 선생님의 큰 자산이 되었군요. 대단한 프로의식이 느껴지기도 해요.


송해: 출연자들과 방송 전 대화를 할 때 예심에서 했던 그대로 하라고 말을 합니다. 예심 통과됐다고 망가지는 걸 부끄러워하고 안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해요. 둔한 사람은 망가지는 걸 못해요. 영리한 사람이라야 망가질 줄 안다는 거예요. 성한 사람이 됐다가 인간의 한 움직임을 배우는 거 아니에요. 머리가 좋고 예민한 사람이라야 망가지죠. 관객으로서 즐거움을 가질 때가 언제겠어요. 보지 못했던 이타성이라든가 돌연한 이야기, 몸동작 이런 것들 아니에요? 나를 받쳐 들고 움직이는 대목이 있다 했을 때, 나는 또 거기서 떨어져보는 거지요. 그러면 또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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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버팀목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 많았어요. 송해 선생님께 ‘사람들’이란 무슨 의미였을까요.


송해: 사람은 상호버팀목입니다. 사람은 서로가 버티고, 밀고 당겨주고 하는 교감이에요. 사람이 그런 것 없이 산다면 그게 뭐겠어요? 삶이라 할 수 없죠. 직업이야 어쨌든 서로는 어디 가서 만나도 버팀목이 되는 거다, 생각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 <전국노래자랑>은 애도의 뜻을 담아 8주 동안이나 방송을 내보내지 못했다. 악단 단원들은 무려 두 달 동안 개런티를 받지 못한 채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송해 역시 비정규직이지만, 송해는 관계자를 설득해 이들 개런티의 60%를 받아냈다. (46쪽)

 

세월호 사건 당시 두 달 동안 <전국노래자랑>을 하지 못했을 때, 급여를 받아내기도 하셨고, <가로수를 누비며>(KBS 라디오 교통방송,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송해 진행) 시절에도 택시 기사 합동결혼식을 치러내기도 하셨잖아요. 그 모든 것들은 역시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에요.


송해: 내 자신이 놀랐으니까요. 예전에는 택시 기사 분들의 생활이 정말 힘들었어요. 결혼식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어요. 놀라서 물어보니 험한 생활 얘기를 하더라고요. 88올림픽을 앞두고 들은 얘기예요. 그래서 회사를 몇 군데 가서 직접 얘기를 들었어요. 결국 합동결혼식을 해보자고 연출자와 얘기해서 신청을 받았는데 이틀 만에 300쌍이 신청을 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씀이 맞아요. 너는 너고, 나는 나지, 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그렇게 안 했겠죠. 그랬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다들 나이 들어서 연락도 오고 그래요. 그분들 자녀가 결혼한다고 청첩장이 오기도 하고요. 나는 가족이 또 하나 얻어졌죠. 사람이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재산이 또 늘지 않았어요?(웃음)

 

정말 인상적인 것이 송해 선생님의 이런 행동력이에요.

 

오민석:<가로수를 누비며>가 방송으로 끝난 게 아니고, 전국의 기사 분들과 정말로 인간적인 교류를 워낙 많이 하셨어요. 기사 분들이 송해 선생님을 ‘송기사’라고 해요.(웃음) 자신들과 같이 생활하고 바닥까지 이해한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죠. 당시 교통법규가 사고가 나면 운전자에게 무조건 책임이 가도록 되어 있었어요. 때문에 택시 운전자나 이런 분들이 감옥에 많이 갔나 봐요. 송해 선생님이 그 바쁜 와중에 서울 톨게이트에서 모금 활동을 하셨죠. 그 가족들을 도와주느라고 말이에요. 그런 걸 안 해도 되는 건데 발로 뛰어서 하시고요. 굉장히 인간적인 거죠.

 

‘사람이 재산’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사람보다 돈’ 아닐까요.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송해: 그렇죠. 방송도 그래요. 지금은 화면에 좀 비치고 누가 찾는다고 하면 ‘얼마 줄래’라고 해요. 달라졌죠.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 도리로 생각하는 것, 아까 사람이 버팀목이라고 했지만 그런 얘기에 대해 생각 자체가 달라진 거죠.

 

 

무엇을 해도 성급하면 안 돼


‘매 시간 사선’이었던 전쟁 당시 경험을 말씀하기도 하셨는데요.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야기에요. 그런 시간을 살아오신 어른으로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송해: 돈에 대한 가치를 알고 돈을 알아야 해요. 무조건 돈만 많은 게 돈의 가치가 아닙니다. 일 푼이라도 그 일 푼을 어디에 쓸 것이냐를 생각해야 하고요.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렇게 성급하면 안 돼요. 요즘은 너무 쉽고 빨라요. 하지만 당장 결론을 내려고 하는 건 실패의 수가 훨씬 더 많지요. 경험을 많이 못한 채로 실패의 순간이 오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돼요.


하나 새겨야 하는 건 내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거예요. 어려움이 좀 있더라도 천직으로 알고 해보면 답은 오게 돼 있어요. 내일을 모르게 발전해가고, 정신없이 사는 세상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얘기하고 싶어요.

 

빨리 뭔가 이루려고 하면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중요한 말씀인 것 같아요.


송해: 요즘 사람들에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가라’고 하면 듣겠어요?(웃음) 하지만 그 나름대로 뜻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또 상대와 나를 바꿔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시행하기는 어렵겠지만 너무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세상은커녕 자기 자신도 모르잖아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특히 분단의 경험은 젊은 세대와는 완전히 유리된 것들이거든요. 그곳에 나의 살붙이가 있다는 감각은 상상도 못하고요.


송해: 올해 광복 70년이라고 하죠. 요즘 사람들은 그 얘기를 저처럼 느끼지 않을 거예요. 나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할 길을 많이 걸어왔어요. 이런 얘기라도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인생이란 게 간단하게 와서 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어떻게 해서 지금 모습까지 왔느냐 생각하면 내가 갈 길에도 도움이 많이 되겠지요.

 

노인 한 사람이 사라지는 건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잖아요. 한 사람의 삶으로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거고요. 지금, 필요한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민석: 쓰지 않으면 다 사라지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에 평전 문화가 약해요. 유명한 사람들은 자서전이라고 쓰는데, 대부분의 자서전은 대필이고요. 객관적 증거도 없고, 자화자찬에 빠지기도 쉽죠. 좋은 평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제가 썼던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였어요. 생가에 가서 방바닥을 더듬어도 도무지 감이 안 오더라고요. 무척 힘들었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돌아가신 분들, 옛날 분들에 대해 쓰는 것과 평전을 쓰는 건 완전히 다르다는 경험을 했죠. 평전은 살아계실 때 써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됐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쓰는 평전은 미이라를 더듬는 일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얘기를 했어요. 또 연대기 순으로 쓰는 건 죽은 이야기예요.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교차시키고 맞대면 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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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자 현재진행형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에 대한 문화적 평을 하신 부분도 인상적이에요. 이 프로그램은 굉장히 역사적이면서 현재진행형인데요. 이 안에서 우리 대중문화를 읽어내셨어요.


오민석: <전국노래자랑>은 제가 볼 때 정말 의미 있는 장르입니다. 영문학의 연구 풍토는 ‘문학’에서 ‘문화’로 중심이 바뀐 지 무척 오래됐습니다. 여기에서 ‘문화’는 고급문화가 아니라 상업적 대중문화를 얘기하는 거예요. 심지어 포르노 잡지의 서사 전략을 비교 연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 책은 제가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달려든 부분도 있지만 영문학자로서 송해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했어요. <전국노래자랑>이라는 유례없이 독특한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가졌었죠. 모든 TV 프로그램은 잘난 사람들의 잔치예요. 우리보다 잘난 얼굴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등장하죠. 때문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무의식중에 열등감을 느껴요. 그래서 성형을 하게도 되고요. 많은 드라마가 열등감을 조장시켜요. 저는 그게 문화 산업이 갖고 있는 아주 나쁜 점이라고 생각해요. <전국노래자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흐친(Mikhail Bakhtin)의 이론을 빌어 ‘카니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위계를 완전히 뒤집어엎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고, 누구나 자유롭게 제 목소리를 내는 자리예요. 남성중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나쁜 젠더 개념이 강조되잖아요. 그런데 <전국노래자랑>에 나오는 아줌마들 보세요. 그런 것들을 스스로 싹 무시하잖아요. 주변, 하위주체들이 문화의 중심에 치고 들어와서 휘저어놓는 거예요. 이거는 굉장한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 중심에 송해 선생님이 계시죠.


오민석: 선생님이 딱 맞는 게, 선생님 얼굴을 보세요. 얼마나 근엄하세요.


송해: (웃음)


오민석:이 외모만 보시면 말 붙이기 힘들 수도 있어요. 근데 무대 위에서 어떻게 그렇게 망가지시냐고요. 한 번은 한우가 많은 지역에서 어떤 여자 분이 부위를 설명하면서 선생님 엉덩이를 때리는 분도 있었어요.(웃음) 세상에, 이렇게 점잖은 분이 망가져주시잖아요. 중심이 망가지니까 출연진들도 마음 놓고 노는 거예요. 완전한 하위주체들의 잔치, 해방구예요. 저는 그래서 대학 다닐 때부터 <전국노래자랑>에 매료되어 있었죠. ‘유쾌한 상대성’이라고도 했는데요, 억눌리는 자가 없는 거예요. 더 주목할 것은, 이 프로그램이 아이돌이 등장하는 음악 프로그램 세 개를 합친 시청률이 나온다는 것이죠. 저는 학문적으로 해석하지만, 일반 시청자들은 그런 걸 몰라도 느끼는 거예요.

 

지금의 모습을 포함해 송해 선생님의 삶 전체가 무척 극적이에요. 그 화살표가 모두 <전국노래자랑>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고요. 얼마 전 기자회견을 하시면서 선생님의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면 주인공은 김수현이라고 하셨던데요.(웃음)


송해:한국전쟁 당시 군대에서 휴전 전보를 내가 쳐놓고 고향을 못가는 사람이 아니오. 그런 걸 지금 생각하면 이게 무슨 운명이었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53년 7월 27일 밤 22시를 기해 모든 전투를 중단한다, 이게 원본이거든요. 암호였으니 몰랐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거예요. 그걸 왜 내가 쳤을까, 또는 그게 아니면 지금 이렇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해요. <전국노래자랑>을 하면서 그런 게 다 돌아오는 겁니다. 재미있는 얘기지요.

 

오민석 교수님은 송해 선생님의 신곡 <유랑청춘>을 작사하기도 하셨어요. 가사에 담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어요?


오민석:선생님의 뼈아픈 일생과 분단의 역사를 함께 담고 싶었죠. 분단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개인사와 겹치면 뼈저리게 다가오거든요. 그래서 하고 싶었어요. 물론 제가 작정하고 한 건 아니에요. 올해가 선생님 데뷔 60주년인데, 기념해서 <전국노래자랑> 악단의 신재동 단장님이 송해 선생님 모르게 선물을 해드리자고 해서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전 작사를 해본 일이 없거든요. 이 책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세 시 쯤에 ‘필’이 왔어요. 3절 가사를 5분 만에 썼어요.

 

송해 선생님은 가사가 마음에 드셨어요?


송해: 가사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나 떠나올 때 나는 몰랐는데 어머니는 육감이 있었던 거예요. 부모 자식 간에 흐르는 일이 있어요. 어머니가 툇마루에 앉아서 다녀오겠다고 하는 제게 “얘야, 이번엔 조심해라” 하시던 게 세월이 흐를수록 더 생각이나요.

 

두 분께서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으면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송해: 아무것도 없이 얼굴만 여기 있는데(웃음), 이게 또 편한 얼굴은 아니잖아요. 그저 이 책을 내 일이다, 하고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아주 젊은층에서는 그렇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뜻이 있겠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민석:일단 책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니까요. 또 독자는 워낙 천차만별이라 읽고 싶은 것을 읽어내면 되는데요. 다행히 이 책이 어떤 독자가 읽더라도 각자 읽을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책 읽는 게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사진첩으로 보셔도 좋고요.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중문화연구를 어떻게 했는지 하는 방식으로 보셔도 되고요. 송해 선생님의 개인사를 알고 싶은 분들은 그걸 읽으시면 돼요.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 읽어도 다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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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딴따라다 오민석 저 | 스튜디오본프리
영원한 국민 MC 송해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은 2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인사동 골목에서 저자와 송해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로부터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1927년의 황해도 재령을 거쳐 부산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참혹한 피난길을 걷는가 하면, 떠돌이 악극단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 유랑길을 구불구불 따라간다. 마치 송해의 맨얼굴을 보는 것처럼 솔직하고 꾸밈이 없으며, 살가우면서도 근엄한 무게를 지닌 이 책은 우리 부모 세대에게는 추억과 그리움을, 젊은 세대에게는 격려와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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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동 “누구나 백조인 시대, 누구나 오리여도 괜찮은 시대가 돼야”
- 소이 “지금도 무언가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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